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
1. 개요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는 1951년 12월 26일부터 1952년 10월 30일까지 320일 동안 유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및 미일 안보 조약 체결 이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반공 입법 추진, 미일 행정 협정 협상, 방위 체제 정비를 목표로 내각을 개조했다. 기무라 도쿠타로를 법무총재로, 오카자키 가쓰오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고, 자유당 내 권력 투쟁을 조절하기 위해 인사를 단행했다. 1952년 8월 28일에는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고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했다.
| 내각명 |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내각 |
|---|---|
| 후리가나 | だいさんじ よしだ だいさんじかいぞうないかく |
| 대수 | 49 |
| 수상명 | 요시다 시게루 |
| 전직 | 중의원 의원・자유당 총재 |
| 성립년 | 1951년 |
| 성립월일 | 12월 26일 |
| 종료년 | 1952년 |
| 종료월일 | 10월 30일 |
| 여당 | 자유당, (녹풍회회파로서 여당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
| 선거 |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해산 | 1952년 8월 28일 기습 해산 |
| 명단 | 내각 명단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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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일본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52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사회당 분열 속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며 장기 집권을 이끌었으나, 공산당 몰락, 야당 지지율 하락, 높은 기권율, 무소속 당선 등 정치적 혼란과 특징을 남겼다. -
1952년 일본 -
제4차 요시다 내각
1952년 10월 30일부터 1953년 5월 21일까지 존속한 제4차 요시다 내각은 요시다 시게루 총리 휘하의 자유당 중심 내각으로, 각료 교체와 료쿠후카이 소속 인사 참여, 그리고 바카야로 해산과 같은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
1951년 일본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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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일본 -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
요시다 시게루가 일본국 헌법 제68조에 따라 국무대신 임면권을 행사하여 단행한 최초의 내각 개조인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준비와 한국 전쟁 발발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응하고 민주자유당 내 파벌 갈등 해소 및 당내 융화를 도모하기 위해 단행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추진, 유엔군 군수 기지 역할 수행, 일본 경제 재건 발판 마련 등의 평가를 받는다. -
요시다 시게루 -
바카야로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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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시게루 -
아소 다로
아소 다로는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아소 시멘트 사장을 역임하고 197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현재 자유민주당 부총재 및 최고 고문이다.
3. 내각의 배경 및 목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연합국에 의한 점령 체제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일본 내에서는 점령 체제가 끝나면서 요시다 내각이 물러나고 요시다 총리도 사임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히지 않고 정권을 계속 이끌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요시다 자신이 오랫동안 '원맨 총리'로서 점령 체제를 극복해 왔다는 자신감과 권력욕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및 미일 안보 조약 발효와 새로운 체제 정비 (미일 행정 협정 협상, 국제 사회 복귀에 따른 외교 정책 수립, 점진적 방위 체제 정비, 공산주의 억제를 위한 노동운동 규제 등)를 실현하기 위해 정권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51년 12월 19일, 요시다는 다음 해인 1952년이 지난 6년을 통틀어 중요한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1953년 1월 22일까지 정권을 맡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1951년 12월 25일, 갑작스럽게 내각 개조를 단행하여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내각'이 성립되었다 (각료 인증은 26일). 요시다는 마스다 가네시치 간사장을 포함한 자유당 수뇌부와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개각을 추진했다.
이번 내각 개조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우익 성향의 검사 출신 기무라 도쿠타로를 법무총재로 기용하여 반공 입법 추진을 가속화했다.
* 외교관 출신 오카자키 가쓰오를 국무대신(자위력 점증 담당)으로 기용하여 미일 행정 협정 협상을 담당하게 했다. 이후 요시다는 자신이 겸임하던 외무대신을 오카자키에게 맡겼다.
* 오하시 다케오를 경찰예비대 담당 국무대신으로 임명하여 방위 체제 검토를 시작하게 했다.
* 히로카와 고젠을 농림상으로 기용한 것은 자유당 내에서 마스다 가네시치 간사장과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고, 국민민주당까지 가세하여 항쟁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당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 당내 화합을 위해 야마자키 다케시를 국무대신으로 기용했다.
* '요시다 학교' 출신 이케다 하야토 대장상, 하시모토 료고 후생상, 사토 에이사쿠 우정상 겸 전기통신상, 스토 히데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을 유임시키고, 호리 시게루를 내각관방장관으로 기용하는 등,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하토야마 이치로 파에 대한 요시다 파의 정권 장악을 시도했다.
