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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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전쟁은 1328년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발생한 일련의 분쟁이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프랑스 귀족 회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 흑사병의 유행, 잉글랜드의 프랑스 침공, 슬로이스 해전, 푸아티에 전투, 브레티니 조약 등을 거치며 잉글랜드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고, 잉글랜드는 칼레를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다. 브레티니 조약으로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아키텐과 칼레에 대한 주권을 얻었지만, 전쟁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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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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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ian 전쟁 정보 | |
개요 | |
분쟁 | 에드워드 전쟁 |
전체 전쟁 | 백년전쟁 |
날짜 | 1337년–1360년 |
장소 | 프랑스 일대 |
결과 | 잉글랜드의 승리 |
결과 상세 | 브레티니 조약 1369년 전쟁 재개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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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교전국 1 | |
추가 교전국 2 | |
지휘관 | |
프랑스 측 지휘관 | |
잉글랜드 측 지휘관 | |
병력 규모 | |
병력 1 | 불명 |
병력 2 | 불명 |
주요 전투 | |
전투 목록 | 카드잔드 아르네무이든 영불 해협 슬로이스 생토메르 투르네 베르주라크 오베로셰 캉 블랑셰타크 크레시 칼레 네빌스크로스 칼레 루날롱게 윈첼시 세인테스 아흐드흐 푸아티에 자크리 샤르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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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에드워드 전쟁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330년대 프랑스의 스코틀랜드 지원은 잉글랜드에 문제를 야기했다.[2] 저지대 국가들의 충성은 분열되어, 플랑드르에서는 도시들이 잉글랜드 양모 공급에 의존했지만 귀족들은 프랑스 왕을 지지했다.[2] 해군력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필리프 6세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마르세유 근처에 함대를 배치했으나, 1336년 계획이 포기되고 함대는 노르망디 해협으로 이동하여 잉글랜드를 도발했다.[5]
아르투아의 로베르 3세는 상속권 분쟁으로 필리프 6세와 갈등을 빚어 프랑스 궁정에서 추방되었는데, 1336년 11월 필리프 6세는 가스코뉴 세네샬에게 로베르의 인도를 요구하며 불응 시 '엄청난 위험과 불화'가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5][6] 이듬해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와 퐁티외를 압수할 때, 로베르 사건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언급했다.[5]
14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구심력을 잃어가고, 저지대 국가(네덜란드)는 사실상 독립적인 영방 국가가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여 1337년 8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지만, 에드워드 3세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1338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국내 문제와 재정난으로 안트베르펜으로 늦게 건너갔다. 잉글랜드 국고는 거의 비어있었고, 에드워드 3세는 이탈리아 은행가 등에게 빚을 져 동맹국에 지불할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침공 지연을 틈타 제노바의 갤리선을 고용하여 잉글랜드 해안 지대를 습격했다. 플리머스와 사우샘프턴이 약탈당하고 건지 섬이 점령되었다. 1338년 가스코뉴도 공격받았고, 1339년 4월에는 주요 거점들이 프랑스에 함락되어 북쪽 공격에 취약해졌다.
1338년 봄까지 프랑스의 해상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잉글랜드도 대비를 시작하여 종종 격퇴되었다. 8월에는 제노바 함대 내 분쟁으로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프랑스 함대의 습격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대응 비용으로 잉글랜드는 다른 전선에 자금을 투입하기 어려웠고, 에드워드 3세는 고리대금업에 의존해야 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침공 계획 유지를 위해 1339년 9월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동맹군은 소극적이었고 캉브레 등 일부 지역 방화 외에 성과가 없었다. 1339년10월 23일 필리프 6세에게 결전을 요구했지만, 필리프 6세는 회피했고 에드워드 3세는 철수했다.
1340년, 잉글랜드는 제노바에 보상금을 지불하여 프랑스 해군 협력을 막고, 1월 불로뉴를 습격해 프랑스 갤리선을 불태웠다.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은 18,000명 이상의 전사자와 190척의 배를 잃고 궤멸되었다. 영국 해협 제해권은 잉글랜드로 넘어갔고,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은 좌절되었다.
가스코뉴의 잉글랜드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프랑스 남서부 유력 귀족들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베르트랑 다르브레는 잉글랜드에 가담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영토 획득은 없었지만, 전투 지역은 확대되었다.
1340년,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동맹국 에노를 공격했지만, 슬로이스 해전 패배로 새로운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나누어 아르투아를 공격했으나 생토메르 전투에서 패배했고, 직접 투르네를 포위했지만 장기화되었다. 9월 필리프 6세의 원군 도착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9월 25일 9개월간 휴전했다.
휴전 동안 반프랑스 동맹은 해체되었고, 잉글랜드는 큰 비용에도 성과가 없어 반발이 커졌다. 재정은 파탄났고,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파산했다.
