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아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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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 아폰수는 포르투갈의 싱어송라이터로, 1929년에 태어나 1987년에 사망했다. 그는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교사로도 활동했다. 1956년 데뷔 앨범을 시작으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불렀으며, 특히 1964년 작곡한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는 카네이션 혁명의 신호탄으로 사용되었다. 반체제 활동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1980년대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포르투갈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기념 사업과 헌정 앨범으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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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아폰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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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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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제 마누엘 세르케이라 아폰수 두스 산투스 |
예명 | 제카 아폰수 |
출생일 | 1929년 8월 2일 |
출생지 | 아베이루, 포르투갈 |
사망일 | 1987년 2월 23일 |
사망지 | 세투발, 포르투갈 |
활동 시기 | 1953년–1987년 |
직업 | |
직업 | 가수, 작곡가, 교사, 활동가 |
음악 스타일 | |
장르 | 포크 민중가요 코임브라 파두 |
악기 | 보컬, 기타 |
기타 정보 | |
관련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2. 생애
조제 아폰수는 1929년 8월 2일 아베이루에서 판사인 아버지 조제 네포무세노 아폰수 도스 산토스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마리아 다스 도레스 단타스 세르케이라 사이에서 태어났다.[1] 1930년 부모님이 포르투갈령 앙골라로 이주하면서, 건강 문제로 숙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1] 1936년 아베이루로 돌아온 후, 1937년에는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1] 1938년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와 벨몬테 시장이었던 삼촌 집에서 지내며 살라자르 정권의 청소년 단체인 모시다드 포르투게사에 가입하기도 했다.[1]
1940년, 코임브라로 가서 학업을 시작했다.[1]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프락스"를 통해 "칸토르 비초"(노래하는 신입생)로 불렸다.[1]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 위해 노력하며,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아말리아 데 올리베이라와 결혼했다.[1] 1949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역사-철학과 공부를 시작했고, 앙골라와 모잠비크로 공연을 갔다.[1] 1953년 첫 아들이 태어났고, 같은 해 78 rpm 레코드인 첫 음반이 발매되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1]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의무 군 복무를 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내와 이혼했다.[1]
1956년, 첫 EP 앨범 ''파두스 드 코임브라''(Fados de Coimbra)를 발매하고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1] 1958년 움베르투 델가두 대통령 선거 운동에 참여했다.[1] 1959년부터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하며 인기를 얻었다.[1] 1961년부터 1962년까지 학생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1] 1964년 5월, 그란돌라에서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2]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모잠비크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1] 1967년 포르투갈로 귀국 후, 좌익 정치적 이상으로 인해 공립학교 교사직에서 해고되었다.[1]
