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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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회는 위나라의 장수로, 아버지 방덕과 같이 용맹한 인물로 묘사된다. 220년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257년 제갈탄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향후에 봉해졌다. 263년 촉한 정벌에 종회 휘하로 참여하여 면죽을 함락시키고 강유를 추격했다. 촉한 멸망 후 관우의 일족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나, 관우의 후손이 발견되면서 관흥의 후손만을 멸족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종 관위는 중위장군, 열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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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회 | |
---|---|
인물 정보 | |
이름 | 방회 |
원어 이름 | 龐會 |
로마자 표기 | Pang Hui |
작위/관직 | 열후(列侯), 중위장군(中尉將軍) |
출생 | 생년 미상 |
출신지 | 양주(涼州) 남안군(南安郡) 환도현(豲道県) |
사망 | 알 수 없음 |
소속 국가 | 위(魏) |
섬긴 군주 | 조비(曹丕) → 조예(曹叡) → 조방(曹芳) → 조모(曹髦) → 조환(曹奐) |
특이 사항 | 아버지: 방덕(龐德) 원수: 관우(關羽)의 자손 |
2. 생애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의 장수 방덕의 아들이다. 아버지 방덕과 풍채가 비슷했으며 용맹하고 굳센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1] 아버지 방덕이 219년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하자 이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황초 원년(220년), 위 문제 조비는 방덕의 공을 기려 방회를 포함한 아들 4명에게 관내후 작위를 내렸다. 감로 2년(257년), 제갈탄이 양주에서 사마씨 정권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자(제갈탄의 난), 당시 평구장군(平寇將軍) 겸 임위정후(臨渭亭侯)였던 방회는 제갈탄의 회유를 거절하고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 공으로 향후에 봉해졌다. 경원 4년(263년), 종회가 지휘하는 촉한 정벌군에 참여하여 촉한 정벌에 나섰다.
왕은의 『촉기(蜀記)』에는 촉한 멸망 후 방회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우의 일족을 찾아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1].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 및 실제 멸족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방회는 이후 관직이 중위장군(中尉將軍)에 이르렀고, 열후[3]에 봉해졌으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아버지 방덕과 풍채가 비슷했으며 용맹하고 굳센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방덕이 건안 24년(219년) 형주에서 관우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하자 이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었다.황초 원년(220년), 위 문제 조비는 방덕의 공을 기려 방회를 포함한 아들 4명에게 관내후 작위를 내렸다. 방회는 이때 임위정후(臨渭亭侯)에 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감로 2년(257년), 제갈탄이 양주에서 사마씨 정권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자(제갈탄의 난), 당시 평구장군(平寇將軍) 겸 임위정후였던 방회는 제갈탄의 회유를 거절하고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이 공으로 향후에 봉해졌다.
경원 4년(263년), 종회가 지휘하는 촉한 정벌군에 참여하여 촉한 정벌에 나섰다. 방회는 호렬, 전속 등과 함께 면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이후 검각에서 후퇴하여 파군(巴郡)에 주둔한 강유의 군대를 추격했다.
왕은의 『촉기(蜀記)』에는 촉한 멸망 후 방회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우의 일족을 찾아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1]. 같은 책에는 종회가 촉 땅에서 방덕의 유해를 찾아 업으로 옮겨 매장했으며, 이때 유해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는 기록도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촉기』의 기록, 특히 방덕의 유해 관련 내용은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배송지는 방덕의 묘는 본래 위의 영토 내에 있었으므로 촉에서 유해를 찾았다는 것은 사실과 명백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방회는 이후 관직이 중위장군(中尉將軍)에 이르렀고, 열후[3]에 봉해졌다.
