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사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지나 사변은 중일 전쟁을 지칭하는 일본의 역사적 명칭이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북지사변으로 불렀으나, 이후 지나 사변으로 변경했다. 이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연합군의 지시에 따라 일시적으로 일지사변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며, 이후 중화민국의 항의와 일본 정부의 지침에 따라 "지나"라는 표현 사용이 회피되었다. 현재는 "중일 전쟁" 또는 "일중전쟁"으로 불리며, 일부 일본 우익 세력에서 지나 사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전쟁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난징 대학살과 731 부대의 생체 실험 등 심각한 전쟁 범죄를 수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지나 사변 | |
---|---|
개요 | |
명칭 | 지나 사변 (支那事変) |
다른 명칭 | 중일 전쟁 (중국)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 |
시기 | 1937년 7월 7일 ~ 1945년 9월 2일 |
장소 | 중화민국 (현재의 중국 대륙) |
원인 | 일본 제국의 대륙 침략 야욕 중화민국의 국력 강화에 대한 위협 |
결과 | 일본의 패전 및 식민지 상실 중화민국의 국력 약화 국공내전 심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의 간접적 계기 |
교전 세력 | |
주체 1 | 일본 제국 |
주체 2 | 중화민국 |
주요 인물 | |
일본 제국 |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
중화민국 | 장제스 마오쩌둥 |
군사적 정보 | |
병력 규모 (일본 제국) | 최대 200만 명 |
병력 규모 (중화민국) | 최대 500만 명 |
주요 전투 | 루거우차오 사건 상하이 전투 난징 전투 우한 전투 창사 전투 충칭 폭격 |
영향 | |
일본 | 전시 체제 강화 국가 총동원 체제 군국주의 심화 전후 경제 성장 기반 약화 |
중국 | 막대한 인명 피해 및 경제적 손실 국공내전 심화 공산당 세력 확장 전후 사회 혼란 |
기타 | |
관련 명칭 (일본) | 지나 사변 (支那事変, 시나지헨) 북지 사변 (北支事変, 호쿠시지헨) 중지 사변 (中支事変, 추시지헨) |
훈장 | |
![]() | |
![]() |
2. 명칭의 변화
중일 전쟁은 국제법상 필요한 국가의 교전 개시 의사 표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불리지 않았다.[14] 일본 정부는 최초에 중일 전쟁을 '''북지사변'''(北支事変|북지사변일본어)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해당 명칭을 '''지나 사변'''(支那事変|지나사변일본어)으로 변경했다.[15] 이는 다나카 신이치가 각료회의에서 "북지사변은 지나사변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합니다. 상대가 확장 정책을 펴고 있는데 우리만 확장 정책을 펴지 않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16]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발단으로 대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국민정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의 군사 캠프를 향해 한 발의 총탄이 발사된 사건이 발단으로 여겨진다. 한 명의 일본군이 행방불명되었지만 해당 병사는 용변을 보고 있었을 뿐이어서 이후 무사히 발견되었다. 이 총탄 발사에 대해 장제스 국민정부가 "어떤 실수에 의한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고, 정식 사과도 있었다. 일본 측도 이시하라 간지가 구면인 독일 주중 대사인 오토 트라트만에게 중재를 의뢰했지만 (트라트만 평화 공작), 내각 서기관장 카자미 아키라 등이 반대 의견을 내며 좌절되었다.[3]
1945년 12월 8일부터 12월 17일까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각 신문에 게재된 '태평양전쟁사'에서는 "지나사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1946년 4월에 연재를 정리하고 간행한 『태평양 전쟁사- 펑톈 사건부터 무조건 항복까지』에서는 '일지사변'(日支事変|일지사변일본어)이 되었다.[17]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6년 11월호에 실린 아오노 도시요시의 「중견작가론 노트」에서 '시나사변'으로 표기한 것에 대해 시나 사변을 일화 사변으로 수정하라고 명령했다.[18]
오늘날 "지나"라는 표현은 중국인에게 멸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사학계는 보다 중립적인 "일중전쟁"(日中戰爭|일중전쟁일본어) 또는 연합국 점령기 때부터 쓰인 "일화사변"(日華事変|일화사변일본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일본 우익은 여전히 중일 전쟁을 지나사변이라고 칭하고 있다.