1968년, 개인 교습을 하며 테주 강 남쪽 지역의 대중 그룹과 함께 노래하면서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1] 같은 해, 루이 파투와 협력하여 첫 앨범 ''Cantares do Andarilho''("방랑자의 노래")를 발매했다.[1] 1969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서 마르셀루 카에타누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조제 아폰수는 민주적인 노동 조합 운동을 지원하고 코임브라 대학 도시에서 일어난 학생 반란에 참여했다. 같은 해, ''Contos Velhos Rumos Novos''("오래된 이야기 새로운 과정") 앨범을 발매했다.[1] 1970년, Pye 스튜디오에서 런던에서 녹음된 ''Traz Outro Amigo Também''("다른 친구도 데려와") 앨범을 발매했다.[1] 1971년, 파리 근처 샤토 데루빌에서 녹음된 ''Cantigas do Maio''("5월의 노래") 앨범을 발매했다.[1]
1973년, PIDE/DGS에 의해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잦았고, 4월에는 카시아스 감옥에 20일간 투옥되기도 했다.[1] 1974년 3월 29일, 리스본의 콜리세우 도스 레크레이오스에서 열린 "포르투갈 노래의 첫 만남" 콘서트에 참여하여 "Grândola, Vila Morena"를 공연했고, 이 곡은 카네이션 혁명의 신호탄으로 사용되었다.[2][4]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대중적인 혁명 운동에 직접 참여했으며, PREC(진행 중인 혁명 과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1] 1976년,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의 대통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1] 1978년에는 파우스토와 협력하여 앨범 《Enquanto Há Força》("힘이 있는 동안")를 발매했다.[1] 1979년, 훌리우 페레이라 및 트로반테 밴드와 협력하여 앨범 《Fura Fura》("드릴 드릴")를 발매했다.[1]
1981년, ''파두스 지 코임브라 이 오트라스 칸송이스''(Fados de Coimbra e Outras Canções) 앨범을 발매하며 코임브라 음악으로 돌아갔다.[1] 1982년,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의 첫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 1983년 1월 23일, 리스본의 콜리세우 도스 레크레이오스에서 매진 공연을 했다.[1] 같은 해, 코임브라 시에서 금메달을 받았고, 포르투갈 대통령 라말류 이아네스의 자유 훈장 수여 제안을 거절했다.[1] 1985년, 마지막 앨범 ''갈리냐스 두 마투''(Galinhas do Mato)가 발매되었다.[1] 1987년 2월 23일, 세투발에서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으로 사망했다.[1]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29-1940)
조제 아폰수는 1929년 8월 2일 아베이루에서 판사인 아버지 조제 네포무세노 아폰수 도스 산토스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마리아 다스 도레스 단타스 세르케이라 사이에서 태어났다.[1]1930년, 그의 부모는 포르투갈령 앙골라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실바 포르투(현재의 쿠이투)시의 판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아폰수는 건강 문제로 아베이루에 있는 폰테 다스 싱코 비카스 근처 집에서 공화주의자이자 반성직주의자인 숙모 지제와 삼촌 시코와 함께 지냈다. 1933년, 아폰수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앙골라로 가서 3년 동안 초등 교육을 받았다.[1]
1936년, 아폰수는 아베이루로 돌아왔다. 1937년에는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로 가서 부모와 형제 주앙, 마리아지냐와 함께 살았다.[1]
1938년, 포르투갈로 돌아온 아폰수는 벨몬테 시장이었던 삼촌 필로메노의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4학년을 마쳤으며, 파시스트 지지자인 삼촌의 영향으로 살라자르의 우익 정권 에스타두 노부의 청소년 단체인 모시다드 포르투게사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정권에 충성하는 간부와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
2. 2. 코임브라 시절 (1940-1956)
1940년, 조제 아폰수는 학업을 위해 코임브라로 갔다. D. 조앙 3세 고등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모 아브리레테와 함께 살았다. 한편, 그의 가족은 모잠비크에서 동티모르로 이주했는데, 당시 동티모르도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판사로 일했고, 형 조앙은 포르투갈로 돌아왔으며, 마리아지냐는 가족과 함께 동티모르로 갔다.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점령 이후, 아폰수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부모님에게서 소식을 듣지 못했다.[1]코임브라 대학교의 "프락스"에서 "비초"(신입생)로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칸토르 비초"(노래하는 신입생)로 불렸다.[1]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두 번 낙방한 후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아말리아 데 올리베이라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오르페옹 아카데미쿠 드 코임브라 등 주요 대학 음악 그룹과 함께 여행했고, 아소시아상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에서 축구를 했다.[1]
