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계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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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1341년부터 1365년까지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분쟁이다. 브르타뉴 공작 아르투르 2세의 사후, 그의 아들 장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이복 동생 장 드 몽포르와 조카 잔 드 팡티에브르가 상속권을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잔 드 팡티에브르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장 드 몽포르를 지지하면서 백년 전쟁과 얽혀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전쟁은 몽포르파의 승리로 끝났으며, 1364년 오레 전투에서 샤를 드 블로아가 사망하고 1365년 게랑드 조약으로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으면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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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계승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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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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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브르타뉴 계승 전쟁 |
일부 | 백년 전쟁 |
날짜 | 1341년 ~ 1365년 4월 12일 (게랑드 조약) |
장소 | 브르타뉴 반도 |
결과 | 몽포르 가문의 군사적 승리 |
교전국 1 | 돌뢰몽포르 가문 |
교전국 2 | 샤티용-블루아 가문 |
지휘관 1 | 장 드 몽포르 |
지휘관 2 | 샤를 드 블루아 (전사) |
교전 세력 | |
몽포르 가문 | 잉글랜드 왕국 몽포르 가문 |
블루아 가문 | 프랑스 왕국 블루아 가문 카스티야 왕국 |
주요 지휘관 | |
몽포르 가문 | 장 드 몽포르 (사망) 잔 드 플랑드르 장 4세 드 브르타뉴 토마스 대그워스 경 |
블루아 가문 | 샤를 드 블루아 (전사) 잔 드 팽티에브르 |
주요 전투 |
2. 역사적 배경
브르타뉴인들은 고대에 브리튼 섬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으로 민족적인 연관성이 있었고, 중세에 브르타뉴 공작이 잉글랜드의 리치먼드 백작을 수여받으면서 잉글랜드와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아르튀르 1세 사후, 앙주 가문을 대신하여 공작위에 오른 드뢰 가문은 프랑스 왕과의 관계도 좋았다.
브르타뉴 공작 장 3세의 아버지 아르투르 2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 마리 드 리모주와의 사이에서 장 3세, 기 등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 몽포르 여백작 욜랑드(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의 부인)와의 사이에 장 드 몽포르 등을 두었다. 장 3세는 이복 동생들을 싫어하여 욜랑드의 혼인 무효를 신청하고, 장 등의 상속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장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후계자로 동생 기를 지명했지만, 1331년에 기는 사망했다. 그의 딸 잔이 후계자로 여겨졌지만, 장 3세는 장 드 몽포르와 화해했으며, 1341년 사망 시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았다. 몽포르 백작 장과 팡티에브르 백작 잔이 상속권을 주장했다.
잔의 남편 샤를 드 블루아의 어머니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었고, 필리프 6세는 조카 부부의 상속을 지지했다(콩플랑의 결정). 장 드 몽포르는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대립하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고 지원을 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여계 상속으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고, 필리프 6세는 남계 상속을 우선하여 프랑스 왕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에서는 반대 이유를 주장하는 후보를 지지했다. 상속 제도는 명확하지 않고 지역마다 달랐기에 모순은 아니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왕국의 "동료"(pair)이므로, 일 드 프랑스의 관습(연장자 남자가 연장자 여자보다 상속권이 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타뉴 관습은 여자 상속을 배제하지 않으며, 팡티에브르 여백작의 상속 순위가 더 높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받았다.
2. 1. 브르타뉴 공작 가계와 상속 분쟁
브르타뉴 공작들은 역사적, 조상적 관계를 통해 영국과 연결되어 있었고, 요크셔의 리치먼드 백작이기도 했다. 아르투르 2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마리 드 리모주(1275-1291)와, 두 번째는 요랑드 드 드뢰(1263-1322)였다. 요랑드는 몽포르 백작 부인이자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의 미망인이었다. 아르투르 2세는 첫 번째 결혼에서 장 3세와 펜티에브르 백작 가이(1331년 사망)를 포함한 세 아들을 두었다. 요랑드와의 사이에서는 또 다른 아들 존을 두었고, 그는 몽포르 백작이 되었다.장 3세는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이 결혼을 무효화하고 이복 형제들을 사생아로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그는 장 드 몽포르가 공작위를 상속받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 장 3세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상속인은 남동생 가이의 딸인 장 드 펜티에브르였다. 1337년 그녀는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했는데, 샤를의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었다. 1340년 장 3세는 이복 형제와 화해하고 장 드 몽포르를 브르타뉴의 상속자로 임명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341년 4월 30일 장 3세가 사망했다.
브르타뉴인들은 고대에 브리튼 섬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으로, 중세에 브르타뉴 공작이 잉글랜드의 리치먼드 백작을 수여받으면서 잉글랜드와 관계가 깊었다. 아르튀르 1세 사후, 앙주 가문을 대신하여 공작위에 오른 드뢰 가문은 프랑스 왕과의 관계도 좋았다.
