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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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기독교를 현대적 지성에 맞춰 재해석하려는 흐름으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장 이후 전통적 교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시작되어 계몽주의의 이성 중시, 경건주의의 종교적 경험 강조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경의 권위, 예수의 신성, 기적 등을 재해석하거나 부정하기도 했다. 슐라이어마허, 리츨, 하르나크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며,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신정통주의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분파로 나뉘었다. 20세기에는 사회복음, 해방신학 등 다양한 신학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긍정적 영향과 함께 성경적 근거 부족, 인간 중심적 사고라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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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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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개요 | |
유형 | 기독교 신학 운동 |
특징 | 이성과 경험을 교리적 권위보다 우선시함 |
관련 운동 | 기독교 좌파 |
역사 | |
기원 |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
주요 발전 시기 | 19세기 |
관련 논쟁 |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 |
주요 사상 | |
핵심 원칙 | 기독교 교리를 현대적 지식과 경험에 맞춰 해석 성경에 대한 비판적 접근 사회 정의 강조 |
신학적 특징 | 초자연적 요소 약화 신학적 자유주의 |
영향 | |
영향 | 사회 운동 및 개혁에 영향 현대 기독교 신학 형성에 기여 교회 내 다양한 신학적 입장 형성 |
관련 용어 | |
영어 명칭 | Liberal Christianity Liberal Theology |
관련 용어 | 기독교 근대주의 |
추가 정보 | |
참고 문헌 | 다이슨 도로린 알리스터 맥그래스 |
웹사이트 | 종교 데이터 자료 보관소 |
2. 역사
자유주의 신학은 16세기 에라스무스와 이신론자들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에서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이성적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가르침만을 남기려 했다.[18]
18세기에는 서유럽에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천지창조와 신의 섭리 해석에서 벗어나는 "합리주의" 흐름이 나타났다. 이 흐름은 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종교개혁과 철학자들의 다양한 관념을 절충하려는 시도였다.[35] 그러나 당시 과학이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전통적 개념을 대체할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지는 못했다.[35]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실망에 응답하여, 하나님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감정으로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3]
알브레히트 리츨은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강조에 동의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이 역사,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삼위일체 같은 교리를 거부하고, 기독교적 삶을 윤리적 활동과 발전으로 이해했다. 리츨의 사상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 개신교 신학의 주요 학파로 남았다.[31]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36] 20세기 초, 아돌프 폰 하르나크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38] 당시 자유주의는 역사, 종교 경험, 사회적 그리스도교라는 세 가지 낙관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었다.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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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 종교와 윤리에 있어 확신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원천은 역사라는 믿음 |
둘째 | 자연과학처럼 경험을 확신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경향 (단, 종교 경험은 순수해야 하며, 다양하게 재해석되어야 함) |
셋째 |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국면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 (사회적 그리스도교) |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은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을 깨뜨렸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낙관도 어두워졌다.[38]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전 연구사』는 역사 기반 방법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빌헬름 2세의 참전 메시지를 아돌프 폰 하르나크가 기고하고, 많은 신학자들이 93인의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면서 문명과 그리스도교계의 위기가 인식되었다.[38] 이러한 배경에서 칼 바르트 등에 의한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대립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2. 1.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발전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에 기독교를 현대 지성적 맥락에 맞추려는 시도 속에서 발전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수용되면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신학자 앨리스터 맥그래스에 따르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앙을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만 의존하기 어려워 "공통된 인간 경험에 신앙의 기초를 두고, 그것을 현대적 세계관에 맞게 해석하려 했다."[1]자유주의 신학은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며, 계몽주의의 인간 이성에 대한 높은 평가, 그리고 종교적 경험과 교회 일치 운동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사상 등 여러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2]
자유주의적 개신교와 보수적인 개신교는 종교적 권위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외치며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보았고, 모든 교리와 가르침, 교회의 권위가 성경에서 유래한다고 보았다.[3] 반면,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이나 성경 무류성 교리를 거부했으며,[4] 이를 성경에 대한 우상숭배로 간주했다.[5]
