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젤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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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젤 참사는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경기장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발생한 대규모 압사 사고이다. 리버풀 FC와 유벤투스 FC의 경기에서 리버풀 팬들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유벤투스 팬들을 포함한 39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열악한 경기장 시설, 부실한 안전 관리, 암표 매매 등으로 인해 참사가 발생했으며, 영국 축구 클럽의 유럽 대회 출전 금지, 경기장 안전 규정 강화 등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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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브래드퍼드 밸리 퍼레이드에서 발생한 브래드퍼드 축구장 화재는 56명의 사망자와 2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낸 대형 참사로, 부실한 안전 관리와 미흡한 소방 시설로 인해 피해가 커져 영국 스포츠 경기장의 안전 기준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헤이젤 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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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헤이젤 스타디움 참사 |
다른 이름 | 헤이젤의 비극 (일본어) 에젤의 비극 (한국어) Strage dell'Heysel (이탈리아어) Katastrophe von Heysel (독일어) Drame du Heysel (프랑스어) Heizeldrama (네덜란드어) |
날짜 | 1985년 5월 29일 |
장소 | 헤이젤 스타디움, 브뤼셀, 벨기에 |
원인 | 잉글랜드 훌리건 노후한 경기장 부주의한 운영 미흡한 경찰력 |
참여자 | 리버풀과 유벤투스 FC 서포터 |
결과 |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 대회 5년 출전 금지 리버풀의 유럽 대회 6년 출전 금지 |
사망자 | 39명 |
부상자 | 600명 |
체포 | 34명 |
유죄 판결 | 브뤼셀 경찰 대위 요한 마히외 및 과실치사 혐의로 리버풀 팬 14명 유죄 판결 |
미디어 | |
촬영 | 유럽 방송 연맹 |
법적 책임 | |
유죄 판결 | 요한 마히외 (경찰 대위) 리버풀 팬 14명 (과실치사) |
2. 배경
1985년 5월, 리버풀은 전년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로마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유럽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리버풀은 또다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와 맞붙게 되었는데, 유벤투스는 전 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유벤투스는 1982년 월드컵 우승 주역인 이탈리아 선수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고, 플레이메이커 미셸 플라티니는 2년 연속 유럽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자랑했다. 양 팀은 UEFA 클럽 랭킹에서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며,[184] 스포츠 언론에서는 유럽 최고의 두 팀으로 평가했다.[185] 두 팀은 1984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이미 맞붙은 적이 있었는데, 유벤투스가 2-0으로 승리했다.
결승전 장소는 벨기에의 국립 경기장인 헤이젤 경기장이었다. 그러나 결승전 당시 헤이젤 경기장은 유지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55년이나 된 낡은 경기장은 외벽이 시멘트 블록으로 대충 쌓여 있었고,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벽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다.[186] 경기장 일부는 개찰구가 하나밖에 없었고, 표 검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다.[187]
리버풀 선수들과 팬들은 아스널 팬들이 "쓰레기장" 같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경기장 상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캄 노우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같은 좋은 경기장을 두고 굳이 헤이젤을 선택한 유럽 축구 연맹(UEFA)에 불만을 제기했다.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유벤투스 회장과 피터 로빈슨 리버풀 구단주는 UEFA에 경기장 변경을 요청했지만, UEFA는 이를 묵살했다.[188][189] 이후 조사에서 UEFA가 경기장 사전 조사에 30분밖에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90]
경기장에는 58,000명에서 60,000명에 달하는 관중이 들어찼고, 양 팀 팬들은 각각 25,000명 이상이었다. 양쪽 골대 뒤편은 입석 구역이었고, 유벤투스 팬들은 O, N, M 구역, 리버풀 팬들은 X, Y, Z 구역으로 나뉘었다. 문제는 Z 구역이었는데, 이곳은 원래 벨기에 현지 중립 팬들을 위한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탈리아 교포들과 유벤투스 팬들이 표를 구매했다.[192][187] 이는 표 되팔이를 통해 양 팀 팬들이 섞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다.[189] 당시 벨기에에는 많은 이탈리아 교포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이 Z 구역 표를 많이 구매했다. 또한, 여행사들이 표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유벤투스 팬들에게 판매하면서 Z 구역은 사실상 유벤투스 팬들의 차지가 되었다. 게다가 리버풀 팬들은 1984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로마 극성팬들에게 공격받은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유벤투스 팬들이 바로 옆 구역에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187]
2. 1. 1980년대 잉글랜드 사회와 훌리건리즘
1960년대부터 잉글랜드 서포터에 의한 폭동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다.[86][92] 폭력 행위를 하는 서포터의 대부분은 젊은 실업자들이었다.[94] 이들은 텔레비전 방송의 영향으로 응원하는 클럽이나 선수들을 숭배했고, 일상의 배출구로 경기장에서 폭력 행위를 했다.[89] 또한,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폭력적인 서포터의 모습은 다른 서포터들에게도 영향을 줬다.[97][95]경기장에서는 많은 수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폭동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한 특별 팀이 편성되었다.[92] 원정 서포터는 교통 기관에서 경기장까지 경찰의 호송을 받았고, 경기장 내에서는 다른 관중과 격리되었다.[92][96]
서포터에 의한 폭동은 유럽 각국의 경기장 주변에서도 벌어졌다. 1974년 UEFA컵 결승 2차전 (페예노르트 대 토트넘 홋스퍼)[98][99], 1975년 UEFA 챔피언스컵 결승 (바이에른 뮌헨 대 리즈 유나이티드)[98][99], 1980년 UEFA 유로 1980 조별 리그 (잉글랜드 대 벨기에)[98] 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86]
1980년대 잉글랜드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실업률이 높았다. 특히 리버풀과 같은 공업 도시의 청년 실업률은 30%에 달해 사회 전체에 폐색감이 만연했고, 이는 폭동의 빈발로 이어졌다.[94][105]
다음은 1970년대부터 헤이젤 참사 직전까지 잉글랜드 서포터들이 일으킨 주요 사건 사고들이다.
