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는 1961년에 개최되었으며, 1,657명의 대의원과 3명의 부참 대의원이 참석했다. 김일성은 제3차 당대회 이후의 경제적 성과, 제1차 7개년 계획, 한반도 통일, 당내 종파주의 극복, 조선로동당의 국제적 위상 등을 보고했다. 그는 농업 집단화와 산업 국유화 완료, 천리마 운동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창출을 강조하며, 대한민국을 북한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당 규약이 수정되었고, 김일성의 권력 장악을 보여주는 제4차 중앙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제4차 중앙위원회는 김일성 유격대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총 19번의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중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조중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은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에 체결된 군사 동맹 조약으로, 양국 우호 증진과 무력 공격 시 상호 원조를 제공하며, 20년마다 갱신되지만 2021년 중국 외교부는 자동 갱신을 부인했고 한반도 안보와 동북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미친다. - 1961년 9월 - 196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1961년 9월 17일에 실시된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이 빌리 브란트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독일 사회민주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아데나워가 총리직을 유지하며 자유민주당과의 연립 정부를 구성하게 된 선거이다. - 1961년 9월 - 1961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1961년 하계 유니버시아드는 다양한 종목으로 구성된 국제 스포츠 대회로, 소련이 종합 1위를 차지했으며 대한민국은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후 한국 스포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 |
---|---|
기본 정보 | |
행사 명칭 |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
원어 명칭 |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
로마자 표기 | Joseon Rodongdang Je4-cha Daehoe |
위치 | 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날짜 | 1961년 9월 11일 ~ 1961년 9월 18일 (7일간) |
참가자 | 투표권이 있는 대표 1,657명 및 투표권이 없는 대표 73명 |
결과 | 제4기 중앙위원회 및 제4기 중앙검사위원회 |
2. 당 대회
제4차 대회는 노동자 994명, 농민 451명, 사무원(인텔리겐챠) 191명, 기타 71명으로 구성된 1,657명의 대의원과 3명의 부참 대의원으로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제3차 당대회 이후의 경제적 성과, 제1차 7개년 계획, 한반도 통일, 당내 종파주의 경향에 대한 승리, 조선로동당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 보고했다.
2. 1. 배경
1961년 당시 조선로동당은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다. 당원은 1,311,563명으로, 인구의 12.2%를 차지했다. 당세포는 65,000개에 달했다. 이러한 성장은 제3차 대회 이후 북한 사회 전반에 걸친 사회주의 건설 운동과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구분 | 내용 |
---|---|
당원 수 | 1,311,563명 |
당세포 수 | 65,000개 |
당원의 인구 비율 | 12.2% |
대의원 수 | 1,657명 (3명 부참) |
대의원 구성 | 로동자 994명, 농민 451명, 인텔리겐챠 191명, 기타 71명 |
2. 2. 주요 내용
김일성은 제3차 당대회 (1956년 개최) 이후 제3차 당 중앙위원회가 수행한 사업에 대해 6시간 동안 보고했다. 보고에서 김일성은 제3차 당대회 이후의 경제적 성과, 제1차 7개년 계획, 한반도 통일, 당내 종파주의 경향에 대한 승리, 조선로동당의 국제적 위상을 언급했다.[1] 주목할 만한 성과로는 농업 집단화와 모든 산업의 국유화 완료, 북한 노동력의 52%가 산업 노동자가 된 점(당의 프롤레타리아트 창출 임무 완수) 등이 있었다.[1] 김일성은 이러한 발전이 2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한 천리마 운동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잉여가치 착취는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1]김일성은 제1차 7개년 계획이 이전의 성공적인 5개년 계획을 계승하여 중공업을 우선시하면서도 경공업과 농업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1] 대한민국과 관련해서는 4.19 혁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북한이 한국보다 더 강하고 번영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또한, 당내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승리를 언급하며, 지난 몇 년간 당이 급성장했고 사회주의 노동 청년동맹 (LSWY)을 통해 젊은 인재를 당 고위직에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조선로동당의 국제적 위상을 설명하면서 북한이 형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하며, 중소 분쟁에서 중립을 지킬 것임을 중국 및 소련 대표단에 알렸다고 밝혔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당 규약 수정안이 별다른 논의 없이 승인되었다. 장 수는 10장에서 9장으로 줄었지만, 조항 수는 62조에서 70조로 늘었다. 이러한 변경은 조선로동당과 LSWY, 조선인민군 (KPA)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2. 3. 제4차 중앙위원회 구성
제4차 중앙위원회 선거를 통해 김일성의 권력 장악 정도가 명확해졌다.[1] 제3차 중앙위원회 위원 71명보다 14명 증가한 85명이 제4차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 이 중 28명만이 제3차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1] 57명은 중앙위원회 활동 경력이 없었다. 1958년 11월 19일에 사망한 유경수를 제외한 모든 제3차 중앙위원회 항일 유격대 출신들은 재선되었다. 소련계 또는 연안파 소속이었던 제3차 중앙위원회 간부들은 파벌 충성을 버리고 항일 유격대 출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김창남, 남일 등을 제외하고는 재선되지 못했다.새로 선출된 위원 57명 중 25명은 김일성 유격대 출신이었으며, 약 21명은 조선인민군(KPA) 또는 사회주의 노동 청년동맹(LSWY)에서 충원되었다. 김영주 (김일성의 동생), 이효순 (이계순의 형) 등 유격대 출신과 가족 관계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격대 출신, 유격대 훈련 경험자, 유격대 출신 가족 관계자들이 중앙위원회 80%를 차지했으며, 김일성에게 유리하게도 중앙위원회 내 다른 조직화된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4차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 50명 중 49명이 신규였으며, 이치찬만이 유일하게 재선되었다.
3. 제4차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1961년 9월 18일에 소집되어 제4차 중앙위원회 간부를 선출했다. 김일성이 당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창만, 이효순이 선출되었다. 이들 중 김창만만이 비(非)파르티잔이었다. 중앙위원회의 모든 기구는 기관장 또는 부기관장 직을 겸임하면서 1명 또는 2명의 파르티잔을 두었다. 예를 들어, 김익선은 제4차 검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지만, 김창덕 (파르티잔)이 부위원장을 지냈다.[1]
4. 대표단
총 1,311,563명의 당원을 대표하기 위해 1,657명의 투표 대의원과 73명의 비투표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소련 공산당(지도자 프로르 코즐로프), 중국 공산당(지도자 덩샤오핑),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지도자 알프레트 크렐러), 일본 공산당(지도자 미야모토 겐지) 등 32개의 서로 다른 형제 정당들이 제4차 당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