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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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욱은 파격적인 서예가로, 술에 취해 글을 쓰거나 머리카락으로 먹을 찍어 글씨를 쓰는 등 기존 서예의 틀을 깨는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는 공손대낭의 검무에서 초서의 필법을, 길에서 다투는 모습에서 필법의 뜻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급진적인 서체는 동시대 서예가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후대 안진경 등 개혁적인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자언첩』과 『낭관석주기』가 있으며, 특히 『낭관석주기』는 그의 유일한 해서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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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張旭 |
로마자 표기 | Jhang Wook |
자(字) | 백고(伯高) |
존칭 | 공손대랑(公孫大娘) |
별칭 | 전장취소(顛張醉素) |
인물 정보 | |
직업 | 서예가 시인 |
2. 파격적인 급진 서예가
장욱은 서예와 생활 태도 모두에서 매우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급진적인 글씨는 두보 등 극히 친한 사람 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왕"([왕희지]]와 왕헌지) 일변도의 서예계에 일석을 가하여 안진경 등 개혁파 서예가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일화
이조의 『당국사보』에 따르면, 장욱은 일찍이 공손대낭이라는 무희의 검기무를 보고 초서의 필법을 깨닫는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장욱의 초서는 필법을 얻어 후에 최묘, 안진경에게 전해졌다. 장욱이 일찍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공주와 짐꾼이 길을 다투는 것을 보고 필법의 뜻을 얻었고, 후에 공손씨의 검기무를 보고 그 신(神)을 얻었다'고 했다."[1] 후년에 두보는 공손대낭의 제자인 이십이낭의 춤을 보고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행"이라는 시를 지었다.[1] 그 서문에 따르면, "옛날 오나라 사람 장욱은 초서 서첩을 잘 썼고, 여러 번 업현에서 공손대낭의 서하의 검기무를 보고 이로부터 초서가 크게 발전했다"고 말하고 있다.[1]이는 동시대 서예가들에게는 도저히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당시 서예계는 육조 이래 왕희지・왕헌지 부자의 "이왕"의 서법을 존중했으며, 서예가는 우선 "이왕"의 글씨를 배우고 서예를 체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2]
구양수의 『신당서』 전기에 따르면, "술을 즐겨 크게 취할 때마다, 고함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혹은 머리로 먹에 적셔 글을 썼다. 이미 깨어나 스스로 보니, 신(神)으로 여겨 다시 얻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장전'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며, 그의 글씨는 "광초"라고 불렸다.[3] 앞서 언급한 "음중팔선가"에 따르면 왕이나 귀족 앞에서도 그러한 행동을 꺼리지 않았다고 읊어지고 있다.[3] 이백은 또한 후년에 젊은 초서의 달인 회소를 읊은 "초서가행"에서 "장전은 늙어 죽어 꼽을 수 없고, 나의 스승은 이 뜻에 옛것을 스승 삼지 않았다"고 평했다. 단, "초서가행"은 이백의 시가 아니라 후세의 위작이다.[3]
이러한 전설에는 다소 과장이 있더라도, 그가 권위를 싫어하고 개의치 않는 파격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그 자신과 그의 서예 작품이 그 이전 서예계의 "상식"에 대한 반역과 도전으로 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4]
그의 글씨는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두보 등 극히 친한 사람 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등장으로 "이왕" 일변도의 서예계에 일석이 가해져, 후일 안진경 등 개혁파 서예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5]
안진경・이양빙은 그의 제자라고 전해지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2. 2. 평가
