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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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는 1889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로부터 할양받아 식민지화한 지역이다.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식민지 확장 및 동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철도, 도로 등 인프라를 건설하고,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일부로 편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식민 통치가 종식되었고, 이후 영국 군정을 거쳐 에티오피아와의 연방 형태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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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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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에리트레아 식민지 |
이탈리아어 명칭 | Colonia Eritrea |
일반 언어 | 이탈리아어 (공식어) 이탈리아-에리트레아어 티그리냐어 티그레어 쿠나마어 나라어 사호어 빌렌어 헤자즈 아랍어 |
표어 | Per l'onore d'Italia (이탈리아의 명예를 위하여) |
국가 | Marcia Reale d'Ordinanza (왕의 행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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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이탈리아의 식민지 |
수도 | 아스마라 |
국왕 | 움베르토 1세 (1882년–1900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00년–1936년) |
총독 | 발다사레 오레로 (1890년, 첫 번째) 피에트로 바돌리오 (1935년–1936년, 마지막) |
역사 | |
주요 사건 | 아사브 구매 (1869년 11월 15일) 정부 통제 시작 (1882년 7월 5일) 에리트레아로 확장 (1885년 2월 5일) 우찰레 조약 (1889년 5월 2일) 에리트레아 식민지 설립 (1890년 1월 1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일부 (1936년 6월 1일) 영국 점령 (1941년 5월 19일) 이탈리아의 포기 (1947년 2월 10일) 영국 점령 종료 (1952년 9월 15일) |
통화 | |
통화 | 에리트레아 탈레로 (1890년–1921년) 이탈리아 리라 (1921년–1936년) |
종교 | |
종교 | 가톨릭교 동방 정교 이슬람교 |
현재 | |
현재 국가 | 에리트레아 |
2. 역사
1889년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은 메넬리크 2세가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로 즉위한 후, 1890년 에티오피아와의 조약을 통해 에리트레아 지역을 할양받아 첫 식민지를 확보했다. 이탈리아는 이곳에 공장과 군대를 배치하며 식민 경영의 기반을 다졌다. 1891년에는 영국령 소말릴란드 일부를 점령하여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5년, 추가적인 식민지 확장을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가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며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 패배를 만회하고자 군사력을 증강한 이탈리아는 1911년 오스만 제국과의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서 승리하여 트리폴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영토를 획득했다.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는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고,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정복했다. 에티오피아 정복 후 1936년, 무솔리니는 기존의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 식민지와 에티오피아를 통합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선포했고,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는 이 새로운 행정 구역의 일부가 되었다.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이후 역사는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영국 군정기를 맞이하고, 결국 에티오피아에 편입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2. 1. 식민지 이전의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지역은 고대 푼트(기원전 2500–980년경), 드모트 왕국(기원전 980–400년경), 악숨 왕국(기원전 150년경–서기 960년경) 등 다양한 왕국과 세력들이 존재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 이후에는 달락 술탄국(960–1557년), 자그웨 왕조(1137–1270년경), 에티오피아 제국(1270–1974년), 단칼리 술탄국(13세기 후반–18세기경), 아우사 술탄국(1734–1936년) 등의 영향을 받았다.16세기 중반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진출하여 하베쉬 아이알렛을 설치(1554–1872년)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세기에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던 이집트가 홍해 서해안 대부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2][36] 그러나 19세기 후반 에티오피아-이집트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하고, 수단 지역에서 마흐디 봉기가 성공하면서 이집트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세력 공백 상황 속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의 요하네스 4세 황제는 영국과의 휴엣 조약(1884년)을 통해 보고스 지역(현재 에리트레아 고지)과 마사와 항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에티오피아가 수단에서 이집트 주둔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돕는 대가였다.[4][38] 하지만 영국 외교관들은 타주라 만을 따라 세력을 확장하는 프랑스 식민지를 견제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와의 조약을 사실상 무시하고, 이탈리아가 마사와를 점령하도록 공공연하게 독려했다. 이탈리아는 이집트군으로부터 별다른 저항 없이 마사와를 점령했으며,[39] 이는 이후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지 건설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2.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진출과 에리트레아 식민지화


이탈리아의 홍해 진출 초기 역사를 이끈 인물은 주세페 사페토(Giuseppe Sapeto)였다. 젊은 수사 시절 카이로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으로 파견되었던 그는 이후 유럽 세력의 아프리카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진출을 도왔으나, 1866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삼았다. 수에즈 운하 완공이 임박하자, 그는 홍해 연안에 이탈리아 증기선을 위한 석탄 보급소 및 기항지 건설을 구상하고 이탈리아 외무부 장관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설득했다.
