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87–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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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87–1889년)은 이탈리아 왕국이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시도와 에티오피아 제국의 저항으로 발생한 전쟁이다. 이탈리아는 1869년 아사브 만을 구매하며 아프리카 진출을 시작했고, 수에즈 운하 개통과 맞물려 홍해 연안을 탐냈다. 1885년 마사와를 점령하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고, 사아티 공방전과 도갈리 전투를 거치며 전쟁이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1889년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선포하고, 므네리크 2세와의 우찰레 조약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일부 영토를 할양받았다. 이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확보했지만, 에티오피아는 독립을 유지하며 민족주의 의식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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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87–18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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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887–1889) |
다른 명칭 | 에리트레아 전쟁 |
전쟁 시기 | 1887년 1월 24일 – 1889년 5월 2일 |
위치 | 메레브 멜라시, 에티오피아 제국 (현재의 에리트레아) |
명분 | 불명 |
전쟁 결과 | 이탈리아의 승리 |
조약 | 우찰레 조약 |
영토 변화 |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설립 |
관련 전쟁 |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전쟁의 부분 | 아프리카 분할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이탈리아 왕국 | A. A. 디 산 마르차노 탄크레디 살레타 안토니오 발디세라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
에티오피아 제국 | 요한네스 4세 라스 알룰라 라스 멩게샤 라스 미카엘 |
병력 규모 | |
이탈리아 | 25,000명 |
에티오피아 | 125,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이탈리아 | 6,000명 이상 사망 |
에티오피아 | 6,500명 이상 사망 |
2. 배경
1880년대, 아프리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품은 이탈리아 왕국은 열강의 식민지화를 벗어난 에티오피아 제국과 대립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 및 이집트와의 관련으로 에티오피아의 홍해 연안부를 탐낸 이탈리아는 민간 회사(나중에 국영화)를 통해 대규모 토지 매입을 진행하고 이주를 시작했다. 1885년 2월,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는 이에 반발하여 군대 동원을 시작했고, 이탈리아 왕국도 마사와 등 몇몇 도시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유럽에서는 도갈리의 학살[2] 등 수년간의 분쟁 및 소규모 전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연안부의 실질적인 지배를 시작했다.
1890년, 에티오피아에서 요하네스 4세의 의붓 여동생의 아들 멩게샤 요하네스와 쇼아의 왕 메넬리크 2세 사이에서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무기 지원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왕이 된 메넬리크는 정식으로 강화 조약(우찰리 조약)에 서명하여 홍해 연안부를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로 할양했다.
2. 1.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진출
1869년 11월 15일, 주세페 사페토는 루바티노 해운 회사를 대신하여 이브라힘과 하산 벤 아흐메드 형제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 6,000개에 아사브 만을 구입했다.[1] 이틀 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후 술탄 압드 알라 사힘이 8,350 탈러에 거래를 완료했다. 1870년 3월 11일, 사페토는 같은 형제와 술탄에게서 부야 만을 구입했다.[2] 하지만 1870년 4월 15일부터 1879년 12월까지 아사브는 사용되지 않았다. 회사는 이탈리아 정부에 아사브를 제안했고, 1882년 7월 5일 이탈리아 정부는 이곳을 이탈리아 최초의 식민지로 선포했다.마흐디 반란으로 이집트 헤디브국이 마사와 주둔군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의 승인 하에 탄크레디 살레타 대령이 지휘하는 이탈리아의 ''코르포 스페치알레 페르 아프리카''가 1885년 2월 5일 마사와를 점령했다. 1880년대, 아프리카에 영토적 야심을 품은 이탈리아 왕국은 열강의 식민지화를 벗어난 에티오피아 제국과 대립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 및 이집트와의 관련으로 에티오피아의 홍해 연안부를 탐낸 이탈리아는 민간 회사를 통해 대규모 토지 매입을 진행하고 이주를 시작했다. 1885년 2월,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는 이에 반발하여 군대를 동원했고, 이탈리아 왕국도 마사와 등 몇몇 도시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3. 전개 과정
1880년대, 이탈리아 왕국은 아프리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품고 열강의 식민지화를 벗어난 에티오피아 제국과 대립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 및 이집트와의 관계로 에티오피아의 홍해 연안을 탐낸 이탈리아는 민간 회사를 통해 토지를 매입하고 이주를 시작했다. 1885년 2월,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는 이에 반발하여 군대를 동원했고, 이탈리아도 마사와 등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이후 수년간의 분쟁 끝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연안 지역을 지배했다.[2]
1890년, 에티오피아에서 요하네스 4세의 의붓 여동생의 아들 멩게샤 요하네스와 쇼아의 왕 메넬리크 2세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무기 지원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한 메넬리크 2세는 우찰리 조약을 체결하여 홍해 연안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로 할양했다.
