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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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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1985년 코소보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세르비아인 농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직장에 깨진 병이 박힌 채 발견된 사건이다. 처음에는 알바니아인들의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후 자위행위 중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의료진의 상반된 소견과 진술 번복, 그리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격화로 인해 사건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세르비아 언론의 민족주의적 보도와 알바니아 혐오를 부추겼으며,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민족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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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
발생일1985년 5월 1일
장소그닐라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형논쟁 중 (자해 또는 폭행)
원인논쟁 중 (항문 자위 또는 토지 분쟁)
가해자논쟁 중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또는 알바니아인 공격자 2명)
결과민족 간 긴장 고조
피해
부상자1명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법 처리
기소기소되지 않음

2. 사건 발생과 초기 조사

1985년 5월 1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에 속한 그닐라네 마을에 거주하던 56세의 세르비아인 농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직장에 깨진 유리병 조각이 박힌 상태로 지역 병원에 후송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20][1][10] 마르티노비치는 처음에는 자신이 밭에서 일하던 중 두 명의 알바니아인 남성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20][1][10]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대령의 심문을 받은 후 자위행위를 시도하다가 스스로 부상을 입었다고 진술을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20][1][10] 초기 공식 조사 결과는 마르티노비치의 부상이 자해 혹은 "성적 행위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결과"라는 결론으로 발표되었다.[20][1][10][21][2][11]

2. 1. 마르티노비치의 초기 진술

1985년 5월 1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코소보 사회주의 자치주에 속한 그닐라네/지란 마을에 거주하던 56세의 세르비아인 농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는 직장에 깨진 유리병 조각이 박힌 상태로 지역 병원에 도착했다.[1][10][20] 마르티노비치는 처음에 자신이 밭에서 일하던 중 알바니아어를 사용하는 남성 두 명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10][1][20]

그러나 이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대령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마르티노비치는 자위행위를 시도하다가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고 진술을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1][10][20] 공식 조사 보고서에는 "검사는 서면 결론에서 부상자가 자신의 밭에서 나무 막대기를 땅에 꽂고 그 막대기에 맥주병을 올려 '자위행위'를 하고, 나중에는 '맥주병을 자기 항문에 넣어 즐기던' 도중 부상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다"고 기록되었다.[20][1][10] 그닐라네/지란의 지역 지도자들 또한 성명을 통해 그의 부상이 "성적 행위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결과" 또는 "스스로 한 (성적) 행위의 우발적인 결과"라고 발표했다.[21][2][11]

마르티노비치는 나중에 이러한 자백을 철회했다. 그는 3시간에 걸친 심문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당했으며, 자백의 대가로 자신의 자녀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주장했다.[20][10] 마르티노비치의 아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당한 것이라며, "친구들은 대알바니아주의자들이 복수를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다. ... 그들은 희생자가 세르비아인이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0][10]

2. 2.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조사와 번복된 진술

1985년 5월 1일, 코소보질란 마을(혹은 그닐라네)에 거주하던 56세의 세르비아인 농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는 직장에 깨진 병이 박힌 상태로 병원에 후송되었다. 마르티노비치는 처음에 자신이 농장에서 일하던 중 두 명의 알바니아인 남성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20][1][10]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대령에게 심문을 받은 후, 마르티노비치는 진술을 바꾸어 자위행위를 시도하다가 스스로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수사관들은 "검사는 서면 결론에서 부상자가 자신의 밭에서 나무 막대기를 땅에 꽂고 그 막대기에 맥주병을 올려 '자위행위'를 하고, 나중에는 '맥주병을 자기 항문에 넣어 즐기던' 도중 부상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다"고 보고했다.[20][1][10] 이후 질란(그닐라네) 마을의 촌장(자치 단체 수뇌부)은 마르티노비치의 부상이 "성적 행위에서 비롯된 우발적인 결과" 또는 "스스로 한 (성적) 행위의 우발적인 결과"라고 공식 발표했다.[21][2][11]

3. 의학적 조사와 논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는 베오그라드로 이송되어 권위 있는 군사 의학 아카데미에서 추가 조사를 받았다.[21][2] 그러나 이곳의 의료진과 이후 구성된 다른 조사 위원회의 의학적 소견이 엇갈리면서 사건의 진상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군의관학교 의료진은 마르티노비치의 부상이 자해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22][3][12] 이후 야네즈 밀친스키 박사가 이끈 위원회는 자해 가능성이 있다는 상반된 결론을 내놓았다.[22][3][12] 유고슬라비아 비밀경찰과 군 정보부는 밀친스키 위원회의 결과를 토대로 마르티노비치의 부상이 자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사건을 종결하였다.[24][5][14]