아르투르 2세는 첫 번째 부인 마리와의 사이에 장 3세, 기 등을 두었지만, 두 번째 부인 몽포르 여백작 욜랑드(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의 부인)와의 사이에 장 드 몽포르 등을 두었다. 장 3세는 이복 동생들을 싫어하여 욜랑드의 혼인 무효를 신청, 장 등의 상속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장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후계자로 동생 기를 지명했지만 1331년에 기는 사망했다. 그의 딸 잔이 후계자로 여겨졌지만, 장 3세는 장 드 몽포르와 화해했으며, 1341년 사망 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몽포르 백작 장과 팡티에브르 백작 잔이 상속권을 주장했다.
잔의 남편 샤를 드 블로아의 어머니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었고, 필리프 6세는 조카 부부의 상속을 지지했다(콩플랑의 결정). 장 드 몽포르는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대립하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고 지원을 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여계 상속으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고, 필리프 6세는 남계 상속을 우선하여 프랑스 왕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에서는 반대 이유를 주장하는 후보를 지지했다. 상속 제도는 명확하지 않고 지역마다 달랐기에 모순은 아니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왕국의 "동료"(pair)이므로, 일 드 프랑스의 관습(연장자 남자가 연장자 여자보다 상속권이 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타뉴 관습은 여자 상속을 배제하지 않으며, 팡티에브르 여백작의 상속 순위가 더 높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받았다.
2. 2.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개입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들은 역사적, 혈연적 관계를 통해 영국과 연결되어 있었고, 요크셔의 리치먼드 백작이기도 했다. 아르투르 2세 드 브르타뉴 공작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마리 드 리모주(1275-1291)와, 두 번째는 요랑드 드 드뢰(1263-1322)였다. 요랑드는 몽포르 백작 부인이자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의 미망인이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아르투르 2세는 장 3세 드 브르타뉴 공작과 펜티에브르 백작 가이(1331년 사망)를 포함한 세 아들을 두었다. 요랑드와의 사이에서는 또 다른 아들 존을 두었고, 그는 몽포르 백작이 되었다.장 3세는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매우 싫어했다.[1] 그는 통치 초기에 이 결혼을 무효화하고 이복 형제들을 사생아로 만들려고 시도했다.[1] 이것이 실패하자 그는 장 드 몽포르가 결코 주권 공작위를 상속받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1] 장 3세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선택된 상속인은 그의 남동생 가이의 딸인 장 드 펜티에브르 여공작이었다.[1] 1337년 그녀는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했는데, 샤를의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었다.[1] 그러나 1340년 장 3세는 이복 형제와 화해하고 장 드 몽포르를 브르타뉴의 상속자로 임명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1] 1341년 4월 30일 장 3세가 사망했다.[1]
대부분의 귀족은 샤를 드 블로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몽포르의 장이 어떤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이루어지기 전에 신속한 행동이 필요했다.[2] 장은 재빨리 공작 수도인 낭트를 점령한 다음 리모주에서 공작 재무부를 압수했다.[2] 8월 중순까지 몽포르의 장은 공국의 대부분, 즉 낭트, 렌 및 반의 세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2]
이 시점까지 계승 위기는 순전히 내부 문제였다.[3] 그러나 4년 전인 1337년에 발발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으로 인해 상황이 복잡해졌다.[3] 1341년에는 두 나라 사이에 휴전이 있었지만, 1342년 6월에 휴전이 끝나면 적대 행위가 재개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3] 프랑스의 필리프 6세에게 몽포르의 장이 잉글랜드 요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리자 프랑스 왕실은 이웃의 상황에 더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다.[3] 샤를 드 블로아가 공식적인 프랑스 후보가 되었다.[3] 몽포르의 장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지지해야 했다.[3]
에드워드 3세는 휴전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서 어떤 공격적인 행동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4] 그러나 그 조약에는 프랑스가 반역적인 봉신을 제압하는 것을 방해하는 내용은 없었다.[4] 11월, 샹토소 전투에서 짧은 포위와 패배 후 몽포르의 장은 시민들에 의해 낭트에서 항복해야 했다.[4] 그는 샤를 드 블로아와 협상을 하기 위해 안전 통행권을 제안받았지만, 이것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감옥에 갇혔다.[4]
장의 아내인 플랑드르의 잔이 몽포르파의 대의를 이끌었다. 그녀는 동부의 재산이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브르타뉴 서부에 있는 앙보에 본부를 설치했지만, 브레스트로 쫓겨나 포위되었고, 이 포위는 1342년 8월 18일 브레스트 해전에서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도착하면서 깨졌다. 노샘프턴은 내륙으로 진격하여 처음에는 공격에 실패한 후 몰레로를 포위했다. 포위는 9월 30일 몰레 전투 이후 해제되었다. 파리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휴전이 끝나면 칼레에 상륙할까 봐 두려워했다. 프랑스 군대의 주요 부분은 철수했고 샤를 드 블로아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추구하도록 남겨졌다. 샤를은 곧 유능한 군인임을 증명했다. 렌과 반이 점령되었고 많은 몽포르파 대위가 탈주했다.