1869년 가을, 사페토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홍해로 파견되어 적합한 항구를 물색하고 매입을 준비했다. 그는 아사브 만의 다나킬 부족 추장들에게 소액의 보증금을 주고 영토 매각 약속을 받아냈다. 동시에 이탈리아 정부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로 향하는 증기선 노선을 계획하던 라파엘레 루바티노의 해운 회사와 접촉했다. 루바티노 회사가 회사 명의와 자금으로 영토를 매입하되, 이탈리아의 국익을 위해 사용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사페토는 회사를 대신하여 아사브 만 북쪽 끝과 그 남쪽 지역의 토지 매입을 완료했다.[1] 이로써 1870년 3월, 이탈리아 해운 회사는 아사브 만 북단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케디브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2] 이탈리아인이 실제로 정착한 것은 1880년 이후였다.[3] 1882년, 이탈리아 정부는 루바티노 회사로부터 아사브 지역을 공식적으로 인수하여 식민지 경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홍해 서해안 대부분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이집트 케디브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에티오피아-이집트 전쟁에서의 이집트 패배와 수단에서의 마흐디 봉기 성공으로 지역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1884년, 영국은 휴엣 조약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요하네스 4세 황제가 수단 주둔군 철수를 돕는 대가로 보고스 지역과 마사와 항구 접근권을 약속했다.[4]
하지만 영국은 타주라만을 따라 세력을 확장하는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와의 조약을 무시하고, 이탈리아가 이집트 철수로 공백이 생긴 마사와를 점령하도록 부추겼다. 1885년, 이탈리아는 큰 저항 없이 마사와를 점령했다.[5] 진주 어장으로 둘러싸인[11] 이 항구는 요새화되어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초기 수도가 되었다.[5] 한편 아사브는 석탄 보급소로서 계속 사용되었다.[6] 이탈리아는 휴엣 조약 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무기 수송을 제한하고 에티오피아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1889년, 에티오피아 황제 요하네스 4세가 갈라밧 전투에서 사망하자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틈을 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에리트레아 해안을 따라 고원 지대를 점령했고, 이탈리아는 수도를 마사와에서 아스마라로 옮겼다.
같은 해, 이탈리아는 쇼아 왕국의 메넬리크 2세와 우찰레 조약(이탈리아어: Uccialli)을 체결했다. 이탈리아는 메넬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과 유럽제 무기 및 탄약 공급을 약속하는 대가로, 그의 경쟁자들이 지배하던 보고스,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세라에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의 점령을 인정받았다. 이후 메넬리크 2세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재위 1889–1913년)하면서 이 조약은 에티오피아 전체에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약 체결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우찰레 조약의 이탈리아어 판본에는 에티오피아가 외교 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이탈리아를 거치도록 규정하여 사실상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항이 있었으나, 암하라어 판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었다.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의 기만적인 조약 해석에 반발하며 조약 파기를 선언했고, 이는 훗날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 이탈리아는 점령 지역을 통합하여 에리트레아(홍해를 뜻하는 라틴어 Erythraea에서 유래)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공식 선포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 첫 식민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2. 3. 식민지 통치와 발전







이탈리아 정부는 새로 획득한 식민지 에리트레아를 개발하기 위해 1880년대 후반부터 첫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에리트레아 철도는 1888년 사티까지 완공되었고[12][46], 1911년에는 고원 지대의 수도 아스마라까지 연결되었다.[13][47] 또한 아스마라와 항구 도시 마사와를 잇는 아스마라-마사와 케이블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노선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군에 의해 전쟁 배상으로 해체되었다.
