모리 오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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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오가이는 일본의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군의관, 관료로,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862년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배우고 도쿄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 유학을 통해 유럽 문학을 접했다.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문학 평론 활동과 함께 낭만주의, 자연주의, 역사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무희》, 《기러기》, 역사 소설 《아베 일족》 등이 있으며, 유럽 문학 번역에도 힘썼다. 그는 문인으로서의 활동과 군의관으로서의 활동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각기병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2년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 근대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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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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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모리 오가이 |
본명 | 모리 린타로 |
출생일 | 1862년 2월 17일 |
사망일 | 1922년 7월 8일 |
출생지 | 쓰와노, 시마네, 일본 |
사망지 | 도쿄, 일본 |
딸 | 모리 마리 |
로마자 표기 | Mori Ōg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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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보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82년–1916년 |
최종 계급 | 일본 제국 육군 군의총감 (육군 중장) |
참전 전투 |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훈장 | 욱일 대수장 서보 대수장 금치 훈장, 3등 |
작가 및 번역가 정보 | |
직업 | 번역가, 소설가, 시인 |
2. 생애
시마네현 쓰와노정 출신으로, 의사이자 육군 군의관,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도쿄 의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임관했으며, 독일 유학을 통해 선진 의학 지식을 습득했다. 귀국 후에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 참전했고, 육군 군의의 최고위직인 군의총감까지 올랐다.
문학 분야에서는 독일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 초기 소설 「무희」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큰 영향을 주었고, 번역 시집 『오모카게』와 평론지 『시가라미조시』를 통해 서구 문예 사조를 소개하고 근대 비평을 개척했다. 『비타 섹슈알리스』 발표 후 금서 조치를 당하거나, 대역죄 사건 이후 정부의 사상 탄압을 비판하는 등 사회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다. 만년에는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에 영향을 받아 「아베 일족」, 「산쇼다유」 등 역사 소설과 사전(史伝) 「시부에 추사이」 집필에 몰두했다.
군 퇴역 후에는 제실박물관 총장, 제국미술원 초대 원장 등을 지냈다. 1922년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묘비에는 森林太郎ノ墓|모리 린타로 노 하카일본어 (모리 린타로의 묘)라고만 새겨졌다.
2. 1. 어린 시절
모리 오가이는 1862년 2월 17일(분큐 2년 음력 1월 19일)[25] 시마네현 가누마군 쓰와노정(현 시마네현 가누마군 쓰와노정)에서 모리 린타로(森 林太郎)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178] 그의 가문은 대대로 쓰와노번 번주의 시의(侍醫, 어의(典医))를 지냈으며(녹봉 50석[22]),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양자였기에 오가이는 가문의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후계자였다.[27]번의 가문의 장남으로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이 흔히 하는 연날리기나 팽이치기 같은 놀이는 거의 해보지 못하고 독서에 몰두해야 했다.[179] 할머니와 어머니의 훈육 아래 만 5세 때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1km 떨어진 곳으로 가서 《논어》와 《맹자》를 배웠다.[179] 8세부터는 한적(漢籍)을 익혔고, 9세 무렵에는 아버지를 통해 의학 서적을 공부하기 위해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179] 또한 번교(藩校)인 양로관(養老館)에서는 사서오경을 복습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9세 때 이미 15세 수준의 학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아,[28] 격동의 메이지 유신 시기에 가족과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872년(메이지 5년), 폐번치현 등의 변화 속에서 10세의 오가이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로 상경했다.[179] 이는 친척이자 네덜란드 유학 경험이 있는 지식인 관료 겸 학자 니시 아마네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179] 도쿄에서는 현재의 스미다구 히가시무코지마(東向島)에 거주하게 되었다. 도쿄로 온 주된 목적은 관립 의학교(독일인 교관이 독일어로 강의) 입학을 위해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같은 해 10월 사숙(私塾)인 신문학사(進文学社)[29]에 입학했고, 통학의 편의를 위해 니시 아마네의 저택에서 한동안 기숙했다. 이듬해에는 쓰와노에 남아있던 가족들도 집 등을 처분하고 도쿄로 이주하여, 아버지가 센쥬(千住)에서 병원(키치이도, 橘井堂)을 운영하는 곳으로 옮겨왔다.
1873년(메이지 6년) 11월, 오가이는 제1대학구 의학교(第一大学区医学校, 이후 도쿄 의학교로 개칭) 의학 본과 예과(정원 약 60명, 수업 연한 3년)[30][31]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입학 연령 제한은 14세에서 17세였으나,[33] 오가이는 실제 나이보다 2살 많은 것으로 속여 만 11세 10개월의 나이로 입학했다.[32] 당시 대학 제도가 정비되기 전 과도기여서 학교 이름이 자주 바뀌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정원에 미달하여 학생 모집이 계속되었고, 나이를 속인 오가이 외에도 상한 연령을 넘긴 지원자들도 입학하여 신입생은 총 71명이었다.[34] 그러나 이들 중 본과로 진학할 수 있는 인원은 30명에 불과했고, 상급 학년의 낙제생과 편입생까지 더해져 예과생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오가이가 속한 독일어 중급반에서는 24명 중 11명만이 낙제 없이 졸업했고, 하급반에서는 41명 중 단 2명만이 졸업할 수 있었다.[34]
오가이는 의학 본과(정원 약 30명, 수업 연한 5년)로 진학하여 독일인 교관들의 강의를 들었다. 동시에 의학관(医学館) 교수였던 사토 모토나가에게 한문, 한시, 한방 의서를 배웠다.[35] 또한 이다 가쿠카이와 이토 쇼케이(伊藤松渓)에게 한문을, 사토 오우쿄(佐藤応挙)에게 한시와 와카를 배우며 직접 시를 짓기도 했다.[35] 그는 서양어에도 능통하여, 자전적 소설 《비타 섹슈알리스》에서 자신의 학습법에 대해 "기숙사에서는 그날 강의에 나온 전문 용어의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 어원을 조사하여 빨간 잉크로 페이지 가장자리에 주석을 다는 것이 교실 밖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사람들이 전문 용어를 외우기 어려워 곤란해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까웠다. 왜 어원을 조사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외우려 하는지 묻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여동생 고카나이 기미코(小金井喜美子)의 회상에 따르면, 젊은 시절 오가이는 사군자를 치거나 마당을 사생하기도 했으며, 직장에서 돌아온 후 종종 요세키(寄席, 만담 등을 공연하는 극장)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졸업 시험 기간 중 문학 서적을 읽는 오가이를 할머니가 걱정하거나, 하숙집 화재로 강의 노트를 잃어버리고, 노트에 적힌 한문 필기 때문에 외과학 교수에게 반감을 사는 등의 어려움도 있었지만,[36] 1881년 7월 4일, 만 19세 5개월의 나이로 도쿄 의학교 본과를 8등으로 졸업했다.[37] 이는 당시 일본에서 의사 면허를 받은 최연소 기록이었다. 수석 졸업자인 동기 미우라 모리지(훗날 도쿄 제국대학 교수)는 훗날 제자들에게 "내가 대학에 있을 때 동급생 중에 모리 오가이의 뛰어난 재능과 다카하시 준타로(高橋順太郎)의 성실함이 있었다. 둘 다 존경하는 경쟁자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졸업 성적 상위 10명 중에서도 다른 학생들보다 5~7세나 어렸던 오가이는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았다.[36] 이 시기 그는 에도 시대 말기의 인기 소설을 폭넓게 읽고 중국 시와 문학 수업을 받으며 문학에 대한 관심도 키워나갔다.
