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옥
1. 개요
임상옥은 조선 후기의 상인으로,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상업에 종사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인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청나라 상인과의 경쟁에서 독특한 상술을 발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임상옥은 인삼 가격을 낮추려는 청나라 상인들의 담합에 맞서 인삼을 불태우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빈민 구제 등 자선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했으며,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임상옥은 상업 활동 외에도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을 실천했으며, 1976년과 2001년에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의 저서로는 《가포집》과 《적중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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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임상옥 |
|---|---|
| 한자 표기 | 林尙沃 |
| 자 | 경약(景若) |
| 호 | 가포(稼圃) |
| 출생 | 1779년 |
| 사망 | 1855년 |
| 국적 | 조선 |
| 직업 | 상인 |
|---|
| 활동 시기 | 19세기 초 |
|---|---|
| 주요 활동 지역 | 의주 |
| 배우자 |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 |
|---|---|
| 자녀 | 2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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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임씨 -
임원식
임원식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음악을 수학하고 지휘자, 피아니스트, 교육자로 활동하며, 아시아인 최초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고려교향악단, KBS 교향악단, 국립교향악단 지휘자를 역임했으며,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지냈다. -
전주 임씨 -
임영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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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
우신잉
우신잉은 신광 그룹 창업주의 손녀이자 신광생명보험 임원을 지낸 대만 정치인이자 기업인으로, 2022년 민중당 소속 입법위원을 거쳐 2024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 부총통 후보로 출마했다. -
상인 -
이원영 (1908년)
이원영은 1908년 경기도 안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기업 임원을, 해방 이후에는 독립헌금실행단 이사, 양조장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
1779년 출생 -
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에도 시대 후기 우키요에 화가로, 풍경화 스타일을 확립하여 『도카이도 오십삼차』, 『에도 명소 백경』 등의 대표작을 남겼고 서양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1779년 출생 -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는 스웨덴의 화학자로, 세륨과 셀레늄을 발견하고 규소 등을 분리했으며, 화학 용어 도입 및 근대적 원소 표기법 확립, 원자량 개념 발전에 기여하여 '근대 화학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불린다.
2. 생애
아버지는 임봉핵이다. 어릴 적에 역관이 목표였던 아버지 임봉핵은 거듭된 낙방을 하였고, 임상옥은 아버지 아래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결국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당시 만상(灣商)인 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에 나서서 돈을 벌었으나 비참한 일을 맞이한다. 결국 임상옥의 일가는 모두 관노로 끌려간다. 후에 만상 사환으로 들어간 임상옥은 만상 도방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기에 이른다. 만상 도방은 그에게 밀무역을 시키기 시작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1810년 순조 10년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1811년 순조 11년에는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의주가 위험해지자 의병을 모을 모집금과 군수물자를 살 돈을 제공하였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청나라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 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1년(순조 31년) 오위장, 첨지를 거쳐 다시 오위장에 임명됐다.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1837년 오위장에 임명됐다. 1861년 9월 30일 특별 명령으로 증 병판에 증직됐다.
3. 상업 활동과 업적
1811년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자 의병 모집과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재산을 지원했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기발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여 막대한 재산을 벌었다.
임상옥은 만상에서 일하던 중 우군칙을 만났는데, 훗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 전 우군칙의 추천으로 홍경래가 임상옥을 포섭하려 했으나, 임상옥은 홍경래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를 내보냈다고 한다. 우군칙과의 친분으로 홍경래가 농성하던 성이 함락되기 직전 우군칙의 아이를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빈민 구제 등 자선 사업에도 힘썼으며, 이러한 공로로 1831년 (순조 31년) 오위장, 첨지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1832년 곽산군수,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에도 능하여 이름을 떨쳤다. 1837년 다시 오위장에 임명되었고, 1861년 9월 30일 특별 명령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1. 초기 상업 활동
임상옥의 아버지는 역관이 목표였으나 거듭된 낙방으로 중국어를 가르쳤다. 결국 역관 시험을 포기하고 만상(灣商)인 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금수품 밀무역에 나섰으나 비참한 일을 겪고, 임상옥 일가는 모두 관노로 끌려갔다. 이후 만상 사환으로 들어간 임상옥은 능력을 인정받아 밀무역을 하며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사망 후 빚을 떠맡아 상인 홍득주 밑에서 조수로 일했다. 의주에는 직원을 고용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지만, 5~10년 후 잠재력을 인정하면 자체 사업을 시작하도록 지원했다. 임상옥은 홍득주의 지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베이징으로 갔다.
어떤 사람이 인삼 감정을 부탁하자, 다른 곳에 옮겨 심어 재배된 것이라고 정확히 답했다. 그 결과 "박물군자"(博物君子중국어)라는 별명을 얻었고, 아무도 그를 속이려 하지 않았다.
고위 관료이자 국왕의 외삼촌인 박종경에게 5000냥을 후원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의 후원금보다 여러 배 많은 금액이었다. 박종경은 임상옥을 불러 하루에 몇 명이 오가는지 묻자, 자신에게 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치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다고 답했다. 박종경은 그의 대답에 만족하며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여 사업을 지원했다.