3. 발발 배경
4일 후 마츠이-친더춘 협정에 의해 일단 수습되었지만, 일본 측은 고노에 내각이 "북지 파병에 관한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사건을 "북지사변"이라고 칭했다. 7월 11일 카자미 아키라 서기관장은 "금번 북지사변은 그 성질을 감안하여 사변으로 칭한다"고 발표하고, "이번 사건은 완전히 지나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임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며, "종래 우리나라가 북지에 보유한 주병권에 근거한 파병이 아니라", "지나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에 대한 제국 정부의 자위권 발동에 근거한 것이며, 만주사변, 상하이 사변의 출병과 동일한 성질의 것으로 파병의 의의는 매우 중대하다"고 강조했다.[3]
이후, 중국 공산당의 국공 합작에 의한 철저 항전 호소(7월 15일) 및 장제스의 "최후의 관두" 담화에 의한 철저 항전 결의 표명(7월 17일), 중국군의 일본군 및 일본인 거류민에 대한 공격으로 사태가 진전되었고, 8월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면서 전선은 중지(中支, 현 중국의 화중 지방), 그리고 중국 대륙 전토로 확대되어 일본과 중화민국의 전면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41년 12월까지, 쌍방 모두 선전 포고나 최후 통첩을 하지 않았다.
사변의 장기화와 함께 미국, 영국은 원장 루트를 통해 충칭으로 도피한 국민정부 (장제스 정권)를 공공연히 지원했다. 소련은 공군 의용대를 보내 중화민국 측을 지원했다. 한편 일본은 새롭게 난징 국민정부 (왕징웨이 정권)을 지원했다.
3. 1.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남서쪽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군의 군사 훈련 중 발생한 총격 사건을 계기로 양측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일어났다.[3]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일시적으로 실종되었다가 무사히 발견되었으나, 일본 측은 이를 빌미로 중국 측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3] 장제스 국민정부는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일본 내 강경파는 전쟁 확대를 주장했다.[3]
3. 2.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운 대일본 제국은 중국 본토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3]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구실로 삼았지만, 일본 군부 내에서는 이시하라 간지 등이 중국과의 전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3] 그러나 고노에 내각의 강경파는 전쟁 확대를 추진했다.[3] 카자미 아키라 서기관장은 "이번 사건은 완전히 지나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임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며 자위권 발동을 명분으로 내세웠다.[3]
4. 전개 과정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대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국민정부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군 군사 캠프를 향해 발사된 한 발의 총탄에서 비롯되었는데,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잠시 행방불명되었으나 용변을 보러 간 것으로 밝혀져 무사히 돌아왔다. 장제스 국민정부는 이 총격이 "실수에 의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공식 사과를 했다. 일본 측에서는 이시하라 간지가 독일 주중 대사인 오토 트라트만에게 중재를 의뢰했지만(트라트만 평화 공작), 카자미 아키라 등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마쓰이-친더춘 협정으로 잠시 수습되는 듯했으나, 일본 측은 고노에 내각이 "북지 파병에 관한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이 사건을 "북지사변"이라고 칭했다. 1937년 7월 11일, 카자미 아키라 서기관장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지나 측의 계획적인 무력 항일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며, "제국 정부의 자위권 발동"에 근거한 파병임을 강조했다.[3]
이후 중국 공산당의 국공 합작(7월 15일)과 장제스의 "최후의 관두" 담화(7월 17일)에 의한 철저 항전 결의 표명, 중국군의 일본군 및 일본인 거류민에 대한 공격으로 사태가 진전되었고, 8월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면서 전선은 화중 지방을 포함,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되어 일본과 중화민국의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41년 12월까지 양국은 선전 포고나 최후 통첩을 하지 않았다. 사변이 장기화되면서 미국과 영국은 원장 루트를 통해 충칭으로 피신한 국민정부를 지원했고, 소련은 공군 의용대를 보내 중화민국을 지원했다. 한편 일본은 난징 국민정부 (왕징웨이 정권)을 지원했다.
