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드 부르고뉴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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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잔 드 부르고뉴 공녀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학자적 기질을 보였으며, 섭정으로서 백년 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통치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다리 기형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1348년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아들 장 2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고, 부르고뉴 공령은 손자인 필리프 2세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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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6세는 살리카 법에 따라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발루아 왕조의 초대 국왕으로, 그의 즉위는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통치 말년은 패배와 흑사병으로 혼란스러웠다. - 1293년 출생 - 원 태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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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드 부르고뉴 공녀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프랑스 왕비 |
배우자 | 필리프 6세 |
가문 | 부르고뉴 가문 |
아버지 | 로베르 2세, 부르고뉴 공작 |
어머니 | 아녜스 드 프랑스 |
출생일 | 기원전 1293년경 |
사망일 | 1349년 12월 12일 |
사망 장소 | 프랑스, 파리 |
매장 장소 | 생드니 대성당 |
언어 | , |
통치 | |
즉위 | 1328년 4월 1일 |
대관식 | 1328년 5월 29일 |
섭정 | 1340년, 1345-1346년, 1347년 |
이전 통치자 | 필리프 6세 |
결혼과 자녀 | |
결혼 | 1313년 7월 |
자녀 | 장 2세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 |
2. 가계 및 초기 생애
잔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아녜스의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 마르그리트는 루이 10세의 왕비였다. 1313년 6월, 잔은 루이 10세의 사촌인 필리프 6세와 결혼했다.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필리프 드 발루아가 왕위에 올랐다.
잔은 학자이자 애서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아들 장 2세에게 읽을 필사본을 보냈고, 뱅상 드 보베의 ''역사 거울''(1333년경)과 자크 드 세솔의 ''도덕적 체스 게임''(1347년경)을 포함한 몇몇 중요한 현대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으며, 이 작업은 장 드 비녜가 수행했다.
1337년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에드워드 3세가 루이 10세의 조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잔은 남편 필리프 6세가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섭정으로서 정사를 돌보았다. 지적이고 강한 의지를 가진 잔의 성격과 권력은 부부에 대한 평판을 악화시켰고, 다리 기형으로 인해 "다리가 불편한 왕비"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1348년 잔은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그녀의 묘는 프랑스 혁명기에 파괴되었다. 잔의 사후, 1361년 조카손자인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가문의 남계가 단절되었다. 이후 잔의 장남 장 2세가 부르고뉴를 왕령으로 잠시 편입시킨 후, 넷째 아들 필리프 2세에게 주었다.[7][8]
2. 1. 가계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와 아녜스 드 프랑스의 딸이다.[1] 루이 9세의 외손녀이며, 언니 마르그리트는 루이 10세의 왕비였다.[2] 1313년, 필리프 6세와 결혼했다.관계 | 이름 |
---|---|
아버지 | 로베르 2세 |
어머니 | 아녜스 드 프랑스 |
외할아버지 | 루이 9세 |
외삼촌 | 필리프 3세 |
오빠 | 위그 5세 |
언니 | 마르그리트 (루이 10세의 왕비) |
남편 | 필리프 6세 |
아들 | 장 2세 |
아들 |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 |
2. 2. 초기 생애
부르고뉴 공 로베르 2세와 루이 9세의 딸 아녜스의 차녀로[7], 언니 마르그리트는 루이 10세의 왕비였다.[8] 1313년 6월, 루이 10세의 사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훗날 필리프 6세)와 결혼했다. 필리프는 1315년부터 1328년까지 메인 공작이었고, 1325년부터 발루아 백작, 앙주 백작이기도 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장(훗날 장 2세)과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등이 태어났다.
3. 프랑스 왕비
1313년 6월, 잔은 루이 10세의 사촌이자 훗날 필리프 6세가 되는 필리프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필리프는 1315년부터 1328년까지 메인 공작이었고, 1325년부터 발루아 백작, 앙주 백작이기도 했다. 잔은 부르고뉴 공 로베르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아녜스의 차녀로,[7] 언니 마르그리트는 루이 10세의 왕비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장 2세와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등이 태어났다. 잔은 학자 타입의 여성이었으며, 애서가로 알려져 있다.
1349년 12월 12일, 흑사병으로 사망하여[8]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잔의 손자인 샤를 5세가 세운 묘는 프랑스 혁명기에 파괴되었다.