11월 말,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그는 거의 즉시 반을 향해 진격했다. 포위는 계속되었고 프랑스 군대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소집되었지만, 1343년 1월 19일, 주요 교전이 벌어지기 전에 두 왕은 새로운 휴전에 합의했다. 반은 교황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몽포르의 장은 감옥에 갇히고, 그의 아들은 유아이며, 그의 아내는 최근 정신이상이 되었으므로 몽포르파가 통제하는 장소는 실제로 런던에서 관리되었고, 브레스트에는 대규모의 영구적인 잉글랜드 수비대가 있었다.
휴전은 1346년 9월 29일까지 지속되었지만, 브르타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휴전은 두 왕과 그 추종자들을 묶었지만 샤를 드 블로아는 자신의 별도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어떤 휴전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잔혹한 소규모 전투는 같은 속도로 계속되었다.
파리에서 몽포르의 장은 거액의 보증금과 동부 영지에 머물겠다는 약속을 받고 1343년 9월 1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잉글랜드 해안 수비대는 굳건히 버텼지만 몽포르파는 계속 무너졌다. 그들은 반에서 교황 보호자를 추방하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성공을 거두었지만, 통일된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런던에서 사람과 돈을 구걸하는 데 그쳤다.
브레스트와 반 사이의 통신을 방해하기 위해 샤를 드 블로아는 1344년 3월 초에 캥페르를 포위했다. 이 도시는 5월 1일에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당시 관례에 따라 1,400명에서 2,000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위해 붙잡혔지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포로들은 파리로 보내져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여름과 가을 동안 몽포르파는 무너졌다. 몽포르의 장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들조차도 이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했다. 1345년 3월에 장이 잉글랜드로 탈출했다. 그는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의 야망을 나타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3세는 휴전이 만료되기 1년 전인 1345년 여름에 휴전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더 큰 전략의 일환으로,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과 몽포르의 장이 공동으로 이끄는 군대가 브르타뉴로 파견되었다. 6월에 상륙한 지 일주일 만에 잉글랜드는 노샘프턴의 부관 중 한 명인 토마스 대그워스 경이 브르타뉴 중부를 습격하여 조슬랭 근처의 카도레에서 샤를 드 블로아를 물리치면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후속 조치는 덜 인상적이었다. 추가 작전은 7월까지 지연되었고, 몽포르는 캥페르를 재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주요 작전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프랑스 정부에 전해졌고, 그들은 노르망디에서 증원을 보낼 수 있었다. 강화된 군대를 이끌고 샤를 드 블로아는 포위를 풀었다. 몽포르는 패배하여 앙보로 도망쳐 9월 16일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몽포르파 대의의 상속자는 그의 다섯 살 된 아들 브르타뉴의 장 4세였다.
겨울 동안 노샘프턴은 반도의 북쪽에 있는 항구를 점령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작전을 펼쳤다.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여름에 그의 주력 부대를 이곳에 상륙시킬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그들의 노력에 대해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부 브르타뉴는 팡티에브르의 잔의 고향이었고 그곳의 저항은 완강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1346년 작전의 상륙 지점으로 노르망디를 결정했다. 노샘프턴은 소환되었고 토마스 대그워스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6월 9일, 대그워스와 그의 호위병이 잉글랜드 요새를 순회하는 동안 생폴드레옹 근처에서 샤를 드 블로아와 그의 군대에 의해 갇혔다. 그들은 언덕 꼭대기에 참호를 파고 밤이 될 때까지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샤를은 부상자들을 남겨둔 채 후퇴해야 했다.
브르타뉴인들은 고대에 브리튼 섬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으로 민족적인 연관성이 있었고, 중세에 브르타뉴 공작이 잉글랜드의 리치먼드 백작을 수여받으면서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아르튀르 1세의 사망 후, 앙주 가문을 대신하여 공작위에 오른 드뢰 가문은 프랑스 왕과의 관계도 좋았다.
브르타뉴 공작 장 3세의 아버지 아르튀르 2세는 첫 번째 부인 마리와의 사이에 장 3세, 기 등을 두었지만, 두 번째 부인 몽포르 여백작 욜랑드 (전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의 부인)와의 사이에 장 드 몽포르 등을 두었다. 아버지의 사망 후 공작위에 오른 장 3세는 욜랑드와 그녀의 자녀인 이복 동생들을 싫어하여 욜랑드의 혼인 무효를 신청, 장 등의 상속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장 3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후계자로 동복 동생 기를 지명했지만, 1331년에 기는 사망했다. 이 때문에, 그의 딸이자 조카인 잔이 후계자로 여겨졌지만, 장 3세는 후에 장 드 몽포르와 화해했으며, 1341년 4월 30일에 사망했을 때는 특별히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미 몽포르 백작을 상속받은 장과 팡티에브르 백작을 상속받은 잔이 함께 브르타뉴 공작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잔의 남편 샤를 드 블로아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여동생이었고, 필리프 6세는 조카 부부의 상속을 지지했다 (콩플랑의 결정). 장 드 몽포르는 이에 대항하여, 이미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대립 관계에 있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지원을 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여계 상속에 의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고, 필리프 6세는 남계 상속을 우선시하여 프랑스 왕이 되었지만, 브르타뉴에서는 각각 반대의 상속 이유를 주장하는 후보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속 제도는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고, 지역에 따라서도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모순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장 드 몽포르의 주장은, 브르타뉴 공작은 이미 프랑스 왕국의 "동료"(pair)가 되었고, 가장 연장자인 남자가 가장 연장자인 여자보다 상속권이 위에 있는 일 드 프랑스의 관습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브르타뉴의 관습에서는 여자에 의한 상속이 배제되지 않으며 (과거에 세 번의 사위(女婿)에 의한 상속이 이루어졌다), 팡티에브르 여백작의 상속 순위가 더 높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에드워드 3세는, 그녀가 샤를과 결혼하기 전에 자신의 동생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했다).