날짜 | 대전 카드 | 대회 | 개최지 | 비고 | 출처 |
---|---|---|---|---|---|
1974년 5월 | 토트넘 대 페예노르트 | UEFA컵 결승 | 로테르담 | 부상자 200명, 체포자 70명 | [100] |
1975년 5월 | 리즈 대 바이에른 | UEFA 챔피언스컵 결승 | 파리 | 부상자 40명, 체포자 27명 | [100] |
1976년 9월 | 사우샘프턴 대 마르세유 | UEFA 컵 위너스컵 1회전 | 마르세유 | 부상자 200명 | [100] |
1977년 9월 | 맨체스터 U 대 생테티엔 | UEFA 컵 위너스컵 1회전 | 생테티엔 | 맨체스터 U에 벌금 7000GBP, 중립지에서 홈 경기 개최 | [100] |
1980년 6월 | 잉글랜드 대 벨기에 | UEFA 유로 1980 | 토리노 | 벌금 8000GBP | [100] |
1980년 9월 | 웨스트햄 대 카스티야 | UEFA 컵 위너스컵 1회전 | 마드리드 | 웨스트햄에 벌금, 홈 경기 무관중 개최 | [100] |
1981년 5월 | 잉글랜드 대 스위스 | 월드컵 예선 | 바젤 | 부상자 16명, 체포자 59명 | [100] |
1981년 9월 | 잉글랜드 대 노르웨이 | 월드컵 예선 | 오슬로 | 체포자 20명 | [100] |
1982년 9월 | 잉글랜드 대 덴마크 | 유로 예선 | 코펜하겐 | 체포자 41명 | [100] |
1983년 11월 | 토트넘 대 페예노르트 | UEFA컵 2회전 | 로테르담 | 부상자 30명, 체포자 40명, 벌금 8000GBP | [100] |
1983년 11월 | 잉글랜드 대 룩셈부르크 | 유로 예선 | 룩셈부르크 | 부상자 2명, 체포자 18명, 벌금 10000GBP | [100] |
1984년 5월 | 토트넘 대 안데를레흐트 | UEFA컵 결승 | 브뤼셀 | 토트넘 측 사망자 1명 | [100] |
1985년 헤이젤 참사 직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FA컵 8강전에서 밀월 서포터에 의한 대규모 폭동(1985 Kenilworth Road riot|케닐워스 로드 폭동영어)이 발생했고, 버밍엄에서는 15세 소년이 사망하고 57명이 중경상을 입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첼시, 토트넘 홋스퍼, 밀월 등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클럽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즈 유나이티드 등의 서포터들이 위험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리버풀 서포터 "콥"은 열광적인 응원으로 유명했지만, 상대 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훌리건리즘'의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1984년 UEFA 챔피언스컵 결승전 (AS 로마 대 리버풀)[109][111]과 1985년 3월 FK 오스트리아 빈 경기 등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2. 2. 헤이젤 경기장의 열악한 환경

헤이젤 경기장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벨기에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었지만, 1930년 건설 이후 55년이 지나 노후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110]
경기장 운영 측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유벤투스 서포터에게는 M, N, O 구역을, 리버풀 서포터에게는 X, Y 구역의 좌석을 배정했다. X, Y 구역에 인접한 Z 구역은 일반 관람객용 좌석으로 배정되었지만, 암표상이 티켓 없이 현장을 방문한 일반 팬들에게 Z 구역 좌석을 판매했다.[110] Z 구역의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벤투스 서포터였기 때문에, 양쪽 서포터가 X, Y 구역과 Z 구역을 가로막는 펜스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110]
1985년 유러피언컵 결승전 당시, 벨기에의 국립 경기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이젤 경기장은 유지보수에 소홀하여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경기장은 개장한 지 55년이 지나 시설의 일부는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경기장 외벽은 시멘트 블록으로 대충 쌓여 있었고, 표를 구매하지 않은 지지자들은 발로 벽을 차며 잠입을 시도했다.[186] 경기장 일부 구역에는 개찰구가 1개밖에 없었고, 일부 지지자들은 표 단속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187]
리버풀 지지자들과 선수들은 아스널 지지자들이 몇 년 전에 이 곳에서 경기를 치르고 "쓰레기장" 같다는 증언과 마찬가지로 헤이젤 경기장의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이들은 바르셀로나의 캄 노우와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열악한 헤이젤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기로 한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유벤투스 회장과 피터 로빈슨 리버풀 구단주는 헤이젤 경기장이 유럽의 양대 산맥이 맞대결을 펼치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열만한 자격이 있는 상태가 아님을 짚으면서, 유럽 축구 연맹(UEFA)에 경기장 변경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럽 축구 연맹은 이들의 의견을 묵살했다.[188][189] 이후 수사에 따르면 유럽 축구 연맹이 결승전 상태를 사전 조사하는데 30분밖에 들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190]
경기장에는 58,000명에서 60,000명에 육박하는 관중들이 들어섰고, 양측 지지자들이 각각 25,000명씩 집결했다. 경기장 양 끝 골대 뒤쪽은 입석으로만 구성된 지역으로 각각 3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유벤투스 측 관중석은 O, N, M 구역이었고, 리버풀 측 관중석은 X, Y, Z 구역이었다. 그러나 Z 구역의 관중석은 나머지 구역과 한데 묶여 벨기에 현지인 관중들에게 표가 할당되었다. 중립 관중표를 많이 할당한 점은 유벤투스와 리버풀 양측의 반발을 야기했는데,[191] 이는 양측 구단의 지지자들이 대행업체나 경기장 밖 표 되팔이로 지지자들이 서로 뒤엉켜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89]
당시 벨기에는 이탈리아 교민들이 많이 이주해 있었고, 다수의 브뤼셀, 리에주, 그리고 샤를루아에 정착한 이탈리아 교포들이 Z 구역 표를 샀다.[192][187] 또한, 매표 대행업체들이 표를 다량 사들여 여행사에 팔았고, 이는 대부분 유벤투스 지지자의 손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유벤투스 지지자들은 본래 중립 지지자들이 차지해야 할 Z 구역도 차지하면서 리버풀 지지자들보다 더 많은 구역을 점거했다.