하지만 마르티노비치 본인은 이후 초기 자백이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진술을 번복했고,[20][10]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알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격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20][10]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및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으며, 마르티노비치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는 용의자를 찾으려는 노력도 이루어지지 않았다.[24][5][14]

3. 1. 군의관학교 의료진의 소견

마르티노비치는 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 베오그라드에 있는 군사 의학 아카데미로 이송되었으나, 그곳의 의료진은 그의 부상이 자해로 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이 의료진은 베오그라드 출신 의사 2명과 류블랴나, 자그레브, 스코페 출신 의사 각 1명 등 유고슬라비아 내 4개 공화국(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의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료진은 이 중 4개 공화국 출신이었다.)을 대표하는 총 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마르티노비치의 부상이 "500ml 병 또는 그 넓은 부분이 강하고 잔혹하게, 갑작스럽게 직장 안으로 삽입되거나 밀어 넣어지면서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마르티노비치 혼자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며, "최소 두 명 이상의 강제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삽입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2][3][12]

3. 2. 야네즈 밀친스키 위원회의 조사

이에 두 번째 의견이 요청되었고, 한 달 후 슬로베니아의 법의학 의사인 야네즈 밀친스키(Janez Milčinski)가 이끄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23] 밀친스키 위원회는 마르티노비치가 땅에 박은 막대기 위에 병을 놓고 앉아 자위행위를 하던 중 미끄러졌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체중으로 인해 직장 안의 병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22] 유고슬라비아 비밀경찰과 군 정보부는 이를 근거로 마르티노비치의 부상이 자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사건을 종결하였다.[24]

3. 3. 마르티노비치의 진술 철회와 의혹 제기

마르티노비치는 이후 초기 자백 내용을 뒤집었다. 그는 3시간에 걸친 신문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당했으며, 자백하는 대가로 자녀들의 일자리를 약속받았다고 주장했다.[20][10]

마르티노비치의 아들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친구들의 말을 인용하며 "대알바니아주의자들이 복수를 위해 저지른 일"이며, "희생자가 누가 되든 상관없이 세르비아인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0][10]

최종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와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1989년 세르비아코소보의 자치권을 폐지한 이후에도 마르티노비치를 공격했다고 주장된 이들을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4][5][14]

4.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격화

이 사건은 세르비아계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이전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 내에서 공공연한 표출이 금기시되었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혐오 정서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0][1][10] 오랫동안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언론은 민족주의적 발언을 억제해왔으나, 마르티노비치 사건 보도를 통해 이러한 금기가 깨지면서 1991년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이어지는 민족주의적 갈등이 심화될 것을 예고했다.[20][1][10]

세르비아의 주요 언론 매체인 폴리티카 등은 마르티노비치가 알바니아인들에게 공격당했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반알바니아 감정을 자극했다.[24][5][14] 이러한 보도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 인구 감소 문제와 맞물려, 알바니아인들이 의도적으로 세르비아인을 박해하고 땅을 빼앗으려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20][1][10]

사건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 역사와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했다. 특히 마르티노비치가 당한 방식은 오스만 제국의 잔혹한 처형 방식인 꼬챙이 형에 비유되며 민족적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알바니아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25][16] 이러한 역사적 비유는 시, 그림 등 문화 예술 작품을 통해 재생산되었고, 마르티노비치는 알바니아인(혹은 무슬림, 터키인)의 악행에 맞서는 세르비아 민족의 고통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졌다.[17][7][2][11]

세르비아 작가 협회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와 문화계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적 해석에 동조하며 마르티노비치 사건을 공론화하는 데 앞장섰다.[12][3] 이들은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의 상황을 파시즘적 박해에 비유하고, 사건 진상 규명과 마르티노비치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며 민족주의 여론을 결집시켰다.[12][3]

이처럼 고조된 민족주의 감정은 코소보 자치권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정치적 파장을 낳았다. 세르비아 내에서는 코소보 자치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강경 여론이 힘을 얻었으며,[8][18]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사건을 무슬림 전체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9][19]

