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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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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1800-1867)는 아일랜드의 귀족이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1841년 백작위를 상속받았으며,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파슨스는 킹스 카운티 국회의원,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장, 왕립 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특히 72인치 반사 망원경인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을 건설하여 나선 은하의 구조를 최초로 밝혀내는 등 천문학 연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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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
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
작위각하, 로스 백작
풀네임윌리엄 파슨스
작위 계승제3대 로스 백작
출생일1800년 6월 17일
출생지잉글랜드, 요크
사망일1867년 10월 31일
사망지아일랜드, 몽크스타운, 더블린 주
국적영국
경력
직업엔지니어
천문학자
학력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모들린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배우자메리 필드 (1836년 결혼)
자녀13명 (장남: 로렌스, 막내아들: 찰스)
부모아버지: 로렌스 파슨스
어머니: 앨리스 로이드
수상왕립 학회 회원 (FRS) (1831년)
세인트 패트릭 훈장 (1845년)
로열 메달 (1851년)
주요 업적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
근무 기관비어 성
왕립 학회 회장
임기 시작1848년
임기 종료1854년
이전스펜서 콤프턴
다음존 로슬리

2. 생애

잉글랜드 요크에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매그덜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4][15][16] 1841년 아버지 로렌스 파슨스의 사망으로 로스 백작 작위와 아일랜드 킹스 카운티(현재의 오팔리 주)의 영지를 상속받았다.[15] 1836년 메리 필드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5] 그중에는 증기 터빈 발명가인 찰스 앨저넌 파슨스 경도 포함된다.

로스는 천문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1840년대 아일랜드 파슨스타운(현재의 버)에 당시 세계 최대였던 구경 약 182.88cm의 반사 망원경인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을 건설했다.[15] 이 거대한 망원경을 제작하기 위해 그는 새로운 주조, 연마, 탑재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망원경 건설은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847년부터 관측을 시작했다.[15]

이 망원경을 통해 로스는 여러 성운에서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가 처음 발견한 나선 구조 천체는 M51로, 그의 스케치는 현대 사진과 매우 유사하다.[15] 또한 그는 게 성운(M1)을 관측하고 그 형태가 게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을 붙였다.[15] 로스는 성운이 가스 구름이 아니라 멀리 있는 별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하며, 성운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오리온 대성운과 같은 천체를 개별 별들로 분해하여 관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우주가 가스에서 별이 생성되는 방식으로 진화한다는 윌리엄 허셜 등의 견해에 반대했다.[15]

천문학 연구 외에도 왕립 학회 회장(1848–1854)과 더블린 대학교 총장(1862–1867) 등을 역임했다.[17][15] 1867년 10월 31일 더블린 주 멍크스타운 자택에서 사망했으며,[15] 장남 로렌스가 작위를 계승했다.[15]

2. 1. 가문과 교육

제3대 로스 백작의 사진


윌리엄 파슨스는 1800년 6월 17일[15] 잉글랜드 요크에서 제2대 로스 백작 로렌스 파슨스와 앨리스 로이드(존 로이드의 딸)[15]의 아들로 태어났다.[4]

1819년 1월 4일 더블린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고,[15] 1821년 2월 1일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매그덜린 칼리지에 입학하여 1822년 수학에서 수석으로 학사 학위(B.A.)를 받았다.[16] 이후 1832년 11월에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문학 석사 학위(M.A.)를 취득했다.[15]

1836년 4월 14일 존 윌머 필드의 딸인 메리 필드와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네 아들이 성인이 되었다.[5]

이름생몰년비고
로렌스 파슨스 제4대 로스 백작1840년 11월 17일 – 1908년 8월 30일1867년까지 옥스만타운 남작으로 알려짐
목사 랜달 파슨스1848년 4월 26일 – 1936년 11월 15일
명예 리처드 클레어 파슨스1851년 2월 21일 – 1923년 1월 26일남아메리카 철도 개발로 알려짐
명예 찰스 앨저넌 파슨스 경1854년 6월 13일 – 1931년 2월 11일증기 터빈 발명으로 알려짐



1841년 2월 24일 아버지 로렌스 파슨스가 사망하자 로스 백작위를 계승하고,[15] 아일랜드 킹스 카운티(현재의 오팔리 주)의 넓은 영지를 상속받았다.

