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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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부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서울의 명칭이었다. '수도'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경성부로 지정되어 경성과 용산구로 구성되었다. 1910년 한성부에서 개칭되었으며, 행정 구역 변천을 거쳐 1946년 서울자유시로 변경된 후 1948년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특별시가 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조선총독부, 경성역, 미쓰코시 백화점 등이 있었고, 광화문, 충무로, 을지로 등이 주요 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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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본 제국은 서울을 식민지 수도로 삼았다.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동안 서울은 경성(京城|경성일본어)이라고 불렸다.[1] 경성은 경성부(府)로, 경성과 용산구의 2개 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 시대 및 현재와는 달리 경성은 독립된 도시나 도(道)가 아닌 경기도의 일부였다.
1914년, 경기도 외곽 지역 일부가 인접한 고양군(현재 고양시)에 편입되면서 경성부의 행정 구역이 축소되었다. 1936년에는 시흥군(현재 시흥시)의 영등포를 편입하고, 고양군으로부터 경성부의 구역(숭인, 영희 등) 일부를 재편입하면서 확장되었다. 총독부 건물은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나 1995년에 철거되었다.
1919년 경성 인구는 48만 8천 명이었다. 이후 일본인 이주 등 여러 사정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일본인 주택지가 조성되었다. 남산 북사면 일대의 필동·남산동·인현동·쌍림동·장충동·회현동과 남대문 밖 서울역 부근의 후암동·청파동·효창동·용문동·원효로 등 용산 방면에 일본인 주택지가 생겨 일본식 목조가옥이 늘어섰다. 을지로와 명동, 충무로에는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었다.
경성부는 종로, 남대문로, 태평로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지가 형성되었고, 청량리, 마포, 돈암동, 영천(靈泉), 영등포 등 전차 종점과 노선 부근도 도시화되었으나, 그 주변은 근교 농촌이었다. 아현동 일대와 숭인동·신설동 등에는 조선인 주택지가 조성되었다.
일제는 시가지 정리 명분으로 1913년 성벽을 헐어 도로를 만들고 시가지를 확장하여 경성부는 성곽 도시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39년 남대문에서 종로·을지로·퇴계로 등 도심부는 상업 지역, 영등포·용산에서 마포·서강 일대와 청계천 하류 답십리 일대는 공업 지역, 그 밖은 주택지구로 정하는 지역제(地域制)를 실시하여 서울은 점차 근대적 도시 틀을 갖추게 된다.[7]
1939년 조선총독부는 병참기지화 일환으로 '제2차 대경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인천(경인선) 권역의 경성부 편입을 검토했다. 당시 편입 검토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 일부(현 경기 광명시 일부),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김포군 양서면/양동면(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 등이었다.[22][23]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도 '경성'이라는 명칭은 한동안 계속 사용되었다.[3] 연합군 군정기인 1946년 10월 18일,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서울자유시'가 설치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독립하면서 수도 '서울특별시'가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1. 명칭의 유래
1105년 고려 숙종 때 남경(南京) 건설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인종 때에는 왕도의 하나로 삼아 ‘한양부(漢陽府)’라 칭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개성과 한성의 이도체제를 계승하여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약 500년 동안 수도였으며, 그 장(長)으로 판부사(判府事)를 두었다. 이는 예종 때 판윤(判尹)으로 개칭되었고, 건양 원년(1896년)에 ‘부윤(府尹)’으로 개칭되었다.[3]1910년 한국 병합 이후, 같은 해 9월 30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에 따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 아래에 두었다. 한편 그 장(長)은 부윤으로 하여 개칭하지 않았다.
