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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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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순은 여포 휘하의 장수로, 청렴하고 과묵하며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여포의 불신과 간언 불응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여포의 부장으로 학맹의 반란을 진압하고, 유비와 하후돈을 격파하는 등 활약했지만, 여포의 패배와 함께 조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고순은 함진영을 이끌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였고, 여포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생애

고순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후한 말의 무장으로 여포(呂布)를 섬겼으며, 그의 행적은 《후한서》, 《삼국지》 및 그 주석서인 《영웅기》, 《구주춘추》 등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순은 청렴하고 과묵하며 위엄 있는 성품을 지녔고, 술과 부당한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이끌던 700여 명의 병력은 잘 훈련된 정예 부대로, 전투마다 적진을 돌파하여 '함진영(陷陣營)'이라 불렸다.[9][10][11][2]

고순은 여포 휘하에서 도독(都督), 중랑장(中郞將) 등을 역임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학맹의 반란을 진압하고[9], 유비하후돈의 군대를 격파하는[2] 등 군사적 공을 세웠으나, 여포는 그의 충언을 항상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198년 하비 전투에서 여포가 조조(曹操)에게 패배하자, 고순 역시 진궁(陳宮) 등과 함께 사로잡혔다.[12] 조조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여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목은 허도(許都) 시장에 효수되었다.

2. 1. 여포 휘하에서의 활약

고순은 여포의 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행적은 《후한서》 여포전, 《삼국지》 여포전 및 그 주석으로 인용된 《영웅기》, 《구주춘추》 등에 기록되어 있다.

건안 원년(196년) 6월, 하비유비에게서 빼앗은 직후 여포의 부하 학맹이 반란을 일으켰다.[9] 이때 도독(都督)이었던 고순은 자신의 병영으로 여포를 피신시키고 신속하게 반란군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진압했다.[10] 학맹은 도주했으나 부하 조성에게 배신당하고 고순에게 최후를 맞았다.

건안 2년(197년), 개양에 주둔하던 장패가 낭야상 소건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거(莒)를 점령했다. 당시 소건을 이미 아군으로 여겼던 여포는 분노하여 장패를 공격하려 했다.[11][5] 고순은 "장군의 위엄과 명성으로도 충분히 장패를 복종시킬 수 있으니, 가볍게 군대를 움직여 패배하면 명성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간언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여포는 고순의 충고를 듣지 않고 출병했으나, 장패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별다른 성과 없이 하비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여포와 장패는 화해했다.

건안 3년(198년) 9월, 고순은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장료와 함께 유비가 지키던 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온 조조의 부장 하후돈의 군대와 싸워 이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2]

배송지진수의 《삼국지》에 단 주석과 왕찬의 《영웅기》 등에 따르면, 고순은 상당군 출신으로 청렴하고 과묵하며 위엄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부당한 선물도 받지 않았다. 비록 700여 명의 병사만을 이끌었지만, 그 병력은 매우 잘 훈련된 정예병으로 천 명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부대는 전투마다 적진을 돌파하여 '함진영(陷陣營, 진영 파괴자)'이라 불렸다. 여포 역시 고순의 충성심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충언을 항상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특히 학맹의 반란 이후에는 고순을 의심하여 병권을 빼앗았다가 전투 시에만 다시 맡기기도 했다. 고순은 이러한 대우에도 불만을 품지 않고 충성을 다했으며, 종종 여포의 경솔한 결정을 지적하며 "일을 시작하실 때 세부 사항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십니다."라고 간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여포는 연패하며 하비성으로 몰렸다. 결국 198년 음력 12월, 여포의 부하 호성, 송헌, 위속 등이 배신하여 고순과 진궁을 붙잡아 조조에게 항복했다.[12][7] 고순은 여포, 진궁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조조의 항복 권유에도 침묵을 지키며 죽음을 택했다. 조조의 명령으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목은 허도의 시장에 효수된 후 매장되었다.

2. 2. 최후

건안 3년(198년) 9월, 중랑장 고순은 장료를 이끌고 유비, 관우, 장비가 지키던 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이어 유비를 구원하러 온 조조의 부장 하후돈까지 격파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포조조의 공격을 받아 하비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 결국 건안 4년(199년) 2월, 하비성이 함락되면서 여포는 조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때 고순 역시 여포, 진궁과 함께 사로잡혔다.[12] 조조의 명령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목은 허도의 시장에 효수된 후 매장되었다.