한편,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등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급격한 부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마르티노비치 사건이 세르비아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민족주의 선동의 구실로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인식했다.[3][12]

4. 1. 언론의 선정적 보도와 민족주의 선동

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 언론에서는 민족주의와 반알바니아주의 정서가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20][1][10] 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에서 중요한 변화였다. 오랫동안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공공연한 민족주의 표출을 금기시했고 언론 역시 이를 체계적으로 축소하거나 배제해왔기 때문이다. 마르티노비치 사건 보도를 통해 민족주의적 발언 금기가 깨지면서, 이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정서의 부상을 예고하는 사건이 되었다.[20][1][10]

세르비아의 유력 일간지 폴리티카는 마르티노비치를 공격한 이들이 그가 팔기를 거부한 땅을 사려 했던 알바니아인 가족 구성원이라는 주장을 보도했다.[24][5][14] 이 주장은 세르비아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인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지역을 떠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이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을 몰아내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의도적인 박해의 결과라는 인식과 맞물려 큰 호응을 얻었다.[20][1][10]

사건 보도 과정에서 19세기까지 세르비아를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과의 비교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마르티노비치가 당한 상해는 오스만 제국이 고문과 처형 수단으로 사용했던 꼬챙이 형(말뚝형, 신체관통형)에 비유되었다.[25][16] 이러한 연결은 사건을 다룬 시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는데, '오스만'이라는 주제를 직접 언급하며 병이 관통된 상황을 오스만 시대의 꼬챙이 형벌과 동일시했다.[25][6][15] 예를 들어, 한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부서진 병으로

> 말뚝 위에

> 마치

> 양을 통해

> 하지만 살아있는,

> 그들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를 통과했다

> 마치 그들의 첫 번째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들의 미래 들판을 밟은 것처럼...

> 아편과 고통에서

>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정신을 차리자

> 마치 먼 과거에서

> 터키 시대

> 그는 말뚝 위에서 깨어났다.[6]

스티에판 메슈트로비치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세르비아의 전설적,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 전통, 민요 등 모든 것이 '막대 꼬챙이 형'의 우화를 포함하고 있다. 이 5세기에 걸친 현실적이고, 동시에 전설적인 터키인의 꼬챙이 형 처형 행위는 민족적 전통에서 잔혹한 요소의 핵심이며, 터키인의 지배의 공포를 보여주는 전설의 메타포로서, '맥주병 꼬챙이 형'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인 일반의 의식 속에 있는 알바니아인을 '터키인'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6]

이러한 비교는 꼬챙이 형이 오스만 제국이 가한 가장 두려운 처벌 중 하나이자, 세르비아 문화에서 오스만 제국의 억압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어 왔기에 더욱 강력한 파급력을 가졌다.[16]

또한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이나 기독교도가 역사적으로 겪어온 고난과 대비되었으며, 마르티노비치는 "알바니아인(≒무슬림, 터키인)의 해악에 견디는 세르비아인"을 상징하는 존재로 승화되었다.[17][7] 작가 브라니슬라프 크르네비치는 마르티노비치의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한 야세노바츠"라고 표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된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에 빗대었다. 화가 미차 포포비치는 호세 데 리베라의 그림 ''성 필립의 순교''를 모티브로, 두개골 모자를 쓴 알바니아인들이 마르티노비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다는 거대한 그림을 제작했다. 그림 속 알바니아인 중 한 명은 유리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1][2]

세르비아 지식인들이 서명한 청원서는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코소보에 사는 모든 세르비아인의 것이 되었다"고 단언했다. 3년 후, 세르비아 여성 단체는 코소보 자치권 정지를 요구하며 세르비아 국민의회 앞에서 데모 행진을 했을 때, "우리 형제가 날카로운 꼬챙이에 꿰뚫리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18][8]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 작가 협회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으며, 협회의 1985년 6월 16일 회합에서 이 건으로 화제가 쏠렸다. 문학 평론가 조란 글루슈체비치는 코소보의 세르비아인이 처한 상황을 "제2차 세계 대전기에 겪었던 가장 끔찍한 파시즘 경험"과 비교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에밀 졸라 등 작가가 그 사건에서 한 역할을 되돌아본 후, 글루슈체비치는 협회에 마르티노비치를 옹호하기 위한 행동을 촉구했다. 이 요구는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으며, 세르비아 국민 의회에 마르티노비치 사건 조사를 위한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청원을 채택했다.[12][3] 세르비아 작가 도브리차 초시치는 코소보 세르비아인에 대한 "열렬한 협력"을 구축하고, 마르티노비치가 변호사를 고용하고 그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한 당국 관계자를 고소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마르티노비치를 위해 세르비아 대통령 이반 스탐볼리치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방 장관에게 편지를 썼다.[12][3]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일부 세르비아인 사이에서 무슬림이 남색을 좋아한다는 견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크로아티아 크라이나의 세르비아인 정신과 의사 요반 라슈코비치는 "무슬림들은 정신적 발달 단계에서 항문기에 고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전반적인 공격성과 정확성 및 청결함에 대한 집착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다. 사건은 많은 세르비아인 사이에서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알바니아인이 세르비아인을 박해하고 알바니아인이 지배하는 코소보 주 정부는 이를 묵인한다"는 전형적인 예로 여겨졌다.[19][9]