2. 2. 결혼과 가족

로스 경은 1836년 4월 14일, 존 윌머 필드의 딸인 메리 필드( Mary Fieldeng, 1813년경 – 1885년 7월 22일)와 결혼하여[5][15]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으며,[19] 그 중 4명의 아들이 성인이 되었다.[5] 자녀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앨리스 파슨스1839년 10월 20일 – 1847년 8월 1일[19]요절
로렌스 파슨스1840년 11월 17일 – 1908년 8월 29일[15]제4대 로스 백작.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문학 연구.
(이름 미상 아들)1842년 1월 19일 – 1842년 1월 19일[19]요절
(이름 미상 딸)1843년 1월 3일 – 1843년 1월 6일[19]요절
윌리엄 윌머 파슨스1844년 3월 20일 – 1855년 9월 7일[19]
(이름 미상 딸)1845년 9월 11일 – 1845년 9월 15일[19]요절
존 파슨스1846년 9월 7일 – 1857년 4월 9일[19]
목사 랜달 파슨스1848년 4월 26일 – 1936년 11월 15일1876년 8월 9일, 일리나 빅토리아 매커니스( Eleanor Victoria Mackarnesseng )[20]존 매커니스( John Mackarnesseng )의 딸과 결혼.
(이름 미상 딸)1850년 2월 14일 – 1850년 2월 16일[19]요절
명예 리처드 클레어 파슨스1851년 2월 21일 – 1923년 1월 26일1878년 11월 21일, 아그네스 엘리자베스 베이트먼( Agnes Elizabeth Batemaneng )[18]남아메리카 철도 개발 기여. 자녀 있음.
명예 찰스 앨저넌 파슨스1854년 6월 13일 – 1931년 2월 11일1883년, 캐서린 베설( Katherine Bethelleng )[20]증기 터빈 발명가. 윌리엄 베설의 딸과 결혼. 자녀 있음.


2. 3. 정치 및 사회 활동

로스는 천문학 연구 외에도 다양한 정치 및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1821년부터 1834년까지 아일랜드 킹스 카운티(현 오팔리 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MP)으로 활동했다.[15][18] 하원에서는 사회 개혁적인 입장을 보여, 1829년 로마 가톨릭 신자 구제법과 제1차 선거법 개정에 찬성표를 던졌다.[15] 이는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권리 신장과 선거 제도 민주화에 기여하는 움직임이었다.

1834년 6월 19일에는 해산되었던 킹스 카운티 로열 라이플 민병대의 대령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연대는 그의 아버지가 이전에 지휘했던 부대였다.[7] 1839년에는 킹스 카운티 보안관을 역임했다.[15][18]

과학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1843년부터 1844년까지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장을 지냈으며,[6] 1848년부터 1854년까지는 권위 있는 왕립 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17]

1845년에는 아일랜드 대표 귀족으로 선출되어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15][18] 귀족원에서는 하원 시절과 달리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곡물법 폐지에 반대했다.[15] 이는 당시 아일랜드 대기근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결정이었다.

1847년 12월 24일에는 그의 남동생인 명예직 로렌스 파슨스가 킹스 카운티 로열 라이플 민병대의 중령으로 합류했다.[7] 1852년 연대가 다시 편성되면서 대령 직은 명예직이 되었다.[7]

말년에는 학계에 기여하여 1862년부터 1867년까지 더블린 대학교(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총장을 역임했다.[15]

3. 과학적 업적

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는 19세기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특히 대형 망원경 제작과 성운 관측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40년대 아일랜드 오팔리 주 비르 성 부지에 당시 세계 최대 구경인 약 182.88cm(1.8m)의 거대 반사 망원경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을 건설했다. 이는 이전에 사용하던 약 91.44cm(91cm) 망원경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리바이어던은 전례 없는 크기였기에 로스 백작은 망원경 제작에 필요한 여러 기술, 특히 거대한 경면 합금 반사경 제작 기술을 직접 개발해야 했다.[8] 이 망원경은 기술적, 건축학적 성과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20세기 초까지 세계 최대 구경의 망원경으로 기록되었다.[9][10]

로스 백작은 리바이어던 망원경을 사용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의 천문 관측을 수행했다. 그는 수많은 성운을 관측하고 목록화했으며, 특히 일부 성운에서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M51 성운의 나선 구조를 최초로 관측하여 '소용돌이 은하'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 또한, 현재 게 성운(M1)으로 알려진 초신성 잔해에 '게'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로스 백작이다.[11]