3. 전쟁의 전개
브르타뉴 귀족 대다수는 샤를 드 블로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장 드 몽포르는 재빨리 낭트(수도), 리모주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8월까지 렌과 반느를 포함한 브르타뉴 공국 대부분을 지배했다.
1341년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휴전 중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국내 문제라며 샤를 드 블로아를 적극 지원하여, 10월 샹토소 전투에서 승리하고 낭트를 함락시켜 장 드 몽포르를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Joanna of Flanders|label=잔 드 플랑드르영어는 아들(후의 장 4세)의 후견인으로서 철저히 항전했다. 잔은 블로아파의 세력이 강한 동부를 방어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서부 브르타뉴의 앙보에 웅거했다. 샤를 드 블로아에게 포위되자, 휘하 기사들과 함께 포위를 돌파하여 브레스트로 가 원군을 이끌고 다시 앙보 포위를 돌파하여 성으로 돌아왔다는 무용담이 전해진다. 1342년 8월까지 버틴 결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휴전 기간이 종료되었고,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과 월터 머니의 원군이 도착하여 브레스트 해전에서 제노바 공화국 함대를 격파했다. 샤를 드 블로아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의 칼레 침공을 두려워한 필리프 6세가 프랑스군을 브르타뉴에서 철수시켰기 때문에, 샤를 드 블로아는 독자적으로 싸우게 되었지만, 전투 지휘관으로서 유능했기 때문에 렌, 반을 탈환했다. 몽포르파의 이탈이 잇따랐고, 이때 잉글랜드 측에 붙어 있던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전사했다. 1342년 11월 에드워드 3세는 브레스트에 도착하여 반느를 포위했지만, 1343년 1월 교황의 중재로 프랑스 국왕과 휴전하여 반느는 교황 보호하에 들어갔다. 1343년 9월 장 드 몽포르는 석방되었지만, 동부 영지에 머물도록 강요받아 영향력이 약해졌고, 반느를 탈환했지만 몽포르파의 이탈은 계속되었다.
1344년 3월, 브레스트와 반느의 연락을 끊기 위해 샤를 드 블로아는 캥페르를 포위하여 5월에 함락시켰고, 1400명에서 2000명에 이르는 주민을 학살했다. 잉글랜드 병사는 몸값 때문에 포로로 잡혔지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병사는 파리로 보내져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1345년 3월, 장 드 몽포르는 감시를 피해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에드워드 3세는 1345년 여름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아키텐에 병력을 보냄과 동시에, 브르타뉴에도 노샘프턴 백작과 장 드 몽포르를 보냈다. 장 드 몽포르는 캉페르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얼마 안 있어 병사했다. 5세의 장 4세가 뒤를 이었고, 어머니 잔은 정신 이상 징후를 보였다. 몽포르파는 런던의 지시를 받은 브레스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 의해 지원받는 상황이었다.
노샘프턴 백작은 팡티에브르 백작령의 브르타뉴 북해안을 침공했지만, 라 로슈데리앙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노르망디를 침공하면서 프랑스군 주력은 노르망디로 이동했다. 노샘프턴 백작은 부대장 토마스 다그워스에게 부대를 맡기고 에드워드 3세에 합류했다(8월 26일 크레시 전투). 6월 20일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과 샤를 드 브루아 사이에서 벌어진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샤를 드 브루아는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몽포르파와 블로아파 모두 당주가 없어졌지만, 블로아 파는 팡티에브르 여백작 잔느 아래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몽포르 백작부인 잔과 합쳐 "두 명의 잔느의 싸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양 파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토마스 다그워스는 브르타뉴 공작 대리로서 팡티에브르 백작령에 공세를 가했지만, 1350년에 전사했다. 1351년에는 양 파에서 30명의 기사가 대결하는 "30인의 결투"라는 기사도 이야기와 같은 사건도 일어났지만, 싸움의 정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1352년 프랑스 측은 네슬레 경 기 장군을 브르타뉴에 파견하여 블로아 파 지원을 재개했다. 1352년 8월 모롱 전투에서는 기 장군은 크레시 전투의 패배를 교훈삼아 전군에게 말에서 내려 도보로 전투를 명령하여 잉글랜드 측 롱보우의 위협을 감소시키려 했지만, 격전 끝에 잉글랜드 측이 승리했다.
1356년 랭커스터 공작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는 브르타뉴에 들어가 렌을 포위했다. 1357년 7월까지 이어진 포위는 헨리가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풀었다. 이때 렌 포위전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름을 떨쳤고, 샤를 5세에게 발탁되었다.
