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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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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종영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등을 역임했으며,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이다. 공조참판, 강원·경상·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팔계군에 봉군되었고,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서원을 세워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6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우찬성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선조 때 은퇴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사망했다. 숙종 때 정헌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중종 38년(154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헌납, 부수찬, 지평,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 7년(1552년)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공조참판을 거쳐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명종 18년(1563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평양에 서원을 건립, 서북 지역의 유학 진흥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한성판윤을 거쳐 명종 22년(1567년)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공조, 형조, 병조, 예조, 호조, 이조의 판서를 모두 1회 이상 역임하고 우찬성을 지낸 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판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임금은 중사(中使)를 보내 환송하게 하였으며, 모든 문무백관이 환송연에 참여하였다. 전송하는 거마(車馬)가 한강을 메웠다고 하며, 이전에 판서로 재직했던 6조 각 부에서는 각각 전별연을 준비하여 별도의 환송연을 치렀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은례(恩禮)로서 치사하는 정종영을 크게 사모하였다.

정종영은 정난정의 서고모(庶姑母)였으며, 윤원형이 옥사를 일으킬 때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정종영은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정난정을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여 윤원형의 유감을 샀으나, 정난정 어머니의 경계로 화를 면하고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윤원형의 친속(親屬) 등이 수령(守令)으로 있는 지역에서 그들의 고과(考課)를 모두 하(下)로 주고, 인종의 태봉(胎峯)의 나무를 베어낸 중을 엄하게 치죄(治罪)하여 죽게 하였다. 이로 인해 내전(內殿)과 권간(權奸)의 분노를 샀으나, 삼사(三司)와 태학(太學) 유생(儒生)들의 변호로 체직되지 않았다. 을사사화 당시 윤원형은 정종영을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참여하도록 하려 했으나, 정종영은 거짓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고, 윤원형은 정종영을 따돌리고 앙심을 품어 해치려 하였으나, 끝까지 화를 면했다.

원주 향리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그해 7월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관비로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숙종 때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종영은 도량이 넓고 굳세었으며, 공사(公事)에 힘을 다하여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였다. 명종 초기에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정종영의 서고모(庶姑母)였으나, 정종영은 윤원형의 옥사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정난정을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여 윤원형의 유감을 샀다. 그러나 정난정 어머니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선조 때에도 청망(淸望)이 쇠하지 않았으나, 도학을 좋아하지 않고 후진을 소외하였으며 이발 등에게 미움을 받아 탄핵을 거듭 받았다. 선조는 그를 정직하게 여겨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이가 들어 명절(名節)을 잃지 않게 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정종영(鄭宗榮)의 자(字)는 인길(仁吉), 호(號)는 항재(恒齋)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고려 시대 시중(侍中)을 지낸 정배걸(鄭倍傑)의 후손이다. 증조부 정온(鄭溫)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조부 정윤겸(鄭允謙)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청계군(淸溪君)에 이르렀다. 아버지 정숙(鄭淑)은 음공(蔭功)으로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정종영이 귀하게 되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초계군(草溪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로, 충의위(忠義衛) 선략장군(宣略將軍) 김계훈(金季勳)의 딸이자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예이다.

정종영은 1513년(중종 8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고 한다.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장양공(정윤겸)의 임지(任地)에 따라가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세에 모재(慕齋) 김안국에게 수학하였는데, 기묘사화 이후 성리학(性理學)이 기피되는 상황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스승의 칭찬을 받았다.

2. 2. 관직 생활

중종 38년(154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헌납, 부수찬, 지평, 교리를 역임하였다. 명종 7년(1552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공조참판을 거쳐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명종 18년(1563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평양에 서원을 세워 학문 진흥에 힘쓴 결과, 서북인(평안도)의 유학 진흥과 문화 발전에 큰 공적을 세웠다. 한성판윤을 지내고, 명종 22년(1567년)에는 진향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공조, 형조, 병조, 예조, 호조, 이조 등 6조의 판서를 모두 1회 이상 역임하고, 우찬성을 지낸 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판중추부사로 치사(벼슬에서 물러남)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 환송하게 하였으며, 모든 문무백관이 환송연에 참여하여 전송하는 거마(車馬)가 한강을 메웠다고 한다. 이전에 판서로 재직했던 6조 각 부에서는 각각 전별연을 준비하여 별도의 환송연을 치렀으니, 모든 사람들이 은례(恩禮)로서 치사하는 정종영을 크게 사모하였다.