2. 1.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1] 왕위를 계승할 가장 가까운 남성 혈족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였다.[1]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의 여동생인 이사벨라를 통해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여성은 군주가 될 수 없었기에 이사벨라가 왕위 계승권을 물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 프랑스 귀족 회의는 남성 혈통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가장 가까운 상속자는 샤를 4세의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이며, 그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1] 프랑스 왕위의 법적 계승 확립은 에드워드 전쟁의 핵심이었으며, 에드워드 3세와 그 후대 잉글랜드 군주들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1]
2. 2.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영토
1328년 프랑스 국왕 샤를 4세가 사망했을 때, 왕위를 계승할 가장 가까운 남성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였다.[1] 에드워드는 죽은 왕의 여동생인 이사벨라를 통해 권리를 상속받았지만, 여성은 군주가 될 수 없었기에 그녀가 권리를 물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프랑스 귀족 회의에서는 남성 계통을 통해 가장 가까운 상속자가 샤를 4세의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이며, 그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프랑스 왕위의 법적 계승 확립은 전쟁의 핵심이었으며, 에드워드 3세와 그 후대 잉글랜드 군주들은 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1]
초기의 망설임 끝에, 17세의 에드워드 3세(아키텐 공작 자격으로)는 1329년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했다.[2] 가스코뉴는 아키텐에 통합되었으며, 피레네 산맥 바로 북쪽,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가스코뉴인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생산하는 클라레라고 알려진 적포도주의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와의 수익성 있는 무역으로 운송되었다. 이 무역은 잉글랜드 왕에게 많은 수입을 안겨주었다. 가스코뉴인들은 자신들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프랑스 왕보다는 그들을 내버려두는 멀리 떨어진 잉글랜드 왕과의 관계를 선호했다.[3]
에드워드가 필리프에게 경의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계속해서 가스코뉴에 간섭했다. 가스코뉴 국경을 따라 있는 일부 성벽 도시에서 일련의 소규모 교전이 발생했다.[3] 아제네는 프랑스에 속한 가스코뉴 지역이었고, 그곳의 관리들은 잉글랜드 행정에 압력을 가했다. 에드워드의 관할하에 있는 일련의 종교 시설에 대해 프랑스 관리들이 재판을 열기도 했다. 필리프는 또한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군대를 제공하기 위해 가스코뉴 내의 여러 영주들과 계약을 맺었다.[2][4]
2. 3. 경제적 요인
14세기 플랑드르의 모직물 산업은 잉글랜드로부터의 양모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플랑드르 백작의 입장은 미묘했다.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쳤지만, 1336년 잉글랜드가 플랑드르에 대한 양모 금수 조치를 내리자,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수공업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헨트를 중심으로 야코프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플랑드르에 중립을 약속했다.[1]1339년 플랑드르에서 아르테벨데의 권력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12월에는 정식으로 반(反)프랑스 동맹을 맺을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세 봉건 도덕에서는 신의 은총을 받은 정통 왕에 대한 반항은 큰 죄로 여겨졌기에,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와의 동맹을 확실히 하고 반란자라는 오명을 피하고자 1340년 1월 26일 헨트 시장에서 프랑스 왕임을 선언했다.[1]
2. 4. 스코틀랜드 문제
1330년대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면서 잉글랜드와 갈등이 심화되었다.[2] 1338년 8월, 스코틀랜드군은 포스 만 북쪽의 마지막 잉글랜드 측 거점인 퍼스를 탈환하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대부분의 지역을 상실했다.[5]
3. 저지대 국가 (1337–1341)
1337년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를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 주둔 영국군이 그 자리를 지키는 동안 북쪽에서 프랑스를 침공하는 전략을 세웠고, 이를 위해 저지대 국가(네덜란드)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동맹 유지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잉글랜드는 양모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재정난에 시달렸다.
1338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안트베르펜으로 건너갔지만, 자금 조달 문제로 프랑스 침공이 지연되었다. 이 틈을 타 프랑스는 가스코뉴를 공격했고, 생마케르와 블레이를 점령했다. 가스코뉴의 영국군은 올리버 잉햄의 지휘 아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분전했다.
1339년 프랑스 함대는 제노바 용병을 고용하여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했다. 포츠머스, 사우샘프턴 등이 약탈당했고, 건지 섬이 점령되었다. 잉글랜드는 뒤늦게 함대를 구성하여 프랑스 함대와 대치했지만, 프랑스 함대는 해상 전투 없이 항구로 도망쳤다. 8월에는 제노바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해상 작전은 중단되었다.
1339년 9월, 에드워드 3세는 저지대 국가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프랑스를 침공했다. 캄브라이를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프랑스 본토로 진격하여 피카르디 지방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자금 부족으로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한편, 1337년 영국이 플랑드르에 대한 양모 수출을 금지하자, 플랑드르에서는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1340년, 플랑드르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
1340년, 프랑스는 슬루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에 대패하여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상실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투르네를 포위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1340년 9월 25일 에스플레섕 휴전을 맺고 전쟁은 일시 중단되었다.