자유주의자들은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도구로 사용해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구약성경이 전통적인 견해만큼 오래전에 작성된 것인지, 복음서가 실제로 예수의 말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했다.[6] 이들은 "신약성경의 어떤 기록도 전통적으로 이해된 의미에서 사도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7]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 교회의 진정한 기준"으로 간주했다.[8]
독일의 신학자 빌헬름 브레데는 "신약학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며, 교리나 조직신학과는 완전히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헤르만 궁켈은 "전통적인 영감 교리를 대신하여 이제는 역사학적 연구방법론이 자리잡았다"고 말했다.[9]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이단으로 간주했다.[10][11]
전통적인 개신교는 성경과 계시가 항상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확인해 준다고 믿었다. 반면, 자유주의적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기독교적 신을 경험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보편적 경험이라는 두 가지 종교적 권위를 인정했다. 즉,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공통적인 인간 이성과 경험에만 의존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보았다.[12]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성경 자체의 오류나 모순보다는 전통 교리를 폐기하거나 재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13] 원죄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약성서 해석이 마니교와의 연관성으로 왜곡되었다고 판단하여 거부되었다. 기독론도 새롭게 해석되어, 예수의 인간성이 강조되었고, 그의 신성은 "인류 전체가 본받을 수 있는 특질을 예수가 구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14]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인도주의적 가르침을 강조하며, 이를 종교적 전통과 초자연적 신앙에 얽매이지 않은 세계 문명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15] 예수의 공생애와 관련된 기적적 사건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었으며,[16] 19세기 교회에서는 기적에 대한 믿음이 단순한 미신인지, 아니면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고, 신학적 타협이 시도되었다.[17] 일부는 예수의 기적을 야훼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적 서사로 해석하기도 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16세기 에라스무스와 이신론자들이 기독교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이성적 사랑"이라는 본질적 가르침만 남기려 했던 시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18]
19세기의 자유주의·합리주의 흐름에 대해 "정통파",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흐름이 생겨나 격렬한 항쟁이 벌어졌으며, 이 항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9] 복음주의 관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전통적인 종교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복음동맹은 리버럴과 유니테리언의 이단에 대해 복음주의 9개조를 확인했다.[20] 위기감을 느낀 복음주의자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를 일으켰다.
2. 1. 1.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1768–1834)는 자유주의 개신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23] 그는 계몽주의 합리론에 대한 낭만주의의 실망감에 응답하여, 하나님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학에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감정이다. 자신의 죄와 구원의 필요성을 의식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며,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신학은 항상 특정한 종교적 맥락을 반영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그가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한 원인이 되었다.[23]2. 1. 2. 알브레히트 리츨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감정을 강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신념은 역사,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1] 리츨은 기적적인 사건을 고려하지 않고 역사를 연구할 때, 신약성경이 예수의 신성한 사명을 확증한다고 믿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를 거부했다.[31] 리츨에게 기독교적 삶은 윤리적 활동과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교리는 사실의 주장이 아니라 가치 판단으로 이해되었다.[31]리츨은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종교를 "인간의 자연적 기원과 환경을 극복하는 영혼(또는 도덕적 주체)의 승리"로 간주했다.[31] 리츨의 사상은 이후 다른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리츨 학파는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 개신교 신학에서 주요 학파로 남았다. 리츨의 저명한 추종자들로는 빌헬름 헤르만, 율리우스 카프탄, 아돌프 폰 하르나크 등이 있다.[31]
2. 1. 3. 아돌프 폰 하르나크
알브레히트 리츨의 저명한 추종자 중 한 명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1930)는 독일 신학자이자 교회사가로서 사회복음을 장려했으며, 『교의사 개론』(Lehrbuch der Dogmengeschichte|교의사de)이라는 역사 신학의 중요한 저서를 저술했다.[23]2. 2.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변화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다른 고대 서적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제자들의 착각으로 여기는 경우까지 생겨났다.[36]20세기 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계승자인 자유주의는 아돌프 폰 하르낙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통해 지지를 얻었다.[38] 당시 자유주의는 세 가지 낙관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었다.[38]
구분 | 내용 |
---|---|
첫째 | 종교와 윤리에 있어 확신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원천은 역사라는 믿음 |
둘째 | 자연과학처럼 경험을 확신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경향 (단, 종교 경험은 순수해야 하며, 다양하게 재해석되어야 함) |
셋째 |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국면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 (사회적 그리스도교) |
이러한 요소들은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로 특징지어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은 이러한 낙관을 깨뜨렸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낙관도 어두워지게 되었다.[38]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전 연구사』(1906년)는 역사를 확신의 기반으로 삼는 방법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빌헬름 2세의 참전 메시지를 아돌프 폰 하르낙이 기고하고, 많은 신학자들이 93인의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면서 문명과 그리스도교계의 위기가 인식되었다.[38]