2. 3. 양 팀 서포터 간의 대립
Heysel Stadium disaster영어 당시, 양 팀 서포터들 간에는 이미 긴장감이 고조된 상태였다. 1985년 5월, 리버풀은 전년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로마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우승한 유럽 챔피언이었다. 이번에도 리버풀은 이탈리아의 유벤투스와 맞붙게 되었는데, 유벤투스는 전 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유벤투스는 1982년 월드컵 우승 주역인 이탈리아 선수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고, 플레이메이커 미셸 플라티니는 2년 연속 유럽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자랑했다. 양 팀은 UEFA 클럽 랭킹에서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며,[184] 스포츠 언론에서는 유럽 최고의 두 팀으로 평가했다.[185] 두 팀은 1984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이미 맞붙은 적이 있었는데, 유벤투스가 2-0으로 승리했다.문제는 경기장인 헤이젤 스타디움의 상태였다. 벨기에의 국립 경기장이었지만, 결승전 당시에는 유지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55년이나 된 낡은 경기장은 외벽이 시멘트 블록으로 대충 쌓여 있었고,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벽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다.[186] 경기장 일부는 개찰구가 하나밖에 없었고, 표 검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언도 나왔다.[187]
리버풀 선수들과 팬들은 아스널 팬들이 "쓰레기장" 같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경기장 상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캄 노우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같은 좋은 경기장을 두고 굳이 헤이젤을 선택한 유럽 축구 연맹(UEFA)에 불만을 제기했다.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유벤투스 회장과 피터 로빈슨 리버풀 구단주는 UEFA에 경기장 변경을 요청했지만, UEFA는 이를 묵살했다.[188][189] 이후 조사에서 UEFA가 경기장 사전 조사에 30분밖에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90]
경기장에는 58,000명에서 60,000명에 달하는 관중이 들어찼고, 양 팀 팬들은 각각 25,000명 이상이었다. 양쪽 골대 뒤편은 입석 구역이었고, 유벤투스 팬들은 O, N, M 구역, 리버풀 팬들은 X, Y, Z 구역으로 나뉘었다. 문제는 Z 구역이었는데, 이곳은 원래 벨기에 현지 중립 팬들을 위한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탈리아 교포들과 유벤투스 팬들이 표를 구매했다.[192][187] 이는 표 되팔이를 통해 양 팀 팬들이 섞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다.[189]
당시 벨기에에는 많은 이탈리아 교포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이 Z 구역 표를 많이 구매했다.[192][187] 또한, 여행사들이 표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유벤투스 팬들에게 판매하면서 Z 구역은 사실상 유벤투스 팬들의 차지가 되었다. 게다가 리버풀 팬들은 1984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로마 극성팬들에게 공격받은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유벤투스 팬들이 바로 옆 구역에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187]
경기 시작 1시간 전인 저녁 7시경, X 구역과 Z 구역 사이에 있던 리버풀과 유벤투스 팬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25] 두 구역 사이의 경계는 임시 철망 울타리와 경찰이 거의 없는 무인지대로, 축구 훌리건들이 서로에게 섬광탄, 병, 돌 등을 던지기 시작했다.[26] 이들은 무너져가는 테라스에서 돌을 주워 던지기도 했다.[19]
3. 대치
현지 시각으로 경기 시작 약 1시간 전인 오후 7시경, 다툼이 시작되었다.[193] 겨우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리버풀과 유벤투스 지지자들이 X 구역과 Z 구역을 점거했다. 두 구역의 경계선은 임시 철망으로만 막혀 있었고, 경계 구역에 경찰 인력이 소수 배치되었다.[194] 축구 폭력배들은 홍염, 병, 짱돌을 경계선 너머로 투척했고, 무너지는 스탠드 밑에 떨어진 돌멩이로 돌팔매질을 했다.[187]
경기 시작 시간이 임박하면서, 더 많은 투사체가 날아다녔다. 결국 리버풀 지지자들이 유벤투스 지지자들한테 돌격했다. 유벤투스 지지자들이 자리를 피하는 가운데, 리버풀 지지자들이 Z 구역 경계석을 나누던 콘크리트 벽을 밀쳤고, 압력이 벽 하부에 누적되다가 허물어지면서 벽 바로 옆의 관중들은 무너진 잔해에 뒤덮여 묻혀 압사당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안전 구역으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수는 중상을 당하거나 명을 달리했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Z 구역의 유벤투스 지지자들도 반대쪽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경기장 육상 주행로를 따라 달려가 다른 유벤투스 지지자들을 도왔지만, 경찰이 사전에 개입을 막았다. 다수의 유벤투스 지지자들은 이들을 막는 경찰들에 돌덩어리, 병, 짱돌을 던지며 2시간 동안 싸웠다. 한 유벤투스 지지자는 벨기에 경찰에 출발 신호 권총을 발포했다.[195]
4. 경기
벨기에 연방 정부는 브뤼셀 시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기는 강행되었다.[177] 경기를 취소하면 더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과 유벤투스의 간곡한 경기 취소 요청도 묵살되었다.[196][178][197] 양측 주장은 관중에게 진정할 것을 요청했고,[198] 선수들은 경기장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안 상태에서 입장했다. 필 닐 리버풀 주장은 나중에 경기를 취소하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189]
경기는 유벤투스가 플라티니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199]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가 얻은 페널티킥을 플라티니가 성공시켰다.