조선반도에서의 ‘부(府)’는 일본의 ‘시(市)’에 해당한다. 따라서 ‘경성시(京城市)’라는 시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윤이 시장에 해당한다. 또한 ‘경성(京城)’은 왕성(王城)·황성(皇城)과 같은 의미의 한어(漢語)이며, 조선에서는 예로부터 한성을 가리켜 사용된 일반 명사 중 하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광복) 후에도 한동안 ‘경성’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연합군 군정기인 1946년 10월 18일, 경기도의 관할에서 벗어나 ‘서울자유시’가 설정되었고, 대한민국이 독립한 1948년에는 수도 ‘서울특별시’가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3]
일본에서는 전후 십수 년간 ‘경성’이라는 옛 명칭이 사용되어 왔다. 흑다 가쓰히로(黒田勝弘)는 일본에서 ‘서울’이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은 “1960년대 이후가 아니었을까”라고 하며, 그 배경에 한국으로부터의 강한 요구(특히 한일기본조약 체결 후)가 있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4]
2. 2. 행정구역 변천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이름이 바뀌고 경기도에 편입되었다.[10] 1911년 4월 1일부터 5부 8면제를 실시하여, 성 안은 기존대로 5부로, 성 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豆毛)·인창(仁昌)·은평·연희·한지(漢芝)의 8면(面)으로 나누었다.1914년 4월 1일,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만 경성부에 두고, 8면의 나머지 지역(성저십리 대부분 지역)은 모두 고양군에 편입되어 5부 8면제는 폐지되었다.[7][11] 이날부터 한성부의 방·계·동 제도는 폐지되었고,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186개 동(洞)으로 하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12]
1914년 9월 27일부터 경성부에 동부·서부·북부·용산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이 출장소 제도는 설치된 지 1년 2개월 후인 1915년 6월 17일 용산출장소만 남기고 폐지되었다.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에 따라 경성부 행정구역의 명칭이 '~동'(洞)에서 '~정(町)'으로 바뀌었고,[13] 같은 해 4월 1일에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연희·한지면, 시흥군 영등포읍·북면,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14] 등이 경성부로 편입되었다.[15]
1936년 7월 23일 동부출장소(東部出張所)와 영등포출장소(永登浦出張所)가 설치되었고, 1940년 7월 1일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어 4개의 출장소가 경성부 업무를 보조하였다.[11] 1943년 6월 10일, 인구 증가에 따라 출장소 제도가 폐지되고 구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도성 안에 종로구(鍾路區)와 중구(中區)를 신설하고, 동부출장소를 분할하여 동대문구(東大門區)와 성동구(城東區)로, 서부출장소를 서대문구(西大門區)로, 용산출장소를 용산구(龍山區)로, 영등포출장소를 영등포구(永登浦區)로 하여 7개 구를 설치하고, 행정기구로 구역소(区役所)를 두고 업무를 수행하였다.[16][17][18]
1944년 11월 1일, 서대문구 일부와 용산구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麻浦區)를 신설하였다.[19][20] 이렇게 경성부 아래 설치되었던 8개의 구(區)가 현재의 구(區廳)의 전신이다.[21]
2. 3. 경성부의 확장과 식민지 정책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 시행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고, 경기도에 편입되었다.[10] 1911년 4월 1일부터 5부 8면제를 실시하여 종전대로 성내는 5부, 성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豆毛)·인창(仁昌)·은평·연희·한지(漢芝)의 8면으로 구분하였다.1914년 4월 1일,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 일부만 경성부에 두고, 8면의 나머지 지역(성저십리 대부분)은 고양군에 편입되어 5부 8면제는 폐지되었다.[7][11] 같은 날, 한성부 방·계·동 제도는 폐지되었고, 경성부 행정구역은 186개 동(洞)으로 하는 대대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12]
1914년 9월 27일, 경성부에 동부·서부·북부·용산 4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년 2개월 후인 1915년 6월 17일 용산출장소만 남기고 폐지되었다.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에 따라 경성부 행정구역 명칭이 “~동”(洞)에서 “~정(町)”으로 개칭되었고,[13] 같은 해 4월 1일 고양군 용강·연희·한지면, 시흥군 영등포읍·북면,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14] 등이 경성부로 편입되었다.[15]
1936년 7월 23일 동부출장소와 영등포출장소가, 1940년 7월 1일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어 4개 출장소가 경성부 업무를 보조하였다.[11] 1943년 6월 10일, 인구 증가에 따라 출장소 제도가 폐지되고 구제가 실시되었다. 도성 내에 종로구와 중구를 신설하고,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서부출장소를 서대문구로, 용산출장소를 용산구로, 영등포출장소를 영등포구로 하여 7개 구를 설치하고, 행정기구로 구역소(区役所)를 두었다.[16][17][18]
1944년 11월 1일, 서대문구와 용산구 일부를 분리하여 마포구를 신설하였다.[19][20] 이로써 경성부 아래 설치되었던 8개 구가 현재 구(區廳)의 전신이다.[21]
1919년 경성 인구는 48만 8천 명이었다. 이후 일본인 이주 등 여러 사정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일본인 주택지가 조성되었다. 남산 북사면 일대의 필동·남산동·인현동·쌍림동·장충동·회현동과 남대문 밖 서울역 부근의 후암동·청파동·효창동·용문동·원효로 등 용산 방면에 일본인 주택지가 생겨 일본식 목조가옥이 늘어섰다. 을지로와 명동·충무로에는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었다.