3. 1. 사아티 공방전과 도갈리 전투
1887년 1월 24일 또는 25일, ''라스'' 알룰라가 이끄는 에티오피아군은 사아티에 있는 이탈리아 요새를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은 적은 사상자만 발생했지만, 에티오피아군은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2] 1월 26일, 약 15,000명의 에티오피아군은 사아티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이탈리아 대대를 매복 공격하여 마사와 서쪽 약 16.09km 지점인 도갈리에서 거의 전멸시켰다. 도갈리 전투는 근대 에티오피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2]도갈리 전투에 대한 이탈리아 의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탈리아 의회는 마사와 지원군 파병을 위해 500만 리라를 투표했다.
3. 2. 이탈리아의 증원과 셰와와의 동맹
1887년 6월 2일, 이탈리아 의회는 마사와에 파병할 병력, 탄약 및 물품에 를 추가로 투표했다.[1] 그해 여름, 2만 명 규모의 이탈리아 원정군이 마사와에 상륙했다.[2]요하네스 4세가 약화되자 셰와의 메넬리크 2세와 고잠의 테클레 하이마노트 왕이 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요하네스 4세는 1887년 8월 초에 고잠으로 건너가 초토화시켰다.[2] 다음 달, 요하네스 4세는 메넬리크 2세에게 아우사를 통해 아삽과의 통신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메넬리크 2세는 황제와 이탈리아 양측에 중재를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1887년 8월 말, 메넬리크 2세는 요하네스 4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협상하기 위해 이탈리아 외교관 피에트로 안토넬리를 셰와에서 만났다. 이탈리아는 여름 동안 군대를 주둔시킬 내륙 지역의 작은 영토를 요청했다. 안토넬리는 또한 메넬리크 2세에게 도갈리 전투에 대한 보복 원정의 정당성을 설명했다. 9월 19일, 안토넬리는 무기를 대가로 셰와와 중립 조약을 제안했으며, 이 조약의 초안이 남아 있다. 10월 초, 요하네스 4세는 엔토토 산의 셰와 궁정에 있던 셰와의 주교 마테보스에게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결심을 했다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1887년 10월 20일, 메넬리크 2세는 안토넬리와 비밀 조약을 체결하여 무기를 받는 대가로 중립을 보장했다. 6개월 이내에 그는 5,000정의 레밍턴 소총을 받기로 했다. 이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영토를 병합할 의도가 없음을 밝혔다.
3. 3. 알룰라의 군사 작전, 에티오피아군의 사아티 철수 및 우찰레 조약
1887년 9월, 라스 알룰라는 다모트를 티그레이 군대로 침공했다. 알룰라가 부재중인 동안, 티그레이의 족장들은 이탈리아와 접촉했다. 1887년 11월 11일, 카이로 주재 영국 영사 제럴드 포털은 아스마라에서 알룰라를 만났고, 12월 7일 아샹기 호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요하네스를 만나 황제에게 영국 정부가 사티에 대한 공격이 "부당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2] 요하네스는 이탈리아에게 양보하지 않고 "그들이 사티 없이는 [마사와]에서 살 수 없다면, 그들이 떠나게 하라."라고 말했다.[2]1888년 1월, 이탈리아군은 두 개 여단을 도갈리로 이동시켰고, 요하네스는 전쟁을 위해 동원했다.[2] 1888년 2월 1일,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의 저항 없이 사티 요새를 재점령했다. 3월에 요하네스의 군대가 사티 요새에 도착하여 이탈리아군과 대치했지만, 질병으로 큰 피해를 입고 서부에서 마아디스트의 침공 위협에 직면하여 4월 초에 사티를 포기하고 요새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었다.
