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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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제정(Dominatus)은 '주인' 또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dominus'에서 유래한 용어로, 로마 제국 말기에 황제의 권력 집중과 관련된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3세기 위기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도입된 도미나투스는 정치, 행정, 군사, 종교, 사회 등 다방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테트라르키아(사두 정치) 도입, 관료제 강화, 원로원 권한 약화, 군대 개편, 황제 숭배 등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 제국의 안정성을 추구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수도가 여러 번 이동하고, 콜로누스 제도가 강화되는 등 사회·경제적인 변화도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로마 제국을 동방 군주국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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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제정 | |
|---|---|
| 지도 | |
| 개요 | |
| 명칭 | 도미나투스 |
| 로마자 표기 | Dominatus |
| 어원 | 라틴어: dominus (도미누스, '주인' 또는 '주권자') |
| 의미 | 로마 황제를 '주인'으로 칭하는 것에서 유래한 정치 체제 후기 로마 제국의 정치 형태 |
| 특징 | 황제의 권력이 강화됨. '도미누스' 칭호가 황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으로 사용됨. 원로원과 같은 전통적인 공화정 기관의 영향력이 약화됨. 황제가 직접 제국을 통치하는 전제 정치 체제 군사적 성격이 강한 관료제가 발달함. 황제 숭배 사상이 강화됨. 사두정치 체제로 시작하여 일인 황제 체제로 복귀함. 동서 로마 제국 분할의 원인이 됨. |
| 역사적 배경 | |
| 전개 |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등장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사두정치(293년)가 그 시발점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 일인 황제 체제로 변모함.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동서 로마 분열로 이어짐. |
| 주요 관직 | |
| 마기스테르 밀리툼 | 로마 군대의 총사령관 |
| 프라에펙투스 프라에토리오 | 근위대 사령관, 황제의 행정 및 사법 업무를 보좌 |
| 관련 개념 | |
| 도미누스 |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 원래는 신하들이 황제를 부르는 호칭이었으나, 점차 공식적인 칭호로 굳어짐. 오현제 시대에도 사용된 바 있음. |
| 원수정 | 도미나투스 이전의 로마 정치 체제. |
| 다른 뜻 | |
| 관련 개념 | 전제 정치 |
2. 용어의 기원
현대 용어 "도미네이트(dominate)"는 "주인" 또는 "지배자"로 번역되는 라틴어 ''dominus''에서 유래했다. 로마 노예들이 주인을 부를 때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dominus''는 제정 시대에 로마 황제를 지칭할 때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대개 황제를 언급할 때 과도한 아첨(또는 정치적 비난)의 형태로 사용되었다.[5]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관행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특히 티베리우스는 이를 아첨으로 비난했다고 한다.[6] 도미티아누스는 그 사용을 장려했지만,[7] 서기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통치 시대까지는 어떤 황제도 반 공식적인 지위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 "deus et dominus natus"("신이자 주인으로 태어남")라는 비문이 새겨진 주화가 발행되었다.[8]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dominus''라는 용어가 황제의 공식 칭호의 일부로 채택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급진적인 개혁의 일부를 형성했다.[1]
3세기 위기라 불리는 50년간의 혼란은 로마 제국의 원수정 체제가 가진 약점을 드러냈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나투스 체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서기 285년부터 시작된 보다 공식적인 독재 정부 형태로의 점진적인 변화였다.[9]
3. 원수정에서 도미나투스로의 전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일반적으로 도미나투스 체제의 창시자로 여겨지지만, 그 기원은 이전 황제들, 특히 아우렐리아누스(270~275년)가 실시한 혁신에 있다.[43] 일부 개혁은 갈리에누스(253~268년)[11]와 트라야누스(98~117년) 치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2]
도미나투스로의 전환은 337년경에 완료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13]
이러한 변화는 제국의 통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때부터 명목상으로는 공화정을 준수하는 태도를 보이며 원수정을 유지하였으나, 3세기 위기를 거치면서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신성한(sacer) 황제”라고 칭하며 황제 권위의 재건에 힘썼다.[64] 이로써 황제는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신권적인 군주가 되었으며, 이 체제를 '''전제군주정'''(Dominátu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를 재분할하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축소했으며, 강력한 관료제를 만들어 전제적인 황제가 관료를 통해 백성을 지배하는 체제를 형성했다. 또한 테트라르키아 제도를 만들어 황제권을 분할하고, 황위 계승 시스템을 구축하여 권력 집중을 막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황제권은 공화정 시대의 여러 공직의 권한에서 계승된 개념에 의존하고 있었고, 황제가 전제 군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67]