2. 2. 독일 유학과 초기 활동
도쿄 대학 의학부 졸업 후 작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병원을 도우며 진로를 고민하던 중 동기 소이케 마사나오와 친구 카고 츠루토의 적극적인 추천과 권유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38] 1881년 12월 16일, 육군성 군의(중위 상당)로 임관하여 도쿄육군병원에 배속되었다.[38] 여동생 고가네이 키미코의 회고에 따르면, 젊은 시절 오가이는 사군자를 그리거나 정원을 사생하고, 퇴근 후에는 요세(寄席, 일본의 전통 만담 극장)를 찾는 등 예술 방면에도 관심이 많았다.[39]임관 6개월 뒤인 1882년 5월, 군의본부로 발령받아 프로이센 육군의 위생 제도에 관한 문헌 조사를 담당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조사 결과를 담은 『의정전서고본』(醫政全書稿本) 12권을 완성하여 제출했다.[42]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884년 6월, 위생학 연구와 독일 제국 육군의 위생 제도 조사를 목적으로 독일 유학을 명령받았다.[43] 같은 해 7월 28일 메이지 천황을 알현한 뒤, 8월 24일 육군성 파견 유학생 신분으로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다. 10월 7일 프랑스 마르세유 항에 도착하여 기차로 이동, 10월 11일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 도착했다. 오가이는 요코하마에서 마르세유까지의 항해 과정을 「항서일기」(航西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독일 유학은 4년간 이어졌다. 첫 1년은 라이프치히(1884년 11월~1885년 10월)에서 보냈는데,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프란츠 호프만(Franz Hoffmann) 교수 등에게 배우며 현지 생활에 적응했다.[44] 이때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드레스덴 미술관의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에서 라파엘로의 명작 「시스티나 성모」를 감상하기도 했다. 다음 체류지인 드레스덴(1885년 10월~1886년 3월)에서는 주로 군의학 강습회에 참여하며 작센 왕국 군의감 빌헬름 로트(Wilhelm August Roth)와 동료 군의 빌케(Wilke) 등과 교류했다.[45] 이곳에서 지질학자 하인리히 에드문트 나우만(Heinrich Edmund Naumann)의 강연 내용에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여 이후 신문을 통해 논쟁(오가이·나우만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뮌헨(1886년 3월~1887년 4월)에서는 뮌헨 대학교에서 당대 위생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막스 폰 페텐코퍼에게 직접 배웠다. 연구 활동 외에도 화가 하라다 나오지로, 귀족원 의원 코노에 아쓰마로 등 다른 일본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연극을 자주 관람했다. 마지막 체류지인 베를린(1887년 4월~1888년 7월)에서는 훗날 저명한 세균학자가 되는 기타자토 시바사부로와 함께 로베르트 코흐를 찾아가 그의 지도를 받으며 위생 시험소에서 연구를 진행했다.[46] 당시 오가이가 머물렀던 거처는 현재 모리 오가이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유학 중이던 1887년 9월, 카를스루에에서 열린 제4회 적십자 국제회의에 일본 대표단 수석 이시구로 타다노리의 통역관으로 참석하여 유창한 독일어 연설로 큰 호응을 얻었다.[47] 회의 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으로 이동하여 만국 위생회에도 일본 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다. 유학 기간이 1년 연장되면서 프로이센 근위 보병 제2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경험도 쌓았으며, 1888년 1월에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독일어로 강의하기도 했다.
1888년 7월 5일, 오가이는 이시구로와 함께 베를린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영국 런던에서는 보안 조례 위반으로 도쿄에서 추방당해 망명 중이던 오자키 유키오를 만나 시를 선물하기도 했으며, 프랑스 파리를 거쳐 7월 29일 마르세유 항에서 배를 탔다. 9월 8일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여 도쿄로 돌아왔고, 같은 날 육군 군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1월에는 육군대학교 교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귀국 직후인 9월 12일, 독일에서 만났던 여성이 오가이를 따라 일본에 와서 약 한 달간(10월 17일까지) 머물다 돌아가는 일이 있었는데,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 「무희」(舞姬)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48] 오가이는 이 여성을 평생 잊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49] 그는 4년간의 독일 유학 경험을 「독일 일기」(獨逸日記)에 상세히 기록했다.
귀국 후 오가이는 군의관 및 교육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889년 8월, 일본 근대시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번역 시집 『오모카게』(於母影, 공역)를 발표했고, 그 인세 수입을 바탕으로 동생 미키 다케지(三木竹二) 등과 함께 문예 평론 전문지 『시가라미조시』(しがらみ草紙)를 창간했다.[180] 이후 안데르센의 『즉흥시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 외국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한편, 평론 활동을 통해 서구 문예 사조를 알리는 데 힘썼다. 또한 독일 유학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무희」(1890), 「물거품의 기록」(うたかたの記, 1890), 「문학사」(文づかひ, 1891)를 연이어 발표했다. 특히 독일 여성과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 「무희」는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181]
문학 활동 외에도 1889년에는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에서 미술 해부학 강사로, 1892년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심미학(미학) 강사로 초빙되어 강의하는 등 교육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이처럼 시, 소설, 평론, 번역, 미술,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왕성한 초기 활동은 청일전쟁 참전과 고쿠라로의 전근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본 근대 문학 및 지성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3. 청일 전쟁과 고쿠라 좌천
1894년 8월,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군의부장(중좌 상당)으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잠시 타이완에서 근무하다 1895년 10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896년 1월에는 이전에 참여했던 "시가라미조시"의 후속으로 고다 로한, 사이토 로쿠지와 함께 문예지 "메사마조시(めさまし草)"를 창간했다. 여기에 세 사람이 함께 쓴 합평 코너 "三人冗語"를 연재하며 당시 문단의 평론계를 이끌었으며, 이 잡지는 1902년까지 발행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의 평론 활동은 이전의 전투적이거나 논쟁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좀 더 온건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러일 전쟁 준비가 진행되던 1899년 6월, 오가이는 군의감(소장 상당)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쿄나 오사카 같은 주요 지역이 아닌, 고쿠라(서부)에 주둔한 제12사단의 군의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는 사실상의 좌천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그는 "고쿠라 일기(小倉日記)"를 남겼다. 세기말부터 신세기 초까지 이어진 고쿠라 시절 동안, 그는 역사관과 근대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여러 수필을 집필하며 문학적 지평을 넓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문단 시평인 '오가이 어사란 누군가(鴎外魚史とは誰ぞ)', 일본 근대 서양화가 하라다 나오지로에 대한 글, 근대 예술을 다룬 '양휴록(潦休録)',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을 담은 '我をして九州の富人たらしめば', 북청 사건에 대한 강연록 '북청사건의 일면의 고찰', 그리고 사회주의 등을 논한 '신사회합평' 등이 있다.
2. 4. 군의 최고위직 취임과 왕성한 문필 활동

작가로서 모리 오가이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문예지에서 카를 폰 하르트만의 미학 이론을 바탕으로 일본에 근대 문학 비평을 도입했다. 모리가 살았던 집은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에 보존되어 있으며, 고쿠라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고쿠라 일기」(Kokura Nikki)를 썼다. 그의 생가도 쓰와노정에 보존되어 있다. 두 채의 단층집은 크기와 전통 일본식 건축 양식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특히 『시부이 주사이』(Shibue Chūsai, 1916)와 같은 그의 전기 작품들 덕분에 오가이는 일본 문화에서 근대 전기 문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16]
그의 딸인 마리(당시 19세)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광범위하게 썼다. 그녀는 1961년에 발표한 소설 恋人たちの森|코이비토타치노모리jpn(''A Lovers' Forest'')를 시작으로 나이 많은 남성과 늦은 십대 소년 사이의 비극적인 연애 이야기를 썼는데, 이는 1970년대 일본 소설과 만화에 등장하기 시작한 여성이 여성을 위해 쓴 남성 간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인 ''야오이'' 장르의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17] 모리의 여동생 기미코는 고가네이 요시키요와 결혼했고, 호시 신이치는 그들의 손자 중 한 명이다.
1889년(메이지 22년) 1월 3일, 『요미우리 신문』 부록에 「소설론」[50]을 발표하였고, 같은 날 『요미우리 신문』부터 동생 미키 타케지(三木竹二)와 함께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의 희곡 「조고의진현일곡」(원제: 사라메야의 마을 수장)을 공역하여 연재하였다. 그 번역 희곡을 높이 평가한 것은 도쿠토미 소호였으며, 8월에 소호가 주필을 맡은 민유사(民友社)의 잡지 『국민지우(国民之友)』 하기 문예 부록에 역시집 「어모영(於母影)」 (서명은 "S・S・S"(신성사(新声社)의 약기)[51])을 발표하였다. 그 「어모영」은 일본 근대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어모영」의 원고료 50JPY을 자본으로, 타케지 등 동인들과 일본 최초의 평론 중심 전문지 『시가라미 소시(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하였다(1889년 10월~1894년 8월. 청일 전쟁 발발로 59호에서 폐간)[52].
이처럼 외국 문학 번역을 시작으로("즉흥시인(即興詩人)","파우스트" 등이 유명)[53] 열심히 평론적 계몽 활동을 계속하였다. 당시 정보가 부족했던 유럽 독일을 배경으로 한 「무희(舞姫)」를 소호의 의뢰로 『국민지우』 1890년 1월에 발표하였다. 이어서 「우타카타노키(うたかたの記)」(『시가라미 소시』 1890년 8월), 1891년 1월 28일 「문쓰카이(文づかひ)」(「신저백종(新著百種)」 12호)를 잇달아 발표하였는데, 특히 일본인과 외국인이 연애 관계가 되는 「무희」는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독일 3부작을 둘러싸고 이시바시 닌게쓰(石橋忍月)와 논쟁을 벌였고, 또 『시가라미 소시』에서 쓰보우치 쇼요의 기실주의를 비판하여 몰이상론 논쟁(没理想論争)을 벌였다.
