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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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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1세는 1394년에 태어나 1406년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지만, 18년간 잉글랜드에 인질로 억류되었다. 142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1437년 암살당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시와 음악에도 능했다. 재위 기간 동안 교회 개혁, 법률 개정, 외교 정책 등을 추진했으나,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조앤 보퍼트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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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
기본 정보
제임스 1세 국왕
16세기 제임스 1세 초상화
군주 칭호스코틀랜드 국왕
재위 기간1406년 4월 4일 – 1437년 2월 21일
대관식1424년 5월 21일
선임자로버트 3세
후임자제임스 2세
섭정로버트 스튜어트 (1406–1420)
머독 스튜어트 (1420–1424)
배우자조앤 보퍼트 (1424년 결혼)
자녀마거릿, 프랑스 왕태자비
이사벨라, 브르타뉴 공작부인
엘리너, 오스트리아 대공비
메리, 부찬 백작부인
조앤, 모턴 백작부인
알렉산더, 로스시 공작
제임스 2세
애너벨라, 헌틀리 백작부인
왕가스튜어트
아버지로버트 3세
어머니애너벨라 드러먼드
출생일1394년 7월 25일 (추정)
출생지던펌린 수도원, 파이프, 스코틀랜드
사망일1437년 2월 21일 (42세)
사망지퍼스 블랙프라이어 수도원, 스코틀랜드
매장지퍼스 차터하우스
주요 사건
1405–1406년 겨울제임스를 프랑스로 보내 안전을 확보하기로 결정
1406년1406년 3월 중순경 프랑스로 피신했으나 3월 22일 해상에서 포로로 잡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포로가 됨
1406–1413년헨리 4세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음
1413–1415년헨리 4세는 1413년 3월 20일 사망. 헨리 5세는 제임스를 포로로 간주하고 런던탑과 윈저성에서 감금
1420–1422년헨리는 제임스를 궁정 손님으로 여기고 프랑스 원정에 데려감. 헨리 사망까지 동행
1423년8월, 의회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제임스 석방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
1424년2월에 조앤 보퍼트와 결혼. 포로에서 풀려나 5월 21일 스콘 수도원에서 대관
1425년제임스는 자신의 친척인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을 파괴하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함
1425–1427년제임스는 의회의 동의를 얻어 교회와 고위 성직자의 영향력을 제한
1428–1431년제임스는 무력으로 아일랜드 군주령을 왕실의 직접 통제하에 두려고 시도했으나 실패
1429년이 시점에서 제임스는 모든 몸값 지불을 중단
1436년제임스는 잉글랜드 영토인 록스버그 성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으나 실패하여 많은 비판을 받음
1437년2월 20일, 제임스는 자신의 삼촌인 애솔 백작 월터의 지시를 받은 자들에 의해 퍼스의 그레이프라이어 수도원 자신의 방에서 살해됨. 애솔은 체포되어 3월 26일에 재판을 받고 처형됨

2. 스코틀랜드 왕자 및 스튜어트

제임스는 1394년 7월 말 던퍼름 수도원에서 로버트 3세와 안나벨라 드럼몬드의 결혼 27년 후에 태어났다.[17]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던퍼름에서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보냈다.[18] 1401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1년 후, 그의 형인 로씨스 공작 데이비드는 알바니 공작 로버트에 의해 폴클랜드 성에 감금된 후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9] 이로써 제임스는 알바니 스튜어트 가문의 왕위 야망을 막는 유일한 존재이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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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 알바니와 그의 측근인 더글러스 백작 4세 아치볼드는 로씨스 공작의 죽음에 대한 혐의를 벗고, 알바니는 다시 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알바니는 더글러스에게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잉글랜드와의 적대 행위를 재개하도록 허용했다.[22] 그러나 1402년 9월 홈밀던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대가 패배하면서 많은 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23] 1402년부터 1406년 사이에 로스, 모레이, 마의 북부 백작령은 성인 지도자가 없었고, 머독 스튜어트가 영국 감옥에 갇히면서 알바니는 그의 형제인 부찬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와 동맹을 맺어야 했다.[24]