이탈리아 식민 통치는 에리트레아 사회의 의료 및 농업 부문에 일부 개선을 이루었다. 비록 인종 차별법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지역의 에리트레아인은 모두 현대적인 위생 및 병원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또한 에리트레아인들을 공무, 특히 경찰 및 공공 사업 부서에서 고용하여 식민 통치에 협력하도록 유도했다.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 총독들은 상당한 수준의 통합과 공공 질서를 유지했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다른 식민지였던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나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되었고, 더 많은 이탈리아 이민자를 자랑하여 '콜로니아 프리모제니타'("장녀 식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14][48] 20세기 초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으로 최초의 수십 가구가 아스마라와 마사와 주변에 정착한 이후, 이탈리아-에리트레아 공동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약 4,000명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거의 100,000명으로 성장했다.[15][49] 이탈리아는 이슬람 신봉을 용인하는 한편, 에리트레아에서 가톨릭교의 거대한 확장을 지지했으며, 수도의 로사리오의 성모 교회를 중심으로 아스마라와 케렌 주변의 고원 지대에 많은 교회를 건설했다. 1940년대 초까지 가톨릭교는 식민지 인구의 약 28%가 선언한 종교였으며, 기독교는 에리트레아인의 절반 이상이 믿는 종교였다.[16][17][50][51]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에리트레아의 식민 정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 두체''가 1936년 5월 이탈리아 제국의 탄생을 선언한 후,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북부 지역으로 확장)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새롭게 정복한 에티오피아와 함께 새로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frica Orientale Italiana'') 행정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 파시스트 시대는 "새로운 로마 제국"을 내세운 제국주의 확장의 특징을 지녔다.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산업 중심지로 선택되었다:[18][52]
에리트레아의 수도는 인구가 급증했다. 역사가 잔 루카 포데스타는 "사실상 아스마라는 이탈리아 도시가 되었다"(in pratica Asmara era diventata una citta' italianaita)라고 썼다.[20][54] 이탈리아 정부는 농업 개혁을 계속 추진했지만, 주로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가 소유한 농장에 국한되었다 (1930년대에 커피 수출이 급증했다). 1940년 아스마라 지역에는 2,00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있었으며, 이들은 건설, 기계, 섬유, 식품 가공 및 전력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1939년 에리트레아의 생활 수준은 현지 에리트레아인과 이탈리아 정착민 모두에게 대륙 최고 수준으로 여겨졌다.[21][55]
무솔리니 정부는 이 식민지를 미래 확장의 전략적 기지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통치했으며, 에리트레아를 1935~1936년 에티오피아 정복 및 식민지화 캠페인의 기지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사용하여 수단을 공격하고 카살라 지역을 점령했다. 실제로 최고의 이탈리아 식민군대는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으며, 이탈리아 원수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전설적인 장교 아메데오 길레가 그렇게 말했다.[22][56]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아스카리와의 복무는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원주민 남성 인구의 주요 유급 고용원이 되었다. 1936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으로 요구된 확산 과정에서 자격 있는 에리트레아인의 40%가 이 식민군에 등록되었다.[23][57]
1939년 이탈리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시의 인구는 98,000명이었고, 이 중 53,000명(54.0%)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아스마라는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제국의 주요 "이탈리아 도시"가 되었다. 또한 도시의 이탈리아 건축물 때문에 아스마라는 ''피콜라 로마'' (작은 로마)라고 불렸다.[24][58] 그 해 에리트레아 전체 이탈리아인의 수는 75,000명이었다.[25][59]
아스마라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로마보다 많은 신호등을 갖추고 있어 예외적으로 현대적인 도시로 알려졌다. 이 도시에는 계획 도시의 많은 특징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아스마라는 건축가들이 만든 이상적인 현대 도시의 초기 사례였으며, 이는 브라질리아와 같이 전 세계의 많은 도시에 도입되었지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특징으로는 지정된 도시 구역 설정 및 계획, 넓은 가로수길, 정치적 지역 및 지구, 개발을 위한 공간 및 범위가 있다. 그러나 아스마라는 에리트레아인을 위해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주로 자신들을 위해 건설했으며, 도시를 자체 자동차 경주(아스마라 서킷)까지 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도시로 만들었다.