3. 1. 잉글랜드의 동맹 전략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저지대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 지역의 소군주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잉글랜드와 협력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동맹국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야 했다.[7][8] 1337년 필리프 6세가 가스코뉴를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 주둔 영국군이 그 자리를 지키는 동안 북쪽에서 프랑스를 침공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에는 대륙 동맹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들에게 2018년 가치로 6,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20만 파운드 이상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7][8]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군대뿐만 아니라 대륙 동맹국에도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1337년 여름,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사실상 모든 국가의 양모 재고를 활용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3만 자루의 양모가 영국 상인에 의해 판매될 것이며, 그 액수(20만 파운드로 추정)는 에드워드 3세에게 대여될 예정이었다.[9] 동맹국에게 약속한 수수료를 지불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는 바르디와 페루치의 대형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차입을 해야 했다.[10] 1338년 말, 은행으로부터의 자금이 고갈되자 부유한 상인인 윌리엄 드 라 폴이 11만 파운드를 지원하여 왕을 도왔다.[11] 윌리엄 드 라 폴이 왕에게 대여한 자금의 상당 부분은 다른 영국 상인으로부터 조달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또한 저지대 국가의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빌렸는데, 이들은 엄청난 이자율을 요구하고 상환에 대한 더 확실한 보증을 요구했다. 1340년에는 더비 백작과 노샘프턴 백작이 대출 상환의 보증인으로 잡혔다.[12]
1339년 9월, 에드워드 3세는 저지대 국가에서 약 12,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그의 군대에는 그의 다양한 동맹국 출신 병력이 포함되었다. 캄브라이는 프랑스 왕의 동맹국이었으므로, 9월 20일에 에드워드 3세의 군대는 주교 관할 구역으로 진입했다. 2주간의 캄브라이 포위 공격이 벌어졌지만 캄브라이는 점령되지 않았고, 10월 9일 저녁에 에드워드 3세의 군대는 포기하고 프랑스 본토로 진격했다.[21]
플랑드르 통치자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대한 모든 영국 상품에 금수 조치를 취했다. 1337년에는 영국 양모와 식량 공급 부족으로 인해 플랑드르에서 반란이 촉발되었다. 반란 지도자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는 영국 금수 조치를 해제하는 대가로 플랑드르의 중립을 준비했다.[22] 12월까지 플랑드르인들은 공식적으로 반 프랑스 연합에 합류할 준비가 되었다. 겐트, 이프르, 브뤼헤의 시 당국은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선포했다. 에드워드 3세의 목적은 저지대 국가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들이 필리프 6세에 반대하는 반역자가 아니라 "진정한" 프랑스 왕에게 충성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1340년 2월, 에드워드 3세는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하고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22][23]
3. 2. 초기 군사 작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1337년 전쟁을 일으켰지만, 초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잉글랜드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양모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대륙 동맹국에 막대한 지원금을 약속했다. 그러나 자금 조달이 지연되면서 잉글랜드의 군사 작전은 차질을 빚었다.[7][8][9][14][15]이 틈을 타 프랑스는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하고 가스코뉴를 침공했다. 1338년 12월, 프랑스군은 생-마케르와 블레이를 점령했다.[16] 가스코뉴 방어를 맡은 올리버 잉햄은 영국 본토의 지원 없이 지역 자원에 의존해야 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알브레 영주를 설득하여 프랑스에서 돌아서게 하는 등 분전했다.[17][18]
1339년, 프랑스 함대는 제노바 용병을 고용하여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했다. 포츠머스, 사우샘프턴 등이 약탈당했고, 건지 섬이 점령당했다. 잉글랜드는 뒤늦게 함대를 구성하여 프랑스 함대와 대치했지만, 프랑스 함대는 해상 전투 없이 항구로 도망쳤다. 8월에는 제노바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해상 작전은 중단되었다.[19]
1339년 9월, 에드워드 3세는 저지대 국가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프랑스를 침공했다. 캄브라이를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프랑스 본토로 진격하여 피카르디 지방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자금 부족으로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1340년 9월 에스플레섕 휴전을 맺었다.[21]
한편, 1337년 영국이 플랑드르에 대한 양모 수출을 금지하자, 플랑드르에서는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1340년, 플랑드르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다.[22]
1340년, 프랑스는 슬루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에 대패하여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상실했다.[23][26]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투르네를 포위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에스플레섕 휴전을 맺고 전쟁은 일시 중단되었다.[14]
3. 3. 슬로이스 해전 (1340)
1340년, 잉글랜드는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 승리로 잉글랜드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23][26]1340년에 프랑스는 프랑스, 카스티야, 제노바 선박을 포함하는 침공 함대를 구성했다. 약 400척의 선박이 즈윈 강어귀에 집결했다.[23] 잉글랜드는 특별히 건조된 군함이 없었기 때문에, 코그라고 알려진, 해군 임무에 맞게 개조된 깊은 흘수를 가진 둥근 선체 상선으로 만족해야 했다.[23] 에드워드 3세는 켄트의 오웰에서 연합 함대를 소집하고, "코그 토마스"에 본부를 설치했다. 그는 프랑스 함대가 자신의 함대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6월 22일에 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여 하루 뒤에 프랑스 함대와 대결했다. 프랑스 함대는 슬로이스 항구 밖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아마도 에드워드가 군대를 상륙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23]