3.2. 인삼 무역 독점
1810년 (순조 10년), 임상옥은 국경 지방에서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이 독점권을 얻기 위해 백지어음을 이조판서였던 박종경에게 내놓는 과감함을 보였고, 박종경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청나라 상인들이 인삼 가격을 낮추기 위해 담합하자, 임상옥은 인삼을 불태우는 전략을 사용했다. 청나라 상인들은 인삼 공급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임상옥이 제시한 높은 가격에 인삼을 구매하게 되었다. 이처럼 임상옥은 기지를 발휘하여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깨뜨리고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임상옥은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번 돈으로 부모에게 버림받고 팔려온 여인을 구해주었는데, 훗날 이 여인은 부유한 상인의 정실부인이 되어 임상옥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3.3. 청나라와의 무역
조선은 상인들이 사업하기에 최악의 환경이었다. 많은 상품의 거래가 금지되었고, 다른 나라와의 무역은 불법이었다. 조선의 인삼은 청나라에서 인기가 많았고 중국인들이 높은 가격을 지불했기 때문에 임상옥은 그들에게 인삼을 밀수했다.
임상옥이 인삼을 팔기 위해 베이징에 갔을 때 인삼 무역에는 가격 문제가 있었다. 중국 상인들은 불법 거래였기에 조선 상인들이 가져온 인삼을 싼 가격에 샀다. 어느 날 중국 상인들은 임상옥의 인삼 판매 권리를 질투하여 그를 보이콧하여 가격을 더 낮추도록 강요했다. 이에 임상옥은 뜰에서 자신의 인삼을 불태우고 중국 상인들을 불렀다. 겁에 질린 그들은 높은 가격에 인삼을 샀다. 그의 행동은 그를 관료로 추천하게 했다.
청나라 상인이 인삼 값을 낮추기 위해 단체로 담합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인삼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이는 시가지에서 불태웠는데, 담합을 하던 청나라 상인들은 인삼과 홍삼 매물이 줄고 있다고 인식하여 결국 임상옥이 부르는 값에 구매하게 되었다.
임상옥은 다른 상인과는 달리 돈보다는 사람 위주로 돈을 쓴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만상 아래에서 있을 때 청나라에 가서 돈을 벌고 돌아가기 전 어느 숙박소에서 한 여인이 부모에게도 버림받고 팔린 신세라고 구해달라고 빌자 그는 청나라에서 벌은 돈(현재 가치로는 수천만원 상당)을 주며 숙박소 주인에게 여인을 사고 풀어주었다. 나중에 이 여인은 어느 한 부유한 상인의 정실부인이 되고 임상옥이 자신의 상단을 차리고 베이징에 왔을 때 여인의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여인을 구해줬던 비용의 갑절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임상옥은 홍득주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고 베이징으로 갔다. 그는 기루를 방문하여 모든 돈을 써서 여자를 하룻밤 동안 샀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나중에 비판을 받고 상인 집단에서 쫓겨났다. 10년 후 그 여자는 청나라 고위 관료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임상옥을 찾아 그를 사는 데 쓴 돈의 10배를 주었다.
4. 홍경래의 난과 임상옥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의주가 위험해지자, 임상옥은 의병 모집금과 군수물자를 살 돈을 제공하였다.
홍경래는 자금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우군칙의 추천으로 임상옥에게 접근하여 창고의 양을 기록하는 서기 일을 제안하며 포섭하려 했으나, 임상옥은 홍경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를 내보냈다.
임상옥은 우군칙과 무역을 하면서 관계가 돈독했는데, 홍경래가 농성하던 성이 무너지기 직전에 성에 몰래 들어가 우군칙의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이는 명확하지 않다.
5. 사회 공헌 및 평가
임상옥은 다른 상인들과 달리 돈보다는 사람을 위주로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 인삼 소각 사건: 청나라 상인들이 인삼 가격을 낮추기 위해 담합하자, 임상옥은 인삼을 시가지에서 불태워 버렸다. 이로 인해 청나라 상인들은 인삼과 홍삼 매물이 줄고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임상옥이 제시하는 가격에 인삼을 구매했다.
* 여인 구출: 청나라에서 돈을 벌고 돌아가기 전, 한 여관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팔려 온 여인을 만났다. 여인의 딱한 사정을 들은 임상옥은 청나라에서 번 돈( 상당)을 여관 주인에게 주고 여인을 풀어주었다. 훗날 이 여인은 부유한 상인의 정실부인이 되었고, 임상옥이 자신의 상단을 차리고 베이징에 왔을 때 여인의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여인을 구해줬던 비용의 갑절의 수익을 얻었다.
* 우군칙과의 관계: 임상옥은 만상의 상단 아래에서 밀무역을 하던 중 우군칙을 만났다. 훗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 전, 거상이었던 우군칙의 추천으로 홍경래가 임상옥을 포섭하려 했으나, 임상옥은 홍경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를 내보냈다고 한다. 홍경래가 농성하던 성이 함락되기 직전, 임상옥이 성에 몰래 들어가 우군칙의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 박종경의 후원: 임상옥은 인삼 무역 독점권을 얻기 위해 백지어음(상대방이 원하는 금액을 적으면 무조건 그 금액을 주는 어음)을 내놓는 대담함을 보였다. 당시 이조판서이자 독점권을 평가하던 박종경은 임상옥의 강심장에 주목하여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후 임상옥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