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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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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탐험가로, 1786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818년 북서 항로 탐험대를 이끌었으나, 신기루를 산맥으로 오인하여 탐험을 중단했다. 1829년에는 외륜선 빅토리 호를 이용한 두 번째 탐험에서 부시아 반도에서 자북극을 발견했으나, 얼음에 갇혀 4년간 고립되었다가 이누이트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1850년에는 존 프랭클린 탐험대를 수색하기 위해 세 번째 북극 항해를 했으며, 1856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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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 (탐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 로스 경
존 로스 경
이름존 로스
경칭
출생1777년 6월 24일
출생지스코틀랜드 위그턴 커크콤
사망1856년 8월 30일
사망지잉글랜드 런던
친척제임스 클라크 로스 (조카)
직업 및 경력
직업탐험가, 해군 장교
소속영국 해군
복무 기간1786년–1856년
최종 계급해군 소장
영국 대사 (스웨덴 스톡홀름)1839년 3월 8일 - 1846년 2월 10일
수상
수상 내역창립자 메달 (1834년)
스웨덴 검 훈장 기사단장 (1834년)
전투
주요 전투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영국-러시아 전쟁

2. 생애

1818년, 영국 해군 본부가 조직한 북극 탐험대의 지휘를 맡아 북서항로 발견을 위한 첫 시도에 나섰다. 이 탐험의 목표는 캐나다 북부 섬들을 통과해 북극해로 진입하고, 베링 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또한 항해 중 해류, 조류, 얼음 상태, 지구 자기장을 측정하고 생물 및 광물 표본을 수집하는 임무도 있었다. 그해 4월, 로스가 이끄는 탐험대는 이사벨라 호와 알렉산더 호에 나눠 타고 런던을 출발하여 8월에 캐나다랭커스터 해협에 도착했다.

로스는 17세기 탐험가 윌리엄 배핀의 기록을 참고하여 랭커스터 해협 너머에 항로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해협 너머에 거대한 산맥이 있다고 주장하며 탐험을 중단했다. 실제로는 신기루였던 이 산맥에 "크로커 힐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일등 항해사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나 에드워드 새빈 등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환했다[7]. 이 탐험으로 로스는 대령으로 승진했지만, 1년 후 항해 기록이 출판되자 크로커 산맥의 실존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탐험 속행을 주장했던 부하들의 의견이 힘을 얻었다. 이 사건은 그의 평판에 다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29년, 로스는 이전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친구인 펠릭스 부스를 설득하여 두 번째 원정 자금을 마련했다. 그해 5월, 외륜선 ''빅토리'' 호를 타고 출발하여[8] 랭커스터 해협을 지나 미지의 해역으로 들어갔으나, 배가 얼음에 갇혀 4년 동안 고립되었다. 다행히 현지 이누이트의 도움으로 캐나다 북부를 육로로 탐험할 기회를 얻었고, 이 과정에서 부시아 반도에서 북자극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832년, 로스와 승무원들은 결국 배를 포기하고 과거 다른 탐험대가 버리고 간 난파선까지 이동했다. 1년 후 해빙기에 맞춰 난파선에 있던 소형 보트로 탈출을 시도했고, 영국 선박에 구조되어 마침내 빙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극적인 경험과 탐험 중 수집한 과학적, 민속학적 정보는 로스에게 오랫동안 원했던 명성을 안겨주었다[9]. 그러나 지도 제작과 관련하여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조카인 제임스 클라크 로스1830년 제임스로스 해협에서 발견한 3개의 섬을 보퍼트 제도라고 명명했는데, 존 로스는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8~9개의 섬을 지도에 추가하고 클래런스 제도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10][11].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탐험은 로스를 극지 탐험가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받았고, 스웨덴의 북극성 훈장 등 다양한 외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1834년에는 영국 기사작위와 바스 훈장을 받았다.

1850년,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로스는 세 번째 북극 항해에 나섰다. 이번 목적은 1818년 탐험에 동행했던 부하 존 프랭클린이 이끌던 실종된 탐험대를 수색하는 것이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제독으로 승진했다. 귀국 후 스코틀랜드에 은거하다가 1856년 런던 자택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존 로스는 1777년 6월 24일 스코틀랜드 웨스트 갤러웨이의 발사로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소속 인치의 목사인 앤드루 로스와, 덤프리스 시장 로버트 코세인의 딸 엘리자베스 코세인 사이의 아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로크 라이언 해안의 스트랜라에 거주했다.

