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레섬 메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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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그레섬 메이천(John Gresham Machen, 1881-1937)은 미국의 신학자이자 보수주의 개혁 신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을 주도하며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옹호했다. 특히,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통해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칼뱅주의 신학을 강조했다. 메이천의 사상은 한국 장로교를 포함한 여러 보수 교단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초 미국 개신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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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레섬 메이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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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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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그레샴 메이천 |
출생일 | 1881년 7월 28일 |
출생지 |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
사망일 | 1937년 1월 1일 (55세) |
사망지 | 미국 노스다코타 주 비스마르크 |
알려진 이유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정통 장로교회 설립 |
종교 | |
종교 | 기독교 (장로교) |
소속 교회 | 미국 장로교회 정통 장로교회 |
서품 | 1914년 |
직위 | 정통 장로교회 총회장 (1936년) |
학문적 배경 | |
학파 | 프린스턴 신학 |
학문적 조언자 | 프랜시스 랜디 패튼 B. B. 워필드 |
분야 | 성서 연구 신학 |
세부 분야 | 신약성경 연구 |
직장 |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
영향을 준 인물 | 칼 매킨타이어 해럴드 오켕가 프랜시스 쉐퍼 |
기타 정보 |
2. 생애
존 그레섬 메이천은 1881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장로교 신앙 교육을 받았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독일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을 접했지만, 오히려 보수적인 개혁파 신학을 더욱 굳건히 믿게 되었다.[3]
1906년부터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쳤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YMCA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3] 전후에는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는 보수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며 《바울 종교의 기원》(1921),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 등을 저술했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게 되자, 메이천은 동료들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여 개혁 정통 신학을 이어갔다.[4] 1933년 장로교 해외 선교 독립 위원회를 설립했지만, 장로교 총회와 갈등을 빚고 1937년 정통장로교회를 설립했다.[7]
메이천은 1937년 폐렴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며 신앙을 지켰으며, 그의 묘비에는 "죽도록 충실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7]
2. 1. 유년 시절 (1881-1898)
존 그레섬 메이천은 1881년 7월 28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서 웹스터 메이천은 볼티모어의 변호사였고, 45세에 24세의 메리 존스 그레섬과 결혼했다. 아서 웹스터 메이천은 성공회 신자였고, 메리 존스 그레섬은 장로교 신자였다. 메이천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배우며 신앙 교육을 받았다. 메이천의 가족은 프랭클린 스트리트 장로교회와 목사관에 다녔다.메이천은 사립 학교에서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등 고전 교육을 받았으며,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다.
2. 2. 청년 시절 (1898-1905)
1898년, 17세의 메이천은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전공하였고,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파이 카파 파이 프래터니티의 멤버였다.[1] 1901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파이 베타 카파 학회에 선출되었다.[1]1902년 메이천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문학 석사 과정을 밟는 동시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2]
1905년, 그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1년간 신학을 연구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빌헬름 헤르만 교수가 가르친 자유주의 때문에 자신의 신앙에 혼란을 느꼈다고 인정했다. 그는 헤르만을 매우 존경했지만, 독일에서의 시간과 근대주의 신학자들과의 교류는 그로 하여금 그 운동을 거부하고 이전보다 더욱 보수적인 개혁파 신학을 받아들이게 했다.[3]
2. 3.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시절 (1906-1929)
1906년,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성경 강사로 합류했다.[3] 프린스턴에서 그는 프랜시스 랜디 패튼과 B. B. 워필드의 영향을 받았는데, 워필드는 그가 만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3] 워필드는 기독교인이 주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수단은 정확한 교리이며,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와 초자연주의를 옹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3] 이러한 영향으로 메이천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확고히 했다. 191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5년에는 신약성경 연구 조교수가 되었다.[3]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메이천은 YMCA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3] 그는 우드로 윌슨의 민주주의 확산과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전쟁에 단호히 반대했다.[3]
전후,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약학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며,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는 보수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부상했다. 그는 《바울 종교의 기원》(1921)에서 바울의 종교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을 비판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에서는 "기독교의 주요 현대적 경쟁자는 자유주의"라고 결론 내리며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다.[3] 《믿음이란 무엇인가?》(1925)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를 정신화하고 개인적 경험의 표현으로 취급하여 성경과 신조의 의미를 비워둔다고 비판했다.
1920년대 동안 그의 연구는 프린스턴에서의 시간과 복음주의적 장로교인들과의 정치적 활동으로 나뉘었다. 그는 보수적인 신학적 신념을 가졌지만, 대중적인 근본주의는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2. 4.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 (1929-1936)
1929년 총회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재편성하기로 결정하고, 오번 선언 서명자들을 이사로 임명했다. 오번 선언은 해리 에머슨 포스딕이 1922년 5월에 행한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설교에서 비롯된 논쟁에 대한 총회의 대응에 반발하여 북장로교 내 자유주의자들이 발표한 것이었다.[4] 이에 메이천과 일부 동료들은 반발하여 개혁 정통 신학을 이어가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2. 5. 정통장로교회 설립과 죽음 (1933-1937)
1933년, 메이천은 장로교 선교지에서 자유주의를 용인하는 것에 대한 우려로 장로교 해외 선교 독립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다음 장로교 총회는 이 독립 위원회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하고, 관련 성직자들에게 관계를 끊으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메이천과 다른 일곱 명의 성직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장로교 사역에서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 논쟁으로 인해 메이천은 클래런스 맥카트니를 포함한 많은 근본주의 친구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결국, 메이천은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나중에 정통장로교회로 알려지게 된 교회를 설립했다.[7]프랜시스 쉐퍼는 그의 저서 ''거대한 복음주의 재앙''에서 미국 기독교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전환된 신학적 변화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메이천의 "성직 박탈"이 당시 미국 세속 언론의 1면 기사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존 그레샴 메이천은 1937년 1월 1일,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네드 스톤하우스를 비롯한 일부 논평가들은 메이천의 체질이 항상 강하지 않았고, 당시 그의 책무에 끊임없이 부담을 느꼈다고 지적한다.