이러한 배경에서 칼 바르트 등에 의한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대립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2. 2. 1. 신정통주의의 등장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다른 고대 서적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제자들의 착각으로 여기는 경우까지 생겨났다.[36] 이러한 자유주의·합리주의 흐름에 반발한 전통주의자들은 "정통파", "복음주의" 흐름을 일으켰고, 이후 격렬한 논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6]20세기 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는 아돌프 폰 하르낙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통해 지지를 얻었다.[38] 당시 자유주의는 세 가지 낙관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었다.[38] 첫째, 역사만이 종교와 윤리에 확신을 주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믿음이었다.[38] 둘째, 종교 경험을 확신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경향이었다.[38] 셋째,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국면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 즉 "사회적 그리스도교"였다.[38]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은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을 깨뜨렸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낙관도 어두워지게 되었다.[38]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예수전 연구사』(1906년)는 역사를 확신의 기반으로 삼는 방법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빌헬름 2세의 참전 메시지를 아돌프 폰 하르낙이 기고하고, 많은 신학자들이 93인의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면서 문명과 그리스도교계의 위기가 인식되었다.[38]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칼 바르트 등에 의한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했다.
2. 2. 2. 자유주의 신학의 다양화
20세기 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은 아돌프 폰 하르낙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통해 지지를 얻었다.[38]당시 자유주의의 기반에는 세 가지 낙관적인 요소가 있었다.[38]
첫째, 종교와 윤리에 있어 확신의 유일한 원천은 역사라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 위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확고한 역사적 핵심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8]
둘째, 자연과학이 경험 위에 확신을 세우는 것처럼, 종교 경험을 확신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종교 경험에는 완전히 순수해야 한다는 것,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붙었다. 더 나아가, 현대 지성이 그리스도교의 권위와 성경에 대한 복종을 완화하고 교리를 경감하려는 경향을 수반했다.[38]
셋째,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국면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그리스도교"라고도 표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사회주의 쪽에 서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와는 동맹하지 않았고, 계급 투쟁은 거부하며 제도의 변혁과 정신의 변혁을 동시에 추구했다.[38]
이러한 요소들은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로도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유럽에 큰 재앙을 가져온 제1차 세계 대전은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을 깨뜨렸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그동안의 낙관도 어두워지게 되었다.[38]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저술한 『예수전 연구사』(1906년)는 역사를 확신의 기반으로 하는 방법론의 "실패 확인서"와 같은 것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자유주의에 대한 어둠은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빌헬름 2세의 참전 메시지를 아돌프 폰 하르낙이 기고했고, 많은 신학자들(자유주의자뿐 아니라 보수파도 포함)이 93인의 지식인 선언에 서명했던 것이 고려되면서, 문명의 위기뿐 아니라 자유주의를 포함한 그리스도교계의 위기가 많은 신학자들에게 인식되게 되었다.[38]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칼 바르트 등에 의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흐름이 생겨났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견해 대립은 19세기부터 21세기 초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3. 주요 특징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수용되면서 창세기 창조 서술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의 인간 이성에 대한 높은 평가, 경건주의 사상 등 여러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56]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이나 성경 무류성 교리를 거부했으며,[56] 이를 성경에 대한 우상숭배로 간주했다.[57] 대신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도구로 사용해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성경과 계시가 항상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확인해 준다고 믿었다. 반면, 자유주의적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기독교적 신을 경험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보편적 경험이라는 두 가지 궁극적인 종교적 권위를 인정한다. 즉,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공통적인 인간 이성과 경험에만 의존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보았다.[56]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전통 교리를 폐기하거나 재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61] 원죄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기인한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되었다. 기독론도 새롭게 해석되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신성은 "인류 전체가 본받을 수 있는 특질을 예수가 구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56]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인도주의적 가르침을 강조하며, 이를 종교적 전통과 초자연적 신앙에 얽매이지 않은 세계 문명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61] 이에 따라,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공생애와 관련된 기적적 사건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었다.[62]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야훼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적 서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종교적 신념은 역사,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를 거부했다. 리츨에게 기독교적 삶은 윤리적 활동과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교리는 사실의 주장이 아니라 가치 판단으로 이해되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인류가 더 큰 진보를 계속 이룰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56] 이러한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는 때때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3. 1. 성서 비평