1889년(메이지 22년)에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의 미술 해부학 강사를 [54], 1890년 9월부터 약 2년간 도쿄전문학교(東京専門學校)의 과외 강사를 [55], 1892년(메이지 25년) 9월에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의 심미학(미학의 구칭)[56] 강사를 위촉받았다(모두 청일전쟁 출정시와 고쿠라(小倉) 전근시에 해촉됨).
2. 5. 각종 논란
1909년 발표한 소설 『비타 섹슈알리스(Vita Sexualis)』는 내용이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공공 도덕에 위험하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라 발표 한 달 만에 금서로 지정되는 일을 겪었다.[11] 오가이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일본 근대 문학계의 경향, 특히 육체와 정신의 연결고리로서의 성(性)과 개인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했다.[7]1910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과 고문으로 취임한 해는 대역죄 사건(High Treason Incident)으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 암살 음모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되는 등[7] 사회적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같은 해 5월 대역사건 관련자 검거가 시작되었고, 9월에는 도쿄 아사히신문의 '위험한 양서'라는 연재물에 오가이와 부인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다.[183]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가이는 정부 관료의 입장에 있었음에도 지식인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정부의 사상 및 학문 억압을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다.[7]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파스체스"(발표 후 발매 금지 처분), 학문과 예술의 자유 문제를 다룬 "침묵의 탑", 표트르 크로폿킨의 무정부주의 등을 언급하며 사회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식당" 등의 작품 발표로 이어졌다.[183][7] 같은 해 4월 '문예의 주위'에서는 이념과 문학 사이의 갈등에 대한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183]
또한 1910년부터 1911년 사이에는 군의관의 인사권을 둘러싸고 당시 육군 차관이었던 이시모토 신로쿠(石本新六)와 의무국장 오가이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이 갈등은 오가이가 사의를 표명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오가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의학 전문성을 우선하는 인사가 그의 퇴임 후에도 유지되었다. 이러한 결과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6. 만년

1916년 4월, 군의총감과 의무국장을 8년 반 동안 역임한 후 예비역으로 편입되며 군에서 물러났다. 이후 문화 행정 분야에서 활동하여, 1917년 12월에는 제실박물관 총장 겸 도서관장이 되었고, 이듬해 1918년 1월에는 제실 제도 심의회 어용괘(帝室制度審議会御用掛일본어)로 취임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제국미술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메이지( 明治일본어 )'와 '다이쇼( 大正일본어 )'라는 원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궁내성 도서두로서 천황의 시호와 원호의 고증 및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天諡考|덴시코일본어'는 간행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후속 작업인 '元号考|겐고코일본어'는 자신이 눈여겨보았던 요시다 마스조(吉田増蔵일본어)에게 맡겼다. 이후 요시다 마스조는 미완이었던 '元号考|겐고코일본어' 간행에 힘썼고, 원호안 '쇼와( 昭和일본어 )'를 제안하게 되었다.
문학 활동에서는 1912년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殉死)에 큰 영향을 받아 역사 소설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노기의 순사 5일 후에 '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오키츠 야고에몬 노 유이쇼일본어'(초고)를 완성했다.[77] 이를 계기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아베 일족'(阿部一族일본어),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창작한 '산쇼다유'(山椒大夫일본어), '다카세부네'(高瀬舟일본어) 등 대표적인 역사 소설을 발표했다. 또한 실증적인 역사 연구에도 몰두하여 사전(史伝) '시부에 추사이'(渋江抽斎일본어)를 집필하여 1916년 1월부터 5월까지 신문에 연재했다. 1916년에는 후세의 연구가나 평론가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지는 수필 '空車|무나구루마일본어'를,[79] 1918년 1월에는 수필 '예의소언'을 저술했다.[80]
1922년 7월 9일, 위축신(萎縮腎, 신장 위축)과 폐결핵으로 인해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나는 이와미( 石見일본어 ) 사람 森林太郎|모리 린타로일본어로서 죽고 싶다( 余ハ石見人森林太郎トシテ死セント欲ス일본어 )"라는 그의 유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언에 따라 그의 묘비에는 일체의 명예나 칭호를 배제하고 '森林太郎ノ墓|모리 린타로 노 하카일본어'(모리 린타로의 묘)라고만 새겨졌다. 묘비명은 유언에 따라 화가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일본어)가 썼다. 처음에는 무코지마의 코후쿠지(向島弘福寺일본어)에 안장되었으나, 간토대지진 이후 도쿄도 미타카시의 젠린지(禅林寺일본어)와 고향인 시마네현 츠와노쵸의 에이메이지(永明寺일본어)로 이장되었다. 계명은 貞献院殿文穆思斎大居士|조켄인덴 분보쿠 시사이 다이코지일본어이다.
3. 문학 세계
모리 오가이의 문학은 활동 시기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제1기: 독일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청신(淸新)한 낭만주의 경향을 보인 시기이다. 아문체(雅文體)로 쓰인 舞姫 등이 대표적이다.
- 제2기: 창작 활동이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시기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소설 即興詩人 번역(1892-1901) 등이 이 시기의 주요 활동이다.
- 제3기: 자연주의 문학의 대두와 나쓰메 소세키 등의 활동에 자극받아 문예지 スバル|스바루일본어, 三田文學|미타문학일본어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현대소설을 발표한 시기이다. 青年](1910), 妄想|もうそう|망상일본어(1911) 등이 이 시기 작품이다.
- 제4기: 역사소설에 집중한 시기이다. 阿部一族](1913) 등에서 헌신적 윤리의 아름다움, 절대자와 개인 자아의 대립, 사회 문제, 관료적 속물주의 비판 등 다양한 현대적 주제를 역사적 소재를 통해 탐구했다.
- 제5기: 엄격한 실증 정신과 시적 감성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사전(史傳) 문학을 개척한 시기이다. 渋江抽斎](1916) 등이 대표작이다.
3. 1. 소설
모리 오가이의 문학 활동은 크게 초기 낭만주의 시기, 중기 자연주의 및 자아 탐구 시기, 후기 역사소설 및 사전(史傳)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 낭만주의와 독일 3부작 ===
1888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오가이는 군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된 후, 1889년 일본 근대시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번역 시집 於母影|おもかげ일본어를 공역하여 발표했다. 이 원고료를 바탕으로 동생 미키 타케지(三木竹二)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평론 전문지 しがらみ草紙|시가라미조시일본어를 창간하며[180]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 오가이는 독일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 문학계에 생소했던 유럽, 특히 독일을 무대로 한 소설들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독일 3부작'으로 불리는 舞姫|まいひめ|무희일본어(1890), うたかたの記|うたかたのき|물거품의 기록일본어(1890), 文づかひ|ふみづかい|아씨의 편지일본어(1891)이다. 특히 무희는 독일 유학 중 만난 독일 여성과의 실제 경험을 소재로 하여[48][49], 일본인 남성 유학생 토요타로(豊太郎)와 가난한 독일 무희 엘리스(Elis)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서구 문물과 일본 전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일본 근대문학에 낭만주의를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인과 외국인의 연애를 다룬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181] 이 작품들은 청신(淸新)한 로맨티시즘을 통해 오가이 청춘기의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중기: 자아 탐구와 자연주의 ===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참전, 고쿠라(小倉) 좌천 등으로 한동안 창작 활동이 뜸했던 오가이는 1909년 문예지 スバル|스바루일본어 창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을 재개했다.[182] 이 시기 그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개인의 내면 심리와 성적 욕망, 근대적 자아의식 등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자신의 성적 경험과 각성을 솔직하게 그린 ヰタ・セクスアリス|비타 섹슈알리스|비타 섹슈알리스일본어(1909),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青年|せいねん|청년일본어(1910), 섬세한 심리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자연주의 문학의 수작으로 꼽히는 雁|がん|기러기일본어(1911-1913) 등이 있다. 특히 ヰタ・セクスアリス|비타 섹슈알리스일본어는 발표 직후 내용의 선정성을 문제 삼아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11], 오가이는 육군 차관으로부터 훈계(戒飭)를 받기도 했다. 이는 당시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10년 대역죄 사건 이후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오가이는 沈黙の塔|ちんもくのとう|침묵의 탑일본어(1910), 食堂|しょくどう|식당일본어(1910) 등의 작품을 통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부의 사상 탄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냈다.[183][7] 그는 "학문의 자유 연구와 예술의 자유 발전을 방해하는 나라는 번영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73]
=== 후기: 역사소설과 사전(史傳) ===
1912년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순사(殉死) 사건은 오가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문학 세계는 역사소설과 사전(史傳)으로 전환된다.[77] 그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인간의 삶과 윤리, 사회 문제를 탐구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기 순사 5일 뒤 집필한 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おきつ やごえもんのいしょ|오키츠 야고에몬의 유서일본어(1912)를 시작으로, 봉건적 윤리와 개인적 자아의 갈등을 그린 阿部一族|あべ いちぞく|아베 일족일본어(1913),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한 堺事件|さかい じけん|사카이 사건일본어(1914) 등 '역사 그대로(歴史其儘)'를 표방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후에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역사 이탈(歴史離れ)' 경향의 작품들도 선보였다. 인신매매와 권선징악의 문제를 다룬 山椒大夫|さんしょう だゆう|산쇼다유일본어(1915)와 안락사라는 윤리적 딜레마를 제시한 高瀬舟|たかせぶね|다카세부네일본어(1916)가 대표적이다. 山椒大夫|산쇼 다유일본어는 중세 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근대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한 작품이다.[15]

오가이 후기 문학의 정점은 사전(史傳) 문학에서 나타난다. 그는 에도 시대 의사들의 삶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대표작인 渋江抽斎|しぶえ ちゅうさい|시부에추사이일본어(1916)는 엄격한 실증 정신과 문학적 감수성을 결합하여 일본 근대 전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84][16] 이후 伊澤蘭軒|いざわ らんけん|이자와 란켄일본어(1916-17), 北条霞亭|ほうじょう かてい|호죠 카테이일본어(1917-18) 등 사전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학 양식을 확립했다.