경기 후, 유벤투스 주장 가에타노 시레아는 자크 조르주 유럽 축구 연맹 회장으로부터 우승컵을 받았다.[200] 다중 히스테리가 발생하여 다수의 기자와 지지자들이 경기 끝에 구장 안으로 난입했다.[200] 양측 지지자들은 관중석에서 연호했고,[201] 몇몇 이탈리아 구단의 선수들은 관중들과 함께 잔디 구장 안에서 자축하고, M 관중석 앞을 돌았고, 몇몇 리버풀 선수들은 사건이 발생한 X와 Z 구역 지지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202]
리버풀 선수들은 브뤼셀에 묵을 호텔에서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유벤투스 지지자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비극의 발생을 깨달았다. 경찰은 리버풀 선수를 수송하는 버스를 인도해야 했다.[189] 리버풀 선수들을 태운 버스는 경찰을 따라 브뤼셀 공항의 타맥으로 직행해 공항 대기실에서 추가 폭력 사태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187]
경기를 포기하는 것은 더 큰 소요를 일으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공공 정책적 이유로 경기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28] 이 결정은 UEFA 관계자, 이탈리아 축구 연맹, 잉글랜드 축구 협회,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와 빌프리트 마르턴스 벨기에 총리가 이끄는 내무부, 에르베 브루혼 브뤼셀 시장, 그리고 도시의 경찰력이 재난의 규모, 벨기에 연방 정부가 선포한 계엄 상태에도 불구하고 공동으로 내린 결정이었다.[10] 유벤투스는 경기 진행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29][28]
경기 전에 11세에서 12세의 선수로 구성된 젊은 벨기에 대표 선수들이 참가하는 시범 경기로 홍백전이 열렸다.[111] 적팀이 3-0으로 리드한 채 전반을 종료하고, 후반이 시작된 19시 10분경부터 스탠드에서는 서포터들 간의 트러블이 시작되었다.[111]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술에 취한 리버풀 서포터는 Z존에 있는 유벤투스 서포터에게 빈 캔이나 깃발을 던지는 등 끊임없이 도발을 했다.[112] 이에 유벤투스 측도 응하며 양쪽 서포터는 작은 싸움을 반복했지만 리버풀 측이 X존과 Z존을 가로막던 방어용 펜스를 파괴하자, 허술한 경비를 틈타 벽돌이나 쇠파이프를 무기로 유벤투스 서포터가 있는 Z존으로 쇄도했다.[112][113]
Z존의 관람객은 리버풀 측의 습격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고, 많은 관람객이 습격을 피하려 메인 스탠드와 Z존의 경계에 있는 높이 3미터의 콘크리트 벽으로 몰려들었다.[110] 일부 관람객은 인접한 벽을 기어 올라가거나 최전열의 펜스를 넘어 경기장으로 탈출하여 위기를 모면했다.[114] 약 수천 명의 관람객이 탈출할 방법을 잃고, Z존 벽가로 몰리는 형태로 포위되었다.[114] 리버풀 서포터는 관람객의 뒤에서 투석이나 위협 행위를 하는 등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포위된 관람객의 군중 밀도는 더욱 높아졌다.[114] 벽은 노후화로 인해 몰려든 관람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군중 붕괴"가 발생했고, 최전선에 있던 관람객은 무너진 벽과 뒤에서 쇄도하는 관람객에 깔려 압사했다.[110]
경기장과 육상 경기용 트랙에는 부상자나 트러블을 피하려는 수백 명의 사람들로 넘쳐났고, 중상자에게는 심폐 소생술 등의 응급 처치가 행해졌으며, 구급차와 헬리콥터를 사용하여 시내의 의료 시설로 이송되었다.[112] 또한 희생자의 유해는 경기장 정문 입구의 임시 텐트에 안치되었다.[112]
한편으로 흥분한 양쪽 서포터가 충돌을 계속하거나, 경찰을 향해 투석을 하는 등의 행위가 끊임없이 행해졌다.[115]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을 표명한 리버풀의 조 페이건이 스탠드로 다가가 서포터에게 냉정을 되찾도록 직접 호소했고,[115] 유벤투스 주장인 가에타노 시레아와 리버풀 주장인 필 니얼 두 명이 장내 방송을 통해 서포터에게 호소했다.[110] 이러한 설득을 받아들이는 자는 적었고 1시간 후 경찰 700명, 군대 1,000명을 동원하여 폭동을 진압했다.[113]
조반니 트라파토니 유벤투스 감독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참사 후에 경기를 할 수는 없다"며 경기의 중단을 요청했지만[130], 주최 측은 "경기가 중단되면 소동이 더욱 격화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130] 경기를 1시간 30분 연기한 뒤 강행했다.[130]
경기는 후반에 들어 플라티니의 롱 패스를 받은 보니에크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넘어져 페널티킥을 얻었고, 이를 플라티니가 58분에 성공시켜 유벤투스가 선제골을 넣었다.[131] 이후 리버풀의 공세를 스테파노 타코니를 비롯한 유벤투스 수비진이 막아내며 1-0으로 승리했다.[131] 유벤투스는 세 번째 결승 진출 만에 첫 우승을 달성했으며, 이탈리아 팀으로는 1968-69 시즌의 AC 밀란 이후 16년 만의 우승이었다. 리버풀은 지금까지 이 대회에서 4번 결승전에 진출하여 모두 우승을 차지했으나, 이번이 첫 번째 결승전 패배였다.[132]
결승골을 넣은 플라티니 자신은 기쁨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133]
5. 희생자 명단
39명의 희생자들 중 32명은 이탈리아인(미성년자 2명 포함)이었고, 4명은 벨기에인, 2명은 프랑스인, 그리고 1명은 북아일랜드인이었다.[203][204] 희생 당시의 나이는 아래와 같다.
6. 수사
사태의 책임은 리버풀에게 돌아갔다. 1985년 5월 30일, 유럽 축구 연맹(UEFA) 공식 참관인 귄터 슈나이더는 "잉글랜드인만이 이 문제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견의 여지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08] 대회 조직 책임자인 UEFA, 헤이젤 경기장 소유주, 그리고 벨기에 경찰도 과실 여부를 조사받았다. 8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벨기에의 마리나 코피테르스 판사 주관으로 보고서가 제작되었는데, 보고서는 리버풀 팬들에게만 과실이 있다고 결론지었다.[208]