이 도시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넓은 거리, 광장, 커피 바 때문에 전형적인 이탈리아적 감각을 지닌 "새로운 로마"로 여겨져 왔다. 대로에는 야자수와 토착 ''시바'카'' 나무가 늘어서 있고, 피자리아와 커피 바가 많아 카푸치노와 라떼를 제공하며,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
아스마라 및 마사와 지역에 많은 산업 투자가 이탈리아인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으로 에리트레아의 산업화가 멈췄다.[26][60]
2. 4.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1889년 이탈리아가 지지하던 메넬리크 2세가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자, 이탈리아는 그와 협상을 통해 1890년 우찰레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 지역을 이탈리아에 할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895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여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은 아드와 전투 등에서 에티오피아군에게 크게 패배하여 에티오피아 점령에 실패하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탈리아는 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군대를 증강했으며, 식민지 주민들까지 징집하여 군 규모를 늘렸다.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에리트레아 식민 정부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무솔리니는 파시즘 이념 아래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을 드러냈다. 1935년, 이탈리아는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여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고, 현대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비교적 쉽게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에티오피아 정복 이후, 1936년 5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제국의 탄생을 선언하며, 기존의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그리고 새롭게 정복한 에티오피아를 통합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Africa Orientale Italiana|아프리카 오리엔탈레 이탈리아나it, AOI)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선포했다. 이 파시스트 시대는 "새로운 로마 제국"을 표방하며 제국주의적 확장을 추구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내에서 에리트레아는 산업 중심지로 지정되었다.[52] 이탈리아 정부는 에리트레아에 새로운 교통 및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고 공장 설립을 장려했다. 이 공장들은 단추, 식용유, 파스타, 건축 자재, 포장 육류, 담배, 가죽 등 다양한 소비재를 생산했다. 1939년에는 약 2,198개의 공장이 운영되었으며, 대부분의 직원은 에리트레아인이었다.[53] 산업 발전은 도시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수도 아스마라의 인구는 급증하여, 1935년 이탈리아인 4,000명과 에리트레아인 12,000명에서 1938년에는 이탈리아인 48,000명과 에리트레아인 36,0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역사가 잔 루카 포데스타는 "사실상 아스마라는 이탈리아 도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54] 1939년 이탈리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 인구 98,000명 중 53,000명(54%)이 이탈리아인이었으며, 이탈리아풍 건축물과 함께 아스마라는 아프리카 내 이탈리아 제국의 주요 "이탈리아 도시"이자 "피콜라 로마"(작은 로마)로 불렸다.[58] 같은 해 에리트레아 전체의 이탈리아인 수는 75,000명에 달했다.[59]
연도 | 이탈리아인 | 에리트레아인 | 총 인구 |
---|---|---|---|
1935년 | 4,000명 | 12,000명 | 16,000명 |
1938년 | 48,000명 | 36,000명 | 84,000명 |
1939년 | 53,000명 | 45,000명 | 98,000명 |
이탈리아 정부는 농업 개혁도 추진했지만, 주로 이탈리아 식민지 개척자들이 소유한 농장에 혜택이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 에리트레아의 생활 수준은 현지 에리트레아인과 이탈리아 정착민 모두에게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로 여겨졌다.[55] 아스마라는 현대적인 도시 계획 아래 넓은 가로수길, 광장, 정치 구역 등이 조성되었으며, 로마보다 많은 신호등을 갖출 정도로 현대적인 도시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에리트레아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도시는 피자리아, 커피 바, 아이스크림 가게 등이 늘어선 전형적인 이탈리아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심지어 자체 자동차 경주(Asmara circuit|아스마라 서킷영어)까지 개최되었다.