1949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역사-철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오르페옹 아카데미쿠 드 코임브라와 함께 앙골라와 모잠비크로 공연을 갔다.[1]
1953년 1월, 첫 아들 조제 마누엘이 태어났다. 그해 말, 코임브라 파두 노래 두 곡이 담긴 78 rpm 레코드인 첫 음반이 발매되었으나, 현재 사본은 존재하지 않는다.[1]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의무 군 복무를 했다. 당시 포르투갈 영토였던 마카오로 소집되었지만,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 이후 코임브라에 주둔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1954년 딸 헬레나가 태어났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아내와 이혼했다.[1]
2. 3. 교사 생활, 초기 앨범, 정치 활동 (1956-1968)
1956년, 아폰수는 첫 EP 앨범 ''파두스 드 코임브라''(Fados de Coimbra)를 발매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58년 움베르투 델가두 대통령 선거 운동에 참여하여 이스타두 노부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했다.[1]1959년부터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하며 노동 계급과 농촌 인구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60년 코임브라 아카데믹 오르페온과 함께 앙골라 투어를 진행하고, EP 앨범 ''발라다 두 아우토노''(Balada do Outono)를 발매했다.[1]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학생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1] 1962년 EP 앨범 ''발라다스 드 코임브라''(Baladas de Coimbra)를 발매했다. 1963년 장 폴 사르트르에 관한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 첫 정규 앨범 ''발라다스 이 칸송이스''(Baladas e Canções)를 발매했다.[1]
1964년 5월, 그란돌라에서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2]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모잠비크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베르톨트 브레히트 연극 음악을 작곡했다.[1]
1967년 포르투갈로 귀국 후, 좌익 정치적 이상으로 인해 공립학교 교사직에서 해고되었고, ''칸타레스 드 조제 아폰수''(Cantares de José Afonso)를 출판했다. 포르투갈 공산당 입당 제안을 거절하고 음반사 오르페우와 계약했다.[1]
2. 4. 왕성한 활동, 반체제 활동 (1968-1974)
1968년, 정부 교사직에서 해고된 조제 아폰수는 개인 교습을 하며 테주 강 남쪽 지역의 대중 그룹과 함께 노래하면서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이 지역은 포르투갈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1] 같은 해 크리스마스 즈음, 루이 파투와 협력하여 첫 앨범 ''Cantares do Andarilho''("방랑자의 노래")를 발매했다.[1] 오르페우와 특별 계약을 맺고 1년에 앨범 한 장을 녹음하는 조건으로 매달 15000ESC라는 큰 수입을 얻었다.[1]1969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마르셀루 카에타누로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국가는 민주적인 노동 조합 운동을 허용하는 등 약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되었다. 조제 아폰수는 이 운동을 지원하고 코임브라 대학 도시에서 일어난 학생 반란에 참여했다. 같은 해, ''Contos Velhos Rumos Novos''("오래된 이야기 새로운 과정")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 앨범에는 기타 외 다른 악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1] 1969년, 1970년, 1971년에는 ''Casa da Imprensa'' 올해의 최고 앨범상을 수상했다.[1]
1970년, Pye 스튜디오에서 런던에서 녹음된 ''Traz Outro Amigo Também''("다른 친구도 데려와") 앨범을 발매했다.[1] 이 앨범은 포르투갈 비밀 경찰에 의해 여행이 금지된 루이 파투가 참여하지 않은 첫 앨범이었다. 3월 21일, ''Casa da Imprensa''(포르투갈 언론 대표)는 "가수이자 작곡가로서의 높은 수준의 작품과 포르투갈 대중 음악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기리는 명예상을 수여했다. 같은 해, 쿠바에서 열린 국제 축제에 참여했다.[1]
1971년, 파리 근처 샤토 데루빌에서 녹음된 ''Cantigas do Maio''("5월의 노래") 앨범을 발매했다.[1] 1972년에는 마드리드에서 녹음한 ''Eu Vou Ser Como a Toupeira''("나는 두더지처럼 될 것이다") 앨범을 발매했다.[1]