영국 정부는 런던 소방대 부장 제리 클락슨을 파견해 경기장 상태를 보고하게 했다. 그는 참사가 "경기장의 열악한 상태에 과실이 매우 크다"라고 결론지었으나, 그의 보고서는 참사에 대한 증거물로 채택되지 않았다.[208]
수사는 리버풀 팬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췄다. UEFA 공식 옵서버인 귄터 슈나이더는 "오직 잉글랜드 팬들만이 책임이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18개월간의 수사 끝에 벨기에의 수석 판사 마리나 코피에테르스의 보고서가 공개되었고, 수사 결과는 리버풀 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벨기에 경찰 당국의 경비 문제도 지적되었다.[100][116][119] 영국의 닐 맥팔레인 스포츠 장관은 서포터 간 충돌을 우려하여 벨기에 정부에 모든 경비 대책을 강구하도록 사전에 요청했지만, 벨기에 측의 답변은 없었고, 경기장 내에는 적절한 경비 태세가 갖춰지지 않았다.[100][112] 통상적인 경비 태세라면 양쪽 서포터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마련하고 경찰관을 배치해야 했지만, X존과 Z존 사이에는 철망 펜스만 설치되어 있었다.[110][100] 경기장 내 경찰관 수가 부족했고, 양쪽 서포터 간 시비 발생 후에도 경찰의 대응이 늦었다.[100][110] 벨기에 경찰은 경기 종료 후 시가지로 유입된 서포터에 의한 폭동을 예상하여 1,000명의 경찰 중 4분의 3을 경기장 외부에 배치했기 때문에 Z존에서의 폭동과 혼란에 즉시 대응할 수 없었다고 한다.[117]
또한, 당일 배치된 많은 경찰관은 서포터 대응이나 훌리건 대책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일부 목격 증언에 따르면 경기장 내 폭동 시 침착함을 잃고 무작위로 관객을 구타했다고 한다.[100] 경찰 당국의 경비 태세 미비에 대해 서독의 심리학자 게오르크 지버를 비롯한 많은 스포츠 관계자와 TV 해설자들이 비판했다.[117][120]
미국 잡지 타임은 폭동으로 발전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보도했다.[121] 영국의 가디언은 리버풀 주변 지역이 대처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 사회 불안이 높아지고 폭동과 좌익적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는 등 영국 내에서도 이질적인 지역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리버풀 서포터가 사건에 관여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인물의 코멘트를 게재했다.[122]
작가 닉 혼비는 자서전 피버 피치에서 "상대에게 달려드는 단순한 행위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놀라웠다. ... 서포터들의 겉보기에는 무해한 행위가 일련의 위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라고 평했다.[83]
경기장에서는 칼이나 쇠파이프 등의 흉기, 병이나 캔 종류 반입이 공공연히 허용되었고, 폭동을 일으킨 리버풀 서포터는 술에 취해 만취 상태였기 때문에 일반 관객은 소동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116] 영국의 경찰 당국은 과거 축구 관련 범죄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자의 데이터와 텔레비전 영상 및 사진을 대조하여 선동자를 특정하는 작업을 했다.[123]
가해자 측인 리버풀 서포터 중에는 사건의 발단이 유벤투스 측에 있었으며 "유벤투스 측의 투석 행위가 폭동을 유발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119] 유벤투스 측 서포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돕기 위해 싸움을 걸었다는 리버풀 출신 소년의 담화가 영국의 신문에 게재되자 항의가 쇄도하여 소년의 집은 경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124] 유벤투스 측 서포터 중 한 명이 권총을 소지하고 폭동 발생 시 여러 차례 경찰에게 발포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현장에 수 발의 탄피가 흩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발포에 의한 총상은 확인되지 않았다.[125][126] 사건 일주일 후 토리노 경찰에 의해 체포된 21세 이탈리아인 학생이 소지했던 총은 스타터 피스톨이었다고 발표되었다.[126]
6. 1. 경기장 조건에 미친 영향
헤이젤 참사 이후, 잉글랜드 클럽들은 국내 경기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더 엄격한 규칙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3개월 동안 배제할 수 있는 법적 조항이 도입되었고, 1991년에는 2000년 축구 (폭력) 법안(Football (Disorder) Act 2000)이 도입되었다.[40][41]1989년에는 축구 관련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법원이 행동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축구 감시법이 제정되었다.[159] 이 법은 폭력 행위뿐만 아니라 인종 차별 행위, 암표 행위 등을 한 사람도 처벌 대상이 되었다.[159]
또한, 과격 팬이나 폭력적인 팬들을 대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대항하던 얼스터 의용군 단속에 효과를 보았던 잠입 수사를 실시했다.[160] 국가 범죄 정보국(NCIS)에 축구 부문이 상설되어 정보 조정, 과거 경기장에서의 폭력 사건 연루자 데이터베이스화, 각국 클럽 및 경찰 기관과의 정보 공유 등의 대책도 강구되었다.[160][161]