영국 함대는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속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늦은 오후에 바람이 바뀌자 영국군은 바람과 태양을 뒤로하고 공격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배를 3척씩 프랑스 함대에 보냈는데, 2척은 궁수로 가득 차 있었고, 1척은 무장 병사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 함대의 배들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기동성이 제한되었다. 궁수를 태운 영국 배는 프랑스 배 옆에 와서 갑판에 화살을 퍼부었고, 무장 병사들이 잔해를 치웠다.[23]
슬루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영국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영국 해협을 지배하여 프랑스 침공을 막았다.[23][26]
3. 4. 에스플레섕 휴전 (1340)
1340년 봄,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의 동맹국을 공격하여 반 프랑스 연합을 분쇄하려 했다. 5월에 프랑스군은 에노를 침공했으나, 슬루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군을 돌렸다.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는데, 로베르 다르투아의 지휘 아래 아르투아 지방을 침공한 군대는 생-오메르에서 패배하여 후퇴했다.[14] 같은 날 에드워드 3세는 투르네 성벽 앞에 나타났다. (현재는 벨기에에 있지만,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투르네 포위전이 이어졌고, 9월에 필리프 6세가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했으나 전투를 거부했다. 양측 모두 자금이 고갈되면서 1340년 9월 25일 에스플레섕 휴전이 체결되었다.[14]에스플레섕 휴전으로 백년 전쟁의 첫 단계가 마무리되었고, 9개월 동안 모든 전선에서 적대 행위가 중단되었다. 이 휴전으로 영국은 정치적,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27] 여론은 에드워드에게 등을 돌렸고, 대륙에서의 성과는 막대한 비용을 치렀으며,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상실했다. 파산 상태에 이른 에드워드는 손실을 줄여야 했다.[28]
4. 브르타뉴 (1341–1345)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31] 브르타뉴 공작위를 두고 몽포르의 장과 펜티에브르의 잔이 대립하였고,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잔의 남편인 블루아의 샤를을 지지했다. 몽포르의 장은 잉글랜드로 도망쳐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아 브르타뉴로 돌아왔으나, 프랑스 군에 의해 낭트에 갇히고 파리에 수감되었다.[32]
몽포르의 장이 사로잡힌 후, 그의 아내 플랑드르의 잔이 몽포르파를 이끌었다. 잔은 앙보를 거점으로 삼고 1341~1342년 겨울 동안 블루아의 샤를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 잉글랜드 군은 브레스트에 상륙하여 잔의 군대와 합류했고,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모를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32]
1342년 말, 에드워드 3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하여 반느를 재탈환하고 렌을 포위했다. 1343년 1월, 아비뇽에서 온 두 추기경의 중재로 말레스트로이트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브르타뉴에서의 전투는 1345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33]
4. 1. 브르타뉴 계승 전쟁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장 3세는 자녀 없이 죽었지만, 공작위를 놓고 그의 이복 동생 몽포르의 장과 그의 조카 펜티에브르의 잔 두 명의 후보가 있었다. 잔은 장 3세와 더 가까운 친족 관계였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에드워드 3세를 배제했던 여성 상속에 관한 새로운 규칙은 여성이 강력한 직위를 상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펜티에브르의 잔의 남편은 왕의 조카인 블루아의 샤를이었다. 봉건법에 따르면, 누가 상속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프랑스 국왕의 책임이었다. 국왕의 공정성에 의존하는 것을 꺼린 몽포르의 장은 공작위를 차지하고,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점령한 후, 브르타뉴의 기사단을 소집하여 그를 몽포르 공작으로 인정하게 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유력자들과 주교들은 몽포르의 장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급 성직자, 기사단, 브르타뉴 농민들은 인정했다. 그 결과 내전이 벌어졌다.[31]몽포르의 장은 낭트를 점령한 후, 리모주에서 공작 재무를 점령했고, 8월 중순까지는 낭트, 렌, 반느 등 세 주요 도시를 포함한 공작령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블루아의 샤를을 공식 후보로 선호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그를 폐위시킬까 두려워한 몽포르의 장은 잉글랜드로 도망쳐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구했다.[31]
에플레슉 휴전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3세는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몽포르의 장은 브르타뉴로 돌아와 잉글랜드 의회로부터 이 지원에 대한 확인을 기다렸다. 그동안 필리프 6세는 블루아의 샤를을 지원하기 위해 브르타뉴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고, 11월까지 그들은 몽포르의 장을 낭트에 가두었다. 장기간의 포위 가능성에 직면한 낭트 시민들은 몽포르의 장을 프랑스군에게 항복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파리에 수감되었다.[32]
이제 몽포르파의 대의를 이끌 책임은 장의 아내인 플랑드르의 잔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브르타뉴 남부의 앙보에 본부를 설치하고, 1341-42년 겨울 내내 블루아의 샤를의 군대에 맞서 앙보를 방어했다. 그녀의 군대는 브레스트 항구와 앙보 사이의 길을 열어두는 데 성공하여, 소규모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에 상륙하여 그녀의 군대와 합류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브르타뉴 서부 지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32]