1889년 초, 이탈리아 장군 오레스테 바라티에리는 에리트레아 해안을 따라 고지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라는 새로운 식민지를 선포했다.[1] 1889년 5월 2일,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는 우찰레 조약을 체결하여 보고스,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및 세라이에 대한 이탈리아 점령을 인정했다.[1] 이는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추가 확장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탈리아의 합병을 막는 데는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4. 결과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탈리아는 사아티에서 7명, 도갈리에서 430명이 사망하는 등 전체적으로 1,000명이 사망했다.[2] 에티오피아는 더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이는데, 사아티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고, 도갈리에서만 730명에서 1,071명이 사망했다.[2]
이탈리아는 도갈리의 학살 등 수년간의 분쟁 및 소규모 전투를 통해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홍해 연안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시작했다. 1890년, 에티오피아에서 멩게샤 요하네스와 메넬리크 2세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무기 지원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황제가 된 메넬리크 2세는 우찰리 조약을 체결하여 홍해 연안 지역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로 할양했다.
5. 영향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간의 전쟁은 양국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1880년대, 아프리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품은 이탈리아 왕국은 열강의 식민지화를 벗어난 에티오피아 제국과 대립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 및 이집트와의 관련으로 에티오피아의 홍해 연안부를 탐낸 이탈리아는 민간 회사를 통해 토지 매입을 진행하고 이주를 시작했다. 1885년 2월,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는 군대를 동원했고, 이탈리아 왕국도 마사와 등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Battaglia di Dogali 등 수년간의 분쟁을 거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연안부 지배를 시작했다.[2]
에티오피아1890년, 에티오피아에서는 요하네스 4세의 의붓 여동생의 아들 멩게샤 요하네스와 쇼아의 왕 메넬리크 2세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무기 지원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왕이 된 메넬리크 2세는 정식으로 강화 조약(우찰리 조약)에 서명하여 홍해 연안부를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로 할양했다.[2]
5. 1. 이탈리아
1880년대, 아프리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품은 이탈리아 왕국은 열강의 식민지화를 벗어난 에티오피아 제국과 급격히 대립했다. 이미 수에즈 운하 개통 및 이집트와의 관련으로 에티오피아의 홍해 연안부를 탐낸 이탈리아는 민간 회사를 통해 대규모 토지 매입을 진행하고 이주를 시작했다. 1885년 2월,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는 이에 반발하여 군대 동원을 시작했고, 이탈리아 왕국도 마사와 등 몇몇 도시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유럽에서는 도갈리의 학살로 불리는[2] Battaglia di Dogali 등 수년간의 분쟁 및 소규모 전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연안부의 실질적인 지배를 시작했다.1890년, 에티오피아에서 요하네스 4세의 의붓 여동생의 아들 멩게샤 요하네스와 쇼아의 왕 메넬리크 2세 사이에서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무기 지원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왕이 된 메넬리크는 정식으로 강화 조약(우찰리 조약)에 서명하여 홍해 연안부를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로 할양했다.
5. 2. 에티오피아
1890년, 에티오피아에서는 요하네스 4세의 의붓 여동생의 아들 멩게샤 요하네스와 쇼아의 왕 메넬리크 2세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의 무기 지원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왕이 된 메넬리크 2세는 정식으로 강화 조약(우찰리 조약)에 서명하여 홍해 연안부를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로 할양했다.[2]참조
[1]
서적
Abyssinia
EB1911
[2]
서적
二つの黒人帝国
東京大学出版会
198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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