같은 해 4월 15일에 발생한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테일러 보고서 이후, 잉글랜드 경기장에 대한 주요 개혁이 이루어졌다. 모든 좌석이 설치된 경기장이 상위 두 개 리그의 클럽에 의무화되었고, 경기장 주변의 펜스가 제거되었으며 폐쇄 회로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었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팬들은 티켓이 취소되고 모든 잉글랜드 경기장의 경기에 법적으로 출입이 금지될 수 있다.[152][162][163]
헤이젤 경기장 자체는 1990년까지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일부 경기에 계속 사용되었으며, UEFA는 벨기에가 최소 10년 동안 유럽 결승전을 개최하는 것을 금지했다. 1994년, 경기장은 보두앵 국왕 경기장으로 거의 완전히 재건축되었다. 1995년 8월 28일, 새로운 경기장은 벨기에와 독일 간의 친선 경기를 통해 헤이젤에 다시 축구를 맞이했다. 1996년 5월 8일에는 파리 생제르맹이 라피트 빈을 1-0으로 꺾고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하며 다시 주요 유럽 결승전을 개최했다.[209][210]
7. 법적 소송
영국 경찰은 헤이젤 참사 가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철저히 수사했다. 17분 분량의 영상과 다수의 사진을 증거로 활용했고, TV 눈은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통해 영상을 공개했으며, 영국 언론들은 사진들을 보도했다.[211]
34명이 체포되었고, 헤이젤 참사를 주도한 리버풀 팬 26명은 범죄인 인도 절차를 거쳐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는 헤이젤 참사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죄인 인도 혐의였다. 1987년 2월부터 3월까지 런던에서 열린 범죄인 인도 심리에서 26명 모두 유벤투스 팬 마리오 론치의 사망에 대해 벨기에 법정에 서게 되었다. 1987년 9월, 이들은 벨기에로 인도되어 39명의 사망에 대한 과실치사 및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벨기에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재판이 지연되면서 판사는 이들의 석방을 허가했다.
1988년 10월 재판이 시작되었고, 벨기에인 3명도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섰다. 알베르트 로센스 벨기에 왕립 축구 협회 회장은 리버풀 구역의 표를 유벤투스 팬들에게 판매한 혐의, 미셸 캉시에와 조앙 마티외 두 경감은 당일 치안 유지와 관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211] 당시 영국에 구금되어 있던 리버풀 팬 2명은 재판이 연기되었다. 1989년 4월, 리버풀 팬 14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중 절반은 5년 집행유예로 영국 복귀가 허용되었다.[212]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은 로니 젭슨으로, 그는 잉글리시 풋볼 리그에서 13년 동안 414경기에 출전한 선수였다.[213]
미국 잡지 TIME은 폭동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보도했다.[121] 가디언은 리버풀 주변 지역이 대처 정부의 경제 정책으로 사회 불안이 높아지고 폭동과 좌익적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는 등 영국 내에서도 이질적인 지역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122] 리버풀 서포터가 사건에 관여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인물의 코멘트를 게재했다.[122]
닉 혼비는 자서전 피버 피치에서 "상대에게 달려드는 단순한 행위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놀라웠다. 그곳에는 상대를 겁주고 재미있어하는 것 외에는 이유가 없으며 젊은 서포터라면 한 번쯤은 경험하는 행위다. 그런데 그런 집단 행동의 의도는 공황 상태에 빠진 중산층 이탈리아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서포터들의 겉보기에는 무해한 행위가 일련의 위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라고 평했다.[83]
경기장에는 칼, 쇠파이프 등 흉기, 병, 캔 등의 반입이 공공연히 허용되었고,[116] 폭동을 일으킨 리버풀 서포터는 술에 취해 만취 상태였기 때문에 일반 관객은 소동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116] 영국 경찰 당국은 과거 축구 관련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데이터와 텔레비전 영상 및 사진을 대조하여 선동자를 특정했다.[123]
일부 리버풀 팬들은 유벤투스 팬들의 투석 행위가 폭동을 유발했다며 사건의 발단이 유벤투스 측에 있다고 주장했다.[119] 유벤투스 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돕기 위해 싸움을 걸었다는 리버풀 출신 소년의 증언이 영국 신문에 실리자[124] 항의가 쇄도했고, 소년의 집은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124] 유벤투스 팬 중 한 명이 권총을 소지하고 폭동 당시 경찰에게 여러 차례 발포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125] 현장에 탄피는 있었으나 발포로 인한 총상은 확인되지 않았다.[126] 사건 일주일 후 토리노 경찰은 21세 이탈리아인 학생을 체포했고, 발포에 사용된 총은 스타터 피스톨이었다고 발표했다.[126]
1987년 9월 9일, 영국 당국은 리버풀 서포터 25명을 실행범으로 특정하여 벨기에 재판 기소에 출두시키기 위해 군용기로 벨기에에 이송했다.[123][148] 1988년부터 재판이 시작되었고, 유죄일 경우 최대 징역 15년형이 내려질 수 있었다.[148] 5개월간의 심의 끝에 1989년 4월, 벨기에 법원은 폭동에 가담한 14명에게 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7명에게 징역 3년, 나머지 7명에게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118][148]
