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현황귀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혜현황귀비는 양황기 포의관료 출신으로, 옹정제의 넷째 아들 홍력(후일 건륭제)의 측복진으로 간택되었다. 건륭제 즉위 후 귀비로 책봉되었으며, 황후를 보필하고 태후를 봉양하며 현덕과 효성을 인정받았다. 1745년 황귀비로 진봉되었으나 이틀 만에 사망하여 혜현황귀비의 시호를 받았다. 건륭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권전을 짓고, 사후 효현순황후, 철민황귀비와 함께 유릉에 부장하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45년 사망 - 조너선 스위프트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사제로, 풍자와 사회 비판으로 유명하며 '걸리버 여행기', '드레이피어 서한', '겸손한 제안'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 부조리를 풍자적으로 비판했고 더블린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의 학장으로도 활동했다. - 1745년 사망 - 카를 7세
카를 7세는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와 동맹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으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전쟁과 영토 상실을 겪었고 바이에른 로코코 시대의 문화적 절정기를 이끌었다. - 1711년 출생 - 라우라 바시
라우라 바시는 171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볼로냐 대학교 최초의 여성 과학 교수로 임명되어 뉴턴 역학, 실험 물리학 등을 연구했으며, 교황의 후원을 받고 볼테르 등과 교류하다가 1778년 사망 후 금성 분화구 등으로 기념되었다. - 1711년 출생 -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에도 막부 제9대 쇼군으로, 건강 문제와 언어 장애에도 불구하고 쇼군직을 계승하여 일부 경제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회 불안을 겪었고, 측근을 중용했으며, 아들에게 쇼군직을 양위한 후 사망하여 그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청나라의 후궁 - 화유황귀비
화유황귀비는 청나라 가경제의 후궁으로, 가경제의 첩 시절 두 자녀를 두었으며 함비, 함귀비를 거쳐 현희황귀태비로 봉해졌고 사후 화유황귀비로 추증되었으며 73세에 사망하여 창릉에 안장되었다. - 청나라의 후궁 - 경민황귀비
경민황귀비는 강희제의 후궁으로, 옹친왕 인상의 생모이며, 비빈으로 총애를 받아 윤상 등 자녀를 낳고 사망 후 민비로 추증, 아들 윤상의 공헌으로 황귀비로 추봉, 최종적으로 경민황귀비로 추존되어 경릉에 합장되었으나, 출생년도, 입궁 시기, 가족 배경 등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2. 생애
혜현황귀비는 내무부 수녀 선발을 통해 황자 홍력(훗날 건륭제)의 시녀 격격(格格)이 되었고, 옹정제 12년(1734년) 측복진(側福晉)으로 봉해졌다. 건륭제 즉위 후인 옹정 13년(1735년) 가문이 만주 양황기로 편입되었으며, 건륭 2년(1737년)에는 귀비(貴妃)로 책봉되어 종수궁(鍾粹宮)에 거처했다. 그녀는 온화한 성품으로 효현순황후와 숭경황태후를 잘 모셨다고 전해진다.
건륭 10년(1745년) 병세가 위독해지자 황귀비(皇貴妃)로 진봉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하여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후 청동릉 유릉(裕陵)에 부장되었으며, 가경 23년(1817년)에는 일족 전체가 만주족으로 편입되면서 고가씨(高佳氏) 성을 하사받고 황실 족보인 옥첩(玉牒)의 기록도 수정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혜현황귀비 고가씨(高佳氏)는 원래 한족(漢族) 출신으로, 내무부(內務府) 양황기(鑲黃旗) 소속의 한인 보의(包衣) 가문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요양(遼陽) 지방에 기반을 두었으며 대대로 관료를 배출했다.[1] 청나라에서는 황제의 후궁이 된 한족 여성의 가문을 만주 팔기(八旗)로 편입시키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고씨 가문은 만주 양황기로 편입되었고 성씨도 고(高)에서 만주식인 高佳|고가중국어로 바뀌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민족 정체성이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변경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고가씨는 "아름답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훌륭한 성격과 다재다능한 여성"으로 묘사된다.[1] 그녀가 언제 궁녀가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내무부의 수녀 선발을 통해 당시 황자였던 홍력(弘曆, 훗날의 건륭제)에게 보내져 시녀인 격격(格格)이 되었다. 옹정제(雍正帝) 13년(1735년) 3월 1일, 옹정제의 명으로 격격에서 측복진(側福晉)으로 승격되었다. 측복진에 맞는 관복과 물품이 제작되었으나, 정식 혼례(補婚禮)를 올렸다는 기록은 없고 책봉 의식만 거행되었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건륭 원년(1736년) 2월에는 귀비(貴妃) 책봉이 논의되었고, 그해 5월 종수궁(鍾粹宮)을 정비하여 그녀의 거처로 삼았다. 종수궁에는 건륭제가 직접 쓴 "숙신온화(淑愼溫和)"라는 현판이 걸렸다. 건륭 2년(1737년) 8월, 생모 마씨(馬氏)와 남동생 고항(高恆)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입궁하였고, 귀비가 된 딸(누나)을 만나고 건륭제의 하사품을 받았다. 아버지 고빈(高斌)은 이 소식을 듣고 같은 해 11월 감사를 표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건륭 5년(1740년) 초에도 어머니 마씨가 다시 입궁하여 귀비를 만나고 건륭제를 알현하는 등 가족과 교류를 이어갔다.