2. 3. 윤원형과의 관계

정종영은 정난정의 서고모(庶姑母)였다. 윤원형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킬 때 정종영에게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정종영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정난정이 정실(正室)이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져 외명부(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으나, 정종영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이 크게 유감을 품어 매번 죄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정난정의 어머니는 정난정에게 "너는 종손을 해치지 말라. 내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당하겠다"라고 경계하였으므로 화를 면하고 예전처럼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윤원형의 가까운 친속(親屬)과 문객(門客) 중 도내(道內) 수령(守令)으로 있는 자들이 기염(氣焰)을 떨치면서 멋대로 탐욕스러운 짓을 저질렀다. 정종영은 부임 후 그들의 고과(考課)를 모두 하(下考, 가장 낮은 점수)에 두었고, 어떤 요망한 중이 내지(內旨)를 칭탁(稱託)하여 인종의 태봉(胎峯)에 있는 나무들을 거의 모조리 베어낸 것을 엄하게 치죄(治罪)하여 그 중을 죽게 하였다. 이로 인해 내전(內殿)이 진노(震怒)하고 권간(權奸)이 앙심을 품어 즉시 정종영의 직임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으나,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리고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이 소(疏)를 올려 정종영의 행위가 옳다고 변호하였기 때문에 체직되지 않았다.

을사사화 당시 윤원형은 인척(姻戚) 관계인 정종영을 불러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참여하도록 하려 했으나, 정종영은 거짓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이에 윤원형은 “이 사람과는 큰일을 함께 상의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정종영을 따돌리고 앙심을 품어 해치려 하였으나, 정종영은 끝까지 화를 면했다.

2. 4. 은퇴와 죽음

정종영은 선조 22년(1589년)에 은퇴를 요청했고, 임금은 중사(中使)를 보내 환송하게 했다. 모든 문무백관이 환송연에 참여했고, 한강에는 전송하는 거마(車馬)가 가득 찼다고 한다. 이전에 판서로 재직했던 6조 각 부서에서는 각각 전별연을 준비하여 별도의 환송연을 열었고, 모든 사람들이 은례(恩禮)로서 치사하는 정종영을 크게 사모하였다. 정종영은 원주 향리로 내려와 자질들과 후진들을 가르치다가 그해 7월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관비로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숙종 때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종영은 풍질(風疾)이 있어 관직을 모두 사퇴하고 훈봉(勳封)으로 집에 돌아갔다. 선조 15년(1582년) 이후 여러 차례 치사를 청하였는데, 이때 집안사람에게 월봉(月俸)을 받지 말도록 하고 간절히 사퇴하여 윤허를 받아 횡성의 향리로 돌아갔다.

정종영은 도량이 넓고 굳세었으며, 삼가고 부지런한 자세로 공사(公事)에 힘을 다하여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였다. 명종 초기에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정종영의 서고모(庶姑母)였으나, 정종영은 윤원형의 옥사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정난정을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여 윤원형의 유감을 샀다. 그러나 정난정 어머니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당저(當宁, 선조) 때에도 청망(淸望)이 쇠하지 않았으나, 도학을 좋아하지 않고 후진을 소외하였으며 이발 등에게 미움을 받아 탄핵을 거듭 입었다. 선조는 그를 정직하게 여겨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이가 들어 명절(名節)을 잃지 않게 되었다. 자손이 많은데 아들 정혹은 명관이 되었다.

3. 사상과 업적

정종영의 사적은 조선왕조실록에 100여 회에 걸쳐 이름이 나오고 있으며, 해동명신록, 여지승람, 태백의 인물 등 여러 문헌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문집, 서화시집 등 기타 문헌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매우 안타깝다.

