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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한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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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광한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청렴하고 유능한 관리로 명성을 떨쳤다. 수재로 천거되어 평준령을 거쳐 효렴으로 양책현령을 지냈고, 경조윤에 이르러 소제 사후 능묘 비리 사건을 처리하고 선제 즉위에 기여하여 관내후에 봉해졌다. 영천 태수로 재직하며 호족 세력을 제압하고 백성을 교화했으며, 흉노 정벌에도 참여했다. 경조윤으로 복귀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력층과의 갈등으로 인해 처형당했다. 비록 처형되었지만, 백성들은 그의 치적을 기렸으며, 송 태조는 그의 후예를 자처했다.

2. 생애

전한의 관리. 젊은 시절 군의 아전과 주의 종사를 지내며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1][2] 수재효렴으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특히 소제 사후 능묘 조성 과정에서의 비리를 엄정하게 처리하여 명성을 얻었다.[1][2] 선제 즉위에 기여한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지기도 했다.[1][2]

이후 영천 태수로 부임하여, 지역 호족 세력을 제압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통치 아래 영천의 치안은 크게 안정되었고, 조광한의 위명은 흉노에게까지 알려질 정도였다.[1][2] 본시 2년(기원전 72년)에는 흉노 정벌에 참전하기도 했다.[1][2]

다시 경조윤으로 복귀한 조광한은 부하들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공을 나누는 등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장안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정치를 쇄신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당시 백성들은 역대 경조윤 중 최고라고 평가했으며, 범법자들은 그의 통치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달아날 정도였다.[1][2]

그러나 곽광 사후, 그의 아들 곽우의 집을 강압적으로 수사하는 등 점차 권력층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자신의 빈객이 연루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었고, 특히 승상 위상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조광한은 위상을 무고하고 협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정위의 조사 끝에 죄가 드러나 원강 2년(기원전 64년) 요참에 처해졌다.[1][2]

비록 죄를 짓고 처형되었으나, 백성들은 그가 경조윤으로서 이룬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후세에도 "앞에는 조·장(조광한·장창)이 있었고, 뒤에는 삼왕(왕존·왕장·왕준)이 있었다"고 칭송했다.[1][2]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조광한의 후예를 자처하기도 했으나, 역사적으로 그 연관성은 불확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2][3]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젊어서 군의 아전과 주의 종사(從事)를 지냈고, 청렴결백하고 유능하여 명성이 있었다. 수재로 천거되어 평준령(平準令)이 되었고, 또 효렴으로 천거되어 양책(陽翟令)이 되었다. 근무 성적이 특히 우수하여 경보도위(京輔都尉)가 되었고, 이후 수(守)경조윤으로 승진하였다.

소제가 붕어하였을 때 능묘 조성을 담당한 자가 비리를 저질렀는데, 조광한은 담당자에게 경고하였다가 그가 잘못을 고치지 않자 체포하였다. 담당자는 세도가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구명을 탄원하였으나 조광한은 듣지 않았고, 담당자의 일족과 세도가는 억지로 구출해내려 하였으나 조광한은 이 또한 저지하였다. 결국 담당자는 주살되었고, 서울에서는 조광한의 행동을 칭송하였다.

소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창읍왕곽광의 손에 폐위되고, 선제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조광한은 선제 즉위에 힘쓴 공로로 관내후에 봉해졌다.

이후 조광한은 영천태수로 발령되었다. 영천에 도착한 조광한은 전임 태수들조차 손을 쓰지 못하던, 영천에서 위법 행위를 일삼던 호족의 수괴를 주살하여 위엄을 보였다. 이때 영천에서는 유력한 호족들끼리 통혼하였고, 아전들은 호족과 영합하고 있었다. 조광한은 호족들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또 아전과 백성들을 부려 염탐하였다. 영천의 풍속은 교화되고, 도적은 생기더라도 바로 붙잡혔다. 조광한의 위명은 전국에 알려져 흉노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한나라에서 다섯 장군을 보내 흉노를 쳤을 때 조광한은 포류장군(蒲類將軍) 조충국의 밑에서 종군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수경조윤이 되었고, 이듬해에 정식 경조윤으로 취임하였다.

