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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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도일은 1920년 중국 지린성 왕칭현에서 태어나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조직에서 활동했으며, 소련군 정찰병으로도 복무했다. 해방 후 김일성의 호위 부대를 지휘하고, 평양학원 지휘 성원으로 파견되었으며,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소련 군사 대학 유학 후 북한군에서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인민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9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현대 군사 과학 지식을 갖춘 군사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리두익, 조명록 등과 함께 김일성의 경호원 및 보좌관으로 활동했으며, 김정일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사망 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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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주도일 |
원어 이름 | 주도일 (주도일) |
로마자 표기 | Ju Do-il |
출생 | 1922년 |
출생지 | 왕칭 현, 중국 |
사망 | 1994년 7월 5일 |
사망지 | 평양, 북한 |
국적 | 북한 |
민족 | 한국인 |
정당 | 조선로동당 |
경력 | |
소속 군대 |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불명 |
최종 계급 | 차수 |
참전 | 중국 내전 한국 독립운동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 불명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5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 | 불명 |
평양 방어 사령관 | 1988년 12월 ~ 불명 |
수상 | |
훈장 | 김일성훈장 공화국 영웅 제1급 국기훈장 |
2. 생애
주도일은 1920년 중화민국 지린성 왕칭현(간도)에서 태어나 15세부터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의 경호원 및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 초에는 두만강을 건너 소련군의 특수 정찰 부대로 활동했다. 조선 해방 이후 김일성을 호위하여 조선에 들어왔으며, 김일성 경호대대장 및 연대장을 역임했고,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 연대장으로 참전했다.[1]
1954년 소련 군사 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58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1979년 5월,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북한에서 광범위한 실전 경험과 현대 군사 과학 지식을 갖춘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현대전의 입체 전술에 따라 경보병 및 저격병 부대의 위치와 역할을 독창적으로 강조하여 저격 부대의 창설과 강화를 주도했으며, 경무장 부대 강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여 북한 군대의 현대화 및 군사력 강화에 공헌했다.[2]
리두익, 조명록, 백학림, 전문섭과 함께 오랫동안 김일성의 경호원 및 보좌관으로 활동했으며, 김정일이 부상을 입은 후 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1994년 7월 5일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3]
2. 1. 초기 활동 (1920-1945)
1920년 중화민국 지린성 왕칭현(간도)에서 태어났다.[3] 1935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조직에 입대하여 김일성의 전령병 및 호위병으로 활동했다.[3] 15세부터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의 경호원 및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에는 소련군의 정찰병으로 두만강 주변에서 활동했다.[3] 항일 빨치산 활동 중 세 아들을 잃었다.[4] 1945년 일본 패망 후 김일성이 귀국하자 김일성의 호위 부대를 지휘했다.[3] 1946년 평양학원 개교 후 김일성은 자신의 부관이었던 주도일을 학원의 지휘 성원으로 파견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1947년 5월 당시 주도일은 학원의 제1훈련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전쟁에서는 대대장으로 종군했다.[3]2. 2. 해방 이후 ~ 한국전쟁 (1945-1953)
조선 해방 이후 김일성을 호위하여 조선에 들어왔다. 입국 후 김일성 경호대대장 및 연대장을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 연대장으로 참전했다.[1] 1946년 평양학원이 개교하자 김일성은 자신의 부관이었던 주도일을 학원의 지휘 성원으로 파견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1947년 5월 당시 주도일은 학원의 제1훈련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전쟁에서는 대대장으로 종군했다.[3]2. 3. 군 경력 (1954-1994)
1954년 소련 군사 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58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제20여단장에 취임했다.[5] 196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 제3, 4, 5, 8,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3] 1962년 사단장,[1] 1964년 제15사단장에 취임했다.[1][5] 1965년 군단장을 역임했다. 1970년 11월 당 중앙위원, 1972년 군 집단 사령관, 1978년 제3군 군단장을 지냈다.[1][5] 1980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 1981년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취임했다.[3] 1985년 4월 인민군 대장으로 승진했고,[1][3] 1988년 12월 평양방어사령부 사령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1][3] 1992년 4월 부원수로 진급했다.[1]1979년 5월,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북한에서 광범위한 실전 경험과 현대 군사 과학 지식을 갖춘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현대전의 입체 전술에 따라, 경보병 및 저격병 부대의 위치와 역할을 독창적으로 강조하여 저격 부대의 창설과 강화를 주도했으며, 경무장 부대 강화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북한 군대의 현대화 및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2]
