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 밀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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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로 밀약설은 1880년대 후반, 조선이 러시아와 맺으려 했던 비밀 협약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고, 외무협판 묄렌도르프는 부동항 조차 및 군사 교관단 초빙을 조건으로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밀약을 추진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반대와 러시아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무산되었다. 1886년에는 조선 정부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으나, 청나라에 발각되어 위안스카이의 반발을 샀다. 1904년에는 고종이 러시아 황제에게 일본의 침략을 알리고 동맹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다. 이러한 밀약 시도들은 조선의 외교적 고립과 열강 간의 각축전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조로 밀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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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 조로 밀약 (1884년)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간섭이 심화되자, 조선 조정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외무협판 묄렌도르프 등을 중심으로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는 비밀 교섭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조선 내부의 이견과 청나라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밀약 추진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켰고, 묄렌도르프는 외교 고문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청과 일본은 조선 내 친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주로 일본 측 자료에 의존하고 있어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2.1. 배경

러시아1884년(고종 21년) 한러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일본 사이의 긴장 관계가 높아졌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조선 조정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84년, 조정 내 일부 친러시아 성향의 인사들은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는 비밀 교섭을 시도하였다.

2.2. 전개

러시아는 1884년 한러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넓혀갔다. 같은 해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자, 불안을 느낀 조선 조정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시도했다. 이에 1884년 말, 조정 내 일부 친러 성향 인사들은 외무협판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 정부에 조선 보호를 요청하는 비밀 교섭을 시작했다.

1885년,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부동항 조차를 대가로 러시아의 보호와 군사 교관 파견을 얻어내려 시도했다. 러시아는 이에 관심을 보이며 주일 공사관 서기관 슈페이에르를 한성부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 내부의 의견 차이와, 조선을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던 청나라, 특히 이홍장의 강력한 반대로 밀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청나라는 묄렌도르프의 이러한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배신으로 간주했고, 결국 그는 외무협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묄렌도르프의 시도와는 별개로, 조선 국왕이 직접 러시아 국경 지역 관리에게 밀사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명확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비밀 교섭 시도, 즉 조로 밀약설은 이후 외부로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전개 과정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일본 측 자료에 의존하고 있어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밀약설이 불거진 후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 내 친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2.3. 결과

1885년,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부동항 조차를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보호와 군사 교관단 파견을 얻어내려 시도했다. 러시아는 이에 관심을 보여 주일 공사관 서기관 슈페이에르를 한성부에 파견하기도 했으나, 조선 정부 내부의 의견 차이와 청국 당국의 반대로 인해 밀약은 결국 성립되지 못했다.

묄렌도르프의 이러한 독자적인 외교 활동은 조선을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 했던 청나라, 특히 이홍장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청나라는 이를 배신 행위로 규정했고, 이로 인해 묄렌도르프는 실각하게 되었다.

한편, 묄렌도르프의 시도와는 별개로 조선 국왕 고종이 직접 파견한 밀사가 러시아 국경 당국과 접촉했으나, 러시아 측은 조선 보호에 대해 어떠한 확언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답변에 그쳤다.

이 밀약 시도 사실이 폭로되자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일본 양국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귀국시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친러 성향의 민씨 일파의 세력과 맞서게 하였다.

3. 제2차 조로 밀약 (1886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조선 조정은 다시 한번 러시아와의 비밀 교섭을 시도했다. 1886년 8월, 조선 정부는 한성에 주재하던 러시아 대리 공사 베베르에게 비밀 서한(밀함)을 보냈다. 이 서한에는 조선이 제3국과의 분쟁에 휘말릴 경우 러시아에 군함 파견 등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 정부 내에 퍼져 있던,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이른바 "거러반청"(拒露反淸, 러시아에 의지하여 청을 반대함) 또는 "배청자주"(排淸自主, 청을 배척하고 자주를 꾀함)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한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밀고하면서 발각되었다. 청나라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청나라 군대 파견과 고종 폐위까지 거론하며 조선을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러시아 외무성은 조선으로부터 밀함을 받은 사실은 인정했지만, 고종의 군사 지원 요청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청나라에 약속했다. 이로써 국제 문제로 비화될 뻔했던 두 번째 조로 밀약 시도는 무산되었다.

