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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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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안성 전투는 192년 동탁 사후 왕윤이 정권을 잡은 뒤, 동탁 잔당 세력인 이각, 곽사 등이 장안성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왕윤은 동탁의 부하들을 사면하지 않고, 가후의 계략으로 서량 지역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포를 내세워 이에 맞섰다. 여포는 우보의 기습과 서영의 전사, 그리고 호진과 양정의 투항 등으로 고전하였고, 중남산 전투에서 이각과 곽사에게 포위당했다. 결국 장안성은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왕윤은 살해당했으며 헌제는 이들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나라의 권위는 더욱 추락하고 군웅할거의 시대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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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장안성 전투
전체알 수 없음
날짜192년
장소한나라 장안, 중남산
결과이각곽사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여포
주요 인물 (교전국 1)왕윤
장료
고순
이숙
서영†
교전국 2이각, 곽사, 장제, 번조
주요 인물 (교전국 2)가후
서황
우보†
이몽
왕방
호진
양정
병력 규모
교전국 210만 명
피해 규모
교전국 1왕윤 살해
교전국 2알 수 없음

2. 배경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사도 왕윤(王允)의 연환계에 빠져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한 뒤 왕윤이 정권을 잡고 황제 헌제(獻帝)도 동탁의 꼭두각시 역할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왕윤은 사관 채옹(蔡邕)을 동탁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처형시키는 등, 오만해지고 덕이 없는 행위를 하였다.

한편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번조(樊稠) 등은 동탁의 근거지였던 서량군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왕윤에게 자신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나 왕윤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모사 가후(賈詡)가 꾀를 내어 왕윤이 서량군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서량주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10만 명을 넘어섰고, 동탁의 사위이자 중랑장 우보(牛輔)도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결국 이각군은 장안성으로 진격하고 왕윤은 여포를 내보냈다. 여포는 부하 이숙을 선봉으로 내세웠으나 방심하여 우보의 기습을 받고 신풍에서는 서영(徐榮)이 패배해 전사한다. 패배했다는 이유로 여포(呂布)이숙(李肅)을 처형하였다. 또한 동탁이 죽은 뒤 왕윤 밑에서 일하던 동탁의 부하들인 호진(胡軫)과 양정(楊定)이 이각과 곽사군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보는 진중 소란으로 도주하다가 심복 호적아(胡赤兒)에게 살해당하고 호적아는 여포에게 우보의 수급을 바쳤으나, 여포는 호적아도 처형하고 여포는 장안성 10km 전방 평원에서 이각군과 대치한다.

2. 1. 동탁의 죽음과 권력 공백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사도 왕윤(王允)의 연환계에 빠져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왕윤이 정권을 잡고 황제 헌제(獻帝)도 동탁의 꼭두각시 역할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왕윤은 사관 채옹(蔡邕)을 동탁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처형하는 등, 오만하고 덕이 없는 행위를 하였다.

한편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번조(樊稠) 등은 동탁의 근거지였던 서량군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왕윤에게 사면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모사 가후(賈詡)의 계책으로 왕윤이 서량군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량주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10만 명이 넘어섰고, 동탁의 사위이자 중랑장 우보(牛輔)도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했다.

결국 이각군은 장안성으로 진격하고 왕윤은 여포를 내보냈다. 여포는 부하 이숙을 선봉으로 내세웠으나 방심하여 우보의 기습을 받고 신풍에서는 서영(徐榮)이 패배해 전사했다. 패배했다는 이유로 여포(呂布)이숙(李肅)을 처형하였다. 또한 동탁이 죽은 뒤 왕윤 밑에서 일하던 동탁의 부하들인 호진(胡軫)과 양정(楊定)이 이각과 곽사군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보는 진중 소란으로 도주하다가 심복 호적아(胡赤兒)에게 살해당하고 호적아는 여포에게 우보의 수급을 바쳤으나, 여포는 호적아도 처형하고 장안성 10km 전방 평원에서 이각군과 대치한다.

2. 2. 왕윤의 실정과 서량군의 반발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사도 왕윤(王允)의 연환계에 빠져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한 뒤 왕윤이 정권을 잡고 황제 헌제(獻帝)도 동탁의 꼭두각시 역할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왕윤은 사관 채옹(蔡邕)을 동탁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처형시키는 등, 오만해지고 덕이 없는 행위를 하였다.