무솔리니 정권은 에리트레아를 미래 확장을 위한 전략적 기지로 간주했으며, 실제로 1935-1936년 에티오피아 침략 당시 주요 거점으로 활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발판 삼아 수단을 공격하고 카살라 지역을 점령했다. 이탈리아 식민군 중 가장 우수한 병력으로 평가받았던 것은 에리트레아 아스카리였으며,[56] 1936년 에티오피아 침공 당시에는 에리트레아 남성 인구의 40%가 이 식민군에 징집될 정도였다.[57]
아스마라와 마사와를 중심으로 많은 산업 투자가 이루어졌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에리트레아의 산업화는 중단되었다.[60]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식민 통치의 종식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중동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동아프리카 전역이 진행되면서 전세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1941년 1월, 영국군은 에리트레아를 점령했고, 이로써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에리트레아의 주요 기반 시설과 공업 지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아있던 시설들(예: 아스마라-마사와 간 삭도)은 영국군에 의해 전쟁 전리품으로 취급되어 인도나 아프리카의 다른 영국 식민지로 옮겨졌다. 같은 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는 해체되었다.
이탈리아 점령 이후에도 일부 이탈리아 세력은 에리트레아 식민지 부대(아스카리)의 지원을 받으며 Italian guerrilla war in Ethiopia|이탈리아의 게릴라전영어을 벌였으나,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이마저도 종결되었다. 대표적인 에리트레아 출신 아스카리로는 훗날 에리트레아 독립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Hamid Idris Awate|하미드 이드리 아와테영어가 있다.
이탈리아의 패전 이후 에리트레아는 영국 군정 하에 놓였다. 전쟁이 끝나자 에리트레아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들은 대거 에리트레아를 떠나기 시작했다. 1949년 영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의 총인구 127,579명 중 이탈리아계는 17,183명에 불과할 정도로 그 수가 급감했다. 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 중동,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이주했다.
영국 군정기 동안 에리트레아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처음에는 영국을 상대로, 이후 에리트레아를 병합한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격렬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Vincenzo Di Meglio|빈첸초 디 메글리오영어 박사와 같은 일부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들은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시도하며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는 "에리트레아 대표 이탈리아인 위원회"(CRIE), "이탈리아-에리트레아 협회", "베테랑 아스카리 협회" 등의 설립을 지원했다.
1947년에는 Partito Eritrea Pro Italia|샬라 이탈리아 당it이 창설되었다. 이 정당은 주로 전직 이탈리아 군인들과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들로 구성되었으며,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샬라 이탈리아 당은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목표로 했으나, 독립 이전에 최소 15년간 이탈리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창당 한 달 만에 20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평화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모든 식민지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이후 에리트레아는 UN의 결정에 따라 에티오피아와의 연방 구성을 거쳐 결국 에티오피아에 병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인 커뮤니티는 점차 소멸하게 되었다. 영국 군정은 1952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연방이 출범하면서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2. 6. 영국 군정과 에티오피아 편입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아프리카 전역의 일환으로 1941년 1월, 영국군이 에리트레아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가 건설했던 인프라와 공업 지대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남아있던 시설들(예: 아스마라-마사와 간 삭도)은 영국에 의해 전리품으로 취급되어 인도나 아프리카의 다른 영국 식민지로 옮겨졌다. 점령 이후에도 에리트레아 식민지군은 이탈리아를 지원하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게릴라전을 이어갔으며, 여기에는 훗날 에리트레아 독립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하미드 이드리 아와테 등도 참여했다. 이 게릴라전은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에리트레아는 공식적으로 영국의 군정 하에 놓였다. 영국은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에리트레아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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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형태 | 군정 |
통화 | 파운드 |
존속 기간 | 1941년 5월 19일 – 1952년 9월 15일 |
주요 사건 | 국제 연합 감독 하 편입 (1951년 2월 19일)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연방 결성 (1952년 9월 15일) |
행정관 | William Platt|윌리엄 플랫eng (1941–1942) Stephen Hemsley Longrigg|스티븐 헴슬리 롱리그eng (1942–1944) Charles D'Arcy McCarthy|찰스 다르시 매카시eng (1944–1945) John Meredith Benoy|존 메러디스 베노이eng (1945–1946) Francis Greville Drew|프랜시스 그리빌 드루eng (1946–1951) |
유엔 최고 대표 | Eduardo Anze Matienzo|에두아르도 안세 마티엔조eng (1951–1952) |
행정 장관 | Duncan Cameron Cumming|던컨 캐머런 커밍eng (1951–1952) |
이전 |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 |
이후 |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연방 -- |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에리트레아 사회는 여러 변화를 겪었다.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Colonia Primogenita|콜로니아 프리모제니타it(최초로 태어난 식민지)라고 부르며[48] 다른 식민지에 비해 많은 이탈리아인 이주민을 보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 아래 수십 가족이 아스마라와 마사와 주변에 처음 정착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약 4,000명이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공동체는 제2차 세계 대전 초에는 거의 1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49]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식민 통치는 에리트레아 사회에 복합적인 영향을 남겼다. 에리트레아는 본래 에티오피아의 일부 지역이었으나, 이탈리아의 점령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탈리아는 이곳을 최초의 식민지, 즉 colonia primogenita|콜로니아 프리모제니타ita로 여기며[48] 다른 식민지와 달리 상대적으로 많은 투자를 단행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식민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주둔시켜 1941년까지 지배를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유입되어 불공정한 상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1]
논문
Great Britain and the Planting of Italian Power in the Red Sea, 1868-1885
1944-05
영국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에리트레아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들은 점차 국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49년 영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스마라의 총인구 127,579명 중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은 17,183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주로 이탈리아로 돌아가거나 미국, 중동,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이주했다.