3. 인물됨

고순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과묵하여 술을 일절 마시지 않았고 어떤 선물이나 뇌물도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배송지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왕찬의 ''영웅기'' (英雄記)에 따르면, 상당군 출신인 그는 엄격하고 청렴하며 위엄 있는 태도를 지녔다.[2]

그가 이끄는 부대는 700명 정도였으나 매우 용맹하고 잘 훈련된 정예 부대였기에 1,000명에 필적한다고 칭송받았으며, 갑옷과 무기는 항상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의 부대는 전투에 참여할 때마다 적진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함진영(陷陣營)'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고순은 주군인 여포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자주 간언했다. 그는 여포의 즉흥적이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행동 방식과 잘못된 언행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대저 집과 국가가 망하게 되더라도, 충신과 지혜로운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행동에 임하실 때 깊이 생각지 않으시며 금세 기꺼워하여 잘못된 말씀을 하시니, 그 실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2]

또한 태산 주변 산적 두목 장패가 약속한 재물을 바치지 않자 여포가 직접 받으러 가려 했을 때, 고순은 장군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여포는 듣지 않았다. 결국 여포는 장패에게 거절당해 체면을 구겼고, 태산의 산적들도 더 이상 여포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2]

여포는 고순의 능력과 충성심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충고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특히 196년 부하 학맹의 반란 사건 이후에는 그를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2] 학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포는 고순에게 피신했고, 고순은 즉시 반란을 진압하여 학맹을 처치했다. 그럼에도 여포는 고순의 병력을 모두 빼앗아 자신의 친척인 위속에게 주었다.[8] 이후 전쟁이 벌어지면 고순에게 위속 휘하의 병사를 지휘하게 했으나, 고순은 이러한 대우에도 평생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변함없이 충성을 다했다고 한다.[2]

조조의 숙적이던 여포의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의 왕찬 등이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영웅기》에서는 고순의 무용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고순은 진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 198년 하비성 공방전 당시, 여포는 진궁과 고순에게 성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출격하여 조조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했으나, 아내가 두 사람의 불화를 지적하며 만류하자 출격을 단념하기도 했다.[2]

4. 《삼국지연의》에서의 고순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흥평 원년(194년)에 여포조조에게서 연주를 빼앗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고순은 팔건장의 일원은 아니다.

복양(濮陽)에서 조조군과의 첫 전투에서는 조조를 거의 한걸음 거리까지 추격했으나, 조조의 부장 전위(典韋)에게 격퇴당했다. 이후 조조의 반격으로 여포가 연주에서 쫓겨날 때, 고순은 여포의 가족을 호위했다.

여포가 유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서주(徐州)를 빼앗을 때, 고순은 여포의 명령으로 원술과 대치하던 유비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고순은 원술의 부장 기령에게 원술이 여포에게 약속했던 군량을 요구했으나 받지 못했다. 원술이 여포를 공격했을 때는 원술 측의 장수 교유의 군대를 격파했다.

소패성에 주둔할 당시, 조조군의 장수 하후돈일기토를 벌였다. 수십 합(소설 18장에서는 40~50합)을 겨루었으나 고순은 열세에 몰려 후퇴했다. 하후돈이 고순을 추격해 적진 깊숙이 들어왔을 때, 고순의 부하 조성(曹性)이 화살을 쏘아 하후돈의 왼쪽 눈을 맞혔다. 하후돈은 비명을 지르며 화살과 함께 눈알을 뽑아 삼키고 즉시 조성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광경에 양측 군사들은 모두 공포에 휩싸였다. 고순은 이 틈을 타 군대를 돌려 하후돈군을 격파하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비에서 여포, 장료 등과 함께 조조군에게 포로로 잡혔다(소설 19장). 조조 앞에 끌려갔을 때 "할 말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으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결국 진궁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5. 현대적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5. 1. 군사적 능력