=== 주요 소설 작품 목록 ===
발표 연도 | 제목 (원제) | 비고 |
---|---|---|
1890년 | 무희 (舞姫|まいひめ일본어) | 독일 3부작 |
1890년 | 물거품의 기록 (うたかたの記|うたかたのき일본어) | 독일 3부작 |
1891년 | 아씨의 편지 (文づかひ|ふみづかい일본어) | 독일 3부작 |
1909년 | 비타 섹슈알리스 (ヰタ・セクスアリス|비타 섹슈알리스일본어) | 발표 후 발매 금지 |
1910년 | 청년 (青年|せいねん일본어) | |
1911년-1913년 | 기러기 (雁|がん일본어) | |
1912년 | 오키츠 야고에몬의 유서 (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おきつ やごえもんのいしょ일본어) | 역사소설 시작 |
1913년 | 아베 일족 (阿部一族|あべ いちぞく일본어) | 역사소설 |
1914년 | 사카이 사건 (堺事件|さかい じけん일본어) | 역사소설 |
1915년 | 산쇼다유 (山椒大夫|さんしょう だゆう일본어) | 역사소설 |
1915년 | 최후의 한마디 (最後の一句|さいごの いっく일본어) | 역사소설 |
1916년 | 다카세부네 (高瀬舟|たかせぶね일본어) | 역사소설 |
1916년 | 시부에추사이 (渋江抽斎|しぶえ ちゅうさい일본어) | 사전(史傳) |
3. 2. 번역
모리 오가이는 여러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문예 활동의 폭이 넓었다. 특히 번역가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독일 유학 시절부터 접한 유럽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썼다.1889년 8월, 동생 미키 다케지(三木竹二) 등과 함께 번역 시집 『於母影』(오모카게)를 공역으로 발표했다. 이 시집은 일본 근대시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180]. 또한 1892년부터 1901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발표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즉흥시인』 번역은 우아하고 유려한 문체로 메이지 시대 문인들을 매료시켰다. 이 책을 들고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하는 문학 청년(마사무네 하쿠토 등)이 속출할 정도였다.
희곡 번역에도 적극적이어서, 동생 미키 다케지가 책임 편집을 맡은 잡지 『가부키(歌舞伎)』에 다수의 번역 희곡을 게재했다[90]. 괴테의 『파우스트』, 입센의 『노라』(원제: 인형의 집), 『존 가브리엘 보크만』,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등 중요한 희곡 작품들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오페라 번역까지 시도하기도 했다.[91]
또한, '교향악(交響楽)', '교향곡(交響曲)'과 같은 일본식 한자어를 만들었으며, 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유럽 유학을 마친 연주가 코우다 노부(幸田延)와 대담하기도 했다(「서양 음악과 코우다 씨와(西楽と幸田氏と)」). 외국 작품 번역 외에도 귀국 후 연극에 대한 계몽적인 비평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92]
번역은 문학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하르트만의 『심미학 강령(審美学綱領)』과 같은 미학(당시 명칭은 심미학) 서적도 번역했다.
아래는 모리 오가이가 번역한 주요 작품 목록이다.
'''소설 및 단편'''
- 녹엽탄 (알퐁스 도데, 『요미우리 신문』 1889년 2월) ※미키 타케지(三木竹二)와 공역
- 구슬을 품고 죄가 있다 (E. T. A. 호프만, 『요미우리 신문』 1889년 3월-7월) ※미키 타케지와 공역
- 전승 (도데, 『소년원』 1889년 3월)
- 신세계의 우라시마 (워싱턴 어빙, 『소년원』 1889년 5월-7월)
- 홍수 (브렛 하트, 『시가라미 조사』 1889년 10월-1890년 3월)
- 스위스관에 노래를 듣다 (레프 톨스토이, 『요미우리 신문』 1889년 11월)
- 이틀 밤 (프리드리히 하클렌델, 『요미우리 신문』 1890년 1월-2월)
- 바보 같은 남자 (이반 투르게네프, 『일본지문화』 1890년 1월)
- 지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국민신문』 1890년 3월)
- 악인연 (클라이스트, 『국민지우』 1890년 4월-7월)
- 매목 (오시프 슈빈, 『시가라미 조사』 1890년 4월-1891년 4월)
- 로마 (투르게네프, 『도쿄추신문』 1890년 6월)
- 우키요의 파도 (아돌프 슈테른, 『국민지우』 1890년 8월-11월)
- 황수장 (하클렌델, 『도쿄닛닛신문』 1891년 3월)
- 참회록 (장자크 루소, 『입헌자유신문』 1891년 3월-5월) ※미완
- 미쿠즈 (도데, 『시가라미 조사』 1891년 6월)
- 여자장부 (카를 프렌첼, 『국민지우』 1891년 8월)
- 누케우리 (미하일 레르몬토프, 『학습원보인회잡지』 1892년 10월)
- 즉흥시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시가라미 조사』 1892년 11월-『메사마시초』 1901년 2월)
- 빡빡머리 (아우구스트 코피슈, 『신소설』 1897년 1월)
- 산향 (테오도르 히펠, 『예문』 1902년 6월)
- 숙명론자 (레르몬토프, 『명성』 1907년 1월)
- 소크라테스의 죽음 (팀 크뢰거, 『마음의 꽃』 1908년 1월)
- 안드레아스 타르마이엘이 유서 (슈니츨러, 『명성』 1908년 1월)
- 아버지 (빌헬름 셰퍼, 『명성』 1908년 2월)
- 언젠가 그대 돌아오리 (안나 크로이상트 루스트, 『명성』 1908년 4월)
- 황금컵 (야코프 바서만, 『명성』 1908년 5월)
- 목사 (셀마 라게를뢰프, 『마음의 꽃』 1908년 10월)
- 이별 (아르노 홀츠, 요하네스 슐라프, 『명성』 1908년 11월)
- 얼굴 (리하르트 데멜, 『마음의 꽃』 1909년 1월)
- 오후 11시 (구스타프 비드, 『태양』 1910년 1월)
- 흰색 (릴케, 『취미』 1910년 1월)
- 낚시 (페터 알텐베르크, 『여자문단』 1910년 1월)
- 개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초출 불명 1910년 1월)
- 까마귀 (빌헬름 슈미트본, 『제국문학』 1910년 3월)
- 치통 (안드레예프, 『취미』 1910년 3월)
- 성 줄리앙 (귀스타브 플로베르, 『태양』 1910년 5월-7월)
- 죄인 (미하일 아르치바셰프, 『동아지광』 1910년 5월)
- 우즈시오 (에드거 앨런 포, 『문예클럽』 1910년 8월)
- 죽음 (아르치바셰프, 『학생문예』 1910년 9월)
- 웃음 (아르치바셰프, 『동아지광』 1910년 9월)
- 두 해골 (휴고 안드레센, 『동아지광』 1911년 1월)
- 깃 (오시프 디모프, 『미타문학』 1911년 1월)
- 한 마리 개가 두 마리 되는 이야기 (마르셀 베르제, 『마음의 꽃』 1911년 1월)
- 탑 위의 닭 (헬베르트 오일렌베르크, 『동아지광』 1911년 6월)
- 세계 만유 (야코프 율리우스 다비드, 『제국문학』 1911년 6월)
- 크산티스 (알베르 사맹, 『신소설』 1911년 7월)
- 장미 (비드, 『여자문단』 1911년 7월)
- 끼어들다 (예브게니 치리코프, 『미타문학』 1911년 7월)
- 미련 (슈니츨러, 『도쿄닛닛신문』 1912년 1월-3월)
- 사할린 탈옥기 (블라디미르 코롤렌코, 『문예클럽』 1912년 1월)
- 여자의 결투 (오일렌베르크, 초출 불명)
- 자신의 장례 (한스 하인츠 에버스, 『견우성』 1912년 1월)