1342년 8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운이 지휘하는 또 다른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 항구에 도착하여 상륙했다. 이 군대는 브르타뉴를 가로질러 진격하여 반느를 점령했다. 리처드 데르투아 부대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1342년 9월 30일 모를레 전투에서 블루아의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했다.[32] 로베르 데르투아는 반느 점령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후 잉글랜드로 항해했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더 나쁜 소식으로, 반느는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게 다시 점령되었다.[33]
1342년 10월 말, 에드워드 3세는 브레스트에 주력 부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반느를 재탈환했다. 그 후 그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렌을 포위했다. 프랑스군은 그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1343년 1월 아비뇽에서 온 두 명의 추기경이 도착하여 일반 휴전, 즉 말레스트로이트 휴전을 시행하면서 대규모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 휴전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1345년 5월까지 브르타뉴에서 계속되었고, 에드워드는 결국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3]
4. 2. 잉글랜드의 개입
브르타뉴 공작 존 3세가 1341년 4월 30일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포르의 존은 잉글랜드로 도망쳐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구했다.[31]에플레슉 휴전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몽포르의 존은 브르타뉴로 돌아와 잉글랜드 의회의 지원 확인을 기다렸다. 그동안 필리프 6세는 블루아의 샤를을 지원하기 위해 브르타뉴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고, 11월까지 몽포르의 존을 낭트에 가두었다. 낭트 시민들은 장기간의 포위 가능성에 직면하여 몽포르의 존을 프랑스군에게 항복시키기로 결정했고, 그는 파리에 수감되었다.[32]
몽포르파의 대의는 존의 아내인 플랑드르의 잔이 이끌게 되었다. 그녀는 앙보에 본부를 설치하고 1341-42년 겨울 내내 블루아의 샤를 군대에 맞서 방어했다. 그녀의 군대는 브레스트 항구와 앙보 사이의 길을 열어두어, 소규모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에 상륙하여 그녀의 군대와 합류하고 프랑스군을 몰아내어 브르타뉴 서부 지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32]
1342년 8월,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운이 지휘하는 또 다른 잉글랜드군이 브레스트 항구에 도착하여 상륙했다. 이 군대는 브르타뉴를 가로질러 진격하여 반느를 점령했다. 리처드 데르투아 부대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1342년 9월 30일 모를레 전투에서 블루아의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했다.[32]
4. 3. 말레스트로이트 휴전 (1343)
1342년 10월 말, 에드워드 3세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브레스트에 도착하여 반느를 재탈환했다. 그 후 동쪽으로 이동하여 렌을 포위했다. 프랑스군은 그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1343년 1월 아비뇽에서 온 두 명의 추기경이 도착하여 대규모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레스트로이트 휴전을 이끌어 냈다.[33] 휴전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에서의 전쟁은 1345년 5월까지 계속되었고, 에드워드 3세는 결국 브르타뉴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3]5. 말레스트로이트 휴전 (1343–1345)
1343년 말레스트로이트 휴전은 양국에 재정비의 시간을 주었지만,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공식적으로는 평화 회담과 지속적인 평화 협상을 위한 시간을 허용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양국 모두 전쟁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33]
1343년 가스코뉴의 세네셜(잉글랜드의 프랑스 영토 통치를 위해 임명된 관리) 올리버 잉엄이 잉글랜드로 소환되었고 니콜라스 드 라 베체로 교체되었다.[34][35] 베체는 가스코뉴에서 휴전을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다. 1343년 2월부터 1345년 6월 사이에 대규모 군사 작전은 없었지만, 시민 평화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36]
5. 1. 양국의 재정 상황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모두 전쟁으로 인해 재정난에 시달렸다. 잉글랜드는 세금 부담이 컸고, 양모 무역도 심하게 조작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후 몇 년 동안 막대한 부채를 천천히 갚아나갔다.[33]프랑스의 필리프 6세 역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는 전국에 걸쳐 세금을 부과할 권한을 가진 중앙 기관이 없었다. 대신 왕실은 다양한 지방 의회와 협상해야 했다. 고대 봉건 관습에 따라, 대부분의 의회는 휴전 기간 동안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필리프 6세는 주화 조작에 의존해야 했고, '푸아주'(fouage, 화로세)와 '가벨'(gabelle, 소금세)을 도입했다.[33]
5. 2. 자유 용병대의 문제
휴전으로 많은 군인이 일자리를 잃자, 이들은 가난 대신 자유 용병대, 즉 ''루티에''(routiers)를 결성했다.[37] 이들은 주로 가스코뉴 출신이었으나, 브르타뉴, 프랑스, 스페인, 독일, 잉글랜드 출신도 있었다.[37] 이들은 군사 훈련 경험을 바탕으로 시골 지역을 약탈하고, 강탈하며, 살인이나 고문을 통해 생필품을 얻었다.[37]자유 용병대는 잘 조직되어 때로는 양쪽 모두를 위해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37] 이들의 전술 중 하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나 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37]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없을 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37] 때로는 몸값을 받고 도시에서 철수하기도 했다.[37]
이 문제는 15세기에 정기적인 군대를 위한 세금 제도가 도입되어 자유 용병대 중 우수한 인력을 고용할 수 있게 되면서 해결되었다.[37]
6. 잉글랜드의 승리 (1345–1351)
1345년 휴전이 종료되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캉과 블랑슈타크 전투에서 승리하고,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칼레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승리하여 데이비드 2세를 포로로 잡으면서 스코틀랜드의 위협을 줄였다.