1404년 12월, 왕은 제임스에게 서쪽의 왕실 스튜어트 땅(에어셔와 클라이드 만 주변)을 직할령으로 하사했다.[25] 1406년, 제임스는 프랑스로 가던 중 영국 배에 나포되어 잉글랜드의 헨리 4세에게 인도되었고,[31] 같은 해 4월 4일 아버지 로버트 3세가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했지만 18년 동안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다.[32][33]

2. 1. 탄생과 초기 생애

로버트 3세와 안나벨라 드럼몬드의 아들인 제임스는 1394년 7월 말 던퍼름 수도원에서 태어났다.[17]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던펌린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18] 1401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1년 뒤에는 그의 형인 로씨스 공작 데이비드가 삼촌인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에 의해 폴클랜드 성에 감금된 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제임스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9] 1404년 12월, 왕은 제임스에게 서쪽의 왕실 스튜어트 영지(에어셔와 클라이드 만 주변)를 직할령으로 하사하여 외부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고 필요할 경우 왕자에게 영토 중심지를 제공했다.[25]

2. 2. 왕위 계승과 잉글랜드로의 피랍

로버트 3세와 안나벨라 드럼몬드의 아들인 제임스는 1402년에 형인 로씨스 공작 데이비드가 삼촌인 알바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제임스는 알바니 스튜어트 가문의 왕위 찬탈 야욕을 막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20]

1404년 12월, 왕은 제임스에게 서쪽 왕실 스튜어트 땅(에어셔와 클라이드 만 주변)을 직할령으로 하사하여 외부 간섭으로부터 보호했다.[25] 1406년 겨울, 제임스를 알바니의 손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는 계획이 세워졌으나, 잉글랜드 배에 나포되어 잉글랜드의 헨리 4세에게 넘겨졌다.[31]

제임스가 잉글랜드에 억류된 해인 1406년 4월 4일, 아버지 로버트 3세가 사망하면서 제임스는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했지만,[32] 잉글랜드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는 불가능했다.

3. 잉글랜드에서의 억류 생활

1406년 3월 22일, 단치히 출신 프랑스행 ''메리엔크나이트''호가 휴 펜 소유의 영국 선박에 나포되어 제임스는 잉글랜드의 헨리 4세에게 인도되었고, 인질이 되었다.[31] 로버트 3세는 아들의 포획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1406년 4월 4일에 사망했다.[32][33] 이후 제임스는 18년간 잉글랜드에서 억류 생활을 하게 된다.

3. 1. 헨리 4세 치하의 생활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제임스의 신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버트 3세 사후 섭정으로 국정을 수행하던 그의 숙부 올버니 공작 로버트는 좀처럼 신병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1402년 9월 홈던힐 전투에서 올버니 공작의 아들 머독이 포로가 되었을 때, 포로 교환으로 즉시 귀환시킨 것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제임스는 18년간 잉글랜드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된다.[31]

헨리 4세는 이 젊은 (명목상의) 스코틀랜드 왕에게 런던 근교의 안전하고 넓은 대저택인 윈저 성에 머물게 하고, 교육도 제공했다. 인질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프랑스 전선에서 압승한 헨리 5세는 여유를 가지고 제임스를 후대했고, 헨리 5세가 급사하고 헨리 6세가 즉위하자 잉글랜드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코틀랜드에 일정한 배려를 할 필요성이 생겨, 제임스는 더욱 후대받게 되었다.

1420년에 제임스의 숙부 올버니 공작 로버트가 죽자 스코틀랜드 측은 제임스의 신병 대가로 40000GBP를 지불했다. 1424년 5월, 제임스는 마침내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여 곧 스콘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3. 2. 헨리 5세와의 관계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에 제임스의 신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버트 3세 사후 섭정으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던 숙부 올버니 공작 로버트는 좀처럼 신병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1402년 9월 홈던힐 전투에서 아들 머독이 포로가 되었을 때, 포로 교환으로 즉시 귀환시킨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결국 제임스는 18년간을 잉글랜드에서 보내게 된다.[31][32][33]

헨리 4세는 제임스를 윈저 성에 머물게 하고 교육도 제공했다. 인질 생활이 길어짐에 따라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헨리 5세는 제임스를 후대했고, 헨리 6세 즉위 후 잉글랜드 내부 혼란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코틀랜드에 일정한 배려를 할 필요성이 생겨 제임스는 더욱 후대받게 되었다.