그의 성운 연구는 당시 천문학계의 주요 논쟁거리였던 성운설과도 관련이 깊다. 로스 백작은 성운이 기체가 아니라 멀리 있는 미세한 별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했으며, 리바이어던을 이용한 관측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이는 항성행성의 형성에 대한 성운설에 도전하는 것으로, 존 허셜 등 당대 천문학자들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당시 기술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로스 백작의 천문학적 발견과 관측 기록은 그의 아들 로렌스 파슨스에 의해 정리되어 발표되었으며, 여기에는 226개의 새로운 NGC 천체 발견이 포함되어 있다.[13] 그의 망원경 제작 기술과 선구적인 관측 활동은 후대 천문학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3. 1.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 건설

1840년대, 아일랜드 오팔리 주 비르(당시 파슨스타운)의 비르 성 부지에 구경 약 182.88cm(1.8m)의 거대한 반사 망원경인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을 건설했다. 이는 이전에 사용하던 약 91.44cm(91cm) 망원경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리바이어던은 전례 없는 크기였고, 당시 망원경 제작 기술은 비밀에 부쳐지거나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로스 백작은 건설에 필요한 많은 기술을 직접 개발해야 했다. 특히 3톤에 달하는 반사경 제작을 위해 경면 합금(구리주석합금)을 주조하고, 이를 정밀하게 연삭 및 연마하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이 과정은 1844년 벨파스트 자연사 협회에서 발표되었다.[8] 경면 합금 반사경은 아일랜드의 습한 기후에 약해 쉽게 흐려졌기 때문에 6개월마다 재연마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동일한 반사경 두 개를 제작하여 하나를 사용하는 동안 다른 하나를 연마하는 방식으로 망원경을 운용했다.

19세기 최대 망원경,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


리바이어던 건설은 1842년에 시작되어 1845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대기근(1845-1849)으로 인해 본격적인 정기 관측은 2년 뒤인 1847년부터 가능했다. 이 망원경은 기술적, 건축학적으로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받았으며, 그 모습은 그림 등을 통해 대영 제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리바이어던은 1917년 미국 윌슨 산 천문대의 100인치 망원경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십 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이었다.[9][10]

1845년 로스 경이 그린 소용돌이 은하 스케치


로스 백작은 리바이어던을 사용하여 많은 성운을 관측하고 목록화했으며, 이 중 일부는 나중에 은하로 밝혀졌다. 특히 그는 M51 성운에서 나선 구조를 최초로 발견하고 상세한 스케치를 남겼는데, 이 성운은 이후 '소용돌이 은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스케치는 현대 사진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또한, M1 성운에 '게 성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로스 백작이다. 이는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약 91.44cm 망원경으로 관측했을 때 그 모습이 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약 182.88cm 망원경으로 관측했을 때는 모습이 다소 다르게 보였지만, '게 성운'이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었다.[11]

로스 백작의 성운 연구는 당시 주요 논쟁거리였던 성운 가설을 검증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성운 가설은 항성과 행성이 가스 상태의 성운에서 중력에 의해 형성된다는 이론이었다. 로스 백작은 성운이 실제 가스가 아니라, 너무 멀리 있어 일반 망원경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미세한 별들의 거대한 집합체라고 주장했다(즉, 성운의 본질이 항성이라고 생각했다). 1845년, 그는 리바이어던을 이용해 오리온 성운을 개개의 별들로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우주가 (다윈 이전의 의미에서) 진화하거나 변화한다는 성운 가설에 반대하는 주장이었으며, 상당한 우주론적, 철학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문제에 대해 존 허셜은 자신의 관측을 근거로 오리온 성운이 실제 가스 성운("true nebula")이라고 주장하며 로스 백작과 대립했고, 서로 상대방의 망원경에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당시 기술로는 어느 쪽도 이 문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성운이 가스 상태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는 훗날 윌리엄 허긴스분광학 연구를 통해 제시되었다.

동시대 아일랜드 국회의원이었던 토머스 랭글로이스 레프로이는 리바이어던에 대해 "일반적인 안경을 통해서는 좋은 별보다 크지 않은 목성이 육안으로 보이는 달보다 두 배나 크게 보인다... 그러나 이 강력한 괴물을 다루는 모든 장치에 나타난 천재성은 그것의 디자인과 실행을 능가한다. 망원경의 무게는 16톤이나 되지만, 로스 경은 혼자서 그것을 원래 위치에서 들어 올렸고, 두 사람이 쉽게 그것을 원하는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고 평하며 그 성능과 설계의 우수성을 칭찬했다.[12]

로스 백작의 아들인 로렌스 파슨스는 아버지가 1848년부터 1878년까지 비르 성의 6피트(약 182.88cm) 및 3피트(약 91.44cm) 반사 망원경으로 관측한 성운과 성단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226개의 NGC 천체 발견이 포함되어 있다.[13]

