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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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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기 왜구는 1350년경부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침략한 일본 해적 집단을 지칭한다. 1350년 2월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으며, 1370년대에는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고려는 최영, 이성계 등을 중심으로 왜구에 맞서 싸웠으며, 최무선, 정지, 박위 등이 왜구 격퇴에 기여했다. 명나라가 건국된 후, 명나라는 일본에 왜구 단속을 요청했고,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왜구를 진압하고 명나라와 감합무역을 시작했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규슈의 다이묘들이 명나라와 교역하고, 대마도가 정벌되면서 전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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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왜구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분쟁전기 왜구
전체왜구
날짜1350년 2월 ~ 1419년경
장소한반도 전역 및 중국 동남해안
결과왜구의 토벌
교전 세력
교전국 1왜구
교전국 2고려조선
교전국 3명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왜구 지휘관아지발도
패가대
등경광
고려/조선 지휘관최영
이성계
정지
박위
최무선
변안열
배극렴
정몽주
병력 규모
왜구 병력불명
고려/조선 병력불명
명나라 병력불명
사상자 규모
왜구 사상자불명
고려/조선 사상자불명
명나라 사상자불명
관련 전투
주요 전투오예포 전투
이작도 전투
진해 전투
삼일포 전투
합포 전투
홍산대첩
행안산 전투
해풍 전투
진포 해전
황산대첩
관음포대첩
대마도 정벌

2. 전기 왜구의 발흥과 고려의 대응

고려사에 따르면 1350년 2월부터 왜구의 침범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3] 1223년(고려 고종 10년) 5월에 왜구가 등장했다는 것이 고려사의 첫 왜구 기록이지만, 여말선초를 휩쓴 전기 왜구 세력이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때부터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일본 조정에 왜구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당시 규슈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로 정서장군이었던 가네요시 친왕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가네요시 친왕 측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일본국왕"을 칭했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 파견된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규슈 남조 세력이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392년 남북조 시대를 종결시켰다. 이후 명과의 무역을 원한 요시미쓰는 명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했고,[4] 새로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어 1404년부터 감합무역을 개시했다.

이처럼 전기 왜구는 무로마치 막부와 기타큐슈의 슈고 다이묘들이 명과 교역하고 쓰시마가 고려 및 이후 조선에게 정벌되면서 수그러졌다.

2. 1. 왜구의 침입과 피해

1350년(충정왕 2년) 2월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2][3]고려사》에는 1223년(고려 고종 10년) 5월에 왜구가 처음 등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이어진 전기 왜구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1370년대를 지나면서 전기 왜구의 활동 범위는 남해안뿐만 아니라 북부 연안과 남부 내륙까지 확대되었다.

1376년 최영홍산에서, 1380년 이성계가 황산에서, 최무선진포에서, 1383년 정지가 관음포대첩에서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389년 박위는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직접 공격하여 왜구 배 300여 척을 격파하고 포로를 구출한 뒤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이후 전기 왜구의 침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2. 2. 고려의 군사적 대응

1376년 최영홍산에서, 1380년 이성계가 황산에서, 최무선진포에서, 1383년 정지가 관음포대첩에서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2][3] 1389년 박위쓰시마를 공격하여 왜구 배 300여 척을 격파하고 포로를 구출한 뒤 마을에 불을 지르고 귀환했다. 이후 전기 왜구의 침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3. 명나라 건국과 동아시아 정세 변화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 시대를 통일하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4]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내 단속을 요청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와의 무역을 원했기에 왜구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러한 노력으로 전기 왜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3. 1. 명나라의 대일 정책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창건한 이후 일본 조정에 왜구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은 남조의 근거지인 규슈에 도착했다. 당시 규슈에서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로 정서장군이었던 가네요시 친왕이 활동하고 있었다. 가네요시 친왕측은 명나라에서 책봉을 받아 "일본국왕"을 칭했다.[4]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 파견된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규슈 남조 세력이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의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1392년 남북조 시대를 종결시킨다. 이후 명과의 무역을 원한 요시미쓰는 명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했고, 새로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어 1404년부터 감합무역을 개시했다.

3. 2. 일본 남북조 시대의 종식과 무로마치 막부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로 정서장군이었던 가네요시 친왕이 활동하던 규슈 남조 세력이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392년 남북조 시대를 종결시킨다.[4] 이후 명과의 무역을 원한 요시미쓰는 명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했고, 새로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어 1404년부터 감합무역을 개시했다.

4. 전기 왜구의 쇠퇴와 조선의 대응

1350년 (고려 충정왕 2년)부터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한 전기 왜구는[2][3] 1370년대를 지나며 남해안 뿐 아니라 북부 연안과 남부 내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고려1376년 최영홍산 전투, 1380년 이성계의 황산 대첩최무선진포 대첩, 1383년 정지의 관음포대첩 등에서 왜구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한편, 1368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일본 조정에 왜구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은 당시 남조의 근거지였던 규슈에 도착했고, 가네요시 친왕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일본국왕"을 칭하기도 했다.

전기 왜구는 무로마치 막부와 기타큐슈의 슈고 다이묘들이 명과 교역하고 조선대마도를 정벌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4. 1. 무로마치 막부의 왜구 진압

명나라와 무역을 원했던 무로마치 막부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했다.[4] 요시미쓰는 1392년 남북조 시대를 종결시키고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어 1404년부터 감합무역을 개시했다.

4. 2. 명일 감합무역의 시작

1392년 무로마치 막부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남북조 시대)를 종결시켰다. 이후 명과의 무역을 원한 요시미쓰는 명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했고,[4] 1404년부터 감합무역을 개시하면서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었다.

4. 3. 조선의 대마도 정벌

1389년 박위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직접 타격하여 왜구 선박 300여 척을 격파하고 포로를 구출한 뒤 마을에 불을 지르고 귀환했다.[2][3] 이후 전기 왜구의 침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근거지를 직접 타격하여 왜구의 활동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

참조

[1] 서적 한 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1998-11-20
[2]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7
[3] 서적 한국사 이야기 8 한길사 2007
[4] 서적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M&B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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