한편, 코소보 알바니아인들 중 다수는 (사건 초기의 조사 결과와 마찬가지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그가 스스로 일으킨 것이지만, 알바니아인의 탓으로 돌려 그 사실을 속이려 하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반 알바니아인 감정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사건 자체는 증거가 불분명하지만,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했다.[10][1]

이 외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세르비아에서 민족주의적 수사가 터져 나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였다. 서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견해는 모두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활에 대한 경계였으며,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단순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세르비아에 유리한 체제로 바꾸도록 몰아붙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12][3]

4. 2. 정치권의 반응과 코소보 자치권 문제

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계 언론에서는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혐오 정서가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에서 중요한 변화였는데, 오랫동안 공공연한 민족주의 표출을 금기시하고 언론 역시 이를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마르티노비치 사건 보도를 통해 이러한 금기가 깨지면서, 1991년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20][1][10]

세르비아의 유력 일간지 폴리티카는 마르티노비치를 공격한 이들이 그가 팔기를 거부한 땅을 사려 했던 현지 알바니아인 가족 구성원이라는 주장을 보도했다.[24][5][14] 이 주장은 세르비아 정치권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계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있었는데, 이를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을 몰아내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의도적인 박해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었다.[20][1][10]

사건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세르비아 본토는 1833년까지, 코소보는 1912년까지)와 비교되기도 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시대의 고문 및 처형 방식이었던 말뚝형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25] 이러한 연결고리는 사건을 다룬 시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데, '오스만'이라는 주제를 직접 언급하며 병이 관통된 것을 오스만 시대의 말뚝형에 비유했다.[6][15]

> 부서진 병으로


> 말뚝 위에


> 마치


> 양을 통해


> 하지만 살아있는,


> 그들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를 통과했다


> 마치 그들의 첫 번째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들의 미래 들판을 밟은 것처럼...


> 아편과 고통에서


>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정신을 차리자


> 마치 먼 과거에서


> 터키 시대


> 그는 말뚝 위에서 깨어났다.[6]

이러한 비교는 오스만 제국의 가장 잔혹한 형벌 중 하나로 알려진 말뚝형의 상징성과 세르비아 문화 속에서 오스만 제국의 억압을 나타내는 은유로서의 역할 때문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16] 스티에판 메슈트로비치는 "세르비아의 전설적,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 전통, 민요 등 모든 것이 '막대 말뚝형'의 우화를 포함하고 있다. 이 5세기에 걸친 현실적이고, 동시에 전설적인 터키인의 말뚝형 처형 행위는 민족적 전통에서 잔혹한 요소의 핵심이며, 터키인의 지배의 공포를 보여주는 전설의 메타포로서, '맥주병 말뚝형'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인 일반의 의식 속에 있는 알바니아인을 '터키인'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했다.[16]

나아가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과 기독교인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다른 박해 사례들과 비교되면서, 마르티노비치는 "세르비아인의 고통과 알바니아인(≒무슬림, 터키인)의 악의 전형"으로 상징화되었다.[7][17] 작가 브라니슬라프 크르네비치는 마르티노비치의 경험을 "한 사람을 위한 야세노바츠"라고 표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된 사건에 빗대었다. 화가 미차 포포비치는 호세 데 리베라의 그림 '성 필립보의 순교'를 모티브로, 알바니아 전통 모자를 쓴 이들이 마르티노비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거대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한 명은 손에 유리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2][11]