제문(祭文) 기록에 따르면, 고가씨는 항상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황후 부찰씨에게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며, 황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공손하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숭경황태후를 정성껏 모셔 효성을 인정받았다. 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다른 비빈들과 원만하게 지내 존경과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2. 2. 건륭제 즉위와 후궁 생활
혜현황귀비 고씨는 본래 옹정제의 넷째 아들인 보친왕 홍력(훗날 건륭제)을 모시는 시녀(使女)였다. 옹정 13년(1735년) 3월 1일, 옹정제의 명으로 격격(格格)에서 측복진(側福晉)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측복진으로 책봉하는 의식은 있었으나, 정식 혼인 예식인 보혼례(補婚禮)를 치렀다는 기록은 없다.옹정제가 1735년 10월 8일에 사망하고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하였다. 건륭제는 즉위 직후, 아버지 고빈(高斌)이 옹정제에게 올린 상소에 대해 직접 답하며 고씨를 언급했다. 건륭제는 고빈에게 "아버지는 네 재능을 알아보고 높은 자리에 임명하였다. 네가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네 딸이 나를 시중들고 있지만, (네가) 악의를 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국가 법률로 용납될 수 없다. 만약 네가 성실과 청렴으로 나라에 충성한다면, 편애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상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했다.[2]
건륭 원년(1736년) 5월, 고씨는 종수궁(鍾粹宮)에 정식으로 거처하게 되었다. 종수궁의 앞 전각에는 건륭제가 직접 쓴 "숙신온화(淑愼溫和)"라는 현판이 걸렸다.
건륭 2년(1737년) 8월, 고씨의 어머니 마씨가 아들 고항과 함께 베이징으로 와 궁궐에서 귀비 고씨를 만났고, 건륭제로부터 하사품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고빈은 같은 해 11월 13일에 상소를 올려 감사를 표했다. 건륭 5년(1740년) 초에는 어머니 마씨가 다시 궁에 들어와 고씨를 만나고 황제를 알현했으며, 함께 연극을 관람하고 여의 등 여러 물건을 하사받기도 했다.
건륭 2년 12월 4일(1738년 1월 23일), 고씨는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당시 궁궐 내에서 귀비 품계를 가진 이는 고씨뿐이었기에, 다른 후궁들과 구별되는 별도의 호칭은 받지 않았다.
제문(祭文)과 기록에 따르면, 고귀비는 아름답고 교양이 있었으며 성품이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다. 그녀는 효현순황후에게 겸손하고 온화했으며, 황후를 도와 후궁을 다스리고 효성헌황후를 정성껏 봉양하여 태후로부터 현명함과 효성을 칭찬받았다. 또한 다른 비빈들과도 원만하게 지내 존경과 명성을 얻었다.
건륭 10년 1월 23일(1745년 2월 23일), 고귀비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건륭제는 그녀를 황귀비(皇貴妃)로 책봉하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틀 뒤인 1월 25일(1745년 2월 25일) 고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책봉식은 거행되지 못했다. 건륭제는 그녀가 죽기 얼마 전, 철민황귀비의 것보다 격이 높은 권전(權殿, 임시 빈전)을 지어주며 애정을 보였다. 사후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1752년, 청동릉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2. 3. 황귀비 진봉과 죽음
건륭제 즉위 직후인 옹정 13년(1735년) 9월 24일, 고씨 집안은 양황기(鑲黃旗) 포의 좌령에서 만주 양황기로 편입되어 신분이 상승하였다.건륭 2년(1737년) 2월 4일, 건륭제는 보화전 대학사 장정옥을 정사(正使)로, 내각 학사 삭주(索柱)를 부사(副使)로 삼아 고씨를 귀비(貴妃)로 책봉하고 종수궁(鍾粹宮)에 거처하게 하였다.[1] 당시 궁중에서 귀비 품계를 지닌 이는 고씨뿐이었기에 별도의 봉호는 없었다. 종수궁에는 건륭제가 직접 쓴 '숙신온화(淑愼溫和)' 현판이 걸렸다. 고귀비는 부찰황후를 공경하며 보필했고, 숭경황태후를 봉양하는 등 궁중 생활에 충실하여 온화하고 공손하다는 평을 받았다. 태후 역시 일찍이 그녀의 현명함과 효성을 칭찬하였다.