경기 당일 현장에서 경찰대를 지휘한 요한 마히유는 "이니셔티브의 결여"가 지적되어 집행유예 9개월,[149][150] 운영 책임을 맡았던 알베르트 로센스 벨기에 축구 협회 사무총장은 "양쪽 서포터 사이에 완충 지대를 설치하고 분리하는 대응을 소홀히 했다"는 점이 지적되어 집행유예 6개월의 판결을 받았다.[149][150] 경기 당일 최고 경비 책임자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149][151]
8. 사건의 여파
이 경기는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 세계 70개국에 생중계되었으며[138],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과 미국에서 반(反) 영국 감정이 고조되었다[134][135][136]。 이러한 반 영국 감정은 몇몇 국가에서 영국의 거친 문화, 식민주의 유산, 마거릿 대처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122]。
- 영국
- * 5월 29일, 마거릿 대처 총리는 "사건에 관여하고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우리나라와 축구 경기에 큰 수치와 불명예를 안겨주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37]。 대처 총리는 폭동 상황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했고, 총리 관저를 떠날 때 분노를 드러냈다고 한다[134]。 스포츠부 장관은 사건 직후 "수치의 밤, 비극의 밤"이라고 평했다[134]。
- * 5월 30일, 대처 총리는 사건의 모든 책임이 리버풀 측 영국인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이탈리아 정부에 사과했으며, 희생자 유족에게 위로금으로 250000GBP를 지급했다[138][139]。 같은 날, 대처 총리는 폭동 재발 방지책으로 경찰의 경비 권한 강화, 경기장에서의 알코올 판매 금지, 흉기가 될 수 있는 병이나 캔 등의 반입 금지, 관람객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ID 카드 발급 등을 포함한 규제 입법안을 제출했다[138]。 국왕 엘리자베스 2세는 이탈리아와 벨기에 양국에 사건에 관한 메시지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138]。
- * 잉글랜드 축구 협회(FA) 회장은 멕시코에서 열린 프리 월드컵을 시찰하기 위해 수도 멕시코시티에 머물고 있었지만[138], 정부의 지시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140]。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며 정부의 어떠한 지시에도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140]。
- * 국내에서는 일련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고급 신문인 『더 타임스』는 "축구는 이제 죽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에 저항하기 어렵다[134]"고 보도했으며, 일간지 『리버풀 에코』는 "축구 경기가 생과 사와 같은 가치를 갖는가"라고 보도했다[135]。 가해자 측이 된 리버풀 시내에서는 벨기에 원정에서 귀국한 선수들을 환영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장례 행렬로 바뀌었다[134]。
- 벨기에
- * 5월 29일, 마르텐스 총리가 이탈리아 정부에 조전을 보냈다[113]。
- * 5월 30일, 노통 내무 장관은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 클럽에 대해 벨기에 입국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38]。
- * 5월 31일, 벨기에의 텔레비전 방송국 RTBF는 사건 당일, 소동이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한 관계자들이 유벤투스를 의도적으로 승리하게 했다는 승부 조작 의혹을 보도했지만, 벨기에 축구 협회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138]。
- * 6월 1일, 메르스브로이크 공군 기지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식을 개최했으며, 마르텐스 총리 등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141]。
- 이탈리아
- * 5월 29일, 알레산드로 페르티니 대통령은 "경기장을 참극으로 만든 폭력 행위를 혐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13]。
- * 6월 1일, 리구리아 주임페리아현의 디아노 마리나에서 영국계 기업 소유의 버스가 습격을 받았고[136], 밀라노 시내에서는 영국인 남성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36]。
- * 6월 2일, 밀라노 시내의 영국계 전문학교에 화염병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38]。 같은 날, 로마 시내의 영국 대사관 앞에서 수백 명이 시위 활동을 벌였다[138]。
- * 이탈리아 신문 매체에서는 로마의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가 "대학살의 경기장[134]", 밀라노의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가 "컵 경기를 위한 학살[135]", 마찬가지로 밀라노의 일간지 『일 조르날레』가 "야만인이 우리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134]。
- 바티칸
- * 5월 29일,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추도 미사를 열고 사고 희생자를 애도했다[113]。
- 전송