자유주의적 개신교는 성서 비평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조하며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보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무오설이나 성경 무류성 교리를 거부했다.[56] 이들은 성경을 우상숭배로 여기기도 했다.[57]자유주의 신학은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도구로 사용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이러한 방법은 구약성경이 전통적인 견해만큼 오래전에 작성되었는지, 복음서가 실제로 예수의 말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58] 그 결과, 자유주의자들은 신약성경의 어떤 기록도 전통적으로 이해된 의미에서 사도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59] 이들은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 교회의 진정한 기준으로 삼았다.[60]
독일의 신학자 빌리암 브레데는 신약학이 조직신학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헤르만 궁켈은 역사학적 연구방법론이 전통적인 영감 교리를 대체했다고 말했다.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과학적 관점(진화론 등)을 수용하고, 성경에 기록된 신화적 요소를 과학적·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유익한 우화(혹은 신화·설화·이야기 등)로 간주한다. 고등비평(성경 본문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해석), 비신화화를 지지하며, 기록된 언어가 기록된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를 해석의 제1의로 한다.
일부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나 예수의 부활조차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신의 존재도 부정하지 않는다.
3. 1. 1. 고등 비평
자유주의 신학은 진화론 등 과학적 관점을 수용하며, 성경에 기록된 천지창조, 노아의 방주, 바벨탑, 여호수아기 등의 신화적 요소를 과학적·역사적 사실로 단정 짓지 않고, 종교적으로 유익한 우화(혹은 신화·설화·이야기 등)로 간주한다.고등 비평(성경 본문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해석)과 비신화화를 지지하며, 기록된 언어가 기록된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를 해석의 최우선으로 삼는다.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라는 전설이나, 이사야서가 한 명의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전설 등을 반드시 채택하지 않으며, 성경무오설, 축자영감설, 성경무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모세오경의 저자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예언자 모세라는 전통적인 이해를 부정하고, 문서가설을 지지한다.
또한, 고문서학 외에도 고고학, 역사학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고대의 신앙의 모습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현대의 과제에 맞춘 기독교 신앙을 재구축하려고 한다.
일부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나 예수의 부활조차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신의 존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과 기본 신조에 제시되는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통 신앙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이단 신학이라기보다는 그 종교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의문시된다.
3. 1. 2. 문서 가설
자유주의 신학은 모세오경의 저자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예언자 모세라는 전통적인 이해를 부정하고, 문서가설을 지지한다.[27]3. 2. 기독론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론을 새롭게 해석하여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그의 신성을 "인류 전체가 본받을 수 있는 특질을 예수가 구현한 것"으로 이해했다.[61]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공생애와 관련된 기적적 사건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었다.[62] 19세기 교회에서는 기적에 대한 믿음이 단순한 미신인지, 아니면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신학적 타협이 시도되었다.[62]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야훼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적 서사로 해석하기도 한다.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종교적 신념은 역사,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를 거부했다. 리츨에게 기독교적 삶은 윤리적 활동과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교리는 사실의 주장이 아니라 가치 판단으로 이해되었다.
3. 3. 종교적 권위
자유주의적 개신교는 보수적인 개신교와는 다른 종교적 권위를 인정했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통해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보았고, 모든 교리와 가르침, 교회의 권위가 성경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56] 전통적인 개신교도는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주장했다.[57] 반면,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이나 성경 무류성 교리를 거부했으며,[56] 이를 성경에 대한 우상숭배로 간주했다.[57]자유주의자들은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도구로 사용해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이러한 방법은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되었으며, 구약성경이 전통적인 견해만큼 오래전에 작성된 것인지, 복음서가 실제로 예수의 말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했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신약성경의 어떤 기록도 전통적으로 이해된 의미에서 사도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이로 인해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전통적 관점 대신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 교회의 진정한 기준"으로 간주했다.