한편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번조(樊稠) 등은 동탁의 근거지였던 서량군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왕윤에게 자신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나 왕윤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모사 가후(賈詡)가 꾀를 내어 왕윤이 서량군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서량주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10만 명을 넘어섰고 동탁의 사위이자 중랑장 우보(牛輔)도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한다.

2. 3. 가후의 계책과 서량군의 봉기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사도 왕윤(王允)의 연환계에 빠져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한 뒤 왕윤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왕윤은 사관 채옹(蔡邕)을 동탁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처형시키는 등, 오만해지고 덕이 없는 행위를 하였다.

한편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번조(樊稠) 등은 동탁의 근거지였던 서량군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왕윤에게 자신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나 왕윤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모사 가후(賈詡)가 꾀를 내어 왕윤이 서량군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서량주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10만 명을 넘어섰고, 동탁의 사위이자 중랑장 우보(牛輔)도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결국 이각군은 장안성으로 진격하고 왕윤은 여포를 내보냈다. 여포는 부하 이숙을 선봉으로 내세웠으나 방심하여 우보의 기습을 받고 신풍에서는 서영(徐榮)이 패배해 전사한다. 패배했다는 이유로 여포(呂布)이숙(李肅)을 처형하였다. 또한 동탁이 죽은 뒤 왕윤 밑에서 일하던 동탁의 부하들인 호진(胡軫)과 양정(楊定)이 이각과 곽사군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보는 진중 소란으로 도주하다가 심복 호적아(胡赤兒)에게 살해당하고 호적아는 여포에게 우보의 수급을 바쳤으나, 여포는 호적아도 처형하고 여포는 장안성 10km 전방 평원에서 이각군과 대치한다.

3. 전개

3. 1. 여포의 초기 대응과 패배

3. 2. 중남산 전투

이각여포에게 패해 중남산으로 후퇴하고 여포장료와 함께 이각을 쫓아 중남산으로 들어간다. 중남산에는 화산 방면과 중남산 정상 방면으로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이각은 정상 방면으로 후퇴하고 중턱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진지에서 바위를 굴리면서 여포군을 저지한다.

이 틈을 타 화산 방면에 매복하고 있던 곽사가 기습 공격을 가한다. 여포는 곽사를 상대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지만, 곽사이각과 마찬가지로 바위를 굴려 여포군을 주춤하게 만든다.

이후 이각군이 다시 공격을 해 여포군은 혼란에 빠진다. 여포가 이각군을 치러 가자 곽사군이 다시 공격을 하지만, 여포의 부하 장료에 밀려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한다.

3. 3. 장안성 함락

가후이각, 곽사가 중남산에서 여포를 잡고 있을 때, 장제번조는 동탁의 잔당 이몽, 왕방과 내통해 여포의 부하 고순이 지키고 있던 장안성을 급습했다. 장제번조장안성을 지키던 장수였으므로 장안성의 약점을 알고 그곳을 이용해 들어갔다. 장제이각의 부하 서황과 함께 장안성을 급습했고, 고순이 이끌던 정예부대와 함진영도 밀리고 말았다.

결국 여포는 장안성이 습격 받자 장안성으로 급히 돌아가려 하지만, 이 틈을 노려 다시 이각곽사여포를 공격했다. 여포장안성왕윤에게 피신을 알렸지만, 왕윤은 거절했다. 결국 여포장료고순 등의 몇몇 수하들만 이끌고 남양 태수 원술에게로 피신했다.

결국 왕윤은 물론 태상경 충불, 태복 노규, 대홍려 주환, 성문교위 최열, 월기교위 왕기 등의 산하들이 이각곽사에게 살해당하고 192년 6월에 장안성은 함락되었다. 이때부터 황제는 이각과 곽사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4. 1. 이각과 곽사의 권력 장악

4. 2. 한나라 권위 추락과 군웅할거 심화

4. 3. 마등, 한수 등의 반란과 실패

5. 역사적 평가

5. 1. 부정적 평가

5. 2. 더불어민주당 관점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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