세르비아 지식인들이 서명한 청원서에는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코소보 전체 세르비아 민족의 사건이 되었다"는 주장이 담겼다.[7] 3년 뒤, 세르비아 여성 단체들은 코소보의 자치권 폐지를 요구하며 세르비아 국민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 형제들이 날카로운 말뚝에 꿰뚫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외쳤다.[8][18]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 작가 협회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1985년 6월 16일 열린 총회에서 문학 평론가 조란 글루슈체비치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 소수민족의 상황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가장 끔찍한 파시즘 경험"에 비유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밀 졸라 같은 작가들의 역할을 언급하며 협회가 마르티노비치를 옹호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그의 제안은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어 협회는 세르비아 국민 의회에 사건 조사를 위한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채택했다.[3][12] 작가 도브리차 초시치는 코소보의 세르비아인 그룹과 협력하며 마르티노비치가 변호사를 선임하고, 자신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하는 관리들을 고소하도록 도왔다. 또한 마르티노비치를 대신하여 세르비아 대통령 이반 스탐볼리치와 연방 국방부에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3][12]

일부 세르비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그, 지식인, 정치인들은 이 사건을 무슬림소도미 성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군사 국경 지역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활동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요반 라슈코비치는 "무슬림은 정신사회적 발달의 항문기에 고착되어 있으며, 따라서 일반적인 공격성과 정확성 및 청결에 대한 집착을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이 사건을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을 박해하고 알바니아인이 지배하는 코소보 자치 정부가 이를 묵인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겼다.[9][19]

반면, 다수의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마르티노비치가 초기 자백처럼 실수로 자해한 뒤 이를 은폐하기 위해 알바니아인들을 비난했으며,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이를 이용하여 반알바니아 감정을 선동했다고 보았다. 일부는 증거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사건이 세르비아-알바니아 관계를 상징하는 방식으로 악용되는 것에 반대했다.[1][10]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공화국, 특히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에서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해 경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마르티노비치 사건이 세르비아가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을 개정하여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두 자치주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3][12]

결과적으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한 입건을 보류했으며, 1989년 코소보의 자치권이 정지된 이후에도 소위 '가해자'를 특정하려는 실질적인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4] 이 사건은 세르비아 내 민족주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코소보 자치권 문제에 대한 강경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3. 문화 예술계의 민족주의적 표현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 문화 예술계에서 민족주의적 정서를 표현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의 고통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사건은 오스만 제국이 고문과 처형 수단으로 사용했던 말뚝형과 자주 비교되었는데,[25][6] 이는 세르비아 민족에게 깊이 각인된 오스만 제국의 억압과 공포를 상징하는 말뚝형의 전설적인 이미지와 결합하여 더욱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다.[16] 이러한 역사적 비유는 사건을 다룬 시에서도 명시적으로 나타났다.

>

> 깨진 병으로

> 불 위에서

> 꿰뚫린

> 엉덩이

> 그러나 살아남은

>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꿰뚫린

> 그들이 짓밟은, 그들의 미래의 밭을 얻기 위한, 첫 번째이자 큰 한 걸음

> 아편이 끊기면 고통

>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온다

> 아득한 과거로부터

> 터키 시대부터

> 화형대에서 부활했다[15]

>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이나 기독교도가 역사적으로 겪어온 고난과 대비되면서, 마르티노비치는 "알바니아인(≒무슬림, 터키인)의 해악에 견디는 세르비아인"을 상징하는 존재로 격상되었다.[17] 작가 브라니슬라프 크르네비치는 마르티노비치의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한 야세노바츠"라고 표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된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의 비극에 빗대었다.[2][11] 화가 미차 포포비치는 호세 데 리베라의 ''성 필립의 순교''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그림을 통해 알바니아 전통 모자를 쓴 인물들이 마르티노비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다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림 속 한 알바니아인은 유리병을 들고 있어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드러냈다.[2][11]

세르비아 지식인 사회 역시 이 사건을 민족적 문제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여러 지식인이 서명한 청원서에서는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코소보에 사는 모든 세르비아인의 것이 되었다"고 단언했다.[18] 3년 후, 세르비아 여성 단체는 세르비아 국민 의회 앞에서 코소보 자치권 폐지를 요구하며 "우리 형제가 날카로운 꼬챙이에 꿰뚫리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외쳤다.[18]