로스 백작은 경면 합금을 주조하여 포물선 형태로 연마하고 광택을 내어 반사경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여러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다.[3][9][14]

로스 백작이 제작한 주요 반사 망원경[3][9]
구경 (인치)구경 (미터법 환산)비고
약 38.10cm38cm
약 60.96cm61cm
약 91.44cm91cm로스 3피트 망원경
약 182.88cm180cm로스 6피트 망원경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 1842년~1845년 제작


3. 2. 성운과 은하 연구

1840년대에 비르 성에 구경 약 182.88cm의 대형 망원경인 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을 건설했다. 이 망원경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이전의 약 91.44cm 망원경을 대체했다. 로스 백작은 리바이어던 망원경을 제작하기 위해 여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8] 이 망원경은 기술적, 건축학적 성과로 평가받았으며,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1847년부터 본격적인 관측에 사용되었다. 리바이어던은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이었고, 로스 백작은 이를 이용해 많은 성운(훗날 은하로 밝혀진 천체 포함)을 관측하고 목록화했다.[9][10]

로스 백작은 이 망원경으로 천문학 연구를 수행하여 오늘날 은하로 알려진 일부 성운의 나선 구조를 발견했다. 특히 1845년 소용돌이 은하(M51)의 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관측하고 상세한 스케치를 남겼는데, 이는 현대 사진과 매우 유사하다.

게 성운(M1)이라는 이름은 로스 백작이 이전에 사용하던 약 91.44cm 망원경으로 관측한 성운의 모습이 게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약 182.88cm 망원경으로 다시 관측했을 때 모습은 다소 달랐지만, '게 성운'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었다.[11]

로스 백작


로스 백작의 성운 연구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성운설에 도전하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성운설은 행성과 별이 기체 상태의 성운에서 중력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으나, 로스 백작은 성운이 기체가 아니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 개별적으로 분해되지 않는 미세한 별들의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1845년, 그는 리바이어던 망원경으로 오리온 성운을 개별 별들로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하며 성운설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우주가 성운설 지지자들의 주장처럼 '진화'하는지에 대한 당시 우주론적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존 허셜과 같은 천문학자들은 로스 백작의 관측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리온 성운이 실제 기체 성운이라고 주장했다. 두 천문학자는 서로의 관측 기구에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며 논쟁을 벌였지만, 당시 기술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이후 윌리엄 허긴스분광학적 관측을 통해 오리온 성운이 기체 상태임을 증명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다.

로스 백작의 아들 로렌스 파슨스는 아버지가 1848년부터 1878년까지 비르 성에서 6피트 및 3피트 반사경으로 관측한 성운 및 성단에 대한 발견 사항을 발표했으며, 여기에는 226개의 NGC 천체 발견이 포함되어 있다.[13]

3. 3. 기타 업적

로스 백작은 1848년부터 1878년까지 비르 성에서 6피트(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 및 3피트 반사경을 이용하여 성운성단을 꾸준히 관측했다. 이 관측을 통해 226개의 NGC 천체를 새롭게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아들인 로런스 파슨스는 아버지의 이러한 관측 결과들을 정리하여 1878년 왕립 더블린 협회의 과학 회보(Transactions of the Royal Dublin Society) 제2권을 통해 발표했다.[13]

4. 유산 및 평가

제3대 로스 백작 윌리엄 파슨스는 19세기 천문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840년대 아일랜드 오파리 주 바르(Birr, 당시 파슨스타운)에 건설한 구경 72인치(약 1.8m)의 거대 반사 망원경파슨스타운의 리바이어던이다. 이 망원경은 1917년 미국 윌슨 산 천문대에 100인치 망원경이 건설되기 전까지 수십 년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당시 망원경 제작 기술이 비공개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로스 백작은 이 거대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여러 새로운 기술을 직접 개발해야 했으며, 이는 그 자체로 뛰어난 기술적, 건축학적 성과로 인정받았다. 망원경은 구리주석합금인 경면 합금으로 만든 반사경을 사용했는데, 습한 기후 때문에 6개월마다 재연마가 필요했다. 감자 기근으로 건설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847년부터 관측을 시작하여 초기에는 18등성까지 관측할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다만 아일랜드의 기상 조건으로 인해 실제 관측 가능한 날은 제한적이었다.