1786년, 9세에 수습생 신분으로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다. 1789년까지 지중해 함대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해협 함대로 옮겼다. 1808년에는 잠시 스웨덴 해군으로 전적하기도 했으나, 다시 영국 해군으로 복귀하여 1812년에는 중령이 되었다.

2. 2. 해군 경력

1786년, 9세의 나이에 영국 해군에 1등 자원 봉사자로 입대하여 ''HMS Pearl''에 배속되었다. 1789년까지 지중해 함대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해협 함대 소속의 ''HMS Impregnable''에서 잠시 복무하다가 8년 동안 상선 해운으로 옮겨 근무했다.

1799년 9월 영국 해군으로 복귀하여 ''HMS Weazel''의 미드십맨으로 임명되었고, 곧 영국-러시아 네덜란드 침공에 참여했다. 이후 ''HMS Clyde''와 ''HMS Diligence''에서 짧은 기간 복무하며 중위로 활동했다.

1803년부터는 주로 발트해를 중심으로 다양한 선박에서 복무했다. 이 시기에는 ''HMS Grampus''와 제임스 소머즈 후방 제독이 지휘하는 발트해 함대의 기함인 ''HMS Victory''에서도 근무했다. 로스는 해군 복무 중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특히 1806년 스페인 선박에 대한 공격 임무 중 칼과 총검에 의한 상처를 입고 다리와 팔이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1808년 말에는 스웨덴 해군에 파견되어 복무했으며, 1812년 영국 해군으로 복귀하여 중령(Commander)으로 진급했다.

3. 북극 탐험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존 로스는 1818년 해군 본부의 지휘 아래 첫 북극 탐험에 나섰다. 이 탐험은 북서 항로를 발견하려는 시도였으나, 로스는 랭커스터 해협 너머의 신기루를 산맥("크로커 힐스")으로 오인하고 탐험을 중단하여 논란을 낳았다.[7] 이 결정은 부관이었던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 등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려졌으며, 그의 평판에 영향을 미쳤다.

1829년, 로스는 개인 후원자 펠릭스 부스의 도움을 받아 증기선 ''Victory'' 호를 타고 두 번째 북극 탐험을 시작했다.[8] 이 탐험에서 그는 부시아 반도에서 자북극의 위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업적을 세웠다. 하지만 탐험대는 4년 동안 얼음에 갇혔다가 현지 이누이트의 도움과 난파선의 보트를 이용해 극적으로 생환하는 등 큰 고난을 겪었다. 이 경험은 로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나[9], 조카 제임스 클라크 로스가 발견한 섬들의 지도를 수정하여 명명하는 등 지도 제작과 관련하여 또다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10][11] 그럼에도 이 탐험으로 로스는 극지 탐험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여러 훈장을 받았다.

1850년,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로스는 실종된 존 프랭클린의 탐험대를 찾기 위해 세 번째 북극 항해에 나섰으나, 수색은 성과 없이 끝났다. 이듬해 제독으로 승진한 그는 1856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로스의 북극 탐험은 성공과 실패, 명성과 논란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3. 1. 1818년: 첫 번째 북극 탐험

1818년, 로스는 영국 해군성이 조직한 북극 탐험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는 북서 항로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발견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 중 첫 번째였다. 탐험의 주요 목적은 북아메리카 북동쪽 해안을 돌아 캐나다 북부의 섬들을 통과하고 북극해로 진입하여 베링 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부가적으로 해류, 조류, 얼음 상태, 지구 자기장 등을 기록하고 항해 중 발견되는 생물 및 광물 표본을 수집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탐험대는 1818년 4월 런던을 출발했다. 로스는 해군성이 고용한 선박 이사벨라(Isabella)호를 지휘했고,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 중위가 지휘하는 알렉산더(Alexander)호가 동행했다. 로스는 배핀 만을 반시계 방향으로 항해하며 약 200년 전 윌리엄 배핀의 탐험 기록을 참고하고 그의 관찰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8월에는 배핀 섬 북쪽 끝에 위치한 랭커스터 해협에 도착했는데, 이 해협은 훗날 북서 항로의 동쪽 입구임이 밝혀졌다.