세르비아 작가 협회는 1985년 6월 16일 총회에서 이 사건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문학 평론가 조란 글루슈체비치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의 상황을 "제2차 세계 대전기에 겪었던 가장 끔찍한 파시즘 경험"에 비유하고,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와 같은 작가들의 역할을 상기시키며 협회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의 제안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협회는 세르비아 국민 의회에 사건 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채택했다.[12] 작가 도브리차 초시치는 마르티노비치가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하는 관리들을 고소할 수 있도록 변호사 선임을 돕고, 마르티노비치를 대신하여 세르비아 대통령 이반 스탐볼리치와 연방 국방부에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12]

5.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미친 영향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 갈등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공공연한 표출이 금기시되었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혐오 정서가 세르비아 언론을 중심으로 분출되었으며[20][1], 이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간의 갈등을 넘어 연방 전체의 민족 관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세르비아 내에서는 이 사건이 알바니아인에 의한 박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었고[1][10],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등 다른 공화국들은 이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상을 연방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깊이 우려했다.[3][12]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 간 불신과 적대감을 심화시키고 각 공화국 간의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켜, 연방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1991년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20][1]

5. 1.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우려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 특히 서부의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에서 민족주의적 수사가 터져 나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였다.[12] 이들 공화국의 지배적인 여론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활을 경계하는 것이었다.[3][12]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마르티노비치 사건이 세르비아가 코소보보이보디나 두 자치주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체를 세르비아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을 변경하려는 구실로 이용되고 있다고 보았다.[3][12] 즉, 이 사건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12]

5. 2. 코소보 분쟁으로의 연결

본 사건은 세르비아계 언론에서 민족주의와 알바니아 혐오 정서가 분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에서 중요한 변화였는데, 오랫동안 공공연한 민족주의 표출은 금기시되어 왔고 언론 역시 이를 체계적으로 축소 보도해왔기 때문이다. 마르티노비치 사건 보도를 통해 이러한 금기가 깨지면서, 1991년 유고슬라비아 해체로 이어지는 민족주의 정서의 성장을 예고했다.[20][1]

세르비아의 유력 신문인 폴리티카는 마르티노비치를 공격한 이들이 그가 팔기를 거부한 땅을 사려 했던 현지 알바니아인 가족 구성원이라는 주장을 보도했다.[24][5] 이 주장은 세르비아 정치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인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이주하는 현상이 있었는데, 이는 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을 몰아내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의도적인 박해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다.[20][1]

사건 보도 과정에서 1833년(코소보의 경우 1912년)까지 세르비아를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과의 비교가 자주 등장했다. 특히 마르티노비치가 당한 상해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고문 및 처형 수단이었던 신체관통형(말뚝형, 꼬챙이형)과 연관 지어졌다.[25] 이러한 연결은 사건을 다룬 시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오스만'이라는 주제를 직접 언급하며 병이 관통된 것을 오스만 시대의 꼬챙이형에 비유했다.[25] 예를 들어 한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부서진 병으로


> 말뚝 위에


> 마치


> 양을 통해


> 하지만 살아있는,


> 그들은 조르제 마르티노비치를 통과했다


> 마치 그들의 첫 번째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들의 미래 들판을 밟은 것처럼...


> 아편과 고통에서


> 조르제 마르티노비치가 정신을 차리자


> 마치 먼 과거에서


> 터키 시대


> 그는 말뚝 위에서 깨어났다.[6]

이러한 비교는 오스만 제국이 가했던 가장 잔혹한 처벌 중 하나로 알려진 꼬챙이형의 상징성과 오스만 제국의 억압에 대한 은유로서 세르비아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스티에판 메슈트로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세르비아의 전설적,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 전통, 민요 등 모든 것이 '막대 꼬챙이 형'의 우화를 포함하고 있다. 이 5세기에 걸친 현실적이고, 동시에 전설적인 터키인의 꼬챙이 형 처형 행위는 민족적 전통에서 잔혹한 요소의 핵심이며, 터키인의 지배의 공포를 보여주는 전설의 메타포로서, '맥주병 꼬챙이 형'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인 일반의 의식 속에 있는 알바니아인을 '터키인'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6]