3. 1. 왕위 계승
1328년, 필리프 4세의 후손인 카페 왕가의 적통은 샤를 4세가 남자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1] 샤를 4세는 사망하기 전 6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블랑슈 드 프랑스가 태어난 후 그에게 남자 상속자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필리프 6세와 1327년 샤를 4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인 이자벨 드 프랑스는 샤를 4세의 딸이었으나 에드워드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은 거부되었다.[1] 에드워드 3세의 왕위 계승 거부는 1316년 필리프 5세가 왕위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1317년 필리프 5세가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 정당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1316년의 계승 결정에 따라 여성 상속인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샤를 4세의 부계 혈통을 가진 필리프 6세에게 왕위가 주어졌고, 에드워드는 모계 혈통을 통해 왕위를 주장했다.[1] 이 선례는 여성의 왕위 계승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살리카법처럼 그들의 섭정 권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살리카법은 종종 필리프 6세가 권력을 잡는 데 사용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권력 역할에 영향을 미쳤으며,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잔 다르크의 섭정 시기에는 그녀의 권한을 제한하지 않았다.[2]필리프 4세의 아들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등 역대 프랑스 국왕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필리프 드 발루아(훗날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1337년, 백년 전쟁이 일어나,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루이 10세의 조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3. 2. 섭정 통치와 백년 전쟁
1316년 필리프 6세와 결혼한 잔은 백년전쟁이 발발한 1337년부터 남편이 자리를 비운 동안 섭정으로서 정사를 관장했다.[3]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으로 자리를 비울 경우를 대비하여 잔에게 왕국 내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사법 문제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권한을 확대했다.[3] 잔은 필리프 6세가 전쟁에 참전하는 동안 국왕과 같은 완전한 사법 권력을 행사하며 두각을 나타냈다.[3]1328년, 카페 왕가의 적통은 샤를 4세가 남자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필리프 6세와 에드워드 3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나, 1316년 필리프 5세가 왕위를 주장하면서 시작된 여성의 왕위 계승 불가 결정에 따라 샤를 4세의 부계 혈통을 가진 필리프 6세에게 왕위가 주어졌다.[1] 이 선례는 여성의 왕위 계승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살리카법처럼 섭정 권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2]
필리프 6세는 왕족 혈통이 아닌 잔에게 섭정 기간 동안 상당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귀족들의 일반적인 문화를 거스르는 행보를 보였다.[3] 잔은 왕족 혈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사법 권한을 처리하고, 필리프 6세가 관리하는 전쟁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통치하며 섭정 여왕으로서의 기대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였다.[3] 필리프 6세가 프랑스의 다른 여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잔에게 이러한 권한을 위임한 것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했다.
지적이고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잔은 남편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섭정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잔의 성격과 권력 때문에 부부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고, 다리 기형으로 인해 "la male royne boiteuse프랑스어" (다리가 불편한 왕비)라고 불리기도 했다.
3. 3. 평가와 논란
필리프 6세는 백년 전쟁에 대비하여 잔에게 왕국 내 사법 문제 처리 권한을 확대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여성의 권력 주장을 존중하지 않았던 문화 속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잔은 왕족 혈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6세의 신뢰를 받아 공동 통치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필리프 5세가 여성의 권력 주장을 거부했던 선례와는 달리, 잔은 섭정 여왕으로서 완전한 사법 권력을 행사했다.[3]그러나 14세기 프랑스 사회는 왕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고, 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잔은 고향인 부르고뉴 출신 인물들을 선호하여 북서부 궁정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5] 그녀의 정치 활동은 남편과 함께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신체적 기형(절름발이)은 이러한 논란을 더욱 심화시켜 ''la male royne boiteuse'' ("절름발이 악한 여왕")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 연대기 작가는 그녀를 "그녀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파멸시켰다"라고 묘사하며, 궁정의 적들에게 위험한 인물로 묘사했다.[4]
4. 죽음과 유산
1348년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고,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손자인 샤를 5세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동안 파괴되었다. 잔의 손자인 호담공 필리프 2세[7]는 그녀의 친정인 부르고뉴의 영지를 물려받아 부르고뉴 공이 되었다.[8] 그녀의 사후, 남편 필리프 6세는 나바라의 블랑슈와 재혼하였다.
잔은 학자 타입의 여성이었으며, 애서가라고 전해진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해 남편이 자리를 비우자 섭정이 되어 정사를 관장하기도 했다.
1349년 흑사병이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 침체도 초래했다. 잔은 1349년 12월 12일 페스트로 사망했다.
5. 자녀
필리프 6세와의 사이에서 9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요절하고 장 2세와 필리프만이 성년으로 성장했다.[7]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장 2세 | 1319년 4월 26일 | 1364년 4월 8일 | 프랑스 국왕 |
마리 | 1326년 | 1333년 9월 22일 | 브라반트 공작 요한 3세의 아들인 브라반트의 요한과 결혼했으나 곧 사망 |
루이 | 1329년 1월 17일 | 1329년 1월 17일 | |
루이 | 1330년 6월 8일 | 1330년 6월 23일 | |
요한 | 1333년 10월 2일 | 1333년 10월 2일 | |
아들 | 1335년 5월 28일 | 1335년 5월 28일 | 사산 |
필리프 | 1336년 7월 1일 | 1375년 9월 1일 | 오를레앙 공작 |
잔 | 1337년 11월 | 1337년 11월 | |
아들 | 1343년 여름 | 1343년 여름 |
6.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The Valois: kings of France, 1328-1589
https://www.worldcat[...]
Hambledon Continuum
2007
[2]
학술지
Isabeau of Bavaria, Anne of France, and the History of Female Regency in France
https://www.jstor.or[...]
2013
[3]
서적
Medieval Queenship
https://books.google[...]
[4]
학술지
Isabeau of Bavaria, Queen of France (1385-1422): The Creation of an Historical Villainess: The Alexander Prize Essay
https://www.jstor.or[...]
1996
[5]
서적
Medieval France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6]
학술지
La succession de Bourgogne à la mort de Philippe de Rouvres
http://gallica.bnf.f[...]
1936
[7]
문서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4남
[8]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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