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태
1. 개요
정성태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민족운동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사회부 감사과장과 내무부 인사과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풀려난 후,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고 광주상업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후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6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활동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1973년 9대 총선에서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2000년에 사망했다.
-
조선민족청년단 -
이범석
이범석은 조선 왕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으로, 청산리 대첩에서의 활약과 대한민국 건국 참여, 초대 국무총리 역임 등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과장된 서술 및 정치적 행보에 대한 논란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조선민족청년단 -
안호상
안호상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 정치인으로, 베를린 대학교 철학 박사 출신으로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며 교육 제도 확립에 기여하고 민족주의 사상가로서 일민주의를 주창하며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으나 독립운동 참여와 일부 친일 활동 의혹 등 논란이 있다. -
하동 정씨 -
정청래
-
하동 정씨 -
정몽준
정몽준은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7선 국회의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FIFA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에 기여했으며,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공헌 활동을 한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축구 행정가이다. -
위키백과 특수 효과용 -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은 런던 빈민가 출신으로 뛰어난 코미디 연기와 영화 연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작은 방랑자" 캐릭터, 슬랩스틱 코미디, 판토마임 연기, 사회 비판적 메시지, 매카시즘 시대의 탄압, 아카데미 명예상 수상 등으로 대표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영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다. -
위키백과 특수 효과용 -
1996년 하계 올림픽
1996년 하계 올림픽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개최되어 26개 종목 271개 세부 종목으로 구성, 197개국이 참가했으나,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 폭탄 테러 사건과 재정적 성공, 도시 인프라 개선이라는 양면성을 남겼다.
2. 생애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군(현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1940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국민회 전남도 지부 청년부장, 보성전문학교 교원, 민족청년단 전남도 부단장을 지냈다.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의 추천으로 사회부 감사과장이 되었고, 1949년부터 내무부 인사과장을 역임했다.
1965년 8월 13일 한일협정 비준에 항의하여 민중당을 탈당하고, 윤보선 계열의 김도연, 김재광 등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민주당 의원을 거쳐, 민정당 원내총무, 민중당 원내총무, 신한당 사무총장, 신민당 원내총무·정무위원, 국회부의장(1970년 6월~1971년 6월) 등을 역임했다.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같은 해 5월 2일 정계를 은퇴했다.
2000년 8월 17일 오전 9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85세.
2.1. 초기 활동 (해방 ~ 1950년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45년 보성전문학교 교사였던 장덕수의 권고와 추천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곧 탈당,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전남 화순탄광에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때 안면을 익힌 전진한이 초대 사회부장관으로 취임함에 따라 사회부 감사과장에 발탁됐고, 1949년 내무부 인사과장으로 전보되었다. 한국 전쟁 중 납치되어 평양까지 끌려갔지만 지인의 주선으로 풀려나 되돌아왔다.
1950년 공무원을 사퇴하고 고향인 광주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 그 후 광주상고 교장으로 있다가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당선되어 4, 5, 6, 7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의원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하며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2.2. 정치 활동 (1950년대 ~ 1970년대)
1945년 보성전문학교 교사였던 장덕수의 권고와 추천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곧 탈당,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전남 화순탄광에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때 안면을 익힌 전진한이 초대 사회부장관으로 취임함에 따라 사회부 감사과장에 발탁됐고, 1949년 내무부 인사과장으로 전보되었다가 한국 전쟁 중 납치되어 평양까지 끌려갔지만 지인의 주선으로 풀려나 되돌아왔다.
1950년 공무원을 사퇴하고 고향인 광주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 그 후 광주상고 교장으로 있다가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4, 5, 6, 7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의원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하며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1964년 박정희, 김종필의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다른 야당정치인들과 함께 동참했고, 한일협정 비준에 항의하여 윤보선 등의 국회의원과 함께 사직서를 내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집권연장을 위한 3선 개헌에 반대하여 도보 행진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 구파 내에서도 강경파로 활동했으나 나중에는 유진오 당수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8월 31일부터 3선 개헌에 반대하기 위해 광주에서 서울로 "3선 개헌 반대 천리도헌정수호행진"을 실시하여 11일간 도보 데모로 서울 시경계에 도착했지만, 경찰의 저지로 시내에서 행진할 수 없게 되어 종로구 삼청동 자택으로 강제 귀가당했다.
4. 학력
* 보성전문학교 법과 전문학사 졸업
5. 약력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출신이다. 1940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국민회 전남도지부 청년부장, 보성전문학교 교원, 민족청년단 전남도 부단장을 거쳐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의 추천으로 사회부 감사과장이 되었고, 1949년부터 내무부 인사과장을 역임했다.
1950년 공무원을 사퇴하고 제2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이후 광주상업중고등학교(현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초선 의원이 된 이후, 광주시 지역구 국회의원을 6선 연임했으나, 제6대 국회의원 재직 중이던 1965년 8월 13일 한일협정 비준에 항의하여 민중당을 탈당하고, 윤보선 계열의 김도연, 김재광 등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민주당 의원을 거쳐, 민정당 원내총무, 민중당 원내총무, 신한당 사무총장, 신민당 원내총무·정무위원, 국회부의장(1970년 6월~1971년 6월) 등을 역임했다. 1973년 제9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같은 해 5월 2일 정계를 은퇴했다.
* 광주상업중고등학교 교장
* 국민회 전남도지부 청년부장
* 민족청년단 전남도 부단장
* 내무부 인사과장
* 민정ㆍ민중ㆍ신민당 원내총무
* 신한당 사무총장
* 신민당 정무위원
* 국회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