2. 2. 제갈탄의 난 진압
감로 2년(257년), 제갈탄이 양주에서 사마씨 정권에 반기를 들고 거병하였다(제갈탄의 난). 당시 평구장군이자 림위정후였던 방회는 제갈탄의 회유를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이 공적으로 향후에 봉해졌다.2. 3. 촉한 정벌
263년, 종회의 부장으로 발탁되어 촉한 정벌(촉한의 멸망)에 참여했다. 방회는 종회의 명령에 따라 호렬, 전속과 함께 면죽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검각에서 물러나 파군에 주둔한 촉의 장수 강유를 추격했다.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이 멸망한 후 방회는 아버지 방덕이 관우에게 살해당한 원한으로 촉 땅을 뒤져 관우의 후손들을 찾아내 모두 죽였다고 한다[1].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같은 『촉기』에는 종회가 촉에서 방덕의 유해를 찾아 업에 매장했으며, 이때 시신이 살아있는 듯했다는 기록도 있으나[2], 배송지는 방덕의 묘는 본래 위나라 영토 내에 있었다고 지적하며 해당 기록이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우 일족 멸족 기록의 진위 역시 불확실하다.
2. 4. 관우 일족 멸족 논란
방회는 아버지 방덕이 관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1] 263년 위나라가 촉한을 정벌할 때(촉한의 멸망), 방회는 종회의 부장으로 참전했다. 왕은의 『촉기』(蜀記)에 따르면, 촉한이 멸망한 후 방회는 성도에서 관우의 일족을 찾아 모두 죽였다고 한다.[1] 이는 아버지의 복수를 한 것으로 해석된다.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같은 『촉기』에는 종회가 촉에서 방덕의 유해를 찾아 업에 매장했다는 기록도 있는데[2], 배송지는 방덕의 묘는 본래 위의 영토 내에 있었으므로 이 기록이 명백히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2] 따라서 방회가 관우의 일족을 멸족시켰다는 기록 역시 그대로 믿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최근 관우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회의 멸족설은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방회가 죽인 것은 관우의 차남 관흥의 후손들이며, 장남 관평의 후손들은 관평이 형주 공방전 이후 오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관평의 후손들이 오나라 지역에 정착하여 대를 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따라서 방회가 관우의 후손을 완전히 멸족시킨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2. 5. 이후 행적
아버지 방덕과 비슷한 풍채를 지녔으며 용맹했다고 전해진다. 황초 원년(220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자, 전년인 건안 24년(219년) 형주에서 관우에게 패배하여 전사한 아버지 방덕을 기리기 위해 방회를 포함한 4명을 관내후로 봉했다(방회는 림위정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회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관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감로 2년(257년), 제갈탄이 양주에서 사마씨 정권에 반기를 들고 거병하자(제갈탄의 난), 당시 평구장군이자 림위정후였던 방회는 제갈탄의 회유를 거절하고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이 공적으로 향후에 봉해졌다.
경원 4년(263년), 종회가 이끄는 촉한 정벌(촉한의 멸망)에 참여했다. 종회의 명령으로 호렬, 전속과 함께 면죽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검각에서 물러나 파군에 주둔한 촉의 장수 강유를 추격했다.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이 멸망한 후 방회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우의 일족을 찾아내 모두 죽였다고 한다.[1]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때 멸족된 것은 관우의 차남 관흥의 후손들이었고, 장남 관평의 후손들은 일찍이 오나라에 억류되었다가 항주에 정착하여 살아남았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관우의 67대 후손이 발견되어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같은 『촉기』에는 종회가 촉 땅에서 방덕의 유해를 찾아 업으로 옮겨 매장했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모습이 온전했다는 기록도 있다.[2] 그러나 배송지는 방덕의 무덤은 본래 위의 영토 내에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
방회는 최종적으로 중위장군까지 올랐으며, 열후[3]에 봉해졌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방회는 아주 짧게 등장한다. 아버지 방덕이 관우와의 결전을 앞두고 관을 메고 출진할 때, 방회가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는 장면이 유일하게 묘사되는 부분이다.
4. 가계
참조
[1]
서적
『三国志』蜀書関羽伝注
[2]
서적
『三国志』魏書龐悳伝注
[3]
문서
郷侯より上位の侯となったかは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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