메이천은 1936년 12월, 노스다코타주에서 예정된 강연을 진행하던 중 유난히 추운 날씨에 흉막염에 걸렸다. 크리스마스 이후 폐렴으로 입원했고, 1937년 1월 1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존 머레이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정말 감사합니다. 그것 없이는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전보를 보냈다.[7] 그는 볼티모어의 그린마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 학위, 날짜, 그리고 그리스어로 "죽도록 충실함"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볼티모어 출신의 저널리스트 H. L. 멘켄은 메이천의 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지적 능력에 대해 존경과 칭찬을 표했다. 멘켄은 메이천이 장로교회를 문학적, 사회적 클럽으로 바꾸려는 개혁가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결국 그는 졌고 프린스턴에서 쫓겨났지만, 그가 모든 승리를 거두며 필라델피아로 행진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또한 멘켄은 메이천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 비유하며 "메이천 박사는 마터호른이 사마귀에 비유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9]
메이천은 자신의 상당한 재산의 절반을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남겼다. 그는 신학교에 10000USD를 직접 기부했고, 형제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유증한 후 남은 재산의 절반을 다섯 명의 이사에게 맡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이익을 위해 관리하도록 했다. 잔여 재산의 10%는 독립 이사회에 귀속되었다. 총 재산은 175000USD로 추정되었다.[10]
3. 신학 사상
메이천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등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확고하게 믿고 변호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 신앙을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축소한다고 비판했다. 칼뱅주의 신학,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소요리문답을 정통 기독교 신앙의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여겼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현대 문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기독교 진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부터 1년 동안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헤르만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기도 했다.[3] 그러나 독일의 근대주의 신학자들과의 만남은 오히려 메이천에게 정통적인 개혁파 신학을 받아들이게 했다.[3] 1906년부터 프린스턴 신학교의 강사가 되었는데, 당시 프린스턴에는 프랜시스 패튼과 워필드가 있었다.[4] 워필드는 정통 교리가 크리스천이 주변에 영향을 미쳐온 수단이라고 주장했고, 성서 무오설을 주장하며 성서의 초자연성을 옹호했다.[4] 자유주의 신학에 동요하던 메이천의 신앙의 위기는 그들에 의해 해결되었다.[4]
1921년에 출간된 '''『바울 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에서 메이천은 "사도 바울의 종교가 그리스 철학에 기초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와 별개의 것이다"라는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에 반박했다.[7] 1923년에 출간된 '''『기독교란 무엇인가 - 자유주의와의 대결(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 "현대 기독교의 주요 적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기독교는 성경 위에 세워졌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죄인의 감정 위에 세워진다"라고 결론지었다.[8]
메이천은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에 있었지만, 대중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을 완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11]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에서 많은 사람이 믿었던 전천년설 등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개혁파 신학이야말로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는 입장에 기인했다.[11] 그는 이 신학이 당시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에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11] 더욱이 메이천의 학자로서의 활동과 근대 신학에 대한 비판은, 근본주의 운동의 일부에서 나타난 반지성적인 태도와 상반되었다.[11]
4. 저서
- 《신약 시대의 문학과 역사》 (1915)
- 《사도행전에 대한 최근의 비평》 (1919)
- 《바울 종교의 기원》 (1921)
- 《초보자를 위한 신약 헬라어》 (1923)
-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
- 《믿음이란 무엇인가?》 (1925)
-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1930)
- 《현대 세계의 기독교 신앙》 (1936)
-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1937)
5. 한국에 미친 영향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은 한국 장로교, 특히 보수적인 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박형룡, 박윤선 등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들은 메이천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한국의 많은 보수 신학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모델로 삼아 설립되었으며, 메이천의 신학은 이들 신학교의 교육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6. 평가
메이천은 20세기 초 미국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맞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고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그의 신학적 통찰력과 변증 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를 잠식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메이천은 복음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Steering a Course Between Fundamentalism and Transformationalism: J. Gresham Machen's View of Christian Scholarship; Part 1
https://opc.org/OS/2[...]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2020-02-02
[2]
서적
What's the Name, Please?
Funk & Wagnalls
1936
[3]
학술지
J. Gresham Machen Was Right About the Gulf Crisis
http://www.reformed.[...]
1991
[4]
웹사이트
The Auburn Heresy
http://opc.org/cce/c[...]
[5]
웹사이트
Testimony before the House & Senate Committees on the Proposed Department of Education
http://homepage.mac.[...]
1926-02-25
[6]
뉴스
J. Gresham Machen on Imperialism, Militarism, and Conscription
https://www.lewrockw[...]
LewRockwell.com
2008-08-22
[7]
웹사이트
J. Gresham Machen's Response to Modernism
http://www.desiringg[...]
[8]
간행물
The Impregnable Rock
1931-12
[9]
뉴스
Dr. Fundamentalis
http://www.garynorth[...]
1937-01-18
[10]
뉴스
The Presbyterian
1937-01-21
[11]
서적
岡田稔著作集
いのちのことば社
[12]
서적
日本基督改革派教会史-途上にある教会
日本基督改革派教会歴史資料編纂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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