1348년 흑사병의 유행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 모두 큰 피해를 입어 잉글랜드의 공세는 일시 중단되었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장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윈첼시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6. 1. 잉글랜드의 공세
1346년 7월 5일, 에드워드 3세는 약 750척의 배와 7,000~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너 포츠머스에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했다.[38] 웨일스 공이 된 16세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도 함께였다. 7월 12일,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의 코탱 반도에 있는 라 아그에 상륙했다. 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잉글랜드 왕이 호그 생 바스트에 도착했을 때, 왕은 배에서 내렸고,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그는 너무 거칠게 넘어졌고, 피가 코에서 터져 나왔다프랑스어(코피). 그를 둘러싼 기사들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폐하, 제발 배로 다시 들어가시어 오늘 이 땅에 다시 오지 마십시오. 이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그러자 왕은 재빨리 대답하며 말했다. "왜? [왜?] 이것은 나에게 좋은 징조다. 땅이 나를 원한다." 이에 그의 모든 병사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그날과 밤에 왕은 모래 위에 숙영했고, 그동안 배에서 말과 다른 짐들을 내렸다.프랑스어 [39]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를 통과하여 행군했다. 필리프 6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모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영토를 점령하고 유지하려 하기보다는 약탈하면서 북쪽으로 저지대로 행군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군은 캉 약탈(캉 전투)과 블랑슈타크 전투에서 승리했다. 결국 필리프 6세를 따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에드워드 3세는 전투를 위해 병력을 배치했고, 필리프 6세의 군대는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장궁병을 상대로 공격을 가했으나 막대한 손실을 입고 흩어졌다. 크레시 전투는 프랑스에게 엄청난 패배였다.[40]

에드워드 3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영국 해협의 해안 도시인 칼레를 포위했고, 1347년에 점령했다.(칼레 포위전)[40]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국의 승리는 데이비드 2세를 포로로 잡았고, 스코틀랜드의 위협을 크게 줄였다.[41]
6. 2. 칼레 포위전 (1346-1347)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에드워드 3세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 도시 칼레를 포위했다. 1년여의 포위 끝에 1347년 칼레는 함락되었고,[40] 잉글랜드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6. 3. 네빌스 크로스 전투 (1346)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데이비드 2세가 포로로 잡혔고, 스코틀랜드의 위협이 크게 감소했다.[41]6. 4. 흑사병의 유행 (1348)
1348년,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에 큰 피해를 입혔다.[40]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주요 공세를 지원하고 시작할 수 없게 되었다.[40]6. 5. 윈첼시 해전 (1350)
1350년, 스페인인들이 바다에서 잉글랜드 선박에 가한 다양한 폭력 행위와 약탈 행위로 인해 잉글랜드와 스페인 사이에는 격렬한 감정이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상업적 목적으로 플랑드르에 있을 때, 잉글랜드인들이 귀국 항해에서 그들을 매복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43] 그들은 슬로이스에 정박해 있는 그들의 배에 모든 종류의 무기와 강력한 포병을 갖추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복무할 용병, 궁병, 석궁병을 고용했다.[43] 에드워드는 이러한 호전적인 준비에 대해 듣고 분노했다.스페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을 습격하려 했다. 그들은 1350년 8월 29일 오후 윈첼시 인근에서 에드워드의 함대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해전은 황혼까지 계속되었고, 슬로이스 해전의 소규모 재현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그들의 배에 탑승하기 전에 궁병들이 스페인 선원을 학살했다. 스페인 선박의 거의 절반이 나포되었고, 나머지는 어둠을 틈타 탈출했다.[43]
7. 프랑스 정부의 붕괴 (1351–1360)
1350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했다. 흑사병은 1348년 영국에 도달하여 전쟁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1350년대 중반까지 질병이 충분히 줄어들어 양국은 재정을 재건할 수 있었다. 1355년 에드워드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는 전쟁을 재개하여 영국령 가스코뉴에서 프랑스를 침공했고, 그해 8월 ''슈보슈''라고 알려진 잔혹한 약탈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며, 프랑스 왕의 재정 자원을 고갈시키기 위해 설계되었다. 운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약탈되었고,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은 부서지거나 불태워졌다. 당시 한 관찰자는 흑태자에 대해 "그가 툴루즈로 갔을 때 황폐시키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고 말했다.[46]