1420년 올버니 공작 로버트가 죽자 스코틀랜드 측은 제임스의 신병 대가로 40000GBP를 지불했다. 1424년 5월 제임스는 스코틀랜드로 귀국했고, 스콘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47][48][49]

3. 3. 조앤 보퍼트와의 결혼과 석방 협상

헨리 6세 즉위 후 잉글랜드 내부 혼란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스코틀랜드에 일정한 배려를 할 필요성이 생겨, 제임스는 더욱 후대받게 되었다. 1420년 제임스의 숙부 올버니 공작 로버트가 죽자 스코틀랜드 측은 제임스의 신병 대가로 40000GBP를 지불했다.

조앤 보퍼트와 제임스 1세


포로로 잡혀 있던 제임스는 귀빈 대접을 받았고, 잉글랜드 귀족 여성들과 교제하는 것도 허락받았다. 제임스는 헨리 5세의 사촌이자 존 오브 곤트의 손녀인 조앤 보퍼트와 사랑에 빠져, 연애 편지 대신 시 "왕의 헌정"(The Kingis Quair)을 조앤에게 보냈다. 이 시는 초기 스코틀랜드 문학에서도 유명한 작품[155] 중 하나이며, 윈저 성 시절 제임스가 잉글랜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1424년 2월 1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기 전 런던 사우스워크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424년 5월, 마침내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여 스콘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마가렛1424년1445년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결혼
이사벨라1426년1494년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와 결혼
엘레오노르1433년1484년오스트리아 대공 지크문트와 결혼
메리?1465년볼페르트 6세 판 볼셀렌(후의 프랑스 원수)과 결혼
조앤1428년경1486년초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결혼
알렉산더1430년1430년제임스 2세의 쌍둥이 형제이지만 요절
제임스 2세1430년1460년
애너벨루이 드 사보이와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제2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과 재혼(1471년 7월 24일 이혼).


4. 친정 (Personal Rule)

월터 스튜어트는 로버트 2세의 막내 아들로, 1389년 3월 이전에 그의 형제인 스트래선과 케이네스 백작 데이비드가 사망하면서 조카딸 유페미아의 후견인이 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스트래선을 관리하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101][102] 1402년에는 로버트(올버니 공작)를 도와 조카 로시스 공작 데이비드를 견제했다.[102] 올버니 공작은 유페미아와 자신의 측근 패트릭 그레이엄의 결혼을 주선하여 월터의 스트래선 관여를 종식시키고, 월터를 애솔 백작과 메스번 영주로 임명하여 스트래선의 이익을 잃은 것을 보상했다.[102][103] 1413년, 그레이엄은 백작령에서 자신의 주요 하인 존 드럼몬드와의 다툼으로 사망했다.[103]

메스번 성. 원래 성은 애솔 백작 월터 스튜어트의 거주지였다.


드럼몬드 일족은 애솔과 가까웠고, 올버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엄 아들의 후견인으로서 스트래선에 다시 관여한 백작은 애솔이 살인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올버니와 애솔 사이의 불화는 142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제임스가 월터 백작과 동맹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104] 애솔은 1425년 5월 회의에 참여하여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의 주요 인물들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처형했다.[59]

제임스는 애솔에게 퍼스 보안관(Sheriff of Perth)과 사법관 직책, 스트래선 백작령을 부여했지만, 평생 사용 권한만 주어졌다.[105] 애솔의 장남 데이비드는 제임스의 석방 조건으로 영국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1434년에 사망했고, 차남 앨런은 1431년 인버로키 전투에서 사망했다.[106] 데이비드의 아들 로버트는 애솔의 상속인이 되었고, 어린 제임스 왕자 다음으로 왕위 계승 순위에 있었다.[102] 제임스는 애솔에게 호의를 보였지만, 1437년 일련의 좌절을 겪은 후, 백작과 로버트는 왕의 행동을 애솔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스트래선 백작령에 대한 애솔의 권위는 불안정했고, 애솔의 죽음과 함께 스트래선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로버트의 소유지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107]