1973년, 포르투갈 전역을 순회공연 했으나, PIDE/DGS에 의해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잦았다. 4월에는 카시아스 감옥에 20일간 투옥되기도 했다.[1] 감옥에서 ''Era Um Redondo Vocábulo''라는 시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조제 마리오 브랑코와 협력하여 파리에서 녹음한 ''Venham Mais Cinco''("다섯 명 더 오세요") 앨범을 발매했다.[1]
1974년 3월 29일, 리스본의 콜리세우 도스 레크레이오스에서 열린 "포르투갈 노래의 첫 만남" 콘서트에 참여했다.[3] 이 행사에서 "Grândola, Vila Morena"를 공연했는데, 이 곡은 카네이션 혁명의 신호탄으로 사용되어 혁명의 찬가로 여겨진다.[2][4]
2. 5. 혁명기 (1974-1980)
1974년 12월, 아폰수는 런던의 파이 스튜디오에서 파우스토 보르달루 디아스의 편곡으로 앨범 《Coro dos Tribunais》("법원 합창단")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1964년에서 1967년 사이에 모잠비크에서 작곡된 브레히트풍 노래 "Coro dos Tribunais"와 "Eu Marchava de Dia e de Noite" 두 곡이 수록되어 있다.[1]1974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대중적인 혁명 운동에 직접 참여했으며, PREC(진행 중인 혁명 과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3월 11일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가 주도한 쿠데타가 실패한 날,[5] 좌익 군사 거점인 RALIS에서 공연했다. 아폰수는 극좌 운동인 LUAR(혁명 행동 및 연합 리그)와 협력하여 싱글 "Viva o Poder Popular"(인민 권력 만세)를 발매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혁명 조직인 ''로타 콘티누아'', ''일 마니페스토'', ''아반과르디아 오페라이아''가 1975년 9월 30일과 10월 1일 로마에서 녹음된 앨범 《República》를 발매했는데, 앨범 판매 수익금은 신문 ''República''의 파업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1]
1976년, 그는 카네이션 혁명 군사 작전의 중요한 지휘관이었던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의 대통령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1980년에도 그를 다시 지지했다. 같은 해, 그는 앨범 《Com as Minhas Tamanquinhas》("내 작은 나막신과 함께")를 발매했다.[1]
1978년에는 파우스토와 협력하여 앨범 《Enquanto Há Força》("힘이 있는 동안")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아폰수의 우려를 보여주며,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드리아누 코레이아 드 올리베이라, 세르지우 고디뉴 등 다른 포르투갈 예술가들도 이 앨범에 참여했다.[1]
1979년, 훌리우 페레이라 및 트로반테 밴드와 협력하여 앨범 《Fura Fura》("드릴 드릴")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연극을 위해 제작된 8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브뤼셀에서 열린 반 유로비전 페스티벌에 참여했다.[1]
2. 6. 말년 (1980-1987)
1981년, 2년간의 공백 후 아폰수는 ''파두스 지 코임브라 이 오트라스 칸송이스''(Fados de Coimbra e Outras Canções, "코임브라 파두와 다른 노래들") 앨범을 발매하며 코임브라 음악으로 돌아갔다. 그는 파리의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에서 공연했다.[1]1982년,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의 첫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브뤼헤의 프린탕 축제에서 공연했다.[1]
1983년 1월 23일, 이미 병으로 쇠약해진 아폰수는 리스본의 콜리세우 도스 레크레이오스에서 매진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녹음되어 ''아우 비부 노 콜리세우''(Ao Vivo no Coliseu)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아폰수의 마지막 콘서트는 1983년 5월 25일, 포르투의 콜리세우 도 포르투에서 열렸다.[1] 같은 해 말, ''코무 세 포라 세우 피류''(Como Se Fora Seu Filho, "마치 그의 아들인 것처럼")를 발매했다. 코임브라 시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코임브라 시장 멘데스 실바는 "제카, 원할 때 언제든지 돌아오세요, 이곳은 당신의 집입니다"라고 말했고, 아폰수는 "저는 제도가 되고 싶지 않지만, 이 헌사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포르투갈 대통령 라말류 이아네스는 자유 훈장 수여를 제안했지만, 아폰수는 거절했다. 1983년, 아폰수는 1968년에 해임되었던 교사직에 복직하여 아제탕의 학교에서 역사와 포르투갈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병은 악화되었다.[1]