나아가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과 기독교인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다른 박해 사례들과 비교되면서, 마르티노비치는 "알바니아인(≒무슬림, 터키인)의 해악에 견디는 세르비아인"을 상징하는 존재로 승화되었다.[7][17] 작가 브라니슬라프 크르네비치(Branislav Crnčević)는 마르티노비치의 경험을 "한 사람을 위한 야세노바츠"라고 표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된 사건에 빗대었다. 화가 미차 포포비치(Mića Popović)는 호세 데 리베라의 ''성 필립의 순교''를 모티브로 하여, 알바니아 전통 모자를 쓴 이들이 마르티노비치를 나무 십자가에 매달고 한 명은 유리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거대한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2][11]

세르비아 지식인들이 서명한 한 청원서는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코소보에 사는 모든 세르비아인의 것이 되었다"고 단언했다. 3년 후, 세르비아 여성 단체는 코소보 자치권 정지를 요구하며 세르비아 국민 의회에서 데모 행진을 했을 때, "우리 형제가 날카로운 꼬챙이에 꿰뚫리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8][18]

세르비아 작가 협회 역시 마르티노비치 사건을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협회의 1985년 회합(6월 16일 개최)에서 이 건으로 화제가 쏠렸다. 문학 평론가 조란 글루슈체비치(Zoran Gluščević)는 코소보의 세르비아인이 처한 상황을 "제2차 세계 대전기에 겪었던 가장 끔찍한 파시즘 경험"과 비교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에밀 졸라 등 작가가 그 사건에서 한 역할을 되돌아본 후, 글루슈체비치는 협회에 마르티노비치를 옹호하기 위한 행동을 촉구했다. 이 요구는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으며, 세르비아 국민 의회에 마르티노비치 사건 조사를 위한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청원을 채택했다.[3][12] 세르비아 작가 도브리차 초시치는 코소보 세르비아인에 대한 "열렬한 협력"을 설립하고, 마르티노비치가 변호사를 고용하고 그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한 당국 관계자를 고소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마르티노비치를 위해 세르비아 대통령 이반 스탐볼리치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방 장관에게 편지를 썼다.[3][12]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일부 세르비아인 사이에서 무슬림이 남색을 좋아한다는 견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크로아티아 크라이나의 세르비아인 정신과 의사 요반 라슈코비치는 "무슬림들은 정신적 발달 단계에서 항문기에 고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전반적인 공격성과 정확성 및 청결함에 대한 집착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다. 사건은 많은 세르비아인 사이에서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알바니아인이 세르비아인을 박해하고 알바니아인이 지배하는 코소보 주 정부는 이를 묵인한다"는 전형적인 예로 여겨졌다.[9][19]

한편, 코소보 알바니아인들 중 다수는 (사건 초기의 조사 결과와 마찬가지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그가 스스로 일으킨 것이지만, 알바니아인의 탓으로 돌려 그 사실을 속이려 하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반 알바니아인 감정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사건 자체는 증거가 불충분하지만,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했다.[1][10]

이 외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세르비아에서 민족주의적 수사가 터져 나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였다. 서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의 견해는 모두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활에 대한 경계였으며,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단순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세르비아에 유리한 체제로 바꾸도록 몰아붙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3][12] 이처럼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간의 민족 갈등을 극적으로 심화시켰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와 1990년대 코소보 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6. 한국의 관점에서의 분석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한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 민족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처럼 다민족 국가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얼마나 폭발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들이 때로는 갈등을 중재하기보다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20]

사건 발생 이후, 세르비아계 언론에서는 이전까지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해 금기시되었던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반알바니아주의 정서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유력 신문인 폴리티카는 마르티노비치를 공격한 이들이 그가 땅 팔기를 거부했던 알바니아인 가족 구성원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보도하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24][5] 이러한 보도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들이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축출되고 있다는 기존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마르티노비치 개인의 사건은 순식간에 세르비아 민족 전체의 문제로 비화하였다.[20][1]