1358년에 체결된 제1차 런던 조약은 장 2세의 몸값을 로 정했다. 프랑스는 1358년 11월 1일까지 첫 번째 할부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합의를 이행하지 못했다. 1359년 3월 12일에 체결된 제2차 런던 조약에서는 장 2세 대신 인질을 잡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인질에는 그의 아들 두 명, 여러 왕자와 귀족, 파리 거주자 4명, 프랑스의 19개 주요 도시에서 각 2명의 시민이 포함되었다.[49] 인질들이 잡혀 있는 동안, 장 2세는 몸값 지불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또한 조약 조건에 따라 영국은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 멘 및 플랑드르에서 스페인까지의 모든 해안선을 소유하여 이전 앙주 제국을 복원했다. 인질들은 ''명예로운 감금'' 상태에 있었고, 이는 ''기사도 규약''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362년 장 2세의 아들인 앙주의 루이 1세는 영국령 칼레에서 가석방을 어기고 탈출하여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장 2세는 아들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껴 감옥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그는 파리를 떠나 칼레의 사령관에게 자신을 넘겼고, 사령관은 그를 영국으로 돌려보내 ''명예로운 감금'' 상태로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1364년 4월 8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잉글랜드에서 열린 장 2세의 장례식은 훌륭한 기사도 행사였고, 그는 플랜태저넷 가문으로부터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48][50][51]
프랑스의 불만을 이용하여 에드워드 3세는 1359년 늦여름 칼레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랭스 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랭스 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와 그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도시의 방어를 건설하고 강화했다. 에드워드 3세는 랭스를 5주 동안 포위했지만 새로운 요새는 버텼다. 그는 포위를 풀고 1360년 봄 파리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파리 교외는 약탈되었지만 도시는 버텼다. 그의 군대는 프랑스 용병의 공격과 질병으로 인해 약화되었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후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샤르트르 마을로 이동시켰다. 샤르트르에서 재앙이 발생하여 변덕스러운 우박 폭풍이 에드워드 3세의 군대를 황폐하게 만들어 약 1,000명의 영국 군인과 6,000마리의 말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평화를 맺겠다고 신에게 맹세하는 종교적 시기를 거쳤다. 도팽이 협상을 제안했을 때 그는 동의할 준비가 되었다. 두 왕관의 대표가 브레티니에서 만났고 일주일 안에 초안 조약에 합의했다.
7. 1. 계속되는 분쟁
브르타뉴에서는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었고, 특히 1351년에는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는 유명한 삼십인 기사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에서 각각 30명의 기사를 내어 싸운 것으로, 프랑스 측이 승리하여 거액의 몸값을 얻었다.[44][45]흑사병 이후 잉글랜드는 재정적으로 회복했고, 1356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가스코뉴에서 침공을 감행하여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했다. 잉글랜드의 롱보우를 활용한 작전과 가스코뉴의 기사 카프탈 드 뷔슈가 적절한 시기에 측면을 공격한 덕분에 프랑스 왕 장 2세와 많은 귀족을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장 2세가 사로잡히면서 프랑스 정부의 기능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장 2세의 몸값은 로 정해졌지만, 본인은 자신의 가치가 더 높다고 불만을 제기하여 두 배인 가 되었다.[47][48]
1359년의 런던 조약에 따라 의 몸값이 결정되었고,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 메느와 플랑드르에서 스페인까지의 모든 해안 지역이 잉글랜드에 할양되었으며, 앙주 제국이 부활하게 되었다.[49]
1358년에는 자크리의 난이라고 불리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한 잦은 피해와 지방 귀족에 대한 증오로 인해, 기욤 칼레가 이끄는 일행은 보베에서 시작하여 주변 마을에서 참가자를 모으면서 귀족과 성을 공격하며 파리로 향했지만, 그해 여름 멜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반란은 진압되었고, 보복 탄압이 이어졌다.[52][53] 같은 시기에 파리에서 상인 두목 에티엔 마르셀이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 (악인왕)와 결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같은 해에 수습되었다.
1359년 왕세자 샤를(샤를 5세)이 소집한 삼부회는 런던 조약의 승인을 거부했다. 이를 받아들여 1359년 10월 에드워드 3세는 대관식을 목표로 다시 프랑스를 침공했다. 샤를 5세의 프랑스군은 야전에서의 전투를 피했지만, 잉글랜드군은 랭스나 파리를 점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360년 5월 런던 조약에서 조건을 대폭 완화하여 프랑스 왕위 포기와 교환으로 아키텐과 칼레의 할양 및 의 몸값을 중심으로 하는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10월 칼레 조약으로 정식 체결되었다.[54][55]
브레티니 조약의 결과, 몇몇 왕족이 대신 인질이 됨으로써 장 2세는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자금 모금은 난항을 겪었다. 이 때문에 인질 구류는 연장되었지만, 인질들은 자유로운 행동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1363년에 인질 중 한 명인 장 2세의 차남 앙주 공작루이 1세가 프랑스로 도망쳐 돌아왔다. 장 2세는 기사도 정신에 넘치고, 선량하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며, 이를 듣고 놀라움과 분노를 표시하며, 자신의 맹세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1364년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장 2세는 잉글랜드에서 기사도 정신에 풍부한 명예를 지키는 인물로 칭찬, 환영받았고, 그 해에 포로로 죽었다.[48][50]
7. 2. 푸아티에 전투 (1356)