경성부는 종로·남대문로·태평로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지가 형성되었고, 청량리·마포·돈암동·영천(靈泉)·영등포 등 전차 종점과 노선 부근도 도시화되었으나, 그 주변은 근교 농촌이었다. 아현동 일대와 숭인동·신설동 등에는 조선인 주택지가 조성되었다.
일제는 시가지 정리 명분으로 1913년 성벽을 헐어 도로를 만들고 시가지를 확장하여 경성부는 성곽 도시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14년 경성부 외곽 성저십리 지역을 고양군에 편입하여 경성부 면적을 축소하였다. 1936년 고양군 한지면, 용강면 일대와 연희면 및 숭인면 일부가 경성부로 재편입되었고, 시흥군 영등포읍 일대와 북면 일부,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가 신규 편입되어 경성부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1939년 남대문에서 종로·을지로·퇴계로 등 도심부는 상업 지역, 영등포·용산에서 마포·서강 일대와 청계천 하류 답십리 일대는 공업 지역, 그 밖은 주택지구로 정하는 지역제(地域制)를 실시하여 서울은 점차 근대적 도시 틀을 갖추게 된다.[7]
1939년 조선총독부는 병참기지화 일환으로 '제2차 대경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인천(경인선) 권역의 경성부 편입을 검토했다. 당시 편입 검토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 일부(현 경기 광명시 일부),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김포군 양서면/양동면(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 등이었다.[22][23]
일본 제국(Empire of Japan)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Japan–Korea Treaty of 1910)을 통해 대한제국을 병합하면서 서울을 식민지 수도로 삼았다.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 동안 이 도시는 경성(京城|경성일본어)이라고 불렸다.[1] 경성은 경성부(府)로, 경성과 용산구(용산구|りゅうさんく한국어)의 2개 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 시대와 현재와는 달리 경성은 독립된 도시 또는 도(府)가 아닌 경기도의 일부였다. 1914년, 경기도 외곽 지역 일부가 인접한 고양시에 편입되면서 경성부 행정 구역이 축소되었다. 1936년, 경성부는 시흥시의 영등포를 편입하고, 고양시로부터 경성부 구역(숭인, 영희 등) 일부를 재편입하면서 확장되었다. 총독부 건물(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Seoul)은 조선총독부(Colonial Korea)의 자리였으나 1995년에 철거되었다.
2. 4.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광복) 후에도 '경성'이라는 명칭은 한동안 계속 사용되었다.[3] 연합군 군정기인 1946년 10월 18일,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서울자유시'가 설치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독립하면서 수도 '서울특별시'가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3. 인구
4. 경성부윤 및 부부윤
경성부윤은 1910년 10월 1일부터 1946년 9월 28일까지 존속한 경성부의 행정 책임자였다. 초기에는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나,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한국인이 임명되었다. 경성부 부부윤은 경성부윤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1944년 8월 21일부터 1946년 9월 29일까지 존속하였다.
4. 1. 경성부윤
4. 2. 경성부 부부윤
5. 주요 시설 및 건물
일제강점기 경성부에는 다양한 주요 시설 및 건물들이 있었다. 이들 시설은 관공서, 금융기관, 상업시설, 도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 '''관공서''': 조선총독부(경복궁 내 청사), 경성사법청사, 경성역, 경성우편국, 경성부민관, 경성공민관, 경기도청, 조선총독부의원, 고등법원, 경성지방재판소 등이 있었다.
- '''금융기관''': 조선은행, 조선상업은행 본점, 조선식산은행 본점, 조선저축은행 등이 있었다.
- '''상업시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조지야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등이 있었다. 주요 상업 지역은 본정(현재의 충무로)이었으며, 명치정(현재의 명동), 황금정(현재의 을지로), 영락정(현재의 중구 저동) 등도 상업 지역이었다.
- '''도로''': 1913년 시가지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성벽을 헐어 도로를 만들고 시가지를 확장하여, 종로, 남대문로, 태평로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지가 형성되었다.
5. 1. 관공서
5. 2. 금융기관
5. 3. 상업시설
경성의 중심 상업 지역은 본정(本町)으로, 현재의 충무로이다.5. 4. 기타
5. 5. 도로
일제는 시가지를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1913년에 성벽을 헐어 도로를 만들고 시가지를 확장하여 경성부는 성곽 도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7] 경성부는 종로, 남대문로, 태평로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심지가 형성되어 갔고, 청량리, 마포, 돈암동, 영천, 영등포 등의 전차 종점과 전차 노선 부근도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나, 그 주변은 근교 농촌이었다.[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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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擴張되는京城府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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