독일의 신학자 빌리암 브레데는 "다른 모든 실질적 학문과 마찬가지로, 신약학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며, 교리나 조직신학과는 완전히 무관하다"고까지 주장했다. 신학자 헤르만 궁켈 역시 "전통적인 영감 교리를 대신하여 이제는 역사학적 연구방법론이 자리잡았다"고 적었다.[58] 한편,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이단으로 간주했다.[59][60]
전통적인 개신교는 성경과 계시가 항상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확인해 준다고 믿었다. 반면, 자유주의적 개신교에서는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기독교적 신을 경험하는 것과, 인간으로써 체험하는 보편적 경험이라는 두 가지 궁극적인 종교적 권위를 인정한다. 즉,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공통적인 인간 이성과 경험에만 의존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보았다.
3. 4. 사회적 관심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에 기독교를 현대 지성적 맥락에 적응시킬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발전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받아들여지면서 창세기 창조 서술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신학자이자 지성사가인 앨리스터 맥그래스에 따르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만 근거한 신앙을 세울 수 없었기에 "그 신앙을 공통된 인간 경험에 뿌리내리고, 현대 세계관 내에서 의미가 통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했다."[56]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가르침을 종교적 전통과 전통적으로 이교적인 유형의 신앙의 흔적이 없는 세계 문명의 기준으로 높이려고 했다.[61] 그 결과,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삶과 관련된 기적적인 사건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었다.[62] 기적에 대한 믿음이 단순한 미신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지에 대한 논쟁은 19세기 교회 내에서 위기를 초래했고, 그에 대한 신학적 타협이 모색되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적인 이야기로 읽는 것을 선호한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인류가 더 큰 진보를 계속 이룰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56] 이러한 역사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는 때때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 주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지지자들은 이것이 가져올 변화가 기독교 교회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의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표현은 기독교 사회복음이었으며, 가장 영향력 있는 대변인은 미국 침례교 신학자 월터 라우쉔부시였다. 라우쉔부시는 미국 문화 속에 제도화된 네 가지 영적인 악(그는 이것을 "초개인적 실체", 즉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조직의 특성으로 규정했다)을 확인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및 군국주의였다.[17]
미국 프로테스탄트 주류 내의 다른 후속 신학 운동으로는 정치적 해방 신학, 철학적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실존주의( 쇠렌 키르케고르[18]에서 시작되었고 루돌프 불트만[19] 및 폴 틸리히[20] 와 같은 다른 신학자와 학자들을 포함함)와 신복음주의, 신정통주의, 구정통주의와 같은 보수적인 운동 등 다양한 신학적 영향이 있었다. 자유주의 사회학자인 딘 M. 켈리는 1970년대 초에 이 문제를 연구하도록 의뢰받았는데, 그는 자유주의 교회 쇠퇴의 잠재적 이유를 확인했다. 즉, 일부 사람들이 복음의 과도한 정치화, 특히 복음을 좌파 민주당/진보적 정치적 목표와 연결한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21]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존 셸비 스퐁[22], 카렌 암스트롱 및 스코티 맥레넌과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서 해석학과 신학에 대한 비교리적인 신학적 연구가 부활했다.
4. 다양한 분파
자유주의 신학은 다양한 분파로 나뉜다.