- 겨울의 왕 (후고 란츠베르거, 『제국문학』 1912년 1월)
- 노조장 (데트레프 폰 릴리엔크론, 『동아지광』 1912년 1월)
- 기차 화재 (한스 키젤, 『미타문학』 1912년 1월)
- 축일 (릴케, 『마음의 꽃』 1912년 1월)
- 구낙 (릴케, 『여자문단』 1912년 1월)
- 아버지와 여동생 (셰퍼, 『여자문단』 1912년 4월)
- 불가설 (앙리 드 레니에, 『견우성』 1912년 5월)
- 악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신일본』 1912년 5월 - 6월)
- 정체 (카를 볼몰러, 『미타문학』 1912년 6월)
- 파락토의 승천 (몰나르 페렌츠, 『견우성』 1912년 8월)
- 13시 (에드거 앨런 포, 『취미』 1912년 10월)
- 시골 (마르셀 프레보, 『견우성』 1912년 10월)
- 노인 (릴케, 『제국문학』 1913년 1월)
- 청원 (에버스, 『마음의 꽃』 1913년 1월)
- 고독한 자의 죽음 (슈니츨러, 『동아지광』 1913년 1월)
- 마부 (알렉세이 톨스토이, 『견우성』 1913년 1월-7월)
- 복수 (레니에, 『미타문학』 1913년 1월 - 4월)
- 원숭이 (쥘 클라레티, 『신일본』 1913년 3월)
- 마지막 오후 (몰나르, 『미타문학』 1913년 5월)
- 노동 (카를 쇤헤르, 초출 불명)
- 병원 옆골목의 살인범 (에드거 앨런 포, 『신소설』 1913년 6월)
- 마차 (몰나르, 『미타문학』 1913년 6월)
- 플로르스와 도둑과 (미하일 쿠즈민, 『미타문학』 1913년 7월)
- 센츠아마니 (막심 고리키, 『미타문학』 1913년 8월)
- 사락 (카를 한스 스트로블, 『견우성』 1913년 8월)
- 파테르 세르기우스 (레프 톨스토이, 『문예클럽』 1913년 9월)
- 다리 아래 (프레데릭 부테, 『미타문학』 1913년 10월)
- 성 니콜라우스의 밤 (카미유 르모니에, 『미타문학』 1913년 11월-12월)
- 소화전 (게오르크 히르슈펠트, 『견우성』 1913년 12월)
- 수녀 (비드, 『우리들』 1914년 1월)
- 무도 (아나톨 프랑스, 『신사조』 1914년 3월)
- 毫光 (렌겔 메니헤르트, 『번홍화』 1914년 3월)
- 개구리 (프레데릭 미스트랄, 『우리들』 1914년 7월)
- 아버지의 원수 (아게 마델룽, 『우리들』 1914년 8월)
- 감정인 (폴 부르제, 『신소설』 1915년 1월)
'''희곡'''
- 조고의 양현 일곡(칼데론, 『요미우리 신문』 1889년 1월-2월) ※미키 타케지와 공역
- 접장미(레싱, 『시가라미 소우시』 1889년 10월-1890년 6월)
- 전기 토오니이(테오도어 쾨르너, 『요미우리 신문』 1889년 11월-12월) ※미키 타케지와 공역, 미완
- 포(레싱, 『시가라미 소우시』 1892년 9월-1893년 7월)
- 목사(입센, 『만년초』 1903년 6월-9월) ※미완
- 아군(빌헬름 폰 숄츠, 『가부키』 1907년 10월)
- 단검을 든 여자(슈니츨러, 『가부키』 1907년 11월-12월)
- 출발 전반 시간(프랑크 베데킨트, 『가부키』 1908년 1월)
- 옥저(헤르만 바르, 『가부키』 1908년 7월-8월)
- 꽃다발(헤르만 주더만, 『가부키』 1908년 9월-10월)
- 맹자(슈니츨러, 『가부키』 1908년 11월)
- 치인과 사와(후고 폰 호프만스탈, 『가부키』 1908년 12월)
- 승방몽(게르하르트 하웁트만, 『가부키』 1909년 1월-3월)
- 예수 강탄제의 매입(슈니츨러, 『신천지』 1909년 1월)
- 기적(모리스 마테를링크, 『가부키』 1909년 1월)
- 넨네 여관(구스타프 비드, 『마음의 꽃』 1909년 4월-5월)
- 채귀(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가부키』 1909년 4월)
- 존 가브리엘 보크만(입센, 『국민신문』 1909년 6월-8월)
- 살로메(오스카 와일드, 『가부키』 1909년 7월-9월)
- 가상차반(릴케, 『태양』 1909년 9월-10월)
- 추석몽(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가부키』 1909년 10월)
- 진자 인(숄츠, 『신소설』 1909년 11월-12월)
- 인의 일생(레오니트 안드레예프, 『가부키』 1910년 1월-5월)
- 거리의 아이(빌헬름 슈미트본, 『가부키』 1910년 5월-10월)
- 비행기(에두아르트 슈투켄, 『가부키』 1910년 6월-8월)
- 마도방(조지 버나드 쇼, 『가부키』 1910년 10월-12월)
- 일인 무대(스트린드베리, 『여자 문단』 1911년 1월)
- 파리아스(스트린드베리, 『신소설』 1911년 1월)
- 인력 이상(비외른손, 『가부키』 1911년 1월-5월)
- 적막한 사람들(하우프트만, 『요미우리 신문』 1911년 2월-4월)
- 장갑(비외른손, 『가부키』 1911년 11월-1912년 3월)
- 유령(입센, 금엽당, 1911년 12월 간행)
- 승원(에밀 베르하렌, 『가부키』 1912년 1월-1914년 9월)
- 디오게네스의 유혹(슈미트본, 『연예 클럽』 1912년 4월)
- 연애 삼매(슈니츨러, 『가부키』 1912년 4월-1913년 9월)
- 괴츠(괴테, 『가부키』 1912년 10월-1914년 3월)
- 파우스트(괴테, 후지산방, 1부: 1913년 1월 간행, 2부: 1913년 3월 간행)
- 밤의 두 장면(프리다 스텐호프, 『다이쇼 연예』 1913년 2월)
- 맥베스(윌리엄 셰익스피어, 경성사, 1913년 7월 간행)
- 노라(입센, 경성사, 1913년 11월 간행)
- 뇌우(스트린드베리, 『가부키』 1914년 1월-5월)
- 수수께끼(호프만슈탈, 현대사, 1914년 5월 간행)
- 잊고 온 실크햇(던세이니 경, 『번홍화』 1914년 7월)
- 백의의 부인(릴케, 『연예화보』 1916년 1월)
- 펠리컨(스트린드베리, 『백화』 1920년 1월)
'''시집 및 시가'''
- 어머니의 그림자(『국민지우』 1889년 여름호 부록) ※“신성사” 명의의 공역 시집
- 나의 백수(1907년 5월)
- 노래 일기(춘양당, 1907년 9월 간행)
- 요코하마시 시가(1909년)
- 사라의 나무(아란다서방, 1915년 9월 간행)
- 요코하마시립 요코하마 상업고등학교 교가(1916년)
- 하마마쓰시 시가 (초대. 1921년 발표, 2005년 폐지)
3. 3. 평론 및 기타
모리 오가이는 문학, 의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평론 활동을 펼치며 당대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계몽가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문학과 의학 양쪽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그의 비판적 지성과 서구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문학 분야에서는 이상주의를 내세워 쓰보우치 쇼요가 주장하는 사실주의적 비이상주의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몰이상론(没理想論) 논쟁'은 일본 근대 문학 비평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모리는 쇼요가 『와세다 문학』에 쓴 셰익스피어 평석에 대한 짧은 부기에 비판적인 평을 『시가라미조시(しがらみ草紙)』에 실으면서 논쟁을 촉발했다.[180]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전투적 계몽주의"[88]로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계몽가로서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89] 그러나 청일 전쟁 이후 『메사마시구사(めさまし草)』를 창간하여 고다 로한, 사이토 로쿠지와 함께 '합평(合評)'을 연재하는 등 점차 온건한 평론 활동으로 변화해갔다.