3.1. 배경

청나라는 원세개를 주한 총리(駐韓總理)로 임명하여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흥선대원군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민씨 세력을 압박했다. 이러한 청나라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민씨 척신(戚臣) 세력은 다시 러시아에 접근했다. 새로 부임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군함 파견까지 간청했다. 베베르 공사가 요청의 근거로 공식 문서를 요구하자, 민비 등은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部事) 심순택(沈舜澤)의 이름으로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에는 국보(國寶)와 총리대신의 도서(圖書 :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스러운 움직임은 내부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부터 러시아와의 교섭에 반대했던 민영익은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하여 이 사실을 원세개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조러 간의 비밀 협상은 큰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밀약 추진은 문서에 명의자로 이름이 오른 심순택조차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일이었다. 러시아 정부 또한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밀약을 부인했다. 하지만 원세개는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 조선 국왕인 고종의 폐위까지 주장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청나라 내부 사정으로 인해 고종 폐위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밀약을 주도했던 조존두(趙存斗) 등을 유배(流配)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1886년 8월에는 두 번째 러시아-조선 밀약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정부가 한성에 주재하던 러시아 대리 공사 베베르에게 제3국과의 분쟁 시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군함 파견)를 요청하는 내용의 밀함(密函, 비밀 서한)이 발각되어 국제 문제로 발전한 사건이다. 당시 조선 정부 내에서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거러반청"(拒露反淸) 또는 "배청자주"(排淸自主)의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민영익이 청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밀고했다. 청나라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청나라 군대 파견과 고종 폐위 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러시아 외무성은 조선의 밀함 수령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군사 지원 요청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청나라에 약속했다. 이로써 국제 문제로 비화될 뻔했던 두 번째 밀약 사건도 종결되었다.

3.2. 전개

청나라는 원세개를 주한 총리로 임명하여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고, 대원군을 귀국시켜 민씨 세력을 압박했다. 이러한 청의 압력에 위기를 느낀 민비를 비롯한 척신 세력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해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새로 부임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접근하여 조선의 보호와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베베르가 공식적인 요청 문서를 요구하자, 이들은 총리내무부사 심순택의 이름으로 문서를 위조하고 국새와 총리대신의 도장까지 날인하여 전달했다. 이 문서는 심순택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 교섭은 민영익에 의해 원세개에게 알려지면서 큰 문제로 비화되었다. 민영익은 이전부터 러시아와의 교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사태의 진전을 우려하여 원세개에게 통고한 것이다. 원세개는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며 고종의 폐위까지 주장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청나라 본국의 사정으로 고종 폐위는 실행되지 않았고, 밀약 추진에 관여했던 조존두 등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러시아 정부 역시 해당 교섭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이듬해인 1886년 8월, 조선 정부는 다시 한번 러시아에 접근했다. 당시 조선 정부 내에서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이른바 "거러반청"(拒露反淸, 러시아에 의지하여 청을 반대함) 또는 "배청자주"(排淸自主, 청을 배척하고 자주를 꾀함)의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 정부는 한성에 주재하던 러시아 대리 공사 웨버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조선이 제3국과 분쟁에 휘말릴 경우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군함 파견)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의 개입을 우려한 민영익이 이 사실을 위안스카이에게 밀고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청나라는 즉각 군대 파견과 고종 폐위를 다시 거론하며 조선을 압박했다. 결국 러시아 외무성은 조선으로부터 밀함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요청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청나라에 약속함으로써 국제 문제로 비화될 뻔했던 두 번째 밀약 시도 역시 무산되었다.

3.3. 결과

러시아 정부는 밀약설 자체를 부인했지만, 청나라의 원세개는 이를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고종의 폐위까지 주장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의 내부 사정으로 고종의 폐위는 실현되지 않았고, 밀약 추진에 관여했던 조존두(趙存斗) 등이 유배되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러시아 외무성은 비밀 서한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군사적 보호 요청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청나라 측에 약속했다. 이로써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조로 밀약 사건은 종결되었다.

4. 대한제국 시기의 밀약 시도 (1904년)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8월 15일,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 제국의 침략 상황을 알리고 동맹 체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황제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러일전쟁 전후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이 주변 강대국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4.1. 배경

러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 제국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한제국의 고종은 1904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 제국의 침략 상황을 알리고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측에서는 고종의 요청을 황제에게 제대로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외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2. 전개

밀약과는 별도로,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8월 15일에 고종이 러시아 황제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일본 제국의 침략 사실을 알리고 동맹 체결을 촉구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측에서는 고종의 요청을 황제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외교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4.3. 결과

밀약과는 별도로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8월 15일,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제국의 침략 사실을 알리고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측에서는 고종의 이러한 요청을 황제에게 상주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조선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