이러한 내각 개조에 대해 하토야마 파의 간부인 고노 이치로는 "터무니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4. 내각의 구성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의 내각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직명 | 대 | 성명 | 출신 등 | 특명 사항 등 | 비고 | |
|---|---|---|---|---|---|---|
| 내각총리대신 | 49 | 요시다 시게루 | -- | 중의원 자유당 | 외무·국무대신 (보안청장관 직무대리) 겸임 | 유임 자유당 총재 |
| 법무총재 | 6 | 키무라 도쿠타로 | -- | 비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1952년 8월 1일 면 |
| (법무부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법무대신 | (법무성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1 | 키무라 도쿠타로 | -- | 비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1952년 8월 1일 임 | |
| 외무대신 | 70 | 요시다 시게루 | -- | 중의원 자유당 | 내각총리대신 겸임 | 유임 1952년 4월 30일 면 자유당 총재 |
| 71 | 오카자키 카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4월 30일 임 | ||
| 대장대신 | 55 | 이케다 하야토 | -- | 중의원 자유당 | 유임 | |
| 문부대신 | 67 | 아마노 데이유 | -- | 민간 | 유임 1952년 8월 12일 면 | |
| 68 | 오카노 기요히데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8월 12일 임 | ||
| 후생대신 | 20 | 하시모토 료고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1월 18일 면 |
| 21 | 요시타케 에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노동대신 겸임 | 1952년 1월 18일 임 | |
| 농림대신 | 14 | 히로카와 고젠 | -- | 중의원 자유당 | ||
| 통상산업대신 | 5 | 다카하시 류타로 | -- | 참의원 녹풍회 | 유임 | |
| 운수대신 | 13 | 무라카미 기이치 | -- | 참의원 녹풍회 | ||
| 우정대신 | 3 | 사토 에이사쿠 | -- | 중의원 자유당 | 전기통신대신 겸임 | 유임 |
| 전기통신대신 | 3 | 사토 에이사쿠 | -- | 중의원 자유당 | 우정대신 겸임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전기통신성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노동대신 | 6 | 요시타케 에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후생대신 겸임 | |
| 건설대신 | 6 | 노다 우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겸임 수도건설위원회 위원장 | 유임 |
| 국무대신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 8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중앙경제조사청, 물가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경제안정본부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국무대신 중앙경제조사청장관 | 6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물가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중앙경제조사청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국무대신 물가청장관 | 8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중앙경제조사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4월 1일 면 |
| (물가청 폐지, 1952년 4월 1일부) | ||||||
| 국무대신 경제심의청장관 | (경제심의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1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 1952년 9월 2일 면 | ||
| 2 | 야마자키 다케시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 7 | 하시모토 료고 | -- | 중의원 자유당 | 후생대신 겸임 | 유임 1952년 1월 18일 면 |
| 8 | 키무라 도쿠타로 | -- | 비의원 자유당 | 법무총재(법무대신) 겸임 | 1952년 1월 18일 임 1952년 4월 5일 면 | |
| 9 | 노다 우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건설·국무대신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겸임 | 1952년 4월 5일 임 | |
| 국무대신 배상청장관 | 9 | 오카자키 카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1년 12월 27일 임 | |
| (배상청 폐지, 1952년 4월 28일부) | ||||||
| 국무대신 지방자치청장관 | 3 | 오카노 기요히데 | -- | 중의원 자유당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 (지방자치청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국무대신 자치청장관 | (자치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1 | 오카노 기요히데 | -- | 중의원 자유당 | 문부대신 겸임 | 1952년 8월 1일 임 | |
| 국무대신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 3 | 노다 우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건설·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유임 |
| 국무대신 보안청장관 | (보안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 | 요시다 시게루 | -- | 중의원 자유당 | 직무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1952년 8월 1일 임 자유당 총재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야마자키 다케시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까지 | |
| - | 야마가타 가쓰미 | -- | 참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오하시 다케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8월 1일까지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오카자키 카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1년 12월 27일까지 | |
| 1952년 4월 29일 임 1952년 4월 30일까지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오노기 히데지로 | -- | 참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나카야마 도시히코 | -- | 참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내각관방장관은 호리 시게루(자유당, 중의원)이었다. 내각관방부장관은 겐노키 도시히로, 에구치 미토루, 간노 요시마루였다.