의학 분야에서는 근대 서양 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시 주류였던 화한방 의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화한방 의학계가 학문적 성과를 쌓은 학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며 일본 의학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했고,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쓰모토 료준과 같은 원로 의사들은 그의 주장에 직접 대응하지 않았지만, 모리는 언론 등을 통해 약 6년간 논쟁을 이어갔다.[87]
번역가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동생 미키 다케지 등과 공역한 번역시집 『오모카게(於母影)』는 일본 근대시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안데르센의 소설을 번역한 『즉흥시인(即興詩人)』은 유려한 문체로 당대 문인들을 매료시켜 이탈리아 문학 기행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비롯한 희곡과 오페라 번역에도 힘썼으며[90][91], '교향악(交響楽)', '교향곡(交響曲)'이라는 일본식 한자어를 만들기도 했다. 문학 작품 외에도 하르트만의 『심미학 강령』과 같은 철학 서적을 번역하며 서양 사상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152]
미술 분야에서도 조예가 깊어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에서 미술 해부학, 심미학, 서양 미술사를 가르쳤고, 게이오기주쿠에서는 심미학 강사로 활동했다. 제1회 문부성 미술 전람회(문전) 서양화 부문 심사 주임을 맡았으며, 이후 제국박물관(현 도쿄 국립박물관) 총장과 일본예술원(당시 제국미술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 근대 미술계 발전에도 공헌했다.[94]
모리는 특정 문파를 형성하거나 제자를 두지 않았으며, 폐쇄적인 관계보다는 서구적인 살롱 분위기의 자유로운 교류를 선호했다.[95] 자택 '관조루(観潮楼)'에서 정기적으로 가회(歌会)를 열어 요사노 뎃칸의 신시사(新詩社) 계열과 마사오카 시키의 네기시(根岸) 파 문인들이 함께 교류하는 장을 마련했다. 이 가회에는 이토 사치오, 우에다 빈, 사사키 노부쓰나, 기타하라 하쿠슈, 이시카와 다쿠보쿠, 사이토 모키치 등 당대 주요 문인들이 참여했다.[96] 또한, 히구치 이치요, 요사노 아키코, 히라쓰카 라이초 등 새로운 여성 문인들을 일찍부터 높이 평가하고 교류하며 여성에 대한 편견 없는 태도를 보였다.[97]
말년에 집필한 『시부에 추사이(渋江抽斎)』와 같은 사전(史伝) 작품들은 당시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사후 전집 간행을 통해 그의 문학적 권위는 재확립되었다.[98] 그러나 동시대 문인이었던 고다 로한은 말년에 모리를 "무섭게 출세욕이 강하고 재물 모으기를 좋아하며 마음이 차가운 남자"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99]
그 외에도 수필 『공차(空車, 무나구루마)』, 『예의소언(礼儀小言)』, 기행문 『고쿠라 일기(小倉日記)』, 아돌프 크니게의 저서를 번안한 잠언집 『지혜주머니』,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저서를 번안한 『혜어(慧語)』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남겼다.[153]
다음은 모리 오가이의 주요 평론 및 기타 저작 목록이다.
4. 연보
- 1882년 (메이지 15년) 경: 독일 유학을 앞두고, 또는 유학 초기, 일본 국내 병식 관련 논문을 참고하여 병식 연구 시작.[101]
- 1883년 2월-3월, 동년 9월-1884년 2월: 일기 '북유일승(北游日乘)' 작성.
- 1884년 (메이지 17년):
- 독일 유학 중, 『일본병식론(日本兵食論)』과 『일본병식론대의(日本兵食論大意)』 두 편의 논문을 집필하여 일본식이 서양식에 비해 영양학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101]
- 상관인 이시구로 타다노리로부터 각기에 대한 견해를 질문받았으나, "쌀밥과 각기의 관계 유무는 감히 말하지 않는다"며 명확한 입장을 밝히기를 회피.[102]
- 8월-10월: 귀국 여정을 담은 일기 '항서일기(航西日記)' 작성.
- 1888년 (메이지 21년):
- 3월-7월: 군 복무 중 일기 '대무일기(隊務日記)' 작성.
- 7월-9월: 귀국 과정을 기록한 일기 '환동일승(還東日乘)' 작성.
- 9월: 4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
- 11월: 대일본사립위생회에서 『비일본식론은 장차 그 근거를 잃으려 한다』라는 제목으로 연설. 영양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일본식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해군 군의관 다카기 카네히로가 주장한 각기 원인설(단백질 부족)과 서양식 도입론을 간접적으로 비판.[103]
- 1889년 (메이지 22년):
- 8월-12월: 육군 병식 시험 위원회의 주임으로서 인체 실험을 실시. 이 실험 결과를 통해 쌀밥이 열량, 단백질 보급, 체내 활성도 면에서 보리밥이나 양식보다 우수하다고 결론 내림.[104] 이는 이후 육군의 각기병 대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 10월-1893년 5월: 독일 유학 시절을 회고하며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 '독일일기(獨逸日記)' 작성.
- 1892년 (메이지 25년) 8월-10월: 일기 '관조루일기(觀潮樓日記)' 작성.
- 1894년 (메이지 27년, 청일전쟁 발발):
- 육군은 전시 병식으로 백미 중심의 "하루 현미 6홉"을 규정. 이는 청일전쟁 중 각기병 유행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8월-1895년 10월: 청일전쟁에 종군하며 일기 '조정일기(徂征日記)' 작성.
- 청일전쟁 및 대만 평정 시기: 육군 내에서 각기병이 심각하게 유행하여 약 4만 명의 환자와 4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대본영 운수통신장관이었던 테라이 마사타케는 훗날 모리가 이시구로 타다노리와 함께 각기 예방 효과가 있던 보리밥 지급을 반대했다고 증언했다.[105][106]
- 1899년 (메이지 32년) 6월-1902년 3월: 고쿠라 제12사단 군의부장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며 일기 '고쿠라일기(小倉日記)' 작성.
- 1901년 (메이지 34년):
- 8월 2일: 『군의학회잡지』에 오사카 진대 병원 등 일부 부대에서 보리밥 지급으로 각기병이 감소했다는 내용의 글이 게재됨.[107]
- 8월 31일: 『각기 감소는 과연 보리를 가지고 쌀로 바꾼 데 인한 것인가』라는 논문을 발표. 보리밥 도입과 각기병 감소 사이의 명백한 인과관계를 부정하며, 이를 전후즉인과의 오류라고 주장. 하지만 주장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아,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평가도 받음.[108]
- 1904년 (메이지 37년, 러일전쟁 발발):
- 제2군 군의부장으로 임명되어 참전.
- 4월 8일: 예하 제1사단 및 제3사단 군의부장들이 각기 예방을 위한 보리밥 지급을 건의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사실상 묵살("답변 없음").[110] 이는 각기병 예방 조치에 대한 그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음.[111]
- 러일전쟁 시기: 육군은 초기 백미식을 고수하여 약 25만 명의 각기 환자와 약 2만 7천 명의 사망자라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겪었다. 이는 보리밥의 효과를 인정하지 않고 백미식을 고집한 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가 큰 원인이었으며, 모리 오가이와 같은 의학 권위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쟁 중반 이후 육군은 뒤늦게 보리밥을 도입했다.
- 러일전쟁 후: 각기병 참화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서 육군성 의무국장 코이케 마사나오가 사임하자, 후임으로 육군성 의무국장(군의총감, 중장 상당)에 취임. 각기병 원인 규명을 목표로 하는 "임시 각기병 조사회" 설립을 주도하고 회장직을 맡음.