1985년, 마지막 앨범 ''갈리냐스 두 마투''(Galinhas do Mato, "기니 닭")가 발매되었다. 아폰수는 모든 노래를 부를 수 없어 루이스 헤프레사스, 헬레나 비에이라, 자니타 살로메, 호세 마리우 브랑코, 네 라데이라스, 마르타 살로메가 대신 불렀다. 음악 편곡은 훌리우 페레이라와 파우스투가 맡았다.[1]
1986년, 마리아 드 로르데스 핀타실고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그녀는 당선되지 못했다.[1]
1987년 2월 23일 오전 3시, 세투발에서 57세의 나이로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으로 사망했다. 다음 날 세투발에서 3만 명 이상이 참석한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 행렬은 1300미터를 이동하는 데 2시간이 걸렸다. 그의 관은 그가 원했던 대로 상징이 없는 붉은 깃발로 덮였고, 세르지우 고딩유, 훌리우 페레이라, 호세 마리우 브랑코, 루이스 실리아, 프란시스쿠 파냐이스 등이 운구했다.[1] 아폰스는 세투발의 노사 세뇨라 다 피에다드 묘지에 안장되었다.[6]
3. 유산
1987년 11월 18일, 포르투갈 음악과 예술 분야에서 아폰수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조제 아폰수 협회가 창설되었다.[1]
1991년, 아마도라시는 도시의 센트럴 파크에 3.7m 높이의 조제 아폰수 동상을 세웠다.[2]
1994년 6월 30일, 리스본-94, 유럽 문화 수도의 일환으로 조제 아폰수를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3] 많은 포르투갈 음악가들, 베테랑과 젊은 예술가들이 이 헌정 축제에 참여했는데, 축제 이름은 "필루스 다 마드루가다"("새벽의 아이들", 아폰수의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의 제목)였다.[3] 그 해 초, BMG는 축제와 같은 제목의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 앨범에는 같은 아티스트들이 아폰수의 노래를 각자 자신만의 버전으로 연주했다.[3] 이 행사에는 브리가다 빅토르 하라, 젠수라도스, 델핀스, 디바, 엔트레 아스파스, 에사 엔텐테, 프레이 파두 델 레이, GNR, 마드레두스, 마오 모르타, 오푸스 앙상블, 페스테 & 시다, 레시스텐시아, 리투알 테주, 세르지우 고디뉴, 세티마 레지앙, 시티아두스, 투바롱이스, UHF, 보제스 다 라디오, 그리고 슈투스 & 폰타페스가 참여했다.[3] 13년 전, 아폰수는 "만약 록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음악 스타일이라면, 우리는 좋은 품질의 록 음악을 요구해야 한다"고 언급했었다.[3]
1995년, 조제 마리우 브랑쿠, 아멜리아 무게, 그리고 조제 아폰수의 조카인 조앙 아폰수는 아폰수를 기리는 또 다른 앨범인 ''마이우, 마두루 마이우''를 발매했는데, 이 앨범에는 그의 많은 노래와 이전에 발표되지 않은 두 곡 "엔트레 소도마 에 고모라"와 "넴 세므프레 오스 디아스 상 디아스 파사도스"가 수록되었다.[4]
1997년, 아폰수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EMI는 1964년 앨범 ''발라다스 에 칸소이스''를 CD 형식으로 처음 발매했다.[5]
1998년, 비토리누와 자니타 살로메는 엑스포'98 프로그램에 포함된 조제 아폰수를 기리는 콘서트에 참여했다.[6]
2007년, 그는 29번째 위대한 포르투갈인으로 선정되었다.
4. 음반 목록
- Contos Velhos Rumos Novospt, 1969년
- Traz Outro Amigo Tambémpt, 1970년
- Cantigas do Maiopt, 1971년
- Eu Vou Ser Como a Toupeirapt, 1972년
- Venham Mais Cincopt, 1973년
- Coro dos Tribunaispt, 1974년
- Com as Minhas Tamanquinhaspt, 1976년
- Enquanto Há Forçapt, 1978년
- Fura Furapt, 1979년
- Fados de Coimbra e Outras Cançõespt, 1981년
- Como Se Fora Seu Filhopt, 1983년
- Galinhas do Matopt, 1985년
4. 1. 정규 앨범
Baladas e Cançõespt, 1964년}}Cantares do Andarilhopt, 1968년}}
참조
[1]
웹사이트
biografia ! AJA
http://www.aja.pt/bi[...]
2021-03-18
[2]
웹사이트
'BLITZ – 25 de Abril. "Grândola, Vila Morena": a história completa de uma canção com várias vidas'
https://blitz.pt/pri[...]
2021-04-05
[3]
간행물
Relatório I Encontro da Canção Portuguesa
http://www.stec.pt/u[...]
Secretaria de Estado da Informação e Turismo
1974-04-01
[4]
웹사이트
Portugal celebrates Carnation Revolution, warns against populism
https://www.euronews[...]
2021-04-06
[5]
웹사이트
11 de Março de 1975. O dia que fez o PS, o CDS e o PSD tremer
https://sol.sapo.pt/[...]
2021-04-10
[6]
웹사이트
O homem que cantou a liberdade morreu há 30 anos
https://www.jn.pt/na[...]
202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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