정무차관은 1951년(쇼와 26년) 12월 26일에 임명되었다.
|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 법무정무차관 (법무부) | 다쓰노 기이치로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7월 31일 면직 |
| (법무부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법무정무차관 (법무성) | (법무성 미설치, 1952년 7월 31일) | ||
| 다쓰노 기이치로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 외무정무차관 | 이시하라 간이치로 | 참의원/자유당 | |
| 대장정무차관 | 니시무라 나오미 | 중의원/자유당 | |
| 문부정무차관 | 이마무라 주스케 | 중의원/자유당 | |
| 후생정무차관 | 마쓰노 라이조 | 중의원/자유당 | |
| 농림정무차관 | 노하라 마사카쓰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6월 10일 면직 |
| 오가와라 마사노부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6월 11일 임명, 1952년 9월 6일 사망 | |
| (결원, 1952년 9월 6일부터) | |||
| 통상산업정무차관 | 혼마 슌이치 | 중의원/자유당 | |
| 운수정무차관 | 사사키 히데요 | 중의원/자유당 | |
| 우정정무차관 | 데라모토 이쓰키 | 중의원/자유당 | |
| 전기통신정무차관 | 히라이 다로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7월 31일 면직 |
| (전기통신성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노동정무차관 | 미조구치 사부로 | 참의원/녹풍회 | |
| 건설정무차관 | 쓰카하라 도시오 | 중의원/자유당 | |
| 경제안정정무차관 | 후쿠다 도쿠야스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7월 31일 면직 |
| (경제안정본부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중앙경제조사정무차관 | 우에하라 쇼키치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3월 31일 임명, 1952년 7월 31일 면직 |
| (중앙경제조사청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물가정무차관 | 우에하라 쇼키치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3월 31일 면직 |
| (물가청 폐지, 1952년 4월 1일) | |||
| 경제심의정무차관 | (경제심의청 미설치, 1952년 7월 31일) | ||
| 후쿠다 도쿠야스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 행정관리정무차관 | 야마구치 로쿠로지 | 중의원/자유당 | |
| 배상정무차관 | 이리마지리 다이조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4월 28일 면직 |
| (배상청 폐지, 1952년 4월 28일) | |||
| 외자정무차관 | (외자위원회 설치, 1952년 4월 28일) | ||
| 이리마지리 다이조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4월 28일 임명 | |
| (외자위원회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지방자치정무차관 | 후지노 시게오 | 참의원/녹풍회 | 1952년 8월 1일 면직 |
| (지방자치청 폐지, 1952년 8월 1일) | |||
| 자치정무차관 | (자치청 미설치, 1952년 7월 31일) | ||
| 후지노 시게오 | 참의원/녹풍회 | 1952년 8월 1일 임명 | |
| 홋카이도 개발 정무차관 | 이리마지리 다이조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보안정무차관 | (보안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 ||
| 히라이 다로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4.1. 국무대신
第3次吉田内閣일본어 제3차 개조내각의 국무대신은 다음과 같다.
| 직명 | 대 | 성명 | 출신 등 | 특명 사항 등 | 비고 | |
|---|---|---|---|---|---|---|
| 내각총리대신 | 49 | 요시다 시게루 | -- | 중의원 자유당 | 외무·국무대신 (보안청장관 직무대리) 겸임 | 유임 자유당 총재 |
| 법무총재 | 6 | 키무라 도쿠타로 | -- | 비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1952년 8월 1일 면 |
| (법무부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법무대신 | (법무성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1 | 키무라 도쿠타로 | -- | 비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1952년 8월 1일 임 | |
| 외무대신 | 70 | 요시다 시게루 | -- | 중의원 자유당 | 내각총리대신 겸임 | 유임 1952년 4월 30일 면 자유당 총재 |
| 71 | 오카자키 카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4월 30일 임 | ||
| 대장대신 | 55 | 이케다 하야토 | -- | 중의원 자유당 | 유임 | |
| 문부대신 | 67 | 아마노 데이유 | -- | 민간 | 유임 1952년 8월 12일 면 | |
| 68 | 오카노 기요히데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8월 12일 임 | ||
| 후생대신 | 20 | 하시모토 료고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1월 18일 면 |