2. 4. 정치 활동
주도일은 간도 왕청현에서 태어나 15세부터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의 경호원 및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 초에는 두만강을 건너 소련군의 특수 정찰 부대로 활동했다. 조선 해방 이후 김일성을 호위하여 조선에 들어왔으며, 김일성 경호대대장 및 연대장을 역임했고,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 연대장으로 참전했다.[1]1954년, 소련 군사 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58년 졸업 후 귀국하여 1961년 중앙위원회 후보, 제3, 4, 5, 8,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62년 사단장, 1964년 제15사단장, 1965년 군단장, 1970년 11월 당 중앙위원, 1972년 군 집단 사령관, 1978년 군사령관을 역임했다. 1980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81년 인민무력부 부상, 1985년 4월 인민군 사령관, 1988년 12월 평양방어사령부 사령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위원, 1992년 4월 부원수로 진급했다.[1]
1979년 5월,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북한에서 그는 광범위한 실전 경험과 현대 군사 과학 지식을 갖춘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현대전의 입체 전술에 따라 경보병 및 저격병 부대의 위치와 역할을 독창적으로 강조하여 저격 부대의 창설과 강화를 주도했으며, 경무장 부대 강화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북한 군대의 현대화 및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2]
리두익, 조명록, 백학림, 전문섭과 함께 오랫동안 김일성의 경호원 및 보좌관으로 활동했으며, 김정일이 부상을 입은 후 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사망 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35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조직에 입대하여 김일성의 전령병 및 호위병으로 활동했다.[3] 1940년대에는 소련군의 정찰병으로 두만강 주변에서 활동했다.[3]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하는 동안 세 아들을 잃었다.[4]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김일성이 귀국하자 김일성의 호위 부대를 지휘했다.[3] 1946년 평양학원이 개교하자 김일성은 자신의 부관이었던 주도일을 학원의 지휘 성원으로 파견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1947년 5월 당시 주도일은 학원의 제1훈련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전쟁에서는 대대장으로 종군했다.[3]
1954년에 소련으로 유학을 갔으며[3], 1958년에 귀국했다.[3] 귀국 후에는 조선인민군 제20여단장에 취임했으며[5], 1964년에 제15사단 사단장에 취임했다.[5] 1961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3],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3] 1970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3], 1978년에 제3군 군단장에 취임했다.[5] 1980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3], 1981년에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취임했다.[3] 1985년에 대장으로 승진했으며[3], 1988년에 평양방어사령관에 취임했다.[3] 1990년 5월에는 최고인민회의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3], 1992년에 차수로 승진했다.[3]
2. 5. 군사 전략 기여
주도일은 광범위한 실전 경험과 현대 군사 과학 지식을 갖춘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2] 그는 현대전의 입체 전술에 따라 경보병 및 저격병 부대의 위치와 역할을 독창적으로 강조하여 저격 부대의 창설과 강화를 주도했으며, 경무장 부대 강화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북한 군대의 현대화 및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2]2. 6. 사망
1994년7월 5일 사망했다.[3]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매장되었다.[3] 그는 리두익, 조명록, 백학림, 전문섭과 함께 오랫동안 김일성의 경호원 및 보좌관으로 활동했으며, 김정일이 부상을 입은 후 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참조
[1]
웹사이트
주도일(朱道一)
http://encykorea.aks[...]
2020-08-31
[2]
웹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web.archive.[...]
2020-09-30
[3]
웹사이트
주도일(朱道一)
http://encykorea.aks[...]
[4]
신동아
파괴된 평화체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실패했다
https://shindonga.do[...]
新東亜
2003-08-22
[5]
웹사이트
주도일(朱道一)
http://www.cybernk.n[...]
[6]
웹인용
주도일(朱道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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