1357년 장 4세가 성인이 되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지만, 푸아티에 전투 이후 잉글랜드, 프랑스 간 평화 협정으로 샤를 드 블로아도 석방되어 다시 두 명의 브르타뉴 공작이 존재하게 되었다. 브르타뉴에서도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브르타뉴를 분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정리될 뻔했지만, 팡티에브르 여백작 잔느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고, 1362년 싸움이 재개되었다.
상황은 한동안 교착 상태였고, 샤를 드 블로아가 사실상 공작이었지만, 몽포르파는 여전히 상당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1363년 샤를 드 블로아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도움을 받아 성공을 거두면서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베르트랑이 나바르와 노르망디 요새를 장악하기 위해 떠나자 샤를의 진군은 베셰렐 포위 실패로 중단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존 챈도스와 함께 오레를 포위하려 했다. 샤를 드 블로아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포위된 도시를 구출하러 왔지만, 1364년 9월 29일 오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샤를 드 블로아가 전사했고, 팡티에브르의 잔은 과부가 되어 자신의 대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뒤 게클랭은 포로로 잡혀 샤를 5세에 의해 에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3. 1. 초기 단계 (1341-1345)
브르타뉴 귀족 대다수는 샤를 드 블로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장 드 몽포르는 재빨리 낭트(수도), 리모주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8월까지 렌과 반느를 포함한 브르타뉴 공국 대부분을 장악했다.1341년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휴전 중이었으므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이를 국내 문제로 간주하고 샤를 드 블로아를 적극 지원, 10월 샹토소 전투에서 승리하고 낭트를 함락시켜 장 드 몽포르를 포로로 잡았다.
장 드 몽포르의 아내 Joanna of Flanders|label=잔 드 플랑드르영어는 아들 장(훗날 장 4세)의 후견인으로서 몽포르파를 이끌며 항전했다. 잔은 샤를 드 블로아의 포위를 뚫고 브레스트로 가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앙보를 지켜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용맹했다.[4] 1342년 8월, 브레스트 해전에서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제노바 공화국 함대를 격파하면서 앙보 포위는 풀렸다.[1]
1343년 몰레 전투 이후,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군의 칼레 침공을 우려해 프랑스군 주력을 철수시켰고, 샤를 드 블로아는 독자적으로 싸우게 되었지만, 렌과 반을 탈환하는 등 유능한 지휘관이었다.[1] 1343년 1월, 교황 중재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휴전했고, 반은 교황 보호하에 놓였다. 이 휴전으로 장 드 몽포르는 석방되었지만, 동부 영지에 머물도록 강요받아 영향력은 약해졌다.
1344년 3월, 샤를 드 블로아는 브레스트와 반 사이 통신을 끊기 위해 캥페르를 포위, 5월에 함락시키면서 주민 1,400~2,000명을 학살했다.[1]
3. 1. 1. 샹토소 전투와 낭트 함락
브르타뉴 귀족 대다수는 샤를 드 블로아를 지지했기 때문에, 장 드 몽포르는 전쟁 초반에 낭트(수도), 리모주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8월까지 렌과 반느를 포함한 브르타뉴 공국 대부분을 장악했다.1341년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휴전 중이었으므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이를 국내 문제로 간주하여 샤를 드 블로아를 적극 지원했고, 10월 샹토소 전투에서 승리하고 낭트를 함락시켜 장 드 몽포르를 포로로 잡았다.
3. 1. 2. 플랑드르의 잔의 활약
플랑드르의 잔은 브르타뉴 계승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남편 몽포르의 장이 낭트에서 샤를 드 블로아에게 사로잡힌 후, 몽포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잔은 동부 지역의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 서부 브르타뉴의 앙보에 본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브레스트로 쫓겨나 포위되었고, 1342년 8월 18일 브레스트 해전에서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도착하면서 포위가 풀렸다.[4] 잔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브레스트로 가서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앙보를 지켜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용맹한 여걸이었다.[4]
1343년 몰레 전투 이후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군의 칼레 침공을 우려하여 프랑스 군대의 주요 부분을 철수시켰고, 샤를 드 블로아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추구해야 했다. 샤를은 렌과 반을 점령하는 등 유능한 군사 지휘관임을 입증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잔은 몽포르파를 이끌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했다. 비록 1345년 남편 몽포르의 장이 사망하고, 아들 브르타뉴의 장 4세는 어린 나이였지만, 잔은 굴하지 않고 몽포르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3. 1. 3. 브레스트 해전 (1342)