-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
앨리스터 맥그래스에 따르면, 19세기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수용되면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이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만 신앙의 기초를 두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공통된 인간 경험에 신앙의 기초를 두고, 그것을 현대적 세계관에 맞게 해석하려 했다"고 설명한다.[56]
계몽주의의 인간 이성에 대한 높은 평가, 종교적 경험과 교회 일치 운동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사상 등 여러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57] 성서무오설이나 성경 무류성 교리를 거부했으며,[60] 이를 성경에 대한 우상숭배로 간주했다.[61]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자유주의 개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강조에 동의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은 역사,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가톨릭교회 내에서 가톨릭 근대주의로 알려진 자유주의 신학 운동이 발전했다. 알프레드 루아지와 조지 티렐이 대표적인 근대주의 작가이다. 그러나 근대주의는 가톨릭교회 지도부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교들과 다른 신학자들이 채택한 네 가지 사상 흐름 중 하나로 자유주의적 태도가 언급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하느님 나라를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으로, 일면적이고 근거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34]
- '''퀘이커교 자유주의'''
1820년대, 퀘이커교는 힉사이트-정통파 분열이라는 큰 분파로 나뉘었다. 힉사이트파는 퀘이커 목사인 엘리아스 힉스가 이끌었는데, 그는 교리나 신조보다는 자신의 내적 빛(inward light)에 귀 기울이는 것에 강한 초점을 맞추었다.[12]
4. 1.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
자유주의적 개신교는 기독교를 현대 지적 상황에 맞게 조화시키려는 노력으로 19세기에 발전하였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수용되면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신학자이자 지성사 연구자인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만 신앙의 기초를 두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공통된 인간 경험에 신앙의 기초를 두고, 그것을 현대적 세계관에 맞게 해석하려 했다"고 설명한다.[56]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며, 계몽주의의 인간 이성에 대한 높은 평가, 그리고 종교적 경험과 교회 일치 운동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사상 등 여러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57]자유주의적 개신교와 보수적인 개신교는 종교적 권위를 다르게 이해했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보았으며, 모든 교리와 가르침, 교회의 권위가 성경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58]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주장했다.[59] 반면,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이나 성경 무류성 교리를 거부했으며,[60] 이를 성경에 대한 우상숭배로 간주했다.[61]
자유주의자들은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이러한 방법은 구약성경이 전통적인 견해만큼 오래전에 작성되었는지, 복음서가 실제로 예수의 말을 기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62] 그 결과, 자유주의자들은 "신약성경의 어떤 기록도 전통적으로 이해된 의미에서 사도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63] 이는 "오직 성경" 대신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 교회의 진정한 기준"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64]
독일의 신학자 빌헬름 브레데는 "다른 모든 실질적 학문과 마찬가지로, 신약학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며, 교리나 조직신학과는 완전히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헤르만 궁켈은 "전통적인 영감 교리를 대신하여 이제는 역사학적 연구방법론이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존 셸비 스퐁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성경과 계시가 항상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확인해 준다고 믿었다. 반면, 자유주의적 개신교는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기독교적 신을 경험하는 것과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보편적 경험, 이 두 가지를 궁극적인 종교적 권위로 인정했다. 즉,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공통적인 인간 이성과 경험에만 의존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성경 자체의 오류나 모순보다는 전통 교리를 폐기하거나 재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원죄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약성서 해석이 마니교와의 연관성으로 왜곡되었다고 판단하여 거부되었다. 기독론 역시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그의 신성은 "인류 전체가 본받을 수 있는 특질을 예수가 구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인도주의적 가르침을 강조하며, 이를 종교적 전통과 초자연적 신앙에 얽매이지 않은 세계 문명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따라서 예수의 공생애와 관련된 기적적 사건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었다. 19세기 교회에서는 기적에 대한 믿음이 단순한 미신인지, 아니면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신학적 타협이 시도되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야훼의 능력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적 서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16세기 에라스무스와 이신론자들이 기독교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이성적 사랑"이라는 본질적 가르침만 남기려 했던 시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자유주의 개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실망감에 응답하여, 하나님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학에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감정이며, 죄와 구원의 필요성을 의식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며, 고립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은 항상 특정한 종교적 맥락을 반영하며, 이는 그가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한 원인이 되었다.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은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강조에 동의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은 역사, 특히 신약성경의 역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츨은 기적을 고려하지 않고 역사를 연구할 때, 신약성경이 예수의 신성한 사명을 확증한다고 믿었다.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했다. 리츨에게 기독교적 삶은 윤리적 활동과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교리는 사실의 주장이 아니라 가치 판단으로 이해되었다.
리츨은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종교를 "인간의 자연적 기원과 환경을 극복하는 영혼(또는 도덕적 주체)의 승리"로 간주했다. 그의 사상은 빌헬름 헤르만, 율리우스 카프탄, 아돌프 폰 하르나크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리츨 학파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독일 개신교 신학의 주요 학파로 남았다.