2. 2. 소제 시대의 활약

젊은 시절 군의 아전과 주의 종사(從事)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유능하여 명성이 높았다. 수재로 천거되어 평준령(平準令)이 되었고, 이후 효렴으로 다시 천거되어 양책(陽翟令)을 지냈다. 근무 성적이 뛰어나 경보도위(京輔都尉)를 거쳐 수(守)경조윤(경조윤 직무대행)으로 승진하였다.[1][2]

소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능묘 조성을 담당한 관리가 부정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광한은 먼저 해당 관리에게 경고하였으나, 그가 잘못을 고치지 않자 체포하였다. 이 관리는 권세가들과 친분이 두터워 주변에서 구명을 위한 탄원이 빗발쳤지만, 조광한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심지어 관리의 일족과 권세가들이 힘으로 그를 구출하려 하자, 조광한은 이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저지하였다. 결국 부정 관리는 처형되었고, 수도 장안에서는 조광한의 강직한 일 처리를 크게 칭송하였다.[1][2]

2. 3. 선제 즉위와 관내후 책봉

소제가 세상을 떠난 후, 곽광 등은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세웠으나 곧 폐위시키고 선제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 조광한은 선제가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 참여하였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2. 4. 영천태수 시절의 업적

경조윤으로 재직하다 영천 태수로 자리를 옮겼다. 영천에 부임한 조광한은 이전 태수들이 손대지 못했던 문제에 직면했다. 지역의 한 유력 호족이 세력을 믿고 빈객들을 동원해 도적질을 하는 등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는데, 조광한은 부임하자마자 이 호족의 수괴를 처형하여 기강을 바로 세웠다.

당시 영천 지역은 유력한 호족 가문들이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세력을 공고히 하고, 관청의 아전들과 결탁하여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가 있었다. 조광한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호족들 사이에 이간책을 써서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아전들과 일반 백성들을 자신의 눈과 귀로 삼아 호족과 부패한 관리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조광한의 단호한 정책은 효과를 거두어, 영천의 풍속은 교화되고 치안이 안정되었다. 도둑이 발생하더라도 곧바로 체포될 정도였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널리 알려져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심지어 흉노조차 조광한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2. 5. 흉노 정벌 참여

영천 태수 시절 조광한의 위명은 전국에 알려져 흉노조차 그의 명성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1][2] 본시 2년(기원전 72년), 전한 조정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다섯 장군을 파견했을 때, 조광한 역시 이 원정에 참여하였다.[1][2] 그는 포류장군(蒲類將軍) 조충국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1][2] 흉노 정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조광한은 다시 수(守)경조윤(경조윤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정식 경조윤 자리에 올랐다.[1][2]

2. 6. 경조윤 복귀와 개혁

본시 2년(기원전 72년), 한나라가 다섯 장군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을 때, 조광한은 포류장군(蒲類將軍) 조충국의 밑에서 종군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수(守)경조윤이 되었고, 이듬해에 정식 경조윤으로 취임하였다.

조광한은 총명하여 부하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활용할 줄 알았다. 사람들을 온화하게 대했으며, 좋은 일이 생기면 그 공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부하 관리들은 조광한을 위해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나섰다. 잘못을 저지르는 이가 있으면 먼저 타일러 가르치고,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용서 없이 체포하여 벌을 내렸다. 또한 직접 심문하지 않고도 상대방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아무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조광한은 장안의 유격(游徼, 순찰을 도는 하급 관리)의 급여를 올려주었는데, 이는 유격들이 이전보다 스스로 조심하고 함부로 법을 어겨 백성을 구금하는 일을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경조윤 지역의 정치는 맑아졌고, 백성과 관리들은 조광한을 칭송하였다. 당시 노인들조차 한나라 역대 경조윤 중에서 조광한만 한 인물이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법을 어긴 자들은 조광한의 통치를 피해 그의 관할이 아닌 우부풍이나 좌풍익 지역으로 달아나곤 했다. 조광한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나의 통치를 방해하는 것은 항상 저 두 곳(우부풍과 좌풍익)이다. 내가 그곳까지 모두 다스릴 수 있다면 간단할 텐데"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대장군 곽광이 살아있는 동안 조광한은 곽광을 섬겼으나, 곽광 사후 선제의 본심을 알아차린 뒤로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장안의 관리들을 동원하여 곽광의 아들 곽우의 집을 술 밀매 혐의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강제로 수색하였다. 당시 황후였던 곽광의 딸(곽황후)이 울며 선제에게 호소했지만, 선제는 내심 조광한을 지지하며 그를 불러 사정을 들었다. 이 사건 이후 조광한은 황족이나 고위 대신들을 대할 때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2. 7. 권력층과의 갈등과 몰락