- 1913년 (다이쇼 2년) 3월 29일: 육군 급여령 개정(칙령 제43호)에 관여하여, 평시 주식을 기존의 현미에서 쌀과 보리를 혼식하는 것으로 변경.[119]
- 1914년 (다이쇼 3년):
- 8월 17일: 육군 전시 급여 규칙 세칙 개정(육달 제20호)에 관여하여, 전시 주식 또한 쌀과 보리 혼식으로 변경.[120]
- 9월: 코이케 마사나오와 공저한 교과서 『위생신편(衛生新編)』 개정 증보 제5판을 발행하면서 처음으로 '각기' 항목을 추가. 그러나 당시 의학계의 혼란을 반영하듯 여러 학설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자신의 명확한 견해는 밝히지 않음.[118]
- 1916년 (다이쇼 5년):
- 4월: 육군성 의무국장직에서 물러나 예비역으로 편입. 동시에 임시 각기병 조사회 회장직에서도 사임.
- 5월: 임시 각기병 조사회의 임시 위원으로 위촉되어 사망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함.[113]
- 1918년 (다이쇼 7년) 1월-1922년 7월: 말년의 일기 '위사록(委蛇錄)' 작성.
- 1921년 (다이쇼 10년) 10월 28일: 임시 각기병 조사회 제25회 총회에 마지막으로 참석. 이 회의에서는 비타민 B 관련 연구 보고가 주를 이루었으며, 각기병 원인 규명이 임박했음을 시사.[114]
- 1922년 (다이쇼 11년) 7월: 사망. 그가 설립을 주도하고 오랫동안 활동했던 임시 각기병 조사회는 이후 일본의 각기병 연구와 비타민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115]와 함께, 결과적으로 각기병의 원인인 비타민 B 결핍설의 확립을 지연시켰다는 비판[116][117]도 받고 있다.
시기 | 제목 |
---|---|
1883년 2월-3월, 동년 9월-1884년 2월 | 북유일승(北游日乘) |
1884년 8월-10월 | 항서일기(航西日記) |
1888년 3월-7월 | 대무일기(隊務日記) |
1888년 7월-9월 | 환동일승(還東日乘) |
1889년 10월-1893년 5월 | 독일일기(獨逸日記) |
1892년 8월-10월 | 관조루일기(觀潮樓日記) |
1894년 8월-1895년 10월 | 조정일기(徂征日記) |
1899년 6월-1902년 3월 | 고쿠라일기(小倉日記) |
1918년 1월-1922년 7월 | 위사록(委蛇錄) |
5. 인물평
모리 오가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문학가, 번역가, 의사, 관료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문학적 업적과 근대 학문 도입에 대한 기여는 높이 평가받지만, 동시에 사생활 문제나 작품 검열 논란, 그리고 특히 군의관으로서 각기병 문제에 대한 대처 방식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육군 내 각기병 피해 확산과 관련하여, 오가이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가이가 당시 상황에서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았고 백미식 강요 등은 불가피했다는 옹호론[121][122][123][124][125]과, 그가 다카기 가네히로 등이 이끈 해군의 성공적인 각기병 예방 조치를 비판하고 세균설에 집착하여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론[126][127][128][129]이 맞서고 있다. 옹호 측은 당시 육군 위생의 총책임자가 오가이가 아니었으며[122], 백미식 고수는 당시 사회적 인식과 군수송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124] 반면 비판 측은 해군의 병식 개량을 통한 각기병 격감 사례를 오가이가 무시하고[126], 코흐 등의 학술적 권위에 의존해 세균설만을 고집하며[127] 결과적으로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상관인 이시구로 다다모토의 잘못된 판단과 조치에 동조하여 문제 해결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28][129]
5. 1. 긍정적 평가
모리 오가이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문예지를 통해 카를 로베르트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미학 이론을 바탕으로 일본에 근대 문학 비평을 도입했으며[16], 문학에서 이상과 이념 등 주관적인 것을 그려야 한다는 이상주의를 내세웠다.[87]
번역가로서 오가이의 활동은 일본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작업한 번역 시집 於母影|오모카게일본어는 메이지 시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1892년부터 1901년에 걸쳐 발표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소설 『즉흥시인』 번역은 우아하고 유려한 문체로 당대 문인들을 매료시켰다. 이 책의 영향으로 마사무네 하쿠초와 같은 문학 청년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희곡 번역에도 힘썼으며[90], 오페라 번역[91]과 함께 '교향악(交響楽)', '교향곡(交響曲)'과 같은 일본식 한자어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하르트만의 『심미학 강령(審美学綱領)』과 같은 미학 서적을 번역하며 단순한 번역가를 넘어 일본 근대 미학의 발전에 기여했다.[93]
오가이는 문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의 촉탁 교원으로서 미술 해부학, 심미학, 서양 미술사를 가르쳤고, 게이오기주쿠에서 심미학 강사로 활동했으며, 초기 분텐 서양화 부문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94]
1916년 군의총감에서 물러난 후에는 문화 행정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7년 궁내성 소속의 제실박물관(현 도쿄 국립박물관) 총장 겸 도서관장(도서두)으로 임명되었고[81], 1918년에는 제국미술원(현 일본예술원)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94] 도서두로 재직하며 천황의 시호와 연호 제정 연구에도 관여하여 『제시고(帝諡考)』를 간행했다.[83] 말년에는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시부에 추사이』(渋江抽斎, 1916)와 같은 역사 전기(史伝) 작품을 연재하며[16] 일본 근대 전기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오가이는 폭넓은 지식과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했다. 특정 문파를 만들지 않고 서양식 살롱과 같은 개방적인 분위기를 선호했으며[95], 자택(관조루(観潮楼))에서 정기적으로 가회(歌会, 와카 모임)를 열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이어진 관조루 가회에는 요사노 뎃칸의 신시사(新詩社) 계열과 마사오카 시키의 네기시(根岸) 파의 대표 가인들이 함께 참여했다. 이토 사치오, 우에다 빈, 사사키 노부쓰나 등 기존 문인뿐만 아니라 기타하라 하쿠슈, 요시이 이사무,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노시타 모쿠타로, 사이토 모키치 등 신진 가인들도 참여하여 교류의 폭을 넓혔다.[96]
특히 당시에 드물게 여성 문인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교류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히구치 이치요를 일찍이 격찬했으며, 요사노 아키코, 히라쓰카 라이초 등 새로운 여성상으로 주목받던 인물들과도 교류하며 그들의 활동을 지지했다.[97] 그의 작품 중에는 「안이 부인(安井夫人)」, 희곡 「시즈카(静)」, 「하나코(花子)」, 번역 희곡 「노라(ノラ)」(헨리크 입센 작 「인형의 집」)처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작품도 다수 있다.
5. 2. 부정적 평가
모리 오가이는 문학 및 의학 분야에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898년(메이지 31년) 7월 9일자 『만조보(万朝報)』의 연재 기사 「폐풍일반 축첩의 실례(弊風一斑 蓄妾の実例)」를 통해 코다마 세키(児玉せき)와의 관계가 드러나 사생활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60] 이듬해인 1899년(메이지 32년)에는 군의감(軍医監, 소장 상당)으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고쿠라(小倉)의 제12사단(第12師団) 군의부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좌천"[61]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문학 작품과 관련해서도 논란을 겪었다. 1909년 발표한 소설 『비타 섹슈알리스(Vita Sexualis)』는 내용이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공공도덕에 해롭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발매 한 달 만에 금서로 지정되는 일을 겪었다.[11] 이는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작품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1910년 대역죄 사건(High Treason Incident)으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 암살 혐의로 재판 없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가이는 엘리트 군의관으로서 정부의 입장에 서 있었다.[7] 그는 정부의 사상 및 학문 억압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며 "침묵의 탑(Chinmoku no to)"[183]이나 표트르 크로폿킨과 무정부주의 등을 다룬 "식당(Shokudo)"[7][183]과 같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던 시기에 그의 지위와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우려 표명은 결과적으로 탄압을 막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6. 가족 및 친족
모리 오가이의 집안은 이와미국 쓰와노번에서 대대로 번주(藩主)를 섬긴 의사 가문이었다. 의사 가문이었던 모리(森) 집안은 1650년경(게이안 연간)부터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번의(藩醫) 모리 시즈야스(森静泰, 또는 静男라고도 표기)이며, 어머니는 미네코(峰子)이다.[178] 아버지 시즈야스는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 기타센주(北千住)에서 병원을 개업했고, 한때 도쿄부 아다치구 센주(千住) 지역의 군의(郡醫)를 지냈다.[155] 오가이에게는 남동생 아쓰지로(篤次郎), 준사부로(潤三郎)와 여동생 고가네이 키미코가 있었다.
오가이는 두 번 결혼했다.