로스는 랭커스터 해협을 따라 서쪽으로 수 마일 항해했으나, 해협 끝에 거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를 실제 지형으로 오인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그는 이 가상의 산맥을 당시 해군성 제1서기였던 존 윌슨 크로커의 이름을 따 '크로커 산맥'(Crocker Mountains) 또는 '크로커 힐스'(Crocker Hills)라고 명명했다.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와 에드워드 새빈을 포함한 여러 장교들은 로스가 본 것이 신기루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더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로스는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탐험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귀환했다.[1][7]

1년 후 로스의 항해 기록이 출판되자, 크로커 산맥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일었다. 탐험 속행을 주장했던 부하 장교들의 의견이 알려지면서 로스의 판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는 그의 명성에 상당한 흠집을 냈다. 실제로 이 탐험은 새로운 지리적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과가 거의 없었다. 다만, 이 탐험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고래잡이 어선들이 배핀 만 북쪽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특히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가 이후 랭커스터 해협을 재탐사하여 북서 항로의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길을 열었다는 의의는 있다. 로스는 이 탐험의 공로로 대령 계급으로 승진했다.

3. 2. 1829년: 두 번째 북극 탐험

1818년 첫 탐험에서 랭커스터 해협 너머를 거대한 산맥("크로커 힐스")으로 오인하고 탐험을 중단하여 평판이 훼손된 존 로스는 이를 만회하고자 했다.[7] 그의 부관이었던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는 1819년 북극으로 돌아가 로스가 산맥이라 주장했던 곳 너머로 약 965.60km 서쪽으로 항해하며 북서항로의 주요 통로인 패리 해협을 발견했다. 로스는 얕은 흘수의 증기선을 이용해 얼음을 돌파하는 새로운 탐험을 제안했으나, 영국 해군성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 거물인 펠릭스 부스를 설득하여 그의 후원으로 1829년 두 번째 북극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8]

1832년, 현재 캐나다 누나부트 준주에 있는 부시아 만에서 항해 중인 ''Victory'' 호의 마지막 모습


탐험선은 측면에 외륜을 단 증기선 ''Victory'' 호였다. 이 배는 존 에릭슨이 제작한 실험적인 고압 보일러를 장착했으며, 얼음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구조의 노를 가지고 있었다. 1826년에 건조되어 이전에는 리버풀과 맨섬 사이의 연락선으로 사용되었다.[2][3][4] 하지만 엔진에 문제가 생겨 첫 겨울 동안 해안에 버려지게 된다. 탐험대는 존 로스와 그의 조카 제임스 클라크 로스, 윌리엄 톰, 외과 의사 조지 맥디아미드 등 4명의 장교와 19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탐험 목표는 배핀 섬 서쪽 끝에 있는 프린스 리젠트 만으로, 이곳은 패리가 1825년 탐험선 ''Fury'' 호를 잃었던 곳이었다. 로스는 ''Fury'' 호가 남긴 저장품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로스 탐험대는 1829년 5월 23일 템스 강을 출발했다. 배핀 만에는 평소보다 얼음이 적었고, 8월 6일에는 10년 전 자신이 되돌아섰던 지점을 통과했다. 8월 11일 프린스 리젠트 만으로 남하하여 13일에는 패리가 배를 포기했던 퓨리 해변에 도착했다. 배의 선체는 사라졌지만 해변에는 많은 저장품이 남아 있었고, 로스는 그중 일부를 챙겼다.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부시아 만에 최초로 진입했지만, 9월 말에는 퓨리 해변에서 남쪽으로 약 약 321.87km 떨어진 지점에서 얼음에 갇히고 말았다. 탐험대는 부시아 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펠릭스 항구에서 첫 겨울을 보냈다. 1830년 1월, 네칠리크 이누이트족이 찾아와 음식과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그중 한 명을 위해 배의 목수가 나무 다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1830년 봄, 제임스 클라크 로스는 여러 차례 서쪽으로 내륙 탐험을 떠났다. 4월 9일 부시아 반도 서쪽에 도달했고, 5월에는 얼음을 건너 킹 윌리엄 섬의 북서쪽 해안에 도착했으나, 당시에는 이 섬을 본토의 일부로 추정했다. 그해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얼음이 일부 풀렸고, 선원들은 해안의 얼음을 톱으로 잘라내고 배를 워핑하여 열린 수로로 나아갔지만 곧 다시 얼음에 갇혔다. 10월에는 배를 쉐리프 만으로 옮겨 펠릭스 항구에서 불과 약 4.83km 떨어진 곳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1831년 4월이 되어서야 이누이트족이 다시 찾아왔다. 제임스 클라크 로스는 다시 부시아 반도를 횡단하여 1831년 6월 1일, 유럽인 최초로 북자기극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8월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겨우 약 6.44km를 이동한 후 빅토리아 항구에 갇혀 세 번째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1832년 1월이 되자 ''Victory'' 호가 얼음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로스는 배를 포기하고, 배에 실린 보트를 북쪽의 퓨리 해변까지 끌고 가 그곳의 저장품을 확보한 뒤, 열린 바다를 찾아 포경선에 구조될 것을 희망하는 계획을 세웠다.