| 21 | 요시타케 에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노동대신 겸임 | 1952년 1월 18일 임 | |
| 농림대신 | 14 | 히로카와 고젠 | -- | 중의원 자유당 | ||
| 통상산업대신 | 5 | 다카하시 류타로 | -- | 참의원 녹풍회 | 유임 | |
| 운수대신 | 13 | 무라카미 기이치 | -- | 참의원 녹풍회 | ||
| 우정대신 | 3 | 사토 에이사쿠 | -- | 중의원 자유당 | 전기통신대신 겸임 | 유임 |
| 전기통신대신 | 3 | 사토 에이사쿠 | -- | 중의원 자유당 | 우정대신 겸임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전기통신성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노동대신 | 6 | 요시타케 에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후생대신 겸임 | |
| 건설대신 | 6 | 노다 우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겸임 수도건설위원회 위원장 | 유임 |
| 국무대신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 8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중앙경제조사청, 물가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경제안정본부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국무대신 중앙경제조사청장관 | 6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물가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중앙경제조사청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국무대신 물가청장관 | 8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국무대신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중앙경제조사청장관) 겸임 | 유임 1952년 4월 1일 면 |
| (물가청 폐지, 1952년 4월 1일부) | ||||||
| 국무대신 경제심의청장관 | (경제심의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1 | 스토 히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 1952년 9월 2일 면 | ||
| 2 | 야마자키 다케시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 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 7 | 하시모토 료고 | -- | 중의원 자유당 | 후생대신 겸임 | 유임 1952년 1월 18일 면 |
| 8 | 키무라 도쿠타로 | -- | 비의원 자유당 | 법무총재(법무대신) 겸임 | 1952년 1월 18일 임 1952년 4월 5일 면 | |
| 9 | 노다 우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건설·국무대신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겸임 | 1952년 4월 5일 임 | |
| 국무대신 배상청장관 | 9 | 오카자키 카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1년 12월 27일 임 | |
| (배상청 폐지, 1952년 4월 28일부) | ||||||
| 국무대신 지방자치청장관 | 3 | 오카노 기요히데 | -- | 중의원 자유당 | 유임 1952년 8월 1일 면 | |
| (지방자치청 폐지, 1952년 8월 1일부) | ||||||
| 국무대신 자치청장관 | (자치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1 | 오카노 기요히데 | -- | 중의원 자유당 | 문부대신 겸임 | 1952년 8월 1일 임 | |
| 국무대신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 3 | 노다 우이치 | -- | 중의원 자유당 | 건설·국무대신 (행정관리청장관) 겸임 | 유임 |
| 국무대신 보안청장관 | (보안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설치) | |||||
| - | 요시다 시게루 | -- | 중의원 자유당 | 직무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1952년 8월 1일 임 자유당 총재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야마자키 다케시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까지 | |
| - | 야마가타 가쓰미 | -- | 참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오하시 다케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2년 8월 1일까지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오카자키 카쓰오 | -- | 중의원 자유당 | 1951년 12월 27일까지 | |
| 1952년 4월 29일 임 1952년 4월 30일까지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오노기 히데지로 | -- | 참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 국무대신 (무임소) | - | 나카야마 도시히코 | -- | 참의원 자유당 | 1952년 9월 2일 임 | |
4.2. 내각관방장관·부장관
내각관방장관은 호리 시게루(자유당, 중의원)이었다. 내각관방부장관은 겐노키 도시히로, 에구치 미토루, 간노 요시마루였다. 1951년(쇼와 26년) 12월 26일에 임명되었다.