록스버러에서의 후퇴는 왕의 통제력, 군사적 능력, 외교적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는 영국과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108] 1436년 10월, 제임스는 추가적인 적대 행위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총회의를 소집했지만, 재산들은 이에 저항했고, 그들의 대변인 로버트 그레이엄 경(Sir Robert Graham)이 왕을 체포하려다 실패하고 추방되었다.[109][110] 1437년 1월, 제임스가 수도원장을 뒤집고 자신의 조카 제임스 케네디로 대체했을 때 애솔은 또 다른 거절을 당했다.[107]

퍼스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현재는 소실됨)


1698년 얀 루이켄의 제임스 1세 암살 묘사 에칭


총회에서 왕에 대한 반발은 애솔 백작에게 제임스 1세가 궁지에 몰렸고 정치적 지위가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의 살해가 실행 가능한 방안이라고 확신시켰을 수 있다.[111] 애솔 백작은 그의 두 형제가 단호한 행동으로 왕국을 장악했던 것을 보았고, 제임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성인 친척으로서 자신의 결정적인 개입이 성공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12][113]

왕에 대한 음모는 1425년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의 몰락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토지 몰수는 이 영지의 관리와 생계에 의존하는 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애솔 백작은 이러한 불만을 가진 올버니 가문의 인물들을 흡수했다. 그들 중에는 로버트와 크리스토퍼 체임버스 형제, 그리고 로버트 그레이엄 경이 있었다.[114] 로버트 체임버스는 왕실 가족의 일원이었지만, 올버니 가문과의 유대감이 더 강했다.[115]

1437년 2월 4일, 애솔 백작의 핵심 지역인 퍼스에서 총회가 열렸고, 음모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왕과 왕비는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머물렀다.[116] 2월 20일 저녁, 왕과 왕비는 방에 있었고 대부분의 하인들과 떨어져 있었다.[109][117] 애솔 백작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로버트 스튜어트(왕의 측근)는 공범들(로버트 그레이엄과 체임버스 형제가 이끄는 약 30명)에게 건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109][117] 제임스 1세는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려 하수도 터널에 숨었지만, 최근 테니스 공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출구가 막혀[118] 갇혀 살해당했다.

암살자들은 왕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왕비는 부상을 입고 탈출했다. 제임스 2세가 된 여섯 살짜리 왕자는 애솔 백작의 측근 존 스펜스가 왕자의 보호자 직에서 물러나면서 애솔의 통제에서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스펜스는 왕 살해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살인 직후 그의 직책과 토지의 재할당은 그가 음모에 가담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살인 이후 혼란 속에서 왕비가 섭정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보장되지 않았다.

왕비를 죽이려는 시도가 성공하고 애솔이 어린 왕을 장악했다면 그의 쿠데타 시도는 성공했을 수도 있다.[119] 앵거스 백작과 윌리엄 크리히톤을 포함한 왕비의 소규모 지지자들은 그녀가 제임스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3월 첫째 주까지 양측 모두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교황의 특사 우르비노 주교는 평화적인 결과를 추구하기 위해 의회를 촉구했다.

3월 중순, 앵거스와 크리히톤은 애솔에 대항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애솔이 그의 핵심 지역으로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을 가능성도 있다. 3월 7일 왕비와 의회는 버거스들에게 "반역자들"의 세력에 저항할 것을 간청했다.[121]

애솔과 그의 측근들의 지위는 월터 백작의 상속자 로버트 스튜어트가 체포되고 자백한 후 무너졌다.[122] 월터는 앵거스에게 체포되어 에든버러 감옥에 수감되었고, 제임스 2세 즉위식 다음 날인 1437년 3월 26일 재판을 받고 참수되었다.[123] 암살단 지도자 로버트 그레이엄 경은 이전 애솔 동맹국에 체포되어 스털링 성에서 열린 의회 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4월 9일 이후 처형되었다.[124]

조앤 왕비의 섭정 추구는 1437년 6월 의회에서 아치볼드 더글러스 5세 백작이 왕국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125] 제임스 국왕의 미라로 만든 심장은 퍼스 카르투지아 수도원에 매장된 후 성지로 순례를 갔을 수도 있다. 1443년 스코틀랜드 국고 기록에는 로도스 섬에서 카르투지아 수도원으로 그것을 반환한 성 요한 기사단 기사 비용으로 90파운드를 지불한 기록이 있다.[126][127]