3. 1. 청렴과 강직

정종영은 평소 검소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가마를 타지 않는 등, 가난한 선비와 같은 모습으로 담담하게 지냈다. 그러나 나랏일을 할 때는 매우 엄정하게 처리하였다.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르던 수령과 승려들을 엄하게 처벌한 것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그는 4도의 감사로 재직하면서 학교 교육을 우선적인 정책으로 삼아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6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는 법을 철저히 지켜 사사로움 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밤늦게까지 정무를 보면서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엄격한 기상으로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이준경이 정종영을 정금미옥(精金美玉)에 비유하며 칭찬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음에도, 모든 당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3. 2. 행정 능력

정종영은 평소 검소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가마를 타지 않는 등 가난한 선비와 같이 담담한 평민적인 모습으로 지냈다. 그러나 국정을 다스릴 때는 엄정한 처사로 임했다. 경상감사 시절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르던 수령과 승려들을 엄하게 처벌한 사실은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면이다. 4도의 감사로서는 교학을 우선 시책으로 삼아 문교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6조의 판서 때는 성헌(成憲)을 준수하여 엄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밤늦게까지 정사에 힘쓰면서 조금도 태만함이 없었다. 엄연한 기상으로 감히 누구도 범하지 못할 위엄을 갖춘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준경이 정금미옥(精金美玉)으로 비유하며 정종영을 칭송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며, 당파 싸움이 치열하던 때였으나 어느 파의 사람에게도 존경을 받는 존재였으니 가히 그 인격을 짐작할 만하였다.

3. 3. 교육 진흥

정종영은 관서 지역(평안도) 백성들이 무예를 좋아하고 글공부를 싫어하여 무식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서적을 널리 간행하고 평양에 서원을 건립하여 글공부를 장려하였다. 그 결과, 수년 뒤에는 생원·진사에 합격하는 자들이 많아졌고, 문과에 급제하는 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4. 평가

정종영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았으며, 훌륭한 업적을 남긴 관리로 평가받는다. 이준경은 정종영을 "정금미옥(精金美玉)"에 비유하며 그의 곧은 성품을 칭송했다. 그러나 그의 문집, 서화 시집, 기타 문헌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아있다.

4. 1. 긍정적 평가

정종영은 평소 비단옷을 입지 않고 가마를 타지 않는 등 가난한 선비와 같이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랏일을 할 때에는 엄격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르던 수령과 승려들을 엄벌한 것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정종영은 4도의 감사로 재직하면서 학교 교육을 장려하고 농업 생산을 늘리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아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또한, 6조의 판서를 지내면서는 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공정하고 사심 없이 업무를 처리하였다. 밤늦게까지 정사에 매달려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누구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준경이 정종영을 "정금미옥(精金美玉)"에 비유하며 칭찬한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정종영은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4. 2. 부정적 평가

정종영은 평소 검소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고 가마를 타지 않는 등 가난한 선비처럼 소박하게 지냈다. 그러나 나랏일을 할 때에는 매우 엄격했다. 경상감사 시절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르던 수령과 승려들을 엄하게 처벌한 것은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4개 도의 감사로서는 교육을 우선 정책으로 삼아 문교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6조의 판서를 지낼 때에는 법을 준수하여 엄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밤늦게까지 정사에 힘쓰면서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엄연한 기상으로 누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갖춘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준경은 정종영을 '정금미옥'(순수하고 아름다운 옥)에 비유하며 칭송했는데, 이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음에도 어느 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인격을 짐작할 만하다.

정종영의 사적은 조선왕조실록에 100여 회에 걸쳐 이름이 나오고 있고, 해동명신록, 동국여지승람, 태백의 인물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문집, 서화 시집, 기타 문헌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은 매우 아쉽다.

