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경찰예비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경찰예비대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일본의 방위력 및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된 준군사조직이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창설되었으며, 미국 육군을 모델로 하여 훈련 및 장비를 갖추었다. 경찰예비대는 보안청으로 이관된 후 1952년 보안대로 개편되었고, 이는 훗날 자위대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경찰 조직 - 일본 해상보안청
    일본 해상보안청은 국토교통성 소속의 준군사 기관으로 해상 안전과 치안 유지를 담당하며, 해상법 집행, 수색 및 구조, 재난 대응, 수로 및 해양 조사, 해상 교통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 일본의 경찰 조직 - 특수급습부대
    특수급습부대는 일본의 대테러 특수부대로, SAP에서 기원하여 하이재킹, 중요 시설 점거 등 중대 테러 사건에 대응하며 기동대에서 선발된 대원들이 고강도 훈련과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를 통해 대테러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 일본의 해체된 법집행기관 - 교토 미마와리구미
    교토 미마와리구미는 1864년 교토 치안 유지를 위해 결성된 도쿠가와 막부 직속 무사 조직으로,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보신 전쟁 패배 후 해체되었다.
  • 일본의 해체된 법집행기관 - 특별고등경찰
    특별고등경찰은 일본 제국에서 위험 사상을 단속하기 위해 창설된 특별 경찰 조직으로, 치안유지법을 통해 사상 통제와 반체제 인사 탄압에 앞장섰으며, 해체 후 공안 경찰로 계승되어 일본 제국주의 시기 사상 검열과 탄압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육상자위대의 역사 - 미시마 사건
    미시마 사건은 1970년 미시마 유키오가 방패회 회원들과 함께 육상자위대 동부방면총감부를 점거하여 헌법 개정과 자위대 국군화를 주장한 후 할복 자결한 사건으로, 그의 민족주의적 사상과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을 보여주며 사회적 논쟁과 성찰을 촉구했다.
  • 육상자위대의 역사 - 중앙즉응집단
    중앙즉응집단은 게릴라 및 테러 대응, 국제 활동을 목적으로 창설된 육상자위대 부대로, 제1공정단, 제1헬리콥터단, 특수작전군, 제101특수무기방호대 등을 예하 부대로 두고 활동하다 2018년 3월 26일 해체되었다.
경찰예비대
기본 정보
명칭경찰예비대
원어 명칭警察予備隊
로마자 표기Keisatsu Yobitai
영어 명칭National Police Reserve, NPR
다른 명칭保安隊 (Hoantai, 국가안전대)
경찰예비대 및 국가안전대 휘장
경찰예비대 휘장
깃발
활동 기간1950년 8월 10일 ~ 1954년 7월 1일 (국가안전대로 개편)
창설일1950년 8월 10일
해체일1952년 10월 15일 (보안대로 개편)
국가일본
규모약 75,000명 ~ 110,000명
본부도쿄도 고토구 엣추지마 주둔지
관할 조직총리부 국가안전보장국
유형헌병
역할대전차전
국경 통제
혹한 전투
대게릴라전
방첩
군중 통제
병력 보호
전방 관측
휴민트
간접 사격
정보 평가
국내 보안
정글전
법 집행
순찰
습격
정찰
폭동 진압
도시 전투
주요 지휘관하야시 게이조(경찰감)
행정 구조
수장 직책본부장관
수장마스하라 케이키치
보좌관 직책총대총감
보좌관하야시 게이조(경찰감)
상위 조직총리부
하위 조직 1본부
하위 조직 설명 1장관관방, 경무국, 인사국, 장비국, 경리국, 공무국, 의무국
하위 조직 2본부 (부속)
하위 조직 설명 2경찰예비대 건설부, 경찰예비대 지방 건설부 4
하위 조직 3총대
하위 조직 설명 3총대총감부, 총대총감부 직할 부대, 관구대 4
본부 위치도쿄도고토구엣추지마 주둔지
정원약 75,000명
기타
관련 법령경찰예비대령(쇼와 25년 정령 제260호)

2. 역사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일미군이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일본의 방어력이 약화되었다.[5] 이러한 상황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GHQ)의 권고에 따라 일본 정부는 경보병 무기로 무장한 7만 5천 명 규모의 경찰예비대 설립을 승인했다. 경찰예비대는 사실상 미국 육군을 모델로 한 군대였다.