4. 2.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19세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 신학적 자유주의가 존재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가톨릭교회 내에서 가톨릭 근대주의로 알려진 자유주의 신학 운동이 발전했다.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티즘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근대주의는 계몽주의에 발맞춰 가톨릭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급진적인 성서 비평을 지지했으며, 특히 그리스도론과 같이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질문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또한 신학적 측면보다 기독교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했다. 알프레드 루아지(Alfred Loisy)와 조지 티렐(George Tyrrell)이 대표적인 근대주의 작가이다. 그러나 근대주의는 가톨릭교회 지도부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션 오리어던(Sean O'Riordan)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교들과 다른 신학자들이 채택한 네 가지 사상 흐름 중 하나로 자유주의적 태도를 언급한다. 20세기 중반의 누벨 테올로지 운동을 반영하는 이 자유주의적 태도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진취적인, 새로운 신앙 모험을 위한 준비가 된" 태도로, 교회의 목회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상하"로 "새로움"을 선택했다.[11]
근대주의와 미국주의에 대한 교황의 비난은 미국에서 자유주의 가톨릭 전통의 발전을 늦추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을 경험했다.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와 프랜시스 슈슬러 피오렌자(Francis Schussler Fiorenza)가 대표적인 자유주의 가톨릭 신학자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가 인식되고 있다.[33]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하느님 나라를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으로, 일면적이고 근거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34]
4. 3. 자유주의 퀘이커주의
1820년대, 퀘이커교(또는 친구들의 종교 사회, Quakers)는 힉사이트-정통파 분열이라는 큰 분파로 나뉘었다. 힉사이트파는 퀘이커 목사인 엘리아스 힉스가 이끌었는데, 그는 교리나 신조보다는 자신의 내적 빛(inward light)에 귀 기울이는 것에 강한 초점을 맞추었다.[12] 힉스는 성경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이 신자들과 기독교 전체에 해롭다고까지 말했다.[13] 힉스는 사탄을 외부 존재로 부인했고 영원한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14]힉사이트 퀘이커교는 종종 자유주의 계열로 불리며, 오늘날에는 친구들 총회(Friends General Conference)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중도적인 친구들 연합회(Friends United Meeting)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힉사이트 퀘이커들은 어떤 확고한 신앙 고백을 고수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믿는 내적 빛에 이끌린다.[15] 복음주의 퀘이커(거니파-보수파 분열 참조)가 인간 이성을 고수하는 것으로 여겨진 반면, 자유주의 퀘이커들은 더욱 영적이고 개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자유주의 퀘이커들은 기독교 보편주의, 종교 다원주의, 진보적 기독교 및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른 사상들을 다양하게 받아들인다.[16]
5.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
21세기 대한민국 개신교 신학의 주류는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다. 개혁신학 관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교리'로 간주된다. 대한민국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연구하지 않으며, 21세기 신학의 주류는 신정통주의, 고전정통주의, 해방신학, 공공신학 등이다. 대한민국에서 역사신학 분야를 제외하고 자유주의 신학 연구는 더 이상 없다.[63]
보수적 신학(개혁주의, 루터주의)을 따르는 이들은 진보적 신학이나 보수적 신학과 차이를 지닌 신학적 활동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보수적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조차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칭하기도 한다.[64]
5. 1. 한국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
21세기 대한민국 개신교 신학의 주류는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다. 개혁신학 관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교리'로 본다. 대한민국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연구하지 않으며, 21세기 신학의 주류는 신정통주의, 고전정통주의, 해방신학, 공공신학 등이다. 대한민국에서 역사신학 분야를 제외하고는 자유주의 신학 연구는 거의 없다.[63]대한민국에서 영향력이 사라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는 주로 보수적 신학(개혁주의, 루터주의)을 따르는 이들이 사용한다. 이들은 진보적 신학이나 보수적 신학과 다른 신학적 활동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63] 심지어 보수적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조차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칭하기도 한다.[64]
일본의 경우, 1889년 일본합동기독교회(日本組合基督教会)의 오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가 도시샤(同志社)에서 열린 YMCA(基督教青年会) 하계학교에서 "성서의 영감(聖書のインスピレーション)"이라는 강연을 통해 고등비평(高等批評)을 옹호하고 성서신앙(聖書信仰)을 부정하면서 일본 리베랄 신학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39][40][41][42] 오자키는 이 강연에서 영적, 윤리적 영감설을 주장하며 성서에 오류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연구가 필요하고, 신앙의 기초는 성서가 아닌 성령, 즉 실험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43]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는 우에무라-에이나 기독론 논쟁에서 리베랄 신학자인 에이나 단조(海老名弾正)를 추방했지만,[39] 그의 성서관 역시 리베랄의 영향을 받아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보수파로부터 받았다.[44] 우에무라는 언어영감(言語霊感)을 성서숭배(聖書崇拝)라고 비판했으며, 그가 리베랄 교재를 사용한 것은 남장로선교회(南長老ミッション)와 결렬되는 원인이 되었다.[41]