4.3. 정무차관
|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 법무정무차관 (법무부) | 다쓰노 기이치로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7월 31일 면직 |
| (법무부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법무정무차관 (법무성) | (법무성 미설치, 1952년 7월 31일) | ||
| 다쓰노 기이치로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 외무정무차관 | 이시하라 간이치로 | 참의원/자유당 | |
| 대장정무차관 | 니시무라 나오미 | 중의원/자유당 | |
| 문부정무차관 | 이마무라 주스케 | 중의원/자유당 | |
| 후생정무차관 | 마쓰노 라이조 | 중의원/자유당 | |
| 농림정무차관 | 노하라 마사카쓰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6월 10일 면직 |
| 오가와라 마사노부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6월 11일 임명, 1952년 9월 6일 사망 | |
| (결원, 1952년 9월 6일부터) | |||
| 통상산업정무차관 | 혼마 슌이치 | 중의원/자유당 | |
| 운수정무차관 | 사사키 히데요 | 중의원/자유당 | |
| 우정정무차관 | 데라모토 이쓰키 | 중의원/자유당 | |
| 전기통신정무차관 | 히라이 다로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7월 31일 면직 |
| (전기통신성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노동정무차관 | 미조구치 사부로 | 참의원/녹풍회 | |
| 건설정무차관 | 쓰카하라 도시오 | 중의원/자유당 | |
| 경제안정정무차관 | 후쿠다 도쿠야스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7월 31일 면직 |
| (경제안정본부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중앙경제조사정무차관 | 우에하라 쇼키치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3월 31일 임명, 1952년 7월 31일 면직 |
| (중앙경제조사청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물가정무차관 | 우에하라 쇼키치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3월 31일 면직 |
| (물가청 폐지, 1952년 4월 1일) | |||
| 경제심의정무차관 | (경제심의청 미설치, 1952년 7월 31일) | ||
| 후쿠다 도쿠야스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 행정관리정무차관 | 야마구치 로쿠로지 | 중의원/자유당 | |
| 배상정무차관 | 이리마지리 다이조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4월 28일 면직 |
| (배상청 폐지, 1952년 4월 28일) | |||
| 외자정무차관 | (외자위원회 설치, 1952년 4월 28일) | ||
| 이리마지리 다이조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4월 28일 임명 | |
| (외자위원회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지방자치정무차관 | 후지노 시게오 | 참의원/녹풍회 | 1952년 8월 1일 면직 |
| (지방자치청 폐지, 1952년 7월 31일) | |||
| 자치정무차관 | (자치청 미설치, 1952년 7월 31일) | ||
| 후지노 시게오 | 참의원/녹풍회 | 1952년 8월 1일 임명 | |
| 홋카이도 개발 정무차관 | 이리마지리 다이조 | 참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보안정무차관 | (보안청 미설치, 1952년 8월 1일) | ||
| 히라이 다로 | 중의원/자유당 | 1952년 8월 1일 임명 | |
5. 내각의 주요 활동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체결 이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새로운 체제 정비를 위해 정권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은 다음과 같은 주요 활동을 추진했다.
* 미일 행정 협정 체결 추진: 오카자키 가쓰오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협상 작업을 진행했다. 외교관 출신인 오카자키는 이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방위 체제 정비: 오하시 다케오 국무대신 주도로 경찰예비대 강화 및 방위력 증강을 검토했다.
* 반공 입법 추진: 기무라 도쿠타로 법무총재 겸 법무대신 주도로 노동운동 규제 등 관련 법안 마련을 추진했다. 기무라는 우익 성향의 검사 출신 정치인으로, 그의 기용은 반공 입법 추진을 예고했다.
* [[1952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 실시 (1952년 8월)]]: 요시다 총리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하토야마 이치로 파 등 반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는 '기습 해산'으로 불리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6. 평가 및 영향
요시다 시게루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체결 이후에도 정권 유지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는 '원맨 재상'으로서 점령 체제를 극복해 왔다는 자부심과 권력욕뿐만 아니라, 조약 발효 후 새로운 체제 정비, 외교 정책 입안, 방위 체제 정비, 공산주의 억제를 위한 노동운동 규제 등의 과제 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1951년 12월 25일, 요시다는 자유당 수뇌부와 상의 없이 내각 개조를 단행했다. 이는 요시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주요 인사는 다음과 같다.
* 기무라 도쿠타로를 법무총재로 기용: 반공 입법 추진
* 오카자키 가쓰오를 국무대신으로 기용: 미일 행정 협정 교섭 담당
* 오하시 다케오를 국무대신으로 기용: 방위 체제 검토
* 히로카와 고젠을 농림상으로 기용, 야마자키 다케시를 국무대신으로 기용: 당내 갈등 해결
* 요시다 학교 출신인 이케다 하야토, 하시모토 료고, 사토 에이사쿠, 스토 히데오 유임, 호리 시게루를 내각관방장관으로 기용: 하토야마 이치로 파 견제 및 요시다 파 중심 정권 장악
이러한 내각 개조는 요시다 시게루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강화하고, 자유당 내 보수 세력을 결집하여 전후 일본 보수 정치 지형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요시다의 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하고, 이후 보수 정권 유지에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에 대한 영향으로는, 일본의 보수화는 한일관계에 있어서 보수 정권의 협상력을 강화시켰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경제적 부흥은 대한민국과의 경제력 격차를 심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