영국 군정기 동안 에리트레아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처음에는 영국을 상대로, 이후에는 에리트레아를 병합하려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Vincenzo Di Meglio|빈첸초 디 메글리오ita와 같은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들은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활동을 벌였다. 디 메글리오는 '에리트레아 대표 이탈리아인 위원회'(CRIE)의 이사로 활동했으며, 1947년에는 이탈리아에 우호적인 에리트레아인들과의 연대를 위해 '이탈리아-에리트레아 협회'와 '베테랑 아스카리 협회' 설립을 지원했다.
같은 해 9월, 디 메글리오는 '이탈리아를 위한 에리트레아 당'( Partito Eritrea Pro Italia|샬라 이탈리아 당ita) 창당에 참여했다. 이 정당은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목표로 했으나, 독립 이전에 최소 15년간 이탈리아의 통치를 받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원은 주로 전직 이탈리아 군인과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로 구성되었으며, 창당 한 달 만에 20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다.
1947년 평화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했다. 이후 에리트레아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논의가 국제 사회에서 진행되었고, UN의 감독 하(1951년 2월 19일~)를 거쳐 1952년 9월 15일,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에리트레아인들의 완전한 독립 열망과는 거리가 먼 결정이었으며, 에티오피아의 영향력 하에 놓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결성 이후 에티오피아 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에리트레아 내 이탈리아인 커뮤니티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이탈로 바살로와 루치아노 바살로 형제처럼 196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에 기여하며 에티오피아 사회에서 활동한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도 있었다.
에티오피아와의 연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2년, 에티오피아는 연방을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에리트레아를 강제 병합했다. 이는 에리트레아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3. 문화와 사회
이탈리아인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이탈리아 문화가 에리트레아, 특히 수도 아스마라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아스마라는 많은 이탈리아풍 건축물 덕분에 Piccola Roma|피콜라 로마it(작은 로마)라고 불렸으며[58], 실제로 1939년 도시 인구 98,000명 중 53,000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59] 역사가 장 루카 포데스타는 "아스마라는 실질적으로 이탈리아 도시가 되었다"고 기록했다.[54] 이 도시는 로마보다 많은 신호등이 설치될 정도로 현대적인 도시 계획을 갖추었으며, 넓은 가로수길, 정치적 지역 구분, 피아트 타글리에로 빌딩과 같은 아르데코 양식 건축물 등이 특징이다. 또한 야자수와 시바 나무가 늘어선 거리에는 피자리아, 카푸치노와 라테를 파는 커피 바, 아이스크림 가게 등이 들어섰고, 독자적인 자동차 경주(Asmara circuit|아스마라 서킷영어)가 열리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이슬람교 신앙을 용인하면서도, 에리트레아에서 가톨릭교 확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수도 아스마라의 로사리오 성모 교회를 중심으로 아스마라와 케렌 주변 고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1940년대 초에는 가톨릭이 에리트레아 인구의 약 28%를 차지하며 주요 종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50][51]
식민 통치 하에서 인종 차별법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지역의 에리트레아인들은 현대적인 위생 설비와 병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일부 사회 기반 시설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는 현지 에리트레아인을 경찰이나 공공 사업과 같은 공무에 고용하기도 했다.