4. 1. 왕권 강화와 국내 개혁

James I영어는 1424년 스코틀랜드의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귀족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며 왕권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려 했다.[59] 왕실 수입 증대를 위해 전임자들과 섭정들의 후원을 취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104] 올버니 공작의 아들 월터 스튜어트를 체포하고, 올버니 가문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강화했다. 1425년, 올버니 공작 머독 스튜어트와 그의 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하여 왕권에 대한 도전을 제거했다.[59] 왕실 재정 확충을 위해 세금을 부과하고, 린리스고 궁전 건설에 재정을 투입했다.

4. 2. 교회와의 관계

제임스 1세는 교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교회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수도원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고, 퍼스에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설립했다. 주교 임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성직자들에게 왕과 왕실을 위한 기도를 지시했다. 또한 교회 관할권 제한, 교황청 여행 규제 등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법률을 제정했다.[107] 바젤 공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교황 특사와 논쟁적인 법률에 대해 논의했으나, 암살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4. 3. 고지대 (Highland) 문제

1428년 7월, 제임스 1세는 퍼스에서 대규모 의회를 소집하여 반자치적인 섬의 영주에 대한 고지대 원정 자금을 모으려 했다. 의회는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결국 왕의 뜻에 따랐다. 제임스 1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결심하고, 북부와 서부 게일족 씨족 지도자들을 인버네스 의회에 소환했다. 8월 24일경, 로스 백작이자 섬의 세 번째 영주인 알렉산더 오브 아이슬레이와 그의 어머니 마리오타를 포함한 약 50명을 체포했다.[79] 몇몇은 처형되었지만, 알렉산더와 그의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는 곧 석방되었다.

알렉산더, 로스 백작이자 섬의 영주


제임스 1세는 알렉산더가 감금된 동안 클랜 도널을 분열시키려 했다. 알렉산더의 삼촌 존 모르는 씨족 지도자직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조카가 억류된 동안 왕과 거래를 거부하여 체포되고 살해되었다.[80] 왕은 서부와 북부의 동맹국이 필요했기에 섬의 영주에 대한 접근을 완화하고 알렉산더를 석방했다.

1429년 봄, 알렉산더는 인버네스의 성과 시가지를 공격했다.[81] 제임스 1세는 군대를 파견하여 6월 21일 로카버에서 알렉산더를 크게 패배시켰다. 알렉산더는 아이슬레이(Islay)로 도망쳤지만, 제임스 1세는 7월에 딩월과 어콰트 성을 함락시키고 섬으로 군대를 파견했다.[84] 알렉산더는 항복 조건을 협상하려 했으나, 제임스 1세는 완전한 항복을 요구했고 받아냈다.[85] 1429년 8월부터 왕은 알렉산더 스튜어트, 마 백작에게 북부와 서부의 평화 유지를 위임했다.[86]

1431년 9월, 섬 사람들이 다시 봉기하여 왕의 부하들에게 두 번의 큰 패배를 안겼다. 마 백작의 군대는 인버로키에서 패했고, 앵거스 모레이의 군대는 케이네스의 텅 근처에서 격렬한 전투에서 패했다.[87] 이는 제임스 1세에게 큰 좌절이었고, 그의 신뢰도는 악영향을 받았다.[88]

1431년 9월 봉기 전, 왕은 그의 조카인 캐릭의 존 케네디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를 체포했다. 더글러스의 체포는 나라에 긴장을 고조시켰고, 제임스 1세는 9월 29일 백작을 석방하여 불안을 완화시키려 했다. 왕은 다가오는 퍼스 의회에서 섬의 영주에 대한 원정 자금을 추가로 확보하려 했지만, 의회는 제임스 1세에게 무조건적인 지원을 허용할 기분이 아니었다. 의회는 고지대 원정을 위한 세금은 허용했지만, 세금 징수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했다.[90] 의회의 이러한 조치는 북부의 추가적인 분쟁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나타냈고, 10월 22일 왕이 더글러스와 알렉산더의 범죄를 용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섬의 영주에 대한 4차례의 여름 원정은 의회에 의해 제임스 1세의 뜻이 효과적으로 막히면서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90]