4. 3. 종합적 평가

정종영은 평소 비단옷을 입지 않고 가마를 타지 않는 등 가난한 선비처럼 검소하게 지냈다. 그러나랏일을 처리할 때는 매우 엄격하고 단호했다. 경상감사 시절 문정왕후와 영의정 윤원형의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르던 수령과 승려들을 엄하게 처벌한 것은 그의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4도의 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을 우선 과제로 삼아 문교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6조의 판서를 지낼 때는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공정하게 처리했으며, 밤늦게까지 정사에 힘쓰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누구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영의정 이준경은 정종영을 '정금미옥(精金美玉, 순수하고 아름다운 금과 옥)'에 비유하며 칭송했는데, 이는 그의 곧은 성품을 잘 보여준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음에도 정종영은 모든 당파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영의 행적이 100여 차례나 기록되어 있으며, 해동명신록, 동국여지승람, 태백의 인물 등 여러 문헌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그의 문집, 서화집, 기타 문헌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5. 가계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정숙(鄭淑)음공(蔭功)으로 출사(出仕)하여 현감 역임, 숭정 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초계군(草溪君)에 추증
어머니정경 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충의위(忠義衛) 선략 장군(宣略將軍) 김계훈(金季勳)의 딸, 개국 공신(開國功臣)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예
부인문화 유씨(文化柳氏)사도시정(司䆃寺正) 유엄(柳渰)의 딸, 자녀 없음
부인성주 이씨(星州李氏)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이엄(李渰)의 딸,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의 후손
장남정약(鄭爚)통정 대부(通政大夫) 목사(牧使)
차남정열(鄭烈)별제(別提)
3남정묵(鄭默)군수(郡守)
4남정혹(鄭豰)문과(文科) 급제, 관찰사(觀察使)
장녀최경상(崔景祥)증(贈) 대사헌(大司憲)에게 출가
차녀조문벽(趙文璧)진사(進士)에게 출가
측실 소생 사위박대경(朴大慶), 윤식(尹湜), 김인원(金仁元), 이흥효(李興孝)
장손정기광(鄭基廣)정약(鄭爚)의 장남, 문과 급제, 좌윤(左尹), 팔천군(八川君) 승습
차손정기성(鄭基成)정약(鄭爚)의 차남, 부호군(副護軍)
손자정기평(鄭基平)정약(鄭爚)의 아들
손자정기풍(鄭基豐)정약(鄭爚)의 아들, 문과 급제, 부윤(府尹)
손녀사위정호경(丁好敬)정약(鄭爚)의 사위, 진사
손녀사위한복윤(韓復胤)정약(鄭爚)의 사위, 도사(都事)
손녀사위권종길(權宗吉)정약(鄭爚)의 사위
손녀사위윤의립(尹毅立)정약(鄭爚)의 사위, 판서(判書)
손녀사위이응시(李應蓍)정약(鄭爚)의 사위, 대사헌
손자정기남(鄭基南)정열(鄭烈)의 장남, 교관(敎官)
손자정기달(鄭基達)정열(鄭烈)의 차남
손녀사위이기영(李奇英)정열(鄭烈)의 사위, 판관(判官)
손녀사위고신오(高愼吾)정열(鄭烈)의 사위
손녀사위원경인(元慶寅)정열(鄭烈)의 사위
손녀사위한태일(韓泰一)정열(鄭烈)의 사위, 찰방(察訪)
손자정기방(鄭基磅)정묵(鄭默)의 아들, 감찰(監察)
손녀사위이분(李昐)정묵(鄭默)의 사위
손녀사위김래(金琜)정묵(鄭默)의 사위, 목사(牧使)
손녀사위홍순일(洪順一)정묵(鄭默)의 사위
손자정기숭(鄭基崇)정혹(鄭豰)의 장남, 부사(府使)
손자정기징(鄭基徵)정혹(鄭豰)의 차남
손자정기강(鄭基岡)정혹(鄭豰)의 3남, 좌랑(佐郞)
손녀사위박순의(朴純義)정혹(鄭豰)의 사위, 목사(牧使)
손녀사위송휘길(宋暉吉)정혹(鄭豰)의 사위



내외(內外)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남녀 합하여 모두 2천여 명이나 되어 별도의 자손록(子孫錄)을 만들었다.

6. 제향

인조 16년(1638년) 칠봉서원에 배향되었고, 별묘를 세워 춘추로 향사하고 있으며 묘소는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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