1834년 ''Victory'' 호의 승무원을 구출하는 Isabella 호


탐험대는 1832년 5월 29일 ''Victory'' 호를 떠났다. 열흘 후, 퓨리 해변을 정찰하고 돌아온 제임스 클라크 로스는 ''Fury'' 호의 보트를 수리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보고했고, 덕분에 무거운 보트를 끄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7월 1일 퓨리 해변에 도착한 그들은 8월 1일 세 척의 보트를 타고 출발하여 8월 말 배로우 해협에 도달했다. 하지만 거대한 얼음 평원에 가로막혀 4주 동안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으나 결국 포기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배티 만에 보트를 남겨두고 다시 퓨리 해변까지 걸어가 네 번째 겨울을 보냈다. 1833년 7월 8일, 그들은 다시 배티 만으로 출발했고, 8월 14일 마침내 열린 바다를 만났다. 다음 날 출발하여 프린스 리젠트 만 입구에 도착했고, 8월 26일에는 배 한 척을 발견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로스가 1819년 탐험 당시 지휘했던 포경선 ''Isabella'' 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만약 로스의 1819년 탐험과 발견이 없었다면 그 해역에 포경선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구조였다. 10월, 탐험대는 마침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탐험에서 세 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로스는 윌리엄 4세에게 소개되었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탐험대원들은 영국 해군 소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으로부터 4년 전체 기간에 대한 두 배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이 극적인 생존 경험과 로스 탐험대가 수집한 과학적, 민족학적 정보는 로스에게 오랫동안 갈망했던 명성을 안겨주었다.[9] 다른 동시대 북극 탐험가들과 비교했을 때, 이는 영웅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았으며, 특히 로스가 이누이트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로부터 생존 지식과 기술을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로스는 탐험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의 굳건하고 충실한 친구인 왕립 해군의 윌리엄 톰 씨는 이사벨라 호에서도 나와 함께 했으며, 사령관으로서의 임무 외에도 기상 일지 작성, 식량 분배 및 관리를 책임졌습니다. 그의 신중한 계획과 제안 덕분에 우리 선원들은 보기 드문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4년 반 동안 사망한 3명 중 2명은 탐험 초기에 기후와 관련 없는 질병으로 사망했으므로, 실제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만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을 여행했던 외과 의사 맥디아미드 씨는 그에 대한 높은 추천에 걸맞은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 그가 수행한 모든 절단 및 수술에서 유용했고 환자 치료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가 국왕 폐하의 봉사에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

> 로스 사령관, 톰 씨, 그리고 저 자신은 실제로 급여 없이 봉사하고 있었지만,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제 동료이자 고통받는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줄 수 없는 점이 더욱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이 탐험의 결과가 과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부시아 만, 부시아 펠릭스 대륙 및 지협, 그리고 수많은 섬, 강, 호수의 발견; 아메리카 대륙 북동쪽 끝이 북위 74도까지 뻗어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의 확립; 모든 종류의 귀중한 관찰, 특히 자기(磁氣)에 대한 관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비로우신 국왕 윌리엄 4세 폐하의 유명한 이름을 북자기극의 정확한 위치에 명명하는 영예를 얻었다는 것입니다."[5]