장욱은 서예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에 있어서도 매우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이조의 『당국사보』에 따르면, 장욱은 공손대낭이라는 무희의 검기무를 보고 초서 필법을 깨닫는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장욱의 초서는 필법을 얻어 후에 최묘, 안진경에게 전해졌다. 장욱이 일찍이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공주와 짐꾼이 길을 다투는 것을 보고 필법의 뜻을 얻었고, 후에 공손씨의 검기무를 보고 그 신(神)을 얻었다'고 했다."[1] 후년에 두보는 공손대낭의 제자인 이십이낭의 춤을 보고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행"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옛날 오나라 사람 장욱은 초서 서첩을 잘 썼고, 여러 번 업현에서 공손대낭의 서하의 검기무를 보고 이로부터 초서가 크게 발전했다"고 적혀 있다.[1]당시 서예계는 육조 이래 왕희지・왕헌지 부자의 "이왕"의 서법을 존중했으며, 서예가는 우선 "이왕"의 글씨를 배우고 서예를 체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동시대 서예가들에게 이는 파격적인 이야기였다.[2]
구양수의 『신당서』 전기에 따르면, "술을 즐겨 크게 취할 때마다, 고함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혹은 머리로 먹에 적셔 글을 썼다. 이미 깨어나 스스로 보니, 신(神)으로 여겨 다시 얻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장전'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의 글씨는 "광초"라고 불렸다.[3] 앞서 언급한 "음중팔선가"에는 왕이나 귀족 앞에서도 그러한 행동을 꺼리지 않았다고 읊어져 있다. 이백은 후년에 젊은 초서의 달인 회소를 읊은 "초서가행"에서 "장전은 늙어 죽어 꼽을 수 없고, 나의 스승은 이 뜻에 옛것을 스승 삼지 않았다"고 평했다. 단, "초서가행"은 이백의 시가 아니라 후세의 위작이다.[3]
이러한 전설에는 다소 과장이 있더라도, 그가 권위를 싫어하고 개의치 않는 파격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그 자신과 그의 서예 작품이 그 이전 서예계의 "상식"에 대한 반역과 도전으로 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4]
그의 글씨는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두보 등 극히 친한 사람 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등장으로 "이왕" 일변도의 서예계에 일석이 가해져, 후일 안진경 등 개혁파 서예가들이 부상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5]
또한 안진경・이양빙은 그의 제자라고 전해지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3. 작품
서예가로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욱이지만, 그의 작품 중 진본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진본으로 거의 확정되거나, 상당히 확정될 수 있는 것으로는 『자언첩』과 『낭관석주기』가 있다. 전자는 이왕(二王)의 서법을 따른 평범한 초서이며, 후자는 해서로, 앞선 전설에서 보이는 듯한 맹렬한 "광초"는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통해 그의 반역이 단순한 반역이 아니라, "이왕"의 서법을 충분히 공부한 뒤의 반역이었음을 엿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고 의의가 깊은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4]
3. 1. 자언첩(自言帖)
『자언첩』(自言帖)은 개원 2년(714년) 서적이다. 장욱이 자신의 서풍을 확립하게 된 유래를 설명한 것으로, "스스로 말하다"라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왕희지의 서풍을 따르는 초서로, 때로는 획이 지나치게 길지만 정통파 서풍이다.3. 2. 낭관석주기(郎官石柱記)
郎官石柱記중국어(郎官石記중국어라고도 함)는 741년(개원 29년), 장욱의 서예와 진구언의 찬문으로 이루어졌다. 낭관으로 임명된 사람의 이름을 육각 석주에 새겼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 원석은 북송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 소실되었으며, 원석 탁본은 송대(宋代)의 것이 단 하나 전해질 뿐이다. 한때 명의 왕세무가 소장했으며, 그 모본이 희홍당첩에 새겨졌다. 장욱은 광초의 시조라고 일컬어지지만, 이 서예는 유일한 해서체로서 귀중한 자료이며, 송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참조
[1]
ChineseBioDict
Chang Hsü
Chang Hsü
[2]
뉴스
'퇴계학의 성지' 청량산의 만추…불타는 것이 산뿐이랴
http://www.kookje.co[...]
국제신문
2020-01-23
[3]
뉴스
"[재미있는 중국술] 당시대의 술고래들 (하)"
http://www.newspim.c[...]
뉴스핌
2020-01-23
[4]
뉴스
"[토요 산책] 공주와 짐꾼의 길 다툼"
https://news.naver.c[...]
서울경제
2020-01-23
[5]
뉴스
동양미학의 변주…오늘의 수묵화를 보다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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