- 첫 번째 부인은 해군 중장 아카마쓰 노리요시의 딸 아카마쓰 도시코(赤松登志子, 1871-1900)이다. 1889년 친척이자 계몽사상가인 니시 아마네의 주선으로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이혼했다.[156][157] 도시코는 오가이와 별거 후 다른 이와 재혼했으나 1900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 장남 모리 오토(1890-1967)는 의학자로 타이완의 타이베이 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등을 지냈다.
- 두 번째 부인은 대심원 판사 아라키 히로오미(荒木博臣)의 딸 모리 시게(荒木志げ, 1880-1936)이다. 1902년 결혼했으며, 시게 또한 재혼이었다.[158] 시게는 소설 『파란(波瀾)』을 집필했고, 시누이인 고가네이 키미코와 함께 잡지 『세이토』의 찬조 회원이었다.
- 장녀 모리 마리(1903-1987)는 수필가이자 소설가로, 아버지에 대한 글 『아버지의 모자』[159] 등으로 알려져 있다.
- 차녀 고보리 안누(1909-1998)는 수필가로, 『만년의 아버지』[160] 등의 책을 썼다.
- 차남 후리쓰(不律, 1911-1914)는 요절했다.
- 삼남 모리 루이(1916-1993)는 수필가였다.
오가이가 자녀들에게 당시로서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준 것은, 자신의 본명 '린타로(林太郎)'가 외국인에게 발음하기 어렵다는 경험 때문에 세계적으로 통용될 이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녀 마리의 아들인 손자 야마다 쟈쿠(山田𣝣)의 이름도 오가이가 지었다.[161]
오가이의 형제자매와 친척 중에서도 문학 및 학술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많다.
- 남동생 아쓰지로(篤次郎, 1868-1908)는 미키 타케지(三木竹二)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연극 평론가이자 내과 의사였다. 연극 잡지 『가부키』를 주재하며 가부키 비평의 객관적 기준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 남동생 준사부로(潤三郎, 1870-1938)는 서지학자로, 모리 준사부로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역사에도 정통하여 1904년 『조선연표』를 출판했고, 형 오가이의 전기 『오가이 모리 린타로』(鷗外森林太郎)를 집필하기도 했다.
- 여동생 고가네이 키미코(1870-1956)는 번역가, 수필가, 가인으로 활동하며 메이지 시대 여성 문인으로 알려졌다. 『오가이의 추억』, 『모리 오가이의 가족』 등의 책을 남겼다.
- 매제 고가네이 요시키요(1859-1944)는 키미코의 남편으로, 오가이보다 1년 먼저 독일에 유학한 의학자이다.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교수와 의과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163] 소설가 호시 신이치는 고가네이 부부의 손자이다.
- 친척 니시 아마네(1829-1897)는 오가이 증조부의 차남 후손으로, 막말과 메이지 유신 시기의 중요한 서양 법학자이자 계몽사상가이다. 오가이가 도쿄로 상경했을 때 잠시 그의 집에서 머물며 신문학사(進文学社)로 통학했다.
또한 오가이에게는 18, 19세 무렵부터 총애했던 외실(外室) 코다마 세키(児玉せき)가 있었다.[162]
7. 모리 오가이를 소재로 한 작품
- 『아베 일족』(1938), 구마가이 히사토라 감독
- 『야생의 기러기』(1953), 도요다 시로 감독
- 『산쇼 대사』(1954), 미조구치 겐지 감독. 모리 오가이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일본 영화사의 이정표로 여겨진다.[20] [21]
- 『아베 일족』(1995), 후카사쿠 킨지 감독
- 가을의 무희 - 『「마음씨 좋은 소년」의 시대』의 제2부. 『무희』 집필과 관련된 독일 여성과의 연애가 그려진다.
- 문호 스트레이 독스 - 같은 이름의 등장인물이 나오며, 모리 오가이의 일화와 작품에서 착안한 설정이 사용된다.
8. 기타
평소 문인으로서의 자신과 군의관으로서의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생각했다. 어느 날, 문단의 친한 친구가 군복 차림으로 역에 서 있는 오가이를 보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자 그 친구에게 고함을 지른 적이 있다. 군의관이자 군인임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딸 쿄누와 산책 중 아이들이 "와, 중장이 걷고 있다!"라며 달려왔다가 그의 군의관 계급장을 보고 "어이, 뭐야, 군의관이잖아!"라고 소리치며 흩어져 버린 일에는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 당시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군인의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오가이를 "아빠", 아내 모시코를 "엄마"라고 불렀다.
세균학, 위생학을 연구한 이후 파스퇴르처럼 결벽증 성향을 보이게 되어, 과일 등의 음식도 익히지 않고는 먹지 못했다. 삶아서 설탕을 뿌린 과일을 좋아했으며, 식탁에는 복숭아, 살구, 매실 등이 자주 올랐다. 목욕은 물 낭비 또는 세균의 온상으로 여겨 싫어했고, 대신 대야 앞에서 하루 두 번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이 일과였다. 그의 아들 오토는 『아버지로서의 모리 오가이』에서 "아버지는 이 때문에 물이 부족한 전장에서도 곤란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술을 마시지 못했고, 단맛을 매우 좋아했다. 단팥빵이나 "소독이 되어 있고 영양이 풍부하다"는 이유로 구운 고구마를 즐겨 먹었다.[173] "만두의 말차"라는 독특한 요리를 좋아했는데, 밥 위에 4등분한 만두를 올리고 차를 부어 섞어 먹는 방식으로, "담백하고 세련된 단맛"으로 묘사된다.[174] 앙금을 좋아해 팥죽도 먹었으며, 기무라야의 단팥빵도 좋아했다. 황궁에서 디저트로 나온 캐러멜이나 초콜릿 등을 군복에 숨겨와 아이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가지 요리도 매우 좋아하여, 된장국, 조림, 구이, 절임 등 가지로만 구성된 식단에도 만족했다고 한다.[175]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요리는 "달걀을 흐물흐물하게 부드럽게 삶는 것"으로,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만들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넣어 냄새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교 없는 요리"를 좋아했다.[176]
기노시타 모쿠타로는 오가이를 "테베 백문의 대도시"에 비유하며, "문학과 자연과학, 일한의 고전과 서양의 신사조, 예술적인 감흥과 순리적인 성실함이 모두 복잡한 조화의 양극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모리 오가이와 교류했거나 관련이 있는 주요 인물들이다.
인물 | 관계 및 일화 |
---|---|
이노우에 미치야스 | 『어머니의 그림자(於母影)』 공역자, 가회상반회(歌会常磐会) 창설 멤버 |
우에다 빈 | 잡지 『예문(芸文)』, 『만년초(万年艸)』 공동 창간 등 교류 |
기노시타 모쿠타로 | 의학생 시절 진로 상담, 오가이를 깊이 이해함 |
구로다 세이키 | 도쿄미술학교 후배 교원, 하라다 나오지로 전람회 발기인 요청 |
사사키 노부쓰나 | 『깨우는 풀(めさまし草)』에 시 발표, 오랜 기간 교류 |
다자이 오사무 | 오가이 묘소 맞은편에 안장됨 (젠린지) |
다야마 가타이 | 오가이의 미학에 영향받음 |
나가이 가후 | 오가이 추천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취임 |
나카무라 후세쓰 | 오가이 자택 및 별장 현판, 묘비명 작성 |
하기와라 산케이 |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유학생 |
하라다 나오지로 | 독일 유학 시절 친구 |
요시다 마스조 | 말년에 연호, 칙어, 황족 이름 등에 관한 자문 및 유저 『연호고(元号考)』 보완 완성 |
나쓰메 소세키 | 저서 교환 등 교류, 1910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직 제안(소세키 사퇴), 장례식 참석 |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 도쿄대학 후배, 독일 유학 중 로베르트 코흐 문하 입문에 도움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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鷗外誕生の前年、祖父の白仙が東海道の土山宿で病死したため、特に祖母は鷗外を白仙の生まれ変わりといって喜び、後年、鷗外が留学と出征から無事帰国する度に、はらはらと涙を落としたという(小金井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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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川ら (1997a)、15頁。同書は、学生、作家、軍医、家庭人の側面から、鷗外の実像に迫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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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イツ人教員がいて生徒の1割強が華族の身分。当時の父親の収入を踏まえると、西周が学費も世話をしたという説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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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制高等学校に相当。本科を含めて現在の東京大学医学部の前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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数え年12歳。この時に数え年の12歳に2歳多く偽り14歳であり、数え年を含まない場合は、13歳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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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7年度は15歳以下の入学が見合わされており、明治8年度は入学年齢制限が16 - 20歳に引き上げられた。平川ら (1997a)、129–13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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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川ら (1997a)、129–13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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