1941년 미일 개전과 함께 장제스 정권은 12월 9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고, 중일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1941년 12월 12일 도조 내각은 각의 결정을 통해 "금번 대미영 전쟁 및 향후 정세의 추이에 따라 생길 수 있는 전쟁은 지나 사변을 포함하여 대동아 전쟁으로 칭한다"고 발표했고,[4] "지나 사변"이라는 명칭은 "대동아 전쟁"에 흡수되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5]
4. 1. 초기 전투 (1937년)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시작으로 대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국민정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3] 일본군 군사 캠프를 향해 총탄이 발사되었고, 일본군 한 명이 잠시 실종되었으나 용변을 보고 있어 무사히 발견되었다. 장제스 국민정부는 총탄 발사에 대해 "실수에 의한 것"이라며 사과했고, 일본 측은 이시하라 간지가 독일 주중 대사 오토 트라트만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트라트만 평화 공작), 카자미 아키라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마츠이-친더춘 협정으로 잠시 수습되는 듯했으나, 고노에 내각은 "북지 파병에 관한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사건을 "북지사변"이라 칭했다. 7월 11일, 카자미 아키라 서기관장은 "이번 사건은 지나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이라 단정하며, "제국 정부의 자위권 발동"에 근거한 파병임을 강조했다.[3]
이후 중국 공산당의 국공 합작과 장제스의 철저 항전 결의, 중국군의 일본군 및 일본인 거류민 공격으로 사태가 악화되었고, 8월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며 전선이 화중 지방을 포함한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되어 일본과 중화민국의 전면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1년 12월까지 양국은 선전 포고나 최후 통첩을 하지 않았다.
4. 2. 국민정부의 항전 (1937~1941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며 항전을 계속했다.[4] 미국과 영국은 원장 루트를 통해 국민정부를 지원했고, 소련은 공군 의용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을 지원했다.[4]4. 3. 일본의 괴뢰 정권 수립 (1940년)
1937년 중일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과 영국은 원장 루트를 통해 충칭으로 피난한 장제스 국민정부를 지원했다.[4] 소련은 공군 의용대를 보내 중화민국을 지원했다. 한편 일본은 왕징웨이를 내세워 난징 국민정부(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여 지원했는데,[4] 이는 중국 민족을 분열시키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책략이었다.4. 4. 태평양 전쟁 발발과 전황 변화 (1941~1945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일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중화민국은 1941년 12월 9일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4]1941년 12월 12일, 도조 내각은 각의 결정을 통해 "이번 대미영 전쟁 및 향후 정세 변화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전쟁은 지나 사변을 포함하여 대동아 전쟁으로 칭한다"고 발표했다.[4] 이로써 "지나 사변"이라는 명칭은 "대동아 전쟁"에 흡수되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5]
5.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전 단계의 출력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6. 전쟁 범죄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전 단계에서 '지나 사변'의 '전쟁 범죄' 섹션에 대한 내용이 출력되지 않은 이유는 요약과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조
[1]
간행물
"「支那事変」考"
駒澤大学大学院史学会
2004-04
[2]
문서
北 (1994)
[3]
서적
新版 日中戦争
中央公論新社
2000-04-25
[4]
문서
昭和16年12月12日閣議決定 今次戦争ノ呼称並ニ平戦時ノ分界時期等ニ付テ
[5]
문서
北 (1994)
[6]
문서
北 (1994)
[7]
문서
事変呼称ニ関スル件
https://ndlsearch.nd[...]
1937-09-02
[8]
문서
北 (1994)
[9]
간행물
日華事変拡大か不拡大か
河出書房
1956-12
[10]
문서
庄司 (2018)
[11]
문서
庄司 (2018)
[12]
간행물
"「支那事変」考"
駒澤大学大学院史学会
2004-04
[13]
문서
北 (1994)
[14]
문서
事変呼称ニ関スル件
https://rnavi.ndl.go[...]
1937-09-02
[15]
문서
事変呼称ニ関スル件
https://rnavi.ndl.go[...]
1937-09-02
[16]
간행물
日華事変拡大か不拡大か
河出書房
1956-12
[17]
문서
庄司 (2018)
[18]
문서
庄司 (20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