경찰예비대는 경찰예비대령(1950년 내각령 제260호)에 따라 특수 상황에서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1952년 10월에는 11만 명으로 확대되어 국가안전대로 개칭되었다.

1954년 자위대법 시행 이후, 국가안전위원회는 방위청으로 개편되었고, 국가안전대는 육상자위대로, 연안안전대(경찰예비대의 해상 부대)는 해상자위대로 개편되었다.

경찰예비대 본부

2. 1. 창설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주일미군의 상당수가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일본의 방위력 및 치안 유지에 공백이 발생하였다.[5] 7월 8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7만 5천 명 규모의 "National Police Reserve"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시하였다. 이 부대는 "사변·폭동 등에 대비하는 치안경찰대"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5]

GHQ 내부 자료에서는 이 부대를 "Constabulary"(경찰군)로 칭하며, 미국필리핀에 창설했던 (PC)나 대한민국 국방경비대(현재의 대한민국 육군)와 같은 반란 진압 작전 부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48년 5월, 육군장관 케네스 로열은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일본의 제한적 재군비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의 비무장 중립을 고집하며 재군비와 경찰 중앙 집권화에 강하게 반대했던 맥아더 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6]

맥아더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일본 재군비에 반대했다.[6]

  • 일본에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가진 중화민국, 필리핀 등 극동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지장을 줄 수 있다.
  • 일본 재군비는 포츠담 선언 등 일본 점령 정책 기본 방침에 어긋난다.
  • 식민지를 잃고 공업이 약화된 일본을 재군비해도 5류 군사 강국밖에 되지 않는다.
  • 재군비 비용이 일본 경제 재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 헌법 9조에 따라 전쟁을 포기한 일본 국민이 재군비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맥아더는 입장을 바꾸어 경찰예비대 창설을 지시하게 되었다.

2. 2. 창설 과정

1950년 8월 10일, '''경찰예비대령'''(쇼와 25년 정령 제260호)이 공포되었다.[5] 이 법령에 따라 경찰예비대는 특수 상황에서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경찰예비대령 제9조에는 내각총리대신 외에 담당 대신을 둘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고, 실제로 1951년 12월 26일부터 1952년 7월 31일까지 국무대신 오하시 다케오가 그 직무를 담당했다.

경찰예비대의 최고 지휘관은 '''경찰예비대 본부''' 장관(인증관)이었으며, 관료 신분이었다. 초대 장관은 증원혜길(훗날 방위청장관 역임)이 1950년 8월 14일부터 1952년 7월 31일 폐지될 때까지 역임했다. 장관을 보좌하는 경찰예비대 본부 차장(현재의 방위심의관)에는 에구치 미토루가 임명되었다.

경찰예비대령 부칙 제2항에 따라, 당분간 대원 모집, 부대 편성, 주둔지 설치 등 부대 설립 업무는 국가지방경찰(국경)이 담당했다. 초기 인원 교육 또한 국경이 주도했다. 8월 13일부터 시작된 인원 모집에는 74,158명이 경찰학교에 입교했다.[6] 그러나 채용된 대원 모두가 2등경사(현재의 2등육사)로 임명되어 간부 대원은 부족했다.