Battle of Brest|브레스트 해전영어은 1342년 8월 18일 브르타뉴 계승전쟁 중에 브레스트 근해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브르타뉴 계승전쟁은 백년 전쟁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휴전 중이었으나,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가 지원하는 몽포르파와 프랑스가 지원하는 블루아파 간의 대립은 계속되었다.잔 드 플랑드르는 앙보에 거점을 마련했으나 브레스트로 쫓겨나 포위되었다. 이 포위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도착하면서 풀렸다. 월터 머니와 함께 원군으로 도착한 노샘프턴 백작은 브레스트 해전에서 제노바 공화국 함대를 격파했다.[1] 샤를 드 블로아는 이를 보고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3. 1. 4. 몰레 전투 (1342)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는 내륙으로 진격하여 몰레를 포위했다. 이 포위는 1342년 9월 30일 몰레 전투 이후 해제되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휴전이 끝나면 칼레에 상륙할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 군대의 주요 부분을 철수시켰고, 샤를 드 블로아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도록 남겨졌다. 샤를은 곧 유능한 군인임을 증명했고, 렌과 반을 점령하면서 많은 몽포르파 대위들이 이탈했다.[1]3. 1. 5. 캥페르 학살 (1344)
1344년 3월, 브레스트와 반 사이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샤를 드 블로아는 캥페르를 포위했다. 이 도시는 5월 1일에 함락되었고, 당시 관례에 따라 1,400명에서 2,000명으로 추정되는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1]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위해 붙잡혔지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포로들은 파리로 보내져 반역죄로 처형되었다.[1]3. 2. 몽포르파의 반격과 샤를 드 블루아의 포획 (1345-1357)
1345년 3월, 장 드 몽포르는 감시를 피해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에드워드 3세는 1345년 여름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아키텐에 병력을 보냄과 동시에, 브르타뉴에도 노샘프턴 백작과 장 드 몽포르를 보냈다. 장 드 몽포르는 캉페르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얼마 안 있어 병사했다. 이로 인해 불과 5세의 장 4세가 뒤를 이었다. 어머니 잔은 정신 이상 징후를 보였고, 몽포르파는 실질적으로 런던의 지시를 받은 브레스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 의해 지원받는 상황이었다.[1]노샘프턴 백작은 팡티에브르 백작령의 브르타뉴 북해안을 침공했지만, 라 로슈데리앙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후 몽포르(Montfort)파와 블로아(Blois)파 모두 당주가 없어졌지만, 블로아 파는 팡티에브르(Penthièvre) 여백작 잔느(Jeanne) 아래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이 때문에 몽포르 백작부인 잔느와 합쳐서 "두 명의 잔느의 싸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양 파의 싸움은 그 후에도 이어졌고, 토머스 다그워스(Thomas Dagworth)는 실질적인 브르타뉴 공작 대리로서 팡티에브르 백작령에 공세를 가했지만, 1350년에 전사했다. 1351년에는 양 파에서 30명의 기사가 장소와 날짜를 정해 대결하는 "30인의 결투"라는 기사도 이야기와 같은 사건도 일어나 프로아사르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조슬랭과 플로에르멜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요새 간의 분쟁은 로버트 벰보로가 이끄는 30명의 몽포르파 기사단과 장 드 보마누아르가 이끄는 샤를 드 블루아의 지지자 30명 간의 결투로 해결되었다. 결투는 1351년 3월 26일 두 도시 사이에서 벌어졌다. 밤이 되자 앵글로-브르타뉴 몽포르파는 프랑스 지지 기사단 6명에 비해 9명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몽포르파는 항복해야 했다. 당시 명성이 높았고 나중에 매우 낭만적으로 미화되었지만, 결투는 전쟁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352년에 프랑스 측은 네슬레(Nesle) 경 기(Guy) 장군을 브르타뉴에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블로아 파의 지원을 재개했다. 1352년 8월 모롱 전투에서는 기 장군은 크레시 전투의 패배의 교훈으로부터 전군에게 말에서 내려 도보로 전투를 명령하여 잉글랜드 측의 롱보우의 위협을 감소시키려 했지만, 격전 끝에 잉글랜드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1356년에 랭커스터 공작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는 브르타뉴에 들어가 렌(Rennes)을 포위했다. 포위는 1357년 7월까지 이어졌고, 헨리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포위를 풀었다. 이때 렌 포위전에서 이름을 떨친 것이 블로아 파의 브르타뉴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다. 게클랭은 이 활약으로 샤를 5세에게 발탁되었다.
1357년에 장 4세가 성인이 되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지만, 동시에 푸아티에 전투 이후 잉글랜드, 프랑스 간의 평화 협정 안에서 샤를 드 블로아도 석방되었기 때문에 다시 두 명의 브르타뉴 공작이 존재하게 되었다. 브르타뉴에서도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한때 브르타뉴를 분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정리될 뻔했지만, 팡티에브르 여백작 잔느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고, 1362년에 싸움이 재개되었다.
3. 2. 1. 라 로슈 데리엔 전투 (1347)

1346년 크레시 전투와 1347년 칼레에서 프랑스가 대패하면서 프랑스의 지원이 끊기자, 샤를 드 블로아는 잉글랜드 용병대장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캥페르 학살의 기억은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고, 브르타뉴 상인들은 잉글랜드와의 관계 강화를 경제적으로 원했다. 1347년 라 로슈 데리엔 전투에서 샤를은 잉글랜드군에게 점령당한 도시를 되찾으려다 포로로 잡혔고, 5년 동안 런던 탑에 갇혔다. 잉글랜드는 브레스트, 캥페르, 반을 장악했다.