- * 5월 29일, 제2독일 텔레비전 (ZDF)은 경기 개최에 항의하여 당일 중계를 중단했다[113]。 이 텔레비전 방송국은 방송 중단 이유에 대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후에 폭도에 둘러싸인 채 아무 일 없이 경기를 방송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전했다[137]。
- * 서독의 수도 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제네랄 안차이거』는 사건에 대해 "축구계는 가장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134]。 또한, 전 서독 대표 선수이자 함부르크 SV의 GM을 맡고 있는 귄터 네처는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과 영국 서포터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평했다[134]。
- 프랑스
- * 5월 31일, 벨기에의 이웃 나라인 프랑스에서도 반 영국 감정이 고조되어 파리 시내에서 영국 번호판을 단 자동차 50대가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38][136]。 또한, 일간지 『르 파리지앵』은 사건에 대해 "그들을 축구 팬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경기에 나타나는 범죄자다", "영국은 부패했다. 고결한 영국인들은 세계 각국에 고상한 예의와 도덕을 가르치기 전에 현관 청소를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134]。
- 유럽 축구 연맹(UEFA)
- * 경기가 열렸을 때 경기 위원을 맡았던 귄터 슈나이더는 "잉글랜드 서포터들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발언했고[142], 자크 조르주 회장은 "사고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결정적인 심판을 내릴 것이다. 이것은 축구계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제다"라고 발언했다[142]。 한스 방고타 사무관은 사견임을 전제로 "폭력 문제는 지금까지 자주 거론되었고 오랫동안 경고를 받아왔다. 관련 클럽 제재뿐만 아니라 대표팀 제재도 고려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142]。
8. 1. 잉글랜드 구단 제명
1985년 5월 31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FA)에 잉글랜드 구단들이 유럽대항전에서 제명되기 전에 자진 기권할 것을 요청했다.[214] 그러나 이틀 뒤, 유럽 축구 연맹(UEFA)은 잉글랜드 구단에 대해 영구 제명 징계를 내렸다.[46][47][48] 6월 6일, 국제 축구 연맹(FIFA)은 이 징계를 모든 국제 경기로 확대했지만, 몇 주 후 유럽 외 지역에서 열리는 친선 경기는 허용하는 것으로 완화했다.[49] 1985년 12월, FIFA는 유럽 내 친선 경기 제재를 해제했으나, 벨기에 정부는 자국 내 잉글랜드 구단 경기를 금지했다.[50][51][52]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제명 대상이 아니었지만, 잉글랜드 구단들은 유럽대항전에서 영구 제명되었고, 리버풀은 추가 징계를 받았다. 1990년 4월, 잉글랜드 축구 당국의 수년간의 항의 끝에 UEFA는 1990-91 시즌부터 잉글랜드 구단(리버풀 제외)의 유럽대항전 참가를 허용했다.[53][54][55] 1991년 4월, UEFA 이사진은 리버풀의 1991-92 시즌 유럽대항전 참가를 허용하는 투표를 진행하여, 리버풀은 다른 잉글랜드 구단보다 1년 늦게, 최초 판결보다 2년 빠르게 유럽대항전에 복귀했다. 결과적으로 리버풀을 제외한 모든 잉글랜드 구단은 5년간, 리버풀은 6년간 유럽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한편, UEFA는 피해자 측인 유벤투스에게 UEFA 주최 홈경기 2경기를 무관중으로 치르도록[146], 주최 측인 벨기에에게는 향후 10년간 UEFA 주최 국제 대회 결승전 개최를 금지하는 처분을 내렸다.[145][146]
8. 2. 잉글랜드의 UEFA 점수
징계 이전 잉글랜드는 UEFA 점수 순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이 사건에 앞서 잉글랜드 구단들은 유럽대항전을 5년 동안 지배하던 상황이었다.[215] 징계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그동안 적립한 점수를 소멸할 때까지 유지했다.잉글랜드 구단들이 유럽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남은 UEFA컵 진출권은 9위에서 21위까지 올라 있는 2개 구단만 참가하는 리그의 구단들에게 재배분되었다.
연도 | 추가 UEFA컵 진출권 배분 국가 |
---|---|
1985-86 시즌 | 소련,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
1986-87 시즌 |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동독 |
1987-88 시즌 |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스웨덴 |
1988-89 시즌 |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
1989-90 시즌 | 오스트리아,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프랑스와 유고슬라비아는 플레이오프전 진행)[216] |
1990년, 점수를 모두 소진한 잉글랜드는 순위표에서 감추었다.[217] 잉글랜드 리그가 다시 선두에 올라간 것은 2008년이 되어서였다.[218]
8. 3. 참가하지 못한 구단들
토트넘 홋스퍼 (3위)사우샘프턴 (5위)
노리치 시티 (리그컵 우승 / 20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위)
셰필드 웬즈데이 (5위)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리그컵 우승 / 18위)
토트넘 홋스퍼 (3위)
아스널 (리그컵 우승 / 4위)
노리치 시티 (5위)
노팅엄 포리스트 (3위)
에버턴 (4위)
루턴 타운 (리그컵 우승 / 9위)
노리치 시티 (4위)
더비 카운티 (6위)
토트넘 홋스퍼 (6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