대장군 곽광이 살아있는 동안 조광한은 그를 섬겼으나, 곽광 사후 선제의 본심을 알아차리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장안의 관리들을 동원하여 곽광의 아들 곽우의 집을 술 밀매 혐의로 문을 부수며 압수수색하였다. 곽우의 누이이자 황후였던 곽황후가 선제에게 울며 호소하였으나, 선제는 내심 조광한을 지지하며 그를 불러 사정을 들었다. 이 사건 이후 조광한은 귀족이나 대신들도 거리낌 없이 대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조광한의 빈객이 장안 시장에서 몰래 술을 팔다가 승상부 관리에게 적발되었다. 조광한은 소현(蘇賢)이라는 인물이 밀고했다고 의심하여 그를 탄핵하였으나, 소현의 친척들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오히려 조광한을 고발하였다. 결국 조광한도 조사를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면되어 감봉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조광한은 이번에는 소현과 같은 고을 출신인 영축(榮畜)이 밀고했다고 여겨, 다른 죄명을 씌워 그를 죽였다.

영축을 죽인 사건 또한 고발되어, 승상과 어사대부가 직접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조광한은 승상 위상의 비리를 조사하던 중 승상부의 계집종이 자살한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빌미로 자신의 사건을 덮어달라고 위상을 협박하였으나 위상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조광한은 위상의 부인이 계집종을 살해했다고 무고하며, 경조윤의 권한으로 직접 수사에 나섰다. 그는 관리와 병졸을 이끌고 승상부에 쳐들어가 위상의 부인을 문초하고 노비 십수 명을 끌고 갔다.

위상은 조광한이 자신을 협박하고 무고한 것이라고 선제에게 상주하였다. 정위가 조사한 결과, 위상의 부인은 계집종을 죽이지 않았으며 계집종은 꾸지람과 매를 맞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조광한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결국 승상사직 번연수[1]가 조광한을 탄핵하여 그는 하옥되었다. 장안의 관리와 백성 수만 명이 그의 구명을 바라며 통곡하였고, 일부는 대신 죽겠다고 나서기도 하였으나, 원강 2년(기원전 64년) 겨울, 조광한은 요참에 처해졌다.

3. 평가 및 영향

조광한은 젊어서부터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으며[1], 수재효렴으로 천거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부하들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온화하게 대했으며, 공이 생기면 부하에게 돌려 아전들의 충성심을 얻었다.[1] 또한 직접 문초하지 않고도 자백을 받아내는 뛰어난 수사 능력을 지녔다.[1]

경조윤으로 재직할 당시 그의 통치는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제 사후 능묘 조성 과정의 비리를 엄단하고[1], 영천 태수 시절에는 지역 호족의 발호를 억누르고 풍속을 교화하여 흉노조차 그의 명성을 두려워할 정도였다.[1] 장안에서는 유격(순라꾼)의 급여를 올려 이들이 스스로 기강을 바로잡도록 유도하여 정치를 깨끗하게 만들었다.[1] 그의 통치 아래 경조윤 관할 지역은 안정을 찾았고, 백성과 아전들은 그를 칭송했으며, 연장자들 사이에서는 역대 경조윤 중 최고라는 평가까지 나왔다.[1] 범법자들은 그의 통치를 피해 우부풍이나 좌풍익 등 다른 지역으로 달아날 정도였다.[1]

그러나 곽광 사후, 선제의 의중을 파악한 뒤로는 권력 실세였던 곽씨 일가를 압수수색하는 등[1] 귀인이나 대신을 가리지 않고 법을 집행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고(영축 살해 사건)[1], 승상 위상을 무고하려다[1] 결국 탄핵되어 요참형에 처해졌다.[1]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장안의 수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슬퍼하며 통곡했고, 일부는 그를 대신해 죽겠다고 나설 정도였다.[1]

3. 1. 후대의 평가

비록 죄를 지어 요참에 처해졌지만, 백성들은 그의 경조윤으로서의 업적을 기억하고 흠모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앞에는 조·장(조광한, 장창)이 있었고, 뒤에는 삼왕(왕존, 왕장, 왕준)이 있었다"고 일컬으며 그의 뛰어난 통치를 칭송했다.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은 스스로 조광한의 후예라고 주장했으나[2], 이 주장은 일찍부터 의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은 『관영제보기술전』 서문에서 "촉한유비가 중산정왕(유승)의 자손이라고 하거나, 조광윤이 조광한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중간 계보가 끊어져 의심스럽다. 일본 전국 시대 무장의 계보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참조

[1] 서적 史記
[2] 서적 宋史
[3] 서적 寛永諸家系図伝 第1 https://www.google.c[...] 続群書類従完成会 198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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