특히 이 사건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연결되면서 더욱 감정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마르티노비치가 당한 방식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잔혹한 처형 방식인 말뚝형(신체관통형)에 비유되었고,[25] 이는 세르비아인들의 피해 의식을 극도로 자극했다. 사건을 다룬 시에서는 '오스만'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마르티노비치의 고통을 과거 민족적 수난의 역사와 동일시했다.[6] 이러한 역사적 비유는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민족 간의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세르비아의 일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적 해석에 동조하거나 이를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작가 브라니슬라프 크르네비치는 이 사건을 "한 사람을 위한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라고 칭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인 학살의 비극과 동일선상에 놓았고, 화가 미차 포포비치는 알바니아인들이 마르티노비치를 십자가에 매다는 듯한 그림을 그려 사건을 종교적 순교의 이미지로 포장했다.[2] 세르비아 작가 협회는 1985년 총회에서 이 사건을 주요 의제로 다루며, 세르비아 의회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채택하는 등 조직적으로 대응했다.[3] 문학 평론가 조란 글루슈체비치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들의 상황을 "파시즘의 가장 끔찍한 경험"에 비유하며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처럼 작가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3] 민족주의 활동가였던 정신과 의사 요반 라슈코비치는 무슬림에 대한 비하 발언을 통해 알바니아 혐오를 정당화하려 시도하기도 했다.[9]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마르티노비치 사건을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결집시키는 강력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세르비아 지식인들이 서명한 청원서는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코소보 전체 세르비아 민족의 사건이 되었다"고 주장했으며, 3년 후 세르비아 여성 단체는 코소보 자치권 폐지를 요구하며 "우리 형제들이 날카롭게 다듬어진 말뚝에 찔리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8]

반면,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은 마르티노비치가 자해 행위를 숨기기 위해 알바니아인들에게 책임을 돌렸다고 주장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 또한,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등 다른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들에서는 이 사건이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연방 내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되고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높았다.[3]

조르제 마르티노비치 사건은 민족 갈등 상황에서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선정적인 언론 보도,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가진 세력의 선동이 결합될 때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개인의 불행이 민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 해석되고, 역사적 트라우마와 결부되어 집단적인 증오로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 갈등이나 역사적 문제를 다룰 때 감정적인 선동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경계하고, 객관적인 사실 확인과 이성적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긴다. 언론의 공정한 보도 책임과 정치권의 책임 있는 자세, 그리고 시민 사회의 비판적 감시 능력이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참조

[1] 서적 Kosovo: How Myths and Truths Started a War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서적 Thinking About Yugoslavia: Scholarly Debates About the Yugoslav Breakup and the Wars in Bosnia and Kosovo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Saviours of the Nation': Serbia's Intellectual Opposition and the Revival of Nationalism https://archive.org/[...] C. Hurst & Co.
[4] 웹사이트 Zgodovina inštituta http://www.ism-mf.si[...] Institute of Forensic Medicin e 2023-09-03
[5] 서적 Slobodan Milosevic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https://archive.org/[...] Duke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Kosovo 1389, Kosovo 1989 Writers' Association of Serbia
[7] 서적 A Paper House: The Ending of Yugoslavia https://archive.org/[...] Pantheon Books
[8] 서적 Ethnic Cleansing in the Balkans: Nationalism and the Destruction of Tradition https://archive.org/[...] Routledge
[9] 서적 Civil Resistance in Kosovo https://books.google[...] Pluto Press 2023-03-23
[10] 서적 Kosovo: How Myths and Truths started a Wa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1] 서적 Thinking about Yugoslavia: Scholarly Debates about the Yugoslav Breakup and the Wars in Bosnia and Kosovo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서적 'Saviours of the Nation?: Serbia''s Intellectual Opposition and the Revival of Nationalism' C. Hurst & Co
[13] URL http://www.ism-mf.si[...]
[14] 서적 Slobodan Milosevic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Duke University Press
[15] 서적 Islam and the Myth of Confrontation: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Middle East I.B. Tauris
[16] 서적 Genocide After Emotion: The Postemotional Balkan War Routledge
[17] 서적 A paper house: The ending of Yugoslavia Pantheon Books
[18] 서적 Ethnic Cleansing in the Balkans: Nationalism and the Destruction of Tradition Routledge
[19] 서적 Civil Resistance in Kosovo Pluto Press
[20] 서적 Kosovo: How Myths and Truths started a Wa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1] 서적 Thinking about Yugoslavia: Scholarly Debates about the Yugoslav Breakup and the Wars in Bosnia and Kosovo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 서적 'Saviours of the Nation?: Serbia''s Intellectual Opposition and the Revival of Nationalism' C. Hurst & Co
[23] 웹인용 Zgodovina - Inštitut za sodno medicino http://www.ism-mf.si[...] 2019-02-20
[24] 서적 Slobodan Milosevic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Duke University Press
[25] 간행물 Kosovo 1389, Kosovo 1989 Writers' Association of Ser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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