건륭 2년(1737년) 8월과 건륭 5년(1740년) 초, 고귀비의 어머니 마씨(馬氏)와 오빠 고항(高恒)이 궁에 들어와 고귀비를 만나고 건륭제를 알현하였으며, 황제로부터 여러 하사품을 받았다. 아버지 고빈은 이 소식을 듣고 감사를 표하는 상소를 올렸다.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가 고빈의 재능을 알아보고 중용했음을 언급하며, 고빈에게 충성과 청렴을 다할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그의 딸인 고귀비가 자신을 모시는 것을 빌미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 "아버지는 네 재능을 알아보고 높은 자리에 임명하였다. 네가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네 딸이 나를 시중들고 있지만, 악의를 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국가 법률로 용납될 수 없다. 만약 네가 성실과 청렴으로 나라에 충성한다면, 편애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상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2]
건륭 10년(1745년) 1월 23일, 고귀비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건륭제는 그녀를 황귀비(皇貴妃)로 진봉시켰다. 그러나 이틀 뒤인 1월 25일 밤, 황귀비 고씨는 훙서하였고, '혜현(慧賢)'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내무부 《홍칭통용(紅稱通用)》에 따르면, '혜(慧)'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현(賢)'은 덕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황귀비로 진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에 책봉식은 거행되지 못했다.
혜현황귀비의 죽음 이후, 건륭제는 그녀를 위해 철민황귀비보다 격이 높은 권전(權殿, 임시 빈전)을 마련하도록 명했다. 삼촌 고옥(高鈺)과 사촌오빠 고녕(高寧) 등이 급히 베이징으로 와 조문했으며, 양강총독 윤계선(尹繼善) 등 지방 관리들도 위로를 표했다. 장례 기간 동안 라마교 승려들이 동원되어 독경하는 등 성대한 의식이 치러졌다.
건륭 17년(1752년) 10월 27일, 혜현황귀비는 효현순황후, 철민황귀비와 함께 청동릉의 유릉(裕陵)에 부장되었다. 이후 가경 23년(1817년) 1월, 고씨 일족 전체가 만주족으로 편입되면서 고가씨(高佳氏)라는 성을 하사받았고, 가경제는 옥첩(玉牒, 황실 족보)에 기록된 혜현황귀비의 성씨를 고씨에서 고가씨로 수정하도록 명했다.
건륭 10년 (1745년) 2월 23일, 고귀비(高貴妃)가 위독해지자 건륭제는 그녀를 황귀비(皇貴妃)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책봉 결정 이틀 후인 2월 25일 사망하여 책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의 원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한족(漢族) 출신으로, 본래 내무부(內務府) 포의(包衣) 양황기(鑲黃旗) 한군(漢軍) 고씨(高氏) 가문 사람이었다.[1] 청나라에서는 후궁 본인과 그녀의 형제, 사촌 등 가까운 남성 친척이 한군 기인(漢軍 旗人)일 경우, 만주 기분(滿洲 旗分)으로 편입시키는 관례가 있었다. 이에 따라 혜현황귀비와 그녀의 형제, 사촌들은 만주 양황기(滿洲 鑲黃旗)로 편입되었고, 청나라 조정의 시각에서는 사실상 한족에서 만주족(滿洲族)으로 민족이 변경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씨 또한 고(高)에서 만주식인 고가(高佳)로 바뀌었다.[1]
3. 사후
같은 해 3월 3일, 옹화궁 만문기록물 번역편에 따르면, 혜현황귀비의 재궁이 정령한 육계도 장례식장에서 제사가 거행되었다. 이때 내무부 소속 태감들은 후궁들의 지위에 따라 수레를 나누어 타고 이동했는데, 서난전 황후의 태감, 익곤궁 한귀비와 장춘궁 가비의 태감, 경인궁 순귀비와 영화궁 유비의 태감, 승건궁 서빈, 연희궁 이빈과 영수궁 영빈의 태감 순으로 수레에 탑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같은 해 3월 8일, 태감 호세걸이 《칙건백의관음암》이라는 현판과 어필 대련, 그리고 《혜현지원》이라는 현판과 어필 대련을 교부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것이 혜현황귀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불분명하다.
1752년, 청동릉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건륭 33년 (1768년), 혜현황귀비의 동생 고항과 조카 고박이 탐오죄로 연이어 탄핵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항의 처형을 앞두고 대학사 부항은 이미 사망한 혜현황귀비를 생각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건륭제에게 청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부항에게 "황후의 형제가 법을 어기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결국 고박은 처형되었고, 건륭제는 "고박은 탐욕스럽고 법을 무시하며, 그 부친 고항보다 더 심하다. 혜현황귀비의 조카라고 해서 조금도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엄격한 법 집행 의지를 보였다.[2]
4. 가족 관계
'''가계'''
'''기타 친척'''
5. 미디어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Eminent Chinese of the Qing Period: 1644-1911/2
https://books.google[...]
Berkshire Publishing Group
2018
[2]
문서
Ho & Bronson (2004)
[3]
문서
雍正十二年 三月 一日
[4]
문서
乾隆二年 十二月 四日
[5]
문서
乾隆十年 正月 二十三日
[6]
문서
乾隆十年 正月 二十六日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