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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엄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영조 연간에 활약하며 산업 발전과 국가 재정에 기여했다. 1738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그는 동래부사,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지방 행정에도 참여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으며,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사망했다. 그는 《해사일기》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혜경궁 홍씨의 외척으로 신정왕후의 증조부가 되었다.
2. 생애
강원도 원주목 지향곡면 간현리(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서 태어났다. 풍양 조씨 출신으로, 부친은 이조판서를 지낸 조상경이다. 훗날 혜경궁의 이모와 결혼하여 장남을 통해 미래의 신정왕후의 증조부가 되었다. 정언, 지평, 교리, 수찬, 부수찬, 부교리, 검상, 사서(司書), 동래부사,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간, 도승지, 한성부좌윤, 공조참판, 대사헌, 예조참판, 부제학, 이조참판, 호조참판, 한성부우윤, 법성첨사, 동지돈녕부사, 대사성,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평안도 관찰사, 지돈녕부사, 예문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교동수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영조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국가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후 의금부지사, 이조판서, 제학을 역임하고,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조정에 복귀한 후 대사간과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의 저술과 회고록은 해사일기와 해행총재에 보존되어 있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738년(영조 14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752년 정시(庭試) 을과(乙科)에 급제한 후 정언,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57년에는 동래의 관리와 충청도의 암행어사를 지냈다.
이후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경상도 관찰사 재직 시에는 도내(道內) 시노비(寺奴婢) 1만여 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시키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하여 전세 부담을 줄였다. 또한 1760년(영조 36년) 창원·진주·밀양 3개 지방에 조창 증설을 건의하여 세곡 수송의 민폐를 덜고 공물 수납의 공정으로 국고를 충실히 했다. 이외에도 대사간, 부제학, 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2.2. 지방관으로서의 활동
1738년(영조 1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한 조엄은 중앙 관직뿐만 아니라 지방관으로도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57년 동래의 관리와 충청도의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1758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된 후 도내 시노비(寺奴婢) 1만여 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감면해주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 비율을 적용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또한 1760년(영조 36년) 창원, 진주, 밀양 3개 지방에 조창 증설을 건의하여 세곡 수송의 민폐를 줄이고 공물 수납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국고를 충실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2.3. 조선 통신사와 고구마 도입
1763년(영조 39년) 영조는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조엄은 이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국내에 최초로 제주도와 동래에서 재배하였다. 이 외교 사절단은 양국 간의 무역 발전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채널로서 일본과 한국 모두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불렀으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4. 유배와 죽음
정조 즉위 직후 홍국영 등의 모함으로 1777년 위원군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김해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