3. 1. 정치, 행정적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위기라고 불리는 50년간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테트라르키아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했다.[9] 이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두 명의 정제(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부제(카이사르)가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방식이었다.[14] 각 황제는 제국의 특정 지역을 담당하여 방어하고, 권력 분담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트라르키아를 폐지하고 단독 황제 체제를 확립했지만, 제국을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는 방식은 유지했다.[13] 그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여 동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미나투스 시대에는 관료제가 크게 발달했다. 황제를 보좌하는 중앙 관료 조직이 강화되었고, 지방 행정 조직도 개편되었다.[10] 이로 인해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고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 구분 | 원수정 시대 | 도미나투스 시대 |
|--------------|--------------------------------|---------------------------------|
| 황제 권력 | 원로원과 분담 | 황제에게 집중 |
| 행정 체제 | 속주 중심 | 관료제 중심 |
| 원로원 역할 | 실질적인 권력 행사 | 황제 자문 기관으로 전락 |
| 주요 관료 | 원로원 의원 | 기사 계급 출신 |
원로원의 권한은 도미나투스 시대에 크게 약화되었다.[24] 원로원은 더 이상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황제의 자문 기관으로 전락했다. 반면, 기사 계급 출신들이 행정 및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12] 이는 전통적인 귀족 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며, 황제 권력 강화에 기여했다.
3. 2. 군사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총독이나 프라이토리아누스 총독이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군사 행정과 민정을 분리했다.[35] 프라이토리아누스 총독은 황제의 최고 행정관으로서 황제 바로 아래 계급에 있었지만, 점차 권한의 일부가 박탈되어 군사령관에게 군사 문제가, 황제 궁내장에게 중앙 민정 행정이 주어졌다.[36] 이는 총독의 광범위한 임무에 적합한 관리가 부족했고, 강력한 총독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37]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군 지휘관과 민정 행정을 분리하고 군대를 야전군("''comitatenses''")과 국경군("''limitanei''")으로 나누었다.[38] 야전군은 제국의 전략 예비군으로 위기에 대응했고, 국경군은 제국 국경("''limes''")을 따라 영구 주둔했다. 황제를 수행하는 궁정군("''Palatini''")는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의 후계자 역할을 했다.[39]
콘스탄티누스는 최고 군사령관인 군사령관 직책을 신설했다. 보병대장 ''마기스터 페디툼(magister peditum)''과 기병대장 ''마기스터 에퀴툼(magister equitum)''으로 시작하여, 네 개의 프라이토리안 총독령에 각각 설립되었다. 제국 전역에서 군사령관의 수와 유형은 다양했으며, 이들은 모두 ''일루스트레스(illustres)'' 계급이었다.3. 3. 종교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숭배를 강화하여 황제의 권위를 신성화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을 유피테르 신과 연결시키고, 동료 황제 막시미아누스를 헤라클레스와 연관시켰다.[47]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공인하고(313년 밀라노 칙령), 기독교를 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육성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기독교는 서양 문명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49] 황궁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의 희생으로 눈에 띄지 않게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51]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380년), 이교 신앙을 금지했다. 이로써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다.[53]
3. 4. 경제, 사회적 변화
도미나투스 시대에는 농노제가 확산되었다. 콜로누스라고 불리는 소작농들은 토지에 묶여 자유롭게 이주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게 되었다.[61] 이는 중세 봉건 사회의 농노제와 유사한 형태였다.
로마는 더 이상 제국의 유일한 수도가 아니었다. 황제들은 제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거나, 특정 도시에 거주하면서 제국을 통치했다.
3. 5. 황제권 강화와 관련된 변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아우구스투스 동료들과 후계자들은 제국의 권력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들은 겸손한 원수 칭호 대신,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 통치자들처럼 숭배를 받기 시작했으며, 원수정 시대 황제들이 사용했던 간소한 토가 프레텍스타와는 달리 보석이 박힌 로브와 신발을 착용했다.[62]
황제들은 호화로운 궁전에 거주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거대한 궁전 유적은 달마티아에 현재까지 남아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참조) 황제의 총애와 근접성 때문에 최고의 명예 칭호와 관료직을 얻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궁정에 둘러싸여 있었다.[62] 궁정 생활과 관련된 많은 직책과 왕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시사하는 직책은 결국 궁내장과 원수의 직책과 같이 권력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62]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의 칭호는 후기 제국에서 단순한 명예직이 되었다.[62]
역사가 데이비드 포터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의 정부 변화를 설명하면서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데 사용한 이미지의 변화(이 경우 시르미움에 거대한 새로운 궁전 건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62]
> 마르쿠스가 기억에 남도록 묘사한 정부의 방식, 즉 황제가 올바른 귀족적 행실의 본보기로 자신을 보이려고 했던 방식은 황제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의 집은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보다 더 큰 버전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달라야 했다.