고순은 여포 휘하의 주요 장수로서 여러 전투와 사건에서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활동은 『후한서』 여포전, 『삼국지』 여포전 및 그 주석으로 인용된 『영웅기』(왕찬 등이 편찬), 『구주춘추』 등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건안 원년(196년) 6월, 여포유비로부터 하비를 빼앗은 직후, 여포군의 곽맹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원술진궁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독[4]이었던 고순은 자신의 병영에 여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한편, 신속하게 곽맹의 부대에 활을 이용한 일제 사격을 가하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달아나던 곽맹은 부하 조성에게 배신당했고, 결국 고순에게 추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건안 2년(197년), 낭야국의 장패소건을 격파하고 거 지역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포는 이미 소건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인 상태였기에 이에 분노하여 장패를 공격하려 했다[5]. 그러나 고순은 "과거 동탁을 주살했을 때의 위세를 이용해 주변 세력을 복속시켜야 하며, 섣불리 군대를 움직여 패배한다면 명성에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조언하며 여포를 만류했다. 여포는 이 충고를 듣지 않고 장패를 공격했으나 결국 격퇴당하고 하비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여포와 장패는 화해했다.

건안 3년(198년) 봄, 여포는 다시 원술과 손을 잡고[6], 고순을 중랑장으로 삼아 장료와 함께 유비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해 9월, 고순은 소패성을 함락시키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조조 군의 하후돈 부대와 싸워 이를 격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여포군은 연이어 패배하며 하비성으로 몰렸다. 결국 같은 해 12월, 여포는 조조에게 패배했고 고순 역시 여포, 진궁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7]. 조조는 항복을 거부하고 침묵을 지킨 고순에게 처형을 명령했다. 고순은 교살된 후, 그의 목은 허의 시장에 효수되었다가 매장되었다.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고순이 하후돈과 40~50합을 겨루다 조성이 쏜 화살에 하후돈이 눈을 맞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되지만, 이는 소설적 각색이다. 정사 기록에서는 고순이 하후돈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5. 2. 충성심과 강직함

고순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과묵하여 술을 일절 마시지 않았고 어떤 선물이나 뇌물도 받지 않았다.[8] 그는 700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렸으나 용맹하여 1,000명으로 칭해졌고, 항상 갑옷과 투구를 정비하여 정예 부대를 유지했다. 공격하는 적을 반드시 격파했기에 그의 부대는 "함진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순은 주군인 여포에 대한 충성심이 두터워 자주 간언했다. 한번은 여포가 태산의 산적 두목 장패가 약속한 물건을 바치지 않자 직접 받으러 가려 했을 때, 고순은 "장군의 위엄과 명성으로 무엇이든 얻으실 수 있는데 직접 선물을 구걸하러 가시면, 만약 성공하지 못할 경우 체면을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으나, 여포는 듣지 않았다. 결국 장패는 여포를 거절했다.

고순은 여포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도 "대저 집과 국가가 망하게 되더라도, 충신과 지혜로운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행동에 임하실 때 깊이 생각지 않으시며 금세 기꺼워하여 잘못된 말씀을 하시니, 그 실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라고 직언하기도 했다.

여포는 고순의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직언을 불편하게 여겨 점차 멀리했다. 특히 196년 부하 학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포는 고순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이후 오히려 고순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여포는 고순이 지휘하던 정예 병력을 빼앗아 자신의 친척인 위속에게 주었고, 전투가 벌어질 때만 고순에게 위속 휘하의 병사를 지휘하게 했다. 그럼에도 고순은 평생 여포를 원망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8]

198년, 고순은 장료와 함께 유비가 주둔하던 패성을 공격하여 조조가 보낸 하후돈의 구원군까지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2] 그러나 같은 해 겨울 시작된 하비 전투에서 여포군이 패배하면서, 199년 2월 7일 고순은 진궁 등과 함께 부하 장수들의 배신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끝까지 여포에 대한 충의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여포, 진궁과 함께 처형되어 그 목이 허창으로 보내졌다.

왕찬 등이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영웅기》에서도 조조의 숙적이던 여포의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순의 무용과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6. 관련 인물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vol. 62
[2] 서적 Records of Heroes
[3] 웹사이트 後漢書 孝獻帝紀 第九 s:zh:後漢書/卷9
[4] 서적 삼국지
[5] 문서
[6] 서적 魏書, 後漢書, 蜀書
[7] 서적 後漢書
[8] 서적 三国志集解
[9] 문서
[10] 서적 삼국지, 영웅기, 후한서
[11] 문서
[12]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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