1936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제국을 선언하고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시킨 후,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공업 중심지로 선정되었다.[52] 새로운 교통 및 통신 수단이 구축되면서 공장 설립이 활발해졌다. 이 공장들은 단추, 식용유, 파스타, 건설 자재, 포장육, 담배, 가죽 등 다양한 상품을 생산했다. 1939년에는 약 2,198개의 공장이 운영되었으며, 대부분의 직원은 에리트레아 시민이었다. 이로 인해 도시의 이탈리아인과 에리트레아인 인구가 모두 증가했다. 이탈리아인의 수는 5년 만에 4,600명에서 75,000명으로 늘어났고, 에리트레아인들도 산업, 무역, 과일 농장 등에 참여하며 경제 활동이 확장되었다.[53] 농업 개혁도 지속되었지만, 주로 이탈리아인 정착민이 소유한 농장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 발전으로 1939년 에리트레아의 생활 수준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로 여겨졌다.[55]
군사적인 측면에서, 에리트레아인 아스카리는 이탈리아 식민지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의 로돌포 그라치아니나 Amedeo Guillet|아메데오 기예영어 같은 장교들은 에리트레아 아스카리를 가장 우수한 병사로 평가했다.[56] 아스카리 복무는 에리트레아 남성들에게 주요한 유급 고용원이 되었으며, 1936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시에는 에리트레아 남성의 40%가 식민지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57]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에리트레아의 공업화는 중단되었다.[60]
4. 통화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와 에티오피아 비르는 초기에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에서 유통되었다. 1890년부터는 로마에서 에리트레아 탈레로가 주조되어 사용되었는데, 이는 5 리라와 동일한 가치를 가졌다. 이 탈레로는 기존의 동전들과 함께 사용되었으나, 1918년에 주조된 이탈리쿰 탈러(italicum thaler)와 마찬가지로 현지 주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32][33] 이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가 성립되면서,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있는 모든 이탈리아 식민지의 공식 통화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리라로 통일되었다.[34]
5. 평가 및 영향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사회 기반 시설 건설과 일부 사회 서비스 개선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1880년대 후반부터 개발 사업을 시작하여, 1888년 사티까지 에리트레아 철도를 완공했고[46], 1911년에는 고지대의 아스마라까지 철도를 연결했다.[47] 또한, 아스마라와 마사와를 잇는 삭도를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최장 노선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에 의해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해체되었다. 도로망 역시 확장되었다.
의료 및 농업 분야에서도 일부 개선이 이루어져, 도시 지역의 에리트레아인들은 현대적인 위생 설비와 병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이탈리아의 통치 효율성을 높이고 이탈리아인 정착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으며, 인종 차별적인 법령이 동시에 시행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탈리아는 현지 에리트레아인을 경찰이나 공공 사업과 같은 하급 공무에 고용하기도 했지만, 이는 식민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다.
이탈리아인 이주도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약 4,000명이던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 공동체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거의 1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49] 이들은 주로 아스마라와 마사와 주변에 정착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를 용인하면서도 가톨릭의 확장을 적극 지원하여, 아스마라와 케렌 등 고지대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1940년대 초에는 가톨릭 신자가 에리트레아 전체 인구의 약 28%를 차지하게 되었다.[50][51]
그러나 식민 통치의 본질은 억압과 착취에 있었다. 이탈리아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에리트레아를 통치했으며, 이는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우찰레 조약을 통해 에티오피아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시도했으나 메넬리크 2세의 반발로 무산되었고, 이는 결국 아도와 전쟁으로 이어져 이탈리아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에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무기 수송을 제한하고 에티오피아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등 적대적인 정책을 유지했다.[45]
결론적으로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는 에리트레아에 근대적인 인프라와 일부 사회 시스템을 도입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이는 식민 지배 강화라는 목적 아래 이루어졌으며, 인종 차별,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억압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했다. 이러한 식민 통치의 유산은 오늘날 에리트레아 사회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현재 에리트레아 인구의 약 2%는 이탈리아계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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