1950년 8월 23일, 간부 육성과 화기, 통신, 시설, 차량 교육을 담당하는 에타지마 학교(현재의 해상자위대 제1술과학교·간부후보생학교)가 설치되었다. 제1기 입대자 중 약 200명이 간부 요원으로 선발되어 미군 교관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훈련 기간은 4주였고, 1950년 9월 28일 제1기 간부 훈련이 수료하여 간부 대원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간부 임명 조건이 불명확하고, 제1기 간부 훈련 수료자 200명으로는 74,000명의 대원을 지휘하기에 부족하여 간부 충원이 시급했다. 경찰청 등에서 출향한 간부 요원들도 원직 복귀를 위해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 간부 부족 문제는 심각했다.

찰스 윌로비 G2 부장의 의뢰로 핫토리 타쿠시로(전 육군대좌)가 구 일본군장교 중심의 간부 후보 명단을 작성했으나, 맥아더의 정치적 판단으로 공직추방된 인물은 채용되지 않아 이 안은 폐기되었다. 핫토리의 참모장 취임도 무산되었다.

대신 증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여 일반 공모 800명, 각 관공서 추천 200명 등 총 1,000명의 간부를 선발했다. 10월 9일에는 내무관료 출신의 하야시 케이조 경찰감(현재의 육장)이 제복조 최고위직인 중앙 본부장(현재의 육상막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29일, 중앙 본부장은 총대 총감으로 개칭되었다.

2. 3. 중무장화 및 훈련

한국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고 1950년 11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극동에서 공산주의 진영과의 직접적인 대치 상황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경찰예비대의 중무장화를 지시했다.

1951년 1월 3일, 맥아더는 미국 육군성에 경찰예비대에 필요한 무기 목록을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M26 퍼싱 307대를 포함한 760대에 달하는 장궤차량 등, 거의 미군 4개 보병사단에 상당하는 장비가 포함되어 있었다.[7] 2월 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이 요청을 기본적으로 승인했으나, 국무부의 반대와 맥아더 해임 등으로 인해 중장비화는 지연되었다.[7]

그러나 이러한 중무장화는 포츠담 선언일본국 헌법 제9조에 위배된다는 소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7] 일본 국내에서도 좌파·공산주의자들이 연계하여 국회에서 중요한 의제가 되었고, 최고재판소에 위헌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7] 요시다 시게루는 자체적인 장비 조달을 포기하고, 당분간 유엔군으로부터 장비를 대여(렌탈)받는 형식으로 이러한 비판을 피했다.[7] (장비가 자체 조달 방식이 된 것은 1954년의 일미 상호방위원조협정 이후였다).[7]

경찰예비대의 훈련은 기본적으로 미국 군사고문의 감독하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부대 규모 확대에 따라 장비도 확충되었다.[8]

기간훈련 내용주요 장비
1950년 8월 23일 - 1951년 1월 14일 (13주)개인 훈련 중심M1 카빈, 지프비장갑 차량 480대
1951년 1월 15일 - 1951년 5월 19일 (18주)중대 단위 훈련 중심브라우닝 M1919 중기관총, M2 60mm 박격포, M20 75mm 무반동총, M15A1 대공자주포 16대, M16 대공자주포 48대
1951년 6월 4일 - 1951년 10월 6일 (18주)대대 단위 훈련 중심차량 2,130대, M1911 권총, M1 개런드 소총, 브라우닝 M1918 자동소총, M1 81mm 박격포(450문)
1951년 10월 8일 - 1952년 1월 19일 (13주)직종별 훈련 중심 (주일미군 시설 내 특기 교육)
1952년 2월 4일 - 1952년 6월 13일 (19주)대대 단위 훈련 및 특기 교육89mm 슈퍼 바주카 443문, 전차 및 화포 훈련 시작
1952년 6월 23일 - 1952년 9월 30일 (13주)연대 단위 훈련 중심M24 경전차 40대, M2 105mm 곡사포 154문, 차량 15,000대



보안대로 개편을 앞둔 10월부터는 M1 155mm 곡사포의 제공이 시작되었다.[8]