1834년 로스가 윌리엄 4세에게 헌정한 지도로, 탐험을 통해 발견된 내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로스는 지도 제작과 관련하여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1830년 탐험 중 제임스 클라크 로스는 제임스 로스 해협에서 세 개의 섬을 발견하고 측량하여, 당시 해군 수로국장이었던 프랜시스 보퍼트의 이름을 따 보퍼트 제도라고 명명했다. 존 로스는 이 섬들을 직접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 탐험대장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하여 지도에 8개 또는 9개의 섬을 그려 넣고, 새로 즉위한 윌리엄 4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도로 추정되는 클래런스 제도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10][11]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모험으로 로스는 극지 탐험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고, 영국과 프랑스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으며, 스웨덴 왕립 극성 훈장 기사 작위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 훈위를 받았고, 이듬해 1834년에는 영국의 기사 작위와 바스 훈장 동반 기사(CB) 작위를 받았다.[6] 그는 1839년부터 1846년까지 스톡홀름 주재 영국 영사로 근무했다.

3. 3. 1850년: 세 번째 북극 탐험

1850년, 72세의 로스는 세 번째 북극 항해를 시작했다. 이는 4년 동안 소식이 끊긴 존 프랭클린 경의 탐험대를 찾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개인 선박인 스쿠너 ''펠릭스''(Felix)호를 타고 랭커스터 해협으로 향했다.

하지만 ''펠릭스''호는 특히 튼튼하지 못했고, 항해 중 다른 선박들로부터 로스 선원들의 괴혈병 치료를 위한 식량을 지원받아야 했다. 결국 프랭클린이나 그의 부하들을 찾는 데 실패한 로스는 1851년 10월 그린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귀환 도중 그린란드에서 프랭클린과 그의 일행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접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무시했지만 로스는 이 소문을 믿었으며, 이듬해 제독으로 승진했다.

4. 말년

존 프랭클린 원정대를 수색하는 동안 영국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귀국하여 스코틀랜드 Stranraer|스트란라sco에 은퇴하고 다시는 항해하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스웨덴어덴마크어 지식을 활용하여,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 발트해 지역 문제에 대해 영국 정부에 자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남은 생애 동안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존 프랭클린 구조 노력에 대한 비판을 담은 여러 팸플릿을 출판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영국 해군성에는 지도 품질 문제 등을 끈질기게 제기했다.

1856년 8월 30일 런던 방문 중 사망했으며, 켄살 그린 묘지에 안장되었다.

5. 저서


  • 로스, 존 (1819). ''영국 해군성 명령에 따른 탐험 항해, 영국 해군 선박 이사벨라호와 알렉산더호를 이용하여 배핀 만을 탐험하고 북서 항로의 가능성을 탐구''. 런던: J. 머레이. OCLC 4559652.
  • 로스, 존 & 로스, 제임스 클라크 (1835). ''북서 항로를 탐구하고 북극 지역 주민을 조사한 두 번째 항해 이야기, 기간: 1829년-1833년''. 런던: A.W. 웹스터. OCLC 1113450. [https://archive.org/details/narrativeofsecon01ross 온라인으로 보기]
  • 로스, 존 (1838). ''드 사마레스 제독의 자서전과 서신. 가족이 소유한 원고에서''. 런던: R. 벤틀리. OCLC 176864.

참조

[1] 웹사이트 John Ross: The discovery of the magnetic pole http://epe.lac-bac.g[...] 2018-04-21
[2] 웹사이트 The Voyages and Travels of Captains Ross, Parry, Franklin, and Mr. Belzoni: Forming an Interesting History of the Manners, Customs, and Characters of Various Nations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North-West Passage https://www.gla.ac.u[...]
[4] 웹사이트 About Us | Isle of Man Steam Packet Company https://www.steam-pa[...]
[5] 서적 Ordeal by Ice: the search for the Northwest Passage McClelland & Stewart 1993
[6] 간행물 London Gazette 1834-12-26
[7] 웹사이트 John Ross - The Arctic and More - 19th Century - Pathfinders and Passageways http://www.collectio[...]
[8] 서적 Ordeal by ice; the search for the Northwest Passage McClelland and Stewart Ltd
[9] 웹사이트 Library and Archives Canada http://www.collectio[...]
[10] 문서 Ross
[11] 문서 Bo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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