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축구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축구는 1920년 조선체육회 창립을 시작으로, 조선심판협회, 조선축구협회 등의 기관을 통해 발전했다.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경평전 등 다양한 컵대회와 도시대항전이 개최되었으며, 실업축구와 학원축구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학원 축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연희전문, 보성전문, 숭실전문 등이 주요 축구단으로 활약했다. 김원겸, 이영민, 김용식 등 뛰어난 선수들이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경성운동장, 기림리공설운동장 등이 주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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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축구 -
축국
축국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군사 훈련, 오락 등으로 발전했으며, 한나라 시대에 황실에서 인기를 얻고 송나라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명나라 시대에 쇠퇴하여 사라진 공을 차는 스포츠이다. -
한국의 축구 -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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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문화 -
자제단
자제단은 3·1 운동 당시 시위 참가자 만류 및 해산 활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로, 지역 유지와 관료 주도로 결성되어 만세 운동 확산 방지 및 시위 참여자 설득, 밀고 등의 활동을 펼쳐 친일단체로 비판받는다. -
일제강점기의 문화 -
형평사 운동
형평사 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되어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와 권익 옹호,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사회 운동으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으나 내부 갈등, 일제 탄압,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대, 친일적 변질을 겪으며 1935년 해산되었다. -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
정몽준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7선 국회의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FIFA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에 기여했으며,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공헌 활동을 한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축구 행정가이다. -
대한민국의 축구에 관한 -
대한축구협회
1921년 전조선 축구대회를 시작으로 1933년 창립된 대한축구협회는 FIFA 가입 후 아시안컵 우승, K리그 출범, 월드컵 4강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승부조작 논란 등 부정적 사건을 겪었으며, 현재는 승부조작 근절과 유소년 축구 육성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2. 협회
1920년 창립된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전신)는 1928년 조선심판협회, 1933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의 전신)가 창립되기 전까지 축구 전반에 관한 문제를 통할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이었다. 한편 각 지역별로 체육협회가 생겼는데, 그 중 1925년 평양에 설립된 관서체육회는 조선체육회와 더불어 가장 활발하고 광범위한 활동을 한 단체였다.
3. 축구대회
1920년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전신)는 1928년 조선심판협회, 1933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의 전신)가 창립되기 전까지 축구 전반에 관한 문제를 통할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이었다. 한편 각 지역별로 체육협회가 생겼는데, 그 중 1925년 평양에 설립된 관서체육회는 조선체육회와 더불어 가장 활발하고 광범위한 활동을 한 단체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다양한 축구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크게 컵대회, 도시대항전, 실업축구, 학원축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종류 | 설명 |
|---|---|
| 컵대회 | 성인 클럽, 소학, 중등, 전문, 실업부 등이 참가하는 토너먼트 방식 |
| 도시대항전 | 도시 연고 팀 단위로 참가하며, 리그전 방식으로 진행 |
| 실업축구 | 직장 단위 실업팀들이 참가 |
| 학원축구 |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 |
3.1. 컵대회
성인 클럽은 물론 소학부, 중등부, 전문부, 실업부 등이 같이 참가하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졌던 대회들이다. 대표적으로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가 있다. 전조선축구대회는 해방 후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거쳐 현재의 FA컵으로 이어졌으며,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는 해방 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로 이어진다. 전조선축구대회 중 1934~1937년 대회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현 전국체육대회의 전신) 종목의 일부로서 치러졌다. 이외에도 재조선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서 주최하는 조선신궁대회 및 기타 일본 본토에서 열리는 대회들이 있어 조선의 팀들도 일부 참가하였다.
| 개최 장소 | 대회 명칭 | 주최, 시기 | 비고 |
|---|---|---|---|
| 서울 | 전조선축구대회 | 조선체육회(1921~1937) 조선축구협회(1938~1940)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FA컵으로 계승 |
|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 조선축구협회(1935~1940)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로 계승 | |
| 전조선아식축구대회 | 오사카아사히신문경성지사(1927~1935) | ||
| 조선신궁대회 | 조선체육협회(1925~1943) | 재조선일본인 중심 대회 | |
| 평양 | 전조선축구대회 | 평양기독청년회(1921~1926), 관서체육회(1925~1941), 조선체육진흥회평남지부(1942) | |
| 기타 지역 | |||
| 일본 본토 |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 | 일본축구협회(1921~1940) |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로 계승 |
| 명치신궁경기대회 | 내무성, 명치신궁체육회, 후생성 |
3.2. 도시대항전
도시 연고 팀 단위로 참여하여 치러졌던 대회들이다. 경평전이 대표적이며, 리그전 방식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경평전의 경우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가며 열렸으며, 3지방대항축구전의 경우 서울, 평양, 함흥 등 참가 도시를 순회하며 열리기도 하는 등 지역 연고 개념이 강한 대회였다.
| 대회 명칭 | 주최, 시기 | 개최 장소 |
|---|---|---|
| 경성평양대항축구전 (경평전) | 조선일보사(1929~1930), 평양군(1933), 조선체육회(1933), 조선축구협회(1934~1935), 자유신문사(1946) | 서울, 평양 |
| 3지방대항축구전 | 조선축구협회(1938~1942) | 서울, 평양, 함흥 |
|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 조선중앙일보사(1936), 조선일보사(1938~1940), 조선축구협회, 매일신보사 공동(1941~1942) | 서울 |
| 전일본3지방대항축구전 | 일본축구협회 | 오사카 |
3.3. 실업축구
20세기 초반부터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직장 단위 실업팀들이 등장하여 전국 단위 대회에 참가하였다. 1930년 평양에서 열린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관서체육회 주최)부터 실업부가 창설되어 평양 일대 실업팀들이 참가하였으며, 1942년 마지막 대회에서는 경평대항실업축구전 부문이 신설되어 평양과 서울 실업팀 연합이 2경기를 치렀다.
1939년에는 서울 실업축구계 인사들이 모여 경성실업축구연맹을 결성하고 제1회 실업축구리그를 개최하였다.
3.4. 학원축구
일제강점기 학원축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개최 장소 | 대회 명칭 | 주최, 시기 |
|---|---|---|
| 서울 | 조선전문학교축구연맹전 | 조선전문축구연맹 (1926~1930) |
| 관립고등전문학교축구대회 | 조선전문학교체육연맹 (1927~1936) | |
| 전조선중등학교축구대회 | 보성전문학교 (1928~1940) | |
| 전조선중등학교축구대회 | 경성제대 예과 (1929~1942) | |
| 조선고등전문축구연맹전 | 조선학생연맹 (1937~1940) |
4. 주요 축구단
일제강점기에는 여러 축구단이 활동했다. 주요 축구단으로는 전조선축구대회나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의 예선에 참가했던 경성 축구단, 평양 축구단 등이 있었다.
이 시기 학원 축구단에 대해서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4.1. 학원 축구단
연희전문(연세대의 전신)과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이 양대 구도를 이루는 가운데, 평양의 숭실전문(숭실대의 전신)이 3대 강호를 형성하였다.
6. 주요 경기장
경성운동장, 평양 기림리공설운동장, 함흥공설운동장, 부산공설운동장 등에서 주요 경기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