2. 4. 보안청 이관 및 자위대 전환

1952년 4월 28일 일본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면서 포츠담 선언을 포함한 포츠담 명령은 원칙적으로 180일 이내에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나, 경찰예비대령에 대해서는 같은 해 5월 27일 개정을 통해 "당분간 법률로서의 효력을 갖는다"고 규정되었다.[10]

그러나 법적 근거의 명확화 및 체제 정비 등을 위해 신법에 의한 조직 구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해상경비대를 통합하는 보안청 구상 아래, 보안청법(쇼와 27년 법률 제265호)을 제정하고, 같은 해 8월 1일에 보안청을 발족시켰다.[10]

경찰예비대는 이후 방위성의 내부 부서에 해당하는 "본부", 육상막료감부에 해당하는 "총대", 육상자위대에 해당하는 "관구대 이하 부대 등"으로 나뉘었고, 본부와 총대는 각각 보안청 내부 부서와 제1막료감부로 이관됨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부대 등은 후계 조직인 보안대의 출범이 8월 1일에 맞추지 못하여 10월 14일까지 2개월 반 동안 "경찰예비대"라는 명칭 그대로 보안청의 하부 조직으로 존속(총리부로부터 이관)되었고, 10월 15일 보안대 발족과 함께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3. 조직

경찰예비대는 일본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경찰력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경찰예비대는 총리부의 기관이지만, 경찰과는 독립되어 내각총리대신의 지휘를 받았다.

경찰예비대 창설 초기에는 국가지방경찰이 대원 모집, 부대 편성, 주둔지 설영 등 부대 설립 업무 대부분을 대행했다. 초기 인원 교육 또한 국경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50년 8월 13일부터 10월 12일까지 74,158명이 관구 경찰학교에 입교했다.

1950년 8월 23일, 간부 육성과 화기, 통신, 시설, 차량 등의 교육을 담당하는 에타지마 학교가 설치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구 병학교 시설을 사용하여 미군 교관으로부터 무기 및 통신 장비 사용법을 배웠다.

찰스 윌로비 G2 부장의 의뢰를 받은 핫토리 타쿠시로는 구군 장교를 중심으로 400명의 명부를 작성했으나, 공직추방된 인물은 채용되지 않아 이 안은 폐기되었다. 대신 1,000명의 간부가 선임되었고, 1950년 10월 9일 내무관료 출신의 하야시 케이조 경찰감이 중앙 본부장(현재의 육상막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2월 29일, 중앙 본부장은 총대 총감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는 후에 제1막료장(보안청 시대), 육상막료장(방위청 시대)으로 개칭되었다.

경찰예비대의 조직은 크게 중앙 조직과 실력 부대로 나뉜다.

3. 1. 중앙 조직

경찰예비대 본부는 장관관방, 경무국, 인사국, 장비국, 경리국, 공무국, 의무국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100명의 인원으로 도쿄도 코시나카지마 주둔지에 설치되었다. 본부에는 경찰예비대 건설부와 경찰예비대 지방건설부도 부속되었다.

실력 부대인 경찰예비대 총대(약 7만 5천 명)의 사령부 기능은 총대총감부가 담당했다. 총대총감부 직할부대에는 관리보급대가 있었다.

3. 2. 실력 부대 (총대 및 관구대)

경찰예비대 총대(약 7만 5천 명)는 내각총리대신의 참모부 기관인 경찰예비대 본부(약 100명)의 지휘를 받았다. 총대의 사령부 기능은 총대총감부가 담당했으며, 1950년 12월 29일에 공포된 경찰예비대의 부대의 편성 및 조직에 관한 규정에 따라 총대총감부 및 4개 관구대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1] 각 관구대는 정원 약 1만 3천 명으로, 거의 사단에 상당하는 규모였다.[2] 이러한 관구대 편성은 1951년 5월 1일에 완료되었다.[1]