4. 4. 대외 정책

1428년,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스코틀랜드에 사절 랭스 대주교 르노 드 샤르트르를 파견하여 제임스 1세에게 '오랜 동맹'을 갱신하도록 설득했다. 그 조건에는 공주 마가렛과 프랑스 왕세자 루이와의 결혼, 그리고 생통주 지방을 제임스 1세에게 하사하는 것이 포함되었다.[92] 샤를 7세는 1428년 10월에 조약을 비준했고, 딸의 프랑스 왕실과의 결혼과 프랑스 영토 소유를 확보한 제임스 1세의 유럽 내 정치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93]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프랑스, 부르고뉴와 비동맹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동시에 아라곤, 오스트리아, 카스티야, 덴마크, 밀라노, 나폴리, 바티칸과 외교 접촉을 시작했다.[94]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고, 1436년까지 연장된 휴전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428년에 약속되었던 스코틀랜드 군대의 샤를 7세 지원과 제임스 1세의 장녀와 프랑스 국왕의 아들 루이와의 결혼은 실현되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주요 동맹국인 부르고뉴 공작이 스코틀랜드의 주요 무역 파트너인 저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 대한 대응을 신중하게 조절해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그의 지지는 약해졌다.[95]

1436년 5월, 잉글랜드와의 휴전이 만료되자 제임스 1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의 점령지인 록스버러 성을 포위했다.[18] 그러나 이 전투는 실패로 끝났고, 스코틀랜드군은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패배는 제임스 1세의 외교 정책과 내부 권위 모두에 큰 타격이었다.[97][98]

5. 암살 사건

1437년 2월 4일, 애솔 백작의 근거지인 퍼스에서 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왕에 대한 반발은 애솔 백작에게 제임스 1세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손상되었음을 보여주었고, 암살이 실행 가능한 방안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111] 애솔 백작은 그의 두 형제가 단호한 행동으로 왕국을 장악했던 것을 보았고, 제임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이 시점에서 자신의 개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12][113]

왕에 대한 음모는 1425년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의 몰락과 관련이 깊다. 올버니 가문의 몰락은 이 영지의 관리와 생계에 의존하던 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불만을 품은 올버니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애솔 백작에게 가담했는데, 그중에는 로버트와 크리스토퍼 체임버스 형제, 그리고 3개월 전 퍼스 의회에서 왕을 체포하려 했던 로버트 그레이엄 경이 있었다.[114]

1437년 2월 20일 저녁, 왕과 왕비는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머물고 있었다.[116] 애솔 백작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로버트 스튜어트(왕의 측근)는 로버트 그레이엄과 체임버스 형제가 이끄는 약 30명의 공범들에게 건물 접근을 허용했다.[109][117] 제임스 1세는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하수도 터널에 숨었지만, 최근 테니스 공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출구가 막혀[118] 갇혀 살해당했다.

5. 1. 배경

제임스 1세의 왕권 강화 정책과 귀족 세력 억압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특히,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의 몰락은 이들과 관련된 인물들의 원한을 샀다. 1425년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의 몰락과 관련된 사법적 살해 및 토지 몰수는 이 영지의 관리와 생계에 의존하던 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 중 로버트와 크리스토퍼 체임버스 형제, 로버트 그레이엄 경 등이 제임스 1세에 대한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114]

로버트 2세의 아들 중 막내였던 월터 스튜어트는 유일하게 아버지 재위 기간 동안 백작위를 받지 못했다. 그는 스트래선 백작령 승계 문제, 아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제임스 1세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112][113]

1436년 제임스 1세의 록스버러 포위 실패는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귀족들의 반발을 더욱 부추겼다. 1437년 2월 4일 퍼스에서 열린 총회에서 애솔 백작은 제임스 1세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타격을 입었다고 판단, 살해가 실행 가능한 방안이라고 확신했을 수 있다.[111]