1356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프랑스 왕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의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프랑스 정부의 붕괴를 초래했다.[47]1356년 8월, 흑태자는 장 2세 휘하의 더 큰 군대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군은 후퇴를 시도했지만 푸아티에에서 길이 막혔다. 흑태자는 프랑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장의 군대는 1356년 9월 19일 영국을 공격했다. 영국 궁병들은 프랑스 기병대의 처음 세 번의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영국 궁병의 화살이 떨어지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거나 지쳐갈 즈음, 프랑스 왕은 정예 부대인 예비군을 투입했다. 프랑스가 승리할 것처럼 보였지만, 가스코뉴 귀족 카프탈 드 뷔슈는 소수의 병력으로 측면 기동을 이끌어 장 2세와 그의 귀족 다수를 포획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를 좌절시켰다.[47] 장은 에드워드 3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그가 부재한 동안 프랑스 정부의 상당 부분이 붕괴되기 시작했다.[47] 장의 몸값은 200만 에퀴로 정해졌지만, 장은 자신이 그 이상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몸값을 400만 에퀴로 인상할 것을 주장했다.[48]
7. 3. 프랑스의 혼란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사로잡히면서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다.[47] 1358년에는 자크리의 난이라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귀족에 대한 증오로 인해, 기욤 칼레가 이끄는 농민군은 보베에서 시작하여 주변 마을에서 참가자를 모아 귀족과 성을 공격했다. 같은 해 파리에서 상인 두목 에티엔 마르셀이 반란을 일으켜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와 결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두 반란 모두 그해 여름 진압되었다.[52][53]
7. 4. 런던 조약 (1359)
1359년 런던 조약에서는 프랑스 왕세자 샤를이 소집한 삼부회가 조약 승인을 거부했다.[49]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400만 에퀴의 몸값을 지불하고,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 메느와 플랑드르에서 스페인까지의 모든 해안 지역을 할양하여 앙주 제국이 부활할 예정이었다.7. 5. 브레티니 조약 (1360)
1359년 왕세자 샤를(샤를 5세)이 소집한 삼부회는 런던 조약 승인을 거부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1359년 10월 대관식을 목표로 다시 프랑스를 침공했다. 샤를 5세의 프랑스군은 야전에서 전투를 피했으나, 잉글랜드군은 랭스나 파리를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1360년 5월, 런던 조약 조건을 대폭 완화하여 프랑스 왕위 포기 대신 아키텐과 칼레를 할양받고 몸값 300만 에퀴를 받는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같은 해 10월 칼레 조약으로 정식 비준되었다.[54]8. 결론 및 영향
브르타뉴 조약으로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양국 간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전쟁은 여러 차례 재개되었고, 1453년 잉글랜드가 프랑스에서 완전히 축출되면서 백년전쟁은 종결되었다.
8. 1. 전쟁의 영향
백년 전쟁의 일부였던 에드워드 전쟁은 중세 유럽 사회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중앙 집권화를 강화한 반면, 신성 로마 제국은 구심력을 잃었고, 저지대 국가는 사실상 독립적인 영방 국가가 되었다.1338년 잉글랜드는 국고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에드워드 3세는 동맹국에 지불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탈리아 은행가 등에게 빚을 졌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침공 지연을 틈타 제노바의 갤리선을 고용하여 잉글랜드 해안 지대를 습격했다. 플리머스는 습격을 받았고, 사우샘프턴은 약탈당했으며, 건지 섬은 점령되었다.[1]
1339년 4월에는 프랑스가 가스코뉴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여, 가스코뉴는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1]
1338년 봄까지 프랑스의 해상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잉글랜드도 대비를 시작하면서 격퇴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노바 함대는 분배금 문제로 반란을 일으켜 대부분 이탈리아로 돌아갔다.[1]
프랑스 함대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잉글랜드는 대책 비용으로 인해 다른 전선에 자금을 댈 수 없었고,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세력은 매우 악화되었다. 1338년 8월, 스코틀랜드군은 퍼스를 탈환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대상인에게 고리의 빚을 졌다.[1]
1339년 10월 23일,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결전을 요구했지만, 필리프 6세는 회피했고, 에드워드 3세는 철수했다.[1]
1340년 1월, 잉글랜드 함대는 불로뉴를 습격하여 프랑스 함대의 갤리선을 불태웠다.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은 거의 궤멸되었고, 영국 해협의 제해권은 잉글랜드가 장악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은 방해받게 되었다.[1]
가스코뉴의 잉글랜드군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남서부 귀족들은 잉글랜드에 가담했고, 전투 지역은 확대되었다.[1]
1340년 5월, 필리프 6세는 에노를 공격했지만, 슬로이스 해전 패배 소식을 듣고 새로운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아르투아와 투르네를 공격했지만, 생토메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투르네 포위도 장기화되었다. 9월 25일, 9개월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1]
휴전 기간 동안 반프랑스 동맹군은 해체되었고,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상실하고 재정이 파탄났다. 채권 지급을 거부당한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파산했다.[1]
8. 2. 한국사에 대한 시사점
백년전쟁은 국가 간의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을 통해 국민 정체성이 형성되고 국가 체제가 변화하는 과정은 한국사의 경험과도 비교될 수 있다. 백년전쟁의 역사는 오늘날의 국제 관계와 분쟁 해결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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