1345년 3월, 장 드 몽포르는 감시를 피해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1345년 여름, 에드워드 3세는 아키텐과 브르타뉴에 병력을 보냈다. 장 드 몽포르는 캉페르 탈환에 실패하고 병사했다. 5세의 장 4세가 뒤를 이었고, 몽포르파는 런던의 지시를 받은 브레스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 의해 지원받았다.
노샘프턴 백작은 팡티에브르 백작령의 브르타뉴 북해안을 침공했지만, 라 로슈데리앙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노르망디를 침공하면서 프랑스군의 주력은 노르망디로 이동했다. 노샘프턴 백작은 부대장 토마스 다그워스에게 부대를 맡기고 에드워드 3세에 합류했다(8월 26일 크레시 전투). 6월 20일,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과 샤를 드 브루아 사이에서 벌어진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샤를 드 브루아는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1]
3. 3. 전쟁의 종결 (1364-1365)
1364년 오레 전투에서 몽포르 가문의 장 4세가 승리하고 샤를 드 블로아가 전사하면서, 20년 넘게 이어진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전투의 결과로 팡티에브르 가문의 잔은 상속권을 포기하고,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았다.[3]1365년 제1차 게랑드 조약을 통해 평화가 찾아왔고, 장 4세는 브르타뉴 공작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팡티에브르 가문의 권리도 완전히 무시되지는 않아, 몽포르 가문에 남성 후계자가 없을 경우 팡티에브르 가문이 공작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2]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장 4세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우려했으나, 백년 전쟁으로 약화된 상황에서 장 4세를 공작으로 인정하고 브르타뉴 귀족들의 지지를 얻는 길을 택했다. 1366년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프랑스의 봉신이 되었다.[2]
하지만, 이후 장 4세는 잉글랜드와 비밀 동맹을 맺는 등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373년에는 추방되기도 했다. 1378년에는 브르타뉴가 프랑스 왕령으로 병합될 위기에 처했으나, 브르타뉴 귀족들의 강력한 저항과 1379년 장 4세의 귀환, 1381년 제2차 게랑드 조약을 통해 복위하면서 브르타뉴의 독립은 유지될 수 있었다.
1420년 팡티에브르 가문이 장 5세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몽포르 가문은 게랑드 조약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팡티에브르 가문의 계승권을 부정했다. 이는 훗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에게 남성 후계자가 없어 그의 딸 브르타뉴의 안이 공작위를 계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
3. 3. 1. 오레 전투 (1364)
상황은 한동안 교착 상태에 머물렀고, 샤를 드 블로아가 사실상 공작이었지만, 몽포르파는 여전히 상당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1363년, 샤를 드 블로아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성공을 거두면서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베르트랑이 나바르와 노르망디의 요새를 장악하기 위해 떠나자 샤를의 진군은 베셰렐 포위 실패로 중단되었다. 합의를 협상할 또 다른 기회가 생겼지만, 잔이 다시 협상을 막았다. 장 드 몽포르는 유명한 잉글랜드 군벌 존 챈도스와 함께 오레를 포위하려 했다. 샤를 드 블로아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포위된 도시를 구출하러 왔지만, 1364년 9월 29일 오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는 이 오랜 분쟁의 종말을 알렸다. 샤를 드 블로아가 전사했고, 팡티에브르의 잔은 과부가 되어 자신의 대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뒤 게클랭은 포로로 잡혀 샤를 5세에 의해 에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2]
1364년, 장 4세와 잉글랜드의 존 챈도스|존 챈도스영어가 이끄는 몽포르 군과 샤를 드 블루아,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와의 코슈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블루아 군이 오레 전투에서 격돌했다. 양측 모두 오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각오를 다졌기에 격전이 벌어졌지만, 몽포르 군의 승리로 끝나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하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포로가 되었다. 팡티에브르 여백작 잔도 상속권 포기를 승낙하여 장 4세가 유일한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3]
3. 3. 2. 게랑드 조약 (1365)
1365년 4월 12일, 제1차 게랑드 조약으로 평화가 종결되어 몽포르의 장이 브르타뉴 공작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팡티에브르 가문의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으며, 브르타뉴의 상속법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공작령은 몽포르 가문의 남성에게서 남성으로 상속된다.
- 남성 후손이 없을 경우, 팡티에브르 가문의 남성에게 상속된다.
- 잔은 팡티에브르 가문과 리모주 자작령의 특권을 유지한다.
- 그녀는 또한 적의 프랑스 영토에서 연간 10000LIV의 수입을 받게 된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몽포르의 장의 지위 상승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몽포르의 장이 그의 보호자이자 전 장인(마리가 1361년에 사망했음)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프랑스는 백년 전쟁의 상황에서 명백히 약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몽포르의 장을 공작으로 인정했다. 이 조치로 그는 브르타뉴 귀족들의 우정을 얻었다. 1366년 12월, 그는 새로운 공작의 충성 서약을 받았는데, 그는 놀랍게도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샤를을 자신의 군주로 인정했다.