5. 2. 암살 실행



1437년 총회에서 왕에 대한 반발은 애솔 백작에게 제임스 1세가 궁지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위가 크게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의 살해가 이제 실행 가능한 방안이라고 확신시켰을 수 있다.[111] 애솔 백작은 그의 두 형제가 서로 다른 시기에 단호한 행동을 통해 왕국을 장악했던 것을 보았고, 제임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성인 친척으로서 이 시점에서 그의 결정적인 개입이 마찬가지로 성공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12][113]

왕에 대한 음모는 1425년 올버니 스튜어트 가문의 몰락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사법적 살해와 토지 몰수는 이 영지의 관리와 생계에 의존하는 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불만을 가진 올버니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복무했던 애솔 백작은 이로 인해 생긴 공백을 메웠다. 그들 중에는 로버트와 크리스토퍼 체임버스 형제, 그리고 불과 3개월 전에 퍼스 의회에서 왕을 체포하려 했던 로버트 그레이엄 경이 있었다.[114] 로버트 체임버스가 왕실 가족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올버니 가문과의 유대감이 더 강했다.[115]

1437년 2월 4일 애솔 백작의 핵심 지역인 퍼스에서 총회가 열렸고, 음모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왕과 왕비는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 있는 숙소에 머물렀다.[116] 1437년 2월 20일 저녁, 왕과 왕비는 방에 있었고 대부분의 하인들과 떨어져 있었다.[109][117] 애솔 백작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로버트 스튜어트(왕의 측근)는 공범들(로버트 그레이엄과 체임버스 형제가 이끄는 약 30명으로 추정됨)에게 건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109][117] 제임스 1세는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려 하수도 터널에 숨을 시간을 벌었지만, 최근 테니스 공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출구가 막히면서[118] 갇혀 살해당했다.

6. 유산 및 평가

제임스 1세는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인 왕이었다. 포로 생활 중에도 훌륭한 교육을 받아 시, 음악, 스포츠 등 다방면에 능통했다.[129] 월터 보워는 제임스 1세의 음악적 재능을 오르페우스에 비견하며 오르간, 드럼, 플루트, 리라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고 묘사했다.[128] 또한 레슬링, 해머 던지기, 궁술 등 스포츠에도 능했다.[128] 그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는데, 그의 대표작 ''왕의 서사시 (The Kingis Quair)''는 초기 스코틀랜드 문학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30] 헥터 보이스는 제임스 1세를 maist vertuous Prince that evir was afoir his daysenm라고 칭송했다.[133]

그러나 제임스 1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며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지만, 급진적인 개혁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18][131] 존 설리는 저서 ''스코틀랜드 왕의 죽음 (The Dethe of the Kynge of Scotis)''에서 제임스 1세를 "폭군"으로 묘사하며, 그의 행동이 복수와 탐욕에 의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132]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제임스 1세를 능력 있고 공격적인 정치가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개혁이 의회와의 갈등을 야기하고 귀족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136][18] 그의 통치는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후대 왕들에게 귀족 세력 통제와 왕권 강화의 과제를 남겼다.

7. 결혼과 자녀

1424년 2월 12일 런던에서 제임스 1세는 존 보퍼트와 마가렛 홀랜드의 딸인 조앤 보퍼트와 결혼했다.[141] 두 사람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출생사망기타
마가렛 스튜어트1424년1445년 8월 16일1436년 6월 24일 투르에서 후일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되는 도핀 루이와 결혼.
이사벨라 스튜어트1426년1499년1442년 10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와 결혼.
조앤 스튜어트약 1428년1486년 10월 16일 이후벙어리였다. 1459년 5월 15일 이전에 모튼 제1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 결혼.
로씨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1430년 10월 16일1430년 10월 16일제임스 2세의 쌍둥이 형.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1430년 10월 16일1460년 8월 3일겔더스의 메리와 결혼.
엘리너 스튜어트1433년1480년 11월 20일1449년 2월 12일/24일경 오스트리아 대공 지기스문트와 결혼.
버컨 백작 부인 메리 스튜어트1434/35년1465년 3월 20일1444년 볼퍼트 6세 판 보르셀렌과 결혼.
안나벨라 스튜어트1436년1509년첫째로 1447년 12월 14일 제네바 백작 루이 드 사보이아와, 둘째로 1460년 3월 10일 이전에 헌틀리 제2백작 조지 고든과 결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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