이 망원경을 통해 로스 백작은 선구적인 천문학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여러 성운에서 나선 구조를 발견했는데, 이는 오늘날 나선 은하로 알려진 천체의 초기 관측에 해당한다. 특히 사냥개자리 M51 은하의 나선 구조를 상세히 스케치했으며, 이는 현대 사진과 매우 유사하여 이 은하에 '소용돌이 은하'(Whirlpool Galaxy)라는 별명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현재 게 성운(M1)으로 알려진 초신성 잔해를 36인치 망원경으로 관측하고 게와 닮았다 하여 명명하기도 했다.

로스 백작의 성운 연구는 당시 주요 논쟁거리였던 성운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성운설은 항성과 행성이 가스 상태의 성운에서 중력에 의해 형성된다는 가설이었으나, 로스 백작은 이를 부정했다. 그는 성운이 실제로는 가스 구름이 아니라, 일반 망원경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수많은 희미한 별들의 집합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거대 망원경으로 오리온 대성운과 같은 천체를 개별 별들로 분해했다고 주장하며, 우주가 가스 구름에서 별이 탄생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거나 변화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윌리엄 허셜과 같은 당대 천문학자들과의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허셜은 오리온 대성운이 실제 가스 구름('true nebula')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논쟁은 망원경 관측만으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며, 훗날 분광학 기술의 발달로 오리온 대성운이 가스 구름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되면서 로스 백작의 주장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천문학 연구 외에도 로스 백작은 영국 하원 의원(1821년-1835년), 아일랜드 귀족 대표 의원(1845년-) 등으로 활동했으며[15][18] 1862년에는 더블린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15] 그의 과학적 업적, 특히 리바이어던 망원경 건설과 이를 통한 초기 은하 연구는 현대 천문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5. 참고 문헌


  • Bennett, J. A. (2004년 9월 23일). "Parsons, William, third earl of Rosse".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 Clerke, Agnes Mary. "Parsons, William (1800-1867)".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43: 425–427.
  • Salmon, Philip. [https://www.historyofparliamentonline.org/volume/1820-1832/member/parsons-william-1800-1867 "PARSONS, William, Lord Oxmantown (1800-1867)."]. ''The History of Parliament Online''.
  • Scaife, W. Garrett (2009년 10월). James McGuire, James Quinn 편. [https://www.dib.ie/biography/parsons-william-a7220 "Parsons, William"]. ''아일랜드 인명 사전''. Cambridge University Press. doi:10.3318/dib.007220.v1.

참조

[1] 논문 William Parsons, third Earl of Rosse http://www.tcd.ie/Se[...] Trinity College Dublin 1968-09
[2] 논문 Williams Parson, Earl of Rosse http://articles.adsa[...] Royal Astronomical Society 2017-06-07
[3] 웹사이트 Telescopes: Lord Rosse's Reflectors http://amazing-space[...] Amazing-space.stsci.edu 2012-09-03
[4] 뉴스 The York Courant 1800-06-23
[5] 서적 Catchers of the Light: The Forgotten Lives of the Men and Women Who First Photographed the Heavens https://books.google[...] ArtDeCiel Publishing 2012
[6] 서적 Biography: Or, Third Division of "The English Cyclopaedia" Bradbury, Evans, & Co. 1867
[7] 서적 The Royal Militia and Yeomanry Cavalry Army List British Army Despatch Press 1850
[8] 간행물 Lord Rosse's Telescope https://books.google[...] The Practical Mechanic and Engineer's Magazine 1844-02
[9] 서적 The History of the Telescope Charles Griffin and Co. 1955
[10] 서적 The Astronomy of Birr Castle Tribune Printing and Publishing Group 1981
[11] 웹사이트 Lord Rosse and the Crab Nebula http://www.ianridpat[...] 2023-09-06
[12] 문서 Memoir of Chief Justice Lefroy Hodges, Foster & Co. 1871
[13] 웹사이트 Photos http://www.klima-luf[...] Klima-luft.de 2012-09-03
[14] 논문 The Earl of Rosse's Experiments on Reflecting Telescopes British Astronomical Association 1977
[15] 서적 The Complete Peerage, or a history of the House of Lords and all its members from the earliest times (Rickerton to Sisonby) https://www.familyse[...] The St Catherine Press
[16] 문서 Parsons, William, Baron Oxmantown
[17] 문서 Parsons; William (1800 - 1867); 3rd Earl of Rosse 2011-12-11
[18] 서적 A Genealogical and Heraldic History of the Peerage and Baronetage, The Privy Council, and Knightage Burke's Peerage Limited
[19] 서적 The Peerage and Baronetage of the British Empire as at Present Existing Hurst and Blackett 1901
[20] 서적 Burke's Genealogical and Heraldic History of the Peerage, Baronetage and Knightage Burke's Peerage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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