조약의 조항들은 후일 공작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1420년 팡티에브르 가문에 의해 조약을 위반하여 납치되면서 몽포르 가문에 의해 거부되었다. 몽포르 가문은 조약이 파기되었으므로 더 이상 상속 조항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남성 후계자를 낳지 못해 1488년 공작령이 그의 딸 브르타뉴의 안에게 넘어갈 수 있게 되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4. 전쟁의 결과와 영향
1365년 4월 12일, 제1차 게랑드 조약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이 조약으로 몽포르의 장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지만, 팡티에브르 가문의 주장도 완전히 무시되지는 않았다. 브르타뉴의 상속법은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1]
- 몽포르 가문의 남성이 공작령을 이어받는다.
- 몽포르 가문에 남성 후손이 없으면, 팡티에브르 가문의 남성이 공작령을 이어받는다.
- 잔은 팡티에브르 가문과 리모주 자작령의 특권을 유지하며, 프랑스 영토에서 연간 10000L의 수입을 받는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몽포르의 장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바칠까 봐 걱정했지만, 백년 전쟁으로 약해진 프랑스는 몽포르의 장을 공작으로 인정하고 브르타뉴 귀족들의 우정을 얻었다. 1366년 12월, 몽포르의 장은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
이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1420년 팡티에브르 가문에 납치되면서 몽포르 가문은 조약을 파기하고 상속 조항을 무시했다. 이는 1488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딸인 브르타뉴의 안에게 공작령이 넘어가게 되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1]
4. 1. 브르타뉴 공국의 운명
제1차 게랑드 조약으로 평화가 종결되어 몽포르의 장이 브르타뉴 공작으로 확정되었다.[1] 그는 팡티에브르 가문의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으며, 브르타뉴의 상속법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1]- 공작령은 몽포르 가문의 남성에게서 남성으로 상속된다.[1]
- 남성 후손이 없을 경우, 팡티에브르 가문의 남성에게 상속된다.[1]
- 잔은 팡티에브르 가문과 리모주 자작령의 특권을 유지한다.[1]
- 그녀는 또한 적의 프랑스 영토에서 연간 10000L의 수입을 받게 된다.[1]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몽포르의 장이 그의 보호자이자 전 장인(마리가 1361년에 사망했음)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우려했다.[1] 게다가 프랑스는 백년 전쟁의 상황에서 명백히 약화되었다.[1] 따라서 그는 몽포르의 장을 공작으로 인정했다.[1] 이 조치로 그는 브르타뉴 귀족들의 우정을 얻었다.[1] 1366년 12월, 그는 새로운 공작의 충성 서약을 받았는데, 그는 놀랍게도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샤를을 자신의 군주로 인정했다.[1]
조약의 조항들은 후일 공작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1420년 팡티에브르 가문에 의해 조약을 위반하여 납치되면서 몽포르 가문에 의해 거부되었다.[1] 몽포르 가문은 조약이 파기되었으므로 더 이상 상속 조항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1] 이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남성 후계자를 낳지 못해 1488년 공작령이 그의 딸 브르타뉴의 안에게 넘어갈 수 있게 되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1]
5. 연표
날짜 | 사건 |
---|---|
1341년 4월 30일 | 장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다. 팡티에브르의 잔과 블루아의 샤를이 브르타뉴 공작부인과 공작이 되었다. 몽포르의 장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잉글랜드 국왕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
1343년 | 몽포르의 장이 포로로 잡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 샤를은 이를 이용하려 앙보를 공격했지만, 몽포르의 아내인 플랑드르의 잔이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다. 잉글랜드 군대가 포위를 풀고 블루아 측에 휴전을 강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
1344년 | 샤를은 프랑스의 필리프 6세 국왕의 호의를 받아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캥페르를 점령하고 민간인 2,000명을 학살하였다. |
1345년 | 몽포르의 장은 캥페르를 탈환하는 데 실패하고 사망하였다. 그의 브르타뉴에 대한 야망은 그의 아들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플랑드르의 잔이 몽포르 파벌의 정치적, 군사적 지휘관이 되었다. |
1346년 ~ 1364년 | 양쪽 모두 여러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배했으며, 여러 차례의 휴전이 체결되고 깨졌다. 플랑드르의 잔은 정신 질환을 앓게 되어 수도원에 수용되었다. |
1351년 3월 27일 | 30인 기사 전투 |
1364년 9월 29일 | 오레 전투.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블루아의 샤를은 장 4세와 잉글랜드의 군벌 존 챈도스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샤를은 전투에서 사망하고, 브르타뉴에서 블루아 측의 주장은 종식되었다. |
1365년 |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고, 팡티에브르의 잔은 게랑드 조약에서 공작령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였다. 놀랍게도 새로운 공작은 자신을 그를 도운 잉글랜드 국왕이 아닌 프랑스의 샤를 5세 국왕의 봉신으로 선언하였다. |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Late Medieval England, 1272–1485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
웹사이트
Mediaeval European History, A.D. 455–1453
https://books.google[...]
E. Benn
1929-05-13
[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Late Medieval England, 1272-1485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4]
문서
イングランド側の記録ではジャン・ド・モンフォールをジャン4世とし、以降1代ずつずれるが、ジャン・ド・モンフォールをブルターニュ公に含めないフランス側の表記の方が一般的なため、それに従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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