존 M.L. 영(ジョン・M.L.ヤング)은 일본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의 고등비평으로 인해 신앙이 무력화되었고, 우에무라 신학이 간이신조주의(簡易信条主義)였기 때문에 이교의 우상숭배(偶像崇拝)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 주장했다.[45]
복음파는 프로테스탄트를 에큐메니즘(エキュメニズム)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파(리베랄파)와 복음파(성서신앙파)로 분류한다.[46][47] 일본복음동맹(日本福音同盟)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복음주의(福音主義)와 에큐메니칼파에 반대하는 복음파를 정의하며, WCC 계열의 에큐메니칼파(일본기독교단 등)는 복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48] 또한 복음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리베랄 신학에 기반한 교회 합동 운동"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는 파라처치(パラチャーチ) 조직이 성립되었다고 본다.[49]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내용은 김재준, 안병무, 서남동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5. 1. 1. 김재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김재준'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5. 1. 2. 안병무
안병무한국어(安炳茂, 1922년 6월 23일 ~ 1996년 10월 19일)는 한국의 신학자이다.5. 1. 3. 서남동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서남동'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5. 2. 보수 신학과의 갈등
21세기 대한민국 개신교 신학의 주류는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 교리'이다. 대한민국 개신교 신학계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연구하지 않는다. 21세기의 신학 주류는 신정통주의, 고전정통주의, 해방신학, 공공신학 등이며, 대한민국에서 역사신학 분야를 제외하고 자유주의 신학 연구는 더 이상 없다.[63]대한민국에서 영향력이 사라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는 주체는 보수적 신학(개혁주의, 루터주의)을 지닌 이들이다. 이들은 진보적 신학이나 보수적 신학과 차이를 지닌 신학적 활동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63] 심지어 보수적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고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칭하기도 한다.[64]
6. 영향 및 비판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초 주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지지자들은 이것이 기독교 교회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 사회복음은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표현이었으며, 월터 라우쉔부시는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라우쉔부시는 미국 문화에 제도화된 개인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군국주의를 영적인 악으로 규정했다.[17]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카를 바르트와 라인홀트 니부어와 같은 신학자들은 신정통주의를 통해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신정통주의는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죄와 인간 본성의 현실을 강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인 격차를 강조했다.
미국 주류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는 해방 신학, 포스트모더니즘 기독교, 기독교 실존주의(쇠렌 키르케고르[18], 루돌프 불트만[19], 폴 틸리히[20]), 신복음주의, 구정통주의 등 다양한 신학 운동이 나타났다. 자유주의 사회학자 딘 M. 켈리는 자유주의 교회 쇠퇴의 잠재적 이유로 복음의 과도한 정치화, 특히 좌파 민주당/진보적 정치 목표와의 연결을 지적했다.[21]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존 셸비 스퐁[22], 카렌 암스트롱, 스코티 맥레넌과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성서 해석학과 신학에 대한 비교리적인 신학적 연구가 다시 활발해졌다.
6. 1. 비판적 관점
자유주의 신학은 성서비평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전통적인 교리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신학적 경향이다. 이러한 관점은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 무오류설을 거부하며, 성경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기도 한다.[56][57] 이들은 역사비평 등 현대적 성서비평학을 사용하여 성경을 이해하려 했으며, 그 결과 신약성경의 어떤 기록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도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58] 이에 따라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 교회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독일의 신학자 빌헬름 브레데는 신약학이 조직신학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으며, 헤르만 궁켈은 역사학적 연구방법론이 전통적인 영감 교리를 대체했다고 언급했다.[58]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이단으로 간주했다.[59][60]
자유주의 신학은 전통적인 원죄 교리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왜곡된 해석으로 보아 거부하고, 기독론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며 그의 신성을 인류가 본받을 특질로 이해한다. 또한, 예수의 기적보다는 그의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며, 기적을 비유적 서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존 그레섬 메이첸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기독교와 다른 종교로 규정하고, 기독교의 주요 적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이 아닌 죄인의 감정에 기초한다고 비판했다. 로버트 찰스 스프롤은 펠라기우스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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