''도미누스''를 공식 칭호로 채택한 것은 제국 지위의 신성한 지위(''디부스'')를 반영한다.[62] 원래 상원이 사후에 황제에게 수여한 특별한 영예였지만, 그 지위는 살아있는 카이사르에게도 기대되는 관례가 되었다. 3세기 위기의 반란과 찬탈을 막기 위해 황제들은 동방 군주국이 사용하는 신성한 정당성을 추구했다.[62]
황제들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의 옷자락에 입 맞추는 의식(프로스퀴네시스) 등을 수입했다.[62]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일부 기독교 황제들조차도 사후에 숭배를 받았다. 476년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 왕관과 동방 정교회 사이의 공생 관계는 중세 로마 국가의 독특한 성격을 만들어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사망(518년) 시 ''디부스''로 봉헌된 마지막 황제였다.[62] 그 칭호는 그 이후로는 영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로마 지도자의 신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의 황제 숭배 참조).[62] ''도미누스 노스터''라는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통치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65년 사망)였으며, ''바실레우스''("왕")라는 칭호로 대체되었다.[62] 제국의 동부,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부터는 도미나투스 제도가 자치적인 절대주의로 발전했다.[62]
그러나 원로원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도미나투스 시대의 황제들은 신격화될 수 없었다. 초기 20년과 율리아누스의 통치, 그리고 기독교 시대의 로마 제국을 제외하고는 말이다.[62]
제국 지위의 상승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명확한 징후는 황제를 로마의 위엄의 화신으로 보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폐하 모독''은 반역죄가 되었다.
4. 도미나투스 체제의 의의와 영향
도미나투스 체제는 3세기의 위기[9]라고 불리는 50년간의 혼란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이 시기의 여러 문제점(권력 찬탈, 군사 반란, 동시다발적 군사 분쟁)은 원수정 하의 로마 국가의 약점을 드러냈고, 그 결과 서기 285년 이후 보다 공식적인 독재 정부로의 점진적인 변화가 나타났다.[9]
이러한 변화는 원로원 귀족이 고위 군사직에서 점진적으로 배제되고 기사 계급(equestrian order)이 동시 승격되었으며, 군대가 재편성되고 기동 야전군이 창설되었다. 또한 황제 복장과 의례의 변화, 종교적 통합을 목표로 하는 종교 정책, 대규모 통화 개혁, 그리고 제국 전역의 민정 관료제의 창설을 보여준다.[10]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반적으로 도미나투스 체제의 창시자로 여겨지지만, 그 기원은 이전 황제들, 특히 아우렐리아누스(270~275년)가 실시한 혁신에 있다.[43] 일부 개혁은 갈리에누스(253~268년)[11]와 트라야누스(98~117년) 치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트라야누스 치세 동안에는 "기사(Equites, knights)들이 로마와 제국의 행정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12]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서기 305년에 퇴위할 때까지 도미나투스 체제를 낳은 모든 변화가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변화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도입되거나 수정되었다. 원수정이 기원전 31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미나투스 체제로 이어진 개혁이 대체로 완료된 것은 서기 337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13]
역사가 존 베그널 버리(J. B. Bury)는 도미나투스 체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세부 사항에 가장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 구성되었으며, 해체와 파산의 위협을 받고, 지리적으로 전혀 압축적이지 않고 방어해야 할 네 개의 긴 국경과 여러 개의 작은 국경을 가진 거대하고 이질적인 제국을 하나로 묶는다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는 또한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두 개의 초점에서 통제되는 두 개의 독립적이지만 완벽하게 유사한 기계로 큰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그 통일성을 희생하지 않고도 흥미롭고 전적으로 새로운 실험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관료 기계는 적당히 잘 작동했고, 그것을 지휘하는 군주들이 항상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매우 뛰어났을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경제와 재정 분야에서는 결점과 결함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일리리아 황제들의 정치적 창조는 로마의 천재성에 어울리는 것이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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