관구대는 관구총감부 및 직할부대 외에 3개 보병연대(3개 대대 기간), 1개 또는 2개의 특과연대(4개 대대 기간)로 구성되었다. 출신지에 가까운 곳에 배치되는 고향 부대주의가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실행이 어려웠다.[1]

연대기의 번호는 연대 번호를 나타낸다


1951년 관구대 배치도


구분총대총감부제1관구대제2관구대제3관구대제4관구대
경비 구역남동북, 관동, 고신에쓰, 도카이 지방홋카이도, 북동북 지방호쿠리쿠, 킨키, 츄고쿠(야마구치현 제외), 시코쿠 지방야마구치현, 큐슈 지방
주둔지도쿄도 코시나카지마 주둔지홋카이도 마코마나이 주둔지교토부 우지 주둔지(후에 이타미 주둔지)후쿠오카현 후쿠오카 주둔지
예하 부대


4. 계급

경찰예비대의 계급은 장교, 부사관(하사관), 병으로 구성되었다. 장교는 다시 장관급, 영관급, 위관급으로 나뉘었다. 각 계급별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보안대, 육상자위대, 그리고 각국 육군의 계급은 표와 같다.

4. 1. 경찰예비대 계급표

경찰예비대의 계급장


경찰예비대의 계급은 1950년 8월 24일에 공포되어 즉시 시행된 경찰예비대령시행령(8월 14일 소급 적용)에 의해 규정되었다. 보안대의 3등 보안정에 해당하는 계급은 "경찰사장"이었으며, 3등 경찰사는 설치되지 않았다. 참고로, 보안대의 3등 보안사 계급은 1953년 3월에 제정되었다.[11]

경찰예비대의 경찰관 계급
rowspan="2" colspan="2"|계급해당하는 군사 계급
보안대육상자위대각국 육군
장교장관급경찰감보안감육장중장
경찰감보보안감보육장보소장
영관급1등경찰정1등보안정1등육좌대령
2등경찰정2등보안정2등육좌중령
경찰사장
→3등경찰정
3등보안정3등육좌소령
위관급1등경찰사1등보안사1등육위대위
2등경찰사2등보안사2등육위중위
(3등경찰사)3등보안사3등육위소위
부사관1등경찰사보1등보안사보1등육조상사
2등경찰사보2등보안사보2등육조중사
3등경찰사보3등보안사보3등육조하사
경사장보사장육사장상등병
1등경사1등보사1등육사일등병
2등경사2등보사2등육사이등병



"상당 계급"에 기재된 후계 조직에서의 계급은 대략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며, 직위나 직권 등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한, 육상자위대로 이행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가된 준육위, 육조장, 3등육사에 대해서는 경찰예비대의 경찰관이나 보안관에 해당하는 계급이 없다.

5. 재해 파견

1951년 10월, 루스 태풍으로 야마구치현 구가군 일대가 고립되자, 경찰예비대가 자연재해 피해 복구를 위해 최초로 파견되었다.[9]

참조

[1] 간행물 PANZER Argonaut.Inc 1998-04
[2] text
[3] text
[4] 웹사이트 警察予備隊令(昭和25年政令第260号)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1950-08-10
[5] 웹사이트 昭和25年7月8日付吉田内閣総理大臣宛連合国軍最高司令官書簡 https://www.archives[...] 2024-05-23
[6] 서적 自衛隊の誕生 中央公論社 2004
[7] 뉴스 CIA files reveal militarist plot to kill Yoshida in ’52 http://www.japantime[...] 2007-02-28
[8] 웹사이트 CIA Records - Name Files http://www.archives.[...]
[9] 뉴스 死傷は千五百余名 惨状の村に予備隊到着 1951-10-22
[10] 법률 保安庁法(昭和27年法律第265号) https://www.shugiin.[...] 1952-07-31
[11] 간행물 月刊PANZER 株式会社アルゴノート 1998-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