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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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속은 위나라의 장군으로, 후한 말 군벌 조조 밑에서 일했던 관리 전추의 종손이다. 220년 조비가 위를 건국한 후, 전추의 도덕성을 기리고자 그의 종손인 전속에게 관내후 작위를 수여했다. 263년 촉한 정벌에 참여하여 등애 휘하에서 종회와 함께 강유를 추격했으며, 이후 등애를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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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은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조조의 사촌이자 그의 거병 때부터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연주 전투에서 왼쪽 눈을 잃어 "애꾸눈 하후"라는 별명을 얻었고, 군사적 능력과 청렴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을 받아 사후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조위의 장군 - 두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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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속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전속 (田續) |
| 출생지 | 기주 |
| 생애 | |
| 활동 시기 | 삼국 시대 |
| 소속 세력 | 조위 |
| 주요 활동 | 제갈량의 가정 전투에서 왕평을 추격 |
| 상세 정보 | |
| 역할 | 군사 |
| 상관 | 장합 |
| 관련 인물 | 제갈량, 왕평, 장합 |
| 기타 정보 | 가정 전투에서 왕평을 추격하다가 되돌아옴 |
2. 생애
톈쉬는 후한 말 군벌 조조 휘하의 관리 톈추의 종손이었다. 조비는 톈추와 그의 아들이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톈쉬를 톈추의 후계자로 삼아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수여했다.
263년, 톈쉬는 위나라 장군 덩아이의 부장으로 촉한 정벌에 참여했다. 덩아이가 장억의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음평(陰平)에서 강유(江油)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려 할 때, 톈쉬는 진격을 거부하여 덩아이에게 처형될 뻔했다. 덩아이가 면죽(緜竹)에서 제갈첨을 격파한 후, 장억은 검각에서 파군(巴郡)으로 후퇴했다. 종회는 톈쉬, 호열, 방회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장억의 퇴각군을 추격하게 했다.
유선이 항복하고 촉한이 멸망한 후, 종회는 조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목숨을 잃었다. 위관은 덩아이가 돌아오면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톈쉬에게 덩아이가 그를 처형하려 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덩아이를 죽이도록 부추겼다. 톈쉬는 부하들을 이끌고 면죽의 산조정(三造亭)에서 덩아이와 그의 아들 덩충(鄧忠)을 살해했다.
조비는 전속의 친아들이 일찍 죽어 가계가 끊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전속을 관내후에 임명했다고도 하고, 전속이 사망하기 전에 친아들이 일찍 죽어 전속이 죽을 때 가독을 물려주었다고도 한다.
2. 1. 초기 생애와 조위 임관
톈쉬(田續)는 현재 톈진시 지저우구에 위치한 유베이핑군 (右北平郡) 우중현 (無終縣) 출신이다. 그는 후한 말 군벌 조조 밑에서 일했던 관리 톈추의 종손이었다.220년, 조비 (조조의 아들이자 계승자)가 동한 왕조를 끝내고 스스로를 초대 황제로 하는 조위를 건국한 후, 톈추의 훌륭한 도덕성을 기리고자 했다. 그러나 톈추와 그의 아들이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조비는 톈쉬를 톈추의 계승자로 삼아 톈쉬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수여했다.
2. 2. 촉한 정벌
263년 5월, 조환의 칙령으로 촉한 정벌이 시작되면서 등애와 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을 이끌게 했다. 제갈서는 종회의 모함으로 병력을 모두 종회에게 빼앗겼고, 전속은 종회를 따라 촉 정벌에 종군했다.[1]촉한의 강유 등이 등애의 공격으로 제갈첨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巴) 지역으로 들어가자, 종회는 부까지 진군하면서 호열, 방회 등과 함께 강유를 추격하게 했다. 전속은 등애를 따라 검각을 넘었으나, 강유성에서 더 진군하지 않아 등애가 목을 베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용서받았다.[1]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전속은 등애의 지휘하에 들어가 간도 우회군에 참가하여 강유성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등애가 병사들을 쉬게 하지 않고 산을 넘어 침공을 계속하려 하자, 휴식을 권했다가 등애의 노여움을 사 참수당할 뻔했다. 주변의 중재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 일로 등애를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1]
촉 정벌에서 촉군과 직접 싸운 기록은 없지만, 위관이 종회의 모함으로 등애를 죽이려다 종회가 반란을 일으켜 죽자, 자신의 신변을 염려해 등애를 죽이려고 할 때 자진해서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등애를 죽였다.[1]
2. 3. 등애 살해
263년 촉한의 강유(姜維) 등이 등애(鄧艾)의 공격으로 제갈첨(諸葛瞻)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巴) 지역으로 들어가자 종회(鐘會)는 부까지 진군하면서 호열(胡烈), 방회(龐會) 등과 함께 강유를 추격했다.[1] 전속은 등애를 따라 검각을 넘었다가 강유성에서 전진하지 않아 등애가 목을 베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용서받았다.264년, 종회, 호열, 사찬(師簒) 등이 등애를 무고해 죄를 씌우려고 하자 위관(衛瓘)이 등애, 등충(鄧忠)을 체포해 낙양으로 압송하게 했다.[1] 이어서 종회와 강유가 성도에서 봉기하다 실패해 피살되자 등애의 옛 수하들이 등애를 구하려고 했다. 이때 자신의 신변을 염려한 위관의 지시를 받아 전속은 등애를 살해했다.[1]
촉 정벌에 참전했지만 촉군과 싸운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위관이 종회의 무고로 등애를 죽이려다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고 죽자 자신의 신변을 염려해 등애를 죽이려고 할 때, 전속은 자진해서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등애를 죽였다.[1]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전속은 등애의 지휘하에 들어가 함께 간도 우회군에 참가하여 강유성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후, 등애가 병사들을 쉬게 하지 않고 산을 넘어 침공을 계속하려 하자, 등애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러나 이것이 등애의 노여움을 사 참수당할 뻔했다. 이때 주변의 중재로 도움을 받았지만, 전속은 이 일로 등애를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촉 멸망 후, 종회에 의한 반란 소동 속에서, 일찍이 종회의 명령으로 등애를 포박하고 등애에게 복수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위관으로부터, 역시 등애를 원망하고 있다는 이유로 암살 명령을 받았다. 전속은 이를 받아 면죽 서부에서 등애를 살해했다. (『한진춘추』). 다만, 진수의 기술에 따르면, 강유성 공략 시점에서는 종회 휘하에 있었을 것이므로,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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