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쿄노츠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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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부쿄노츠보네는 종2위 타이라노 토키코를 모시며 미나미노온카타로 불린 여성이다. 1179년 모리사다 친왕의 유모가 되면서 지부쿄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후 시죠노츠보네로 불렸다. 겐페이 전쟁에서 남편 타이라노 토모모리가 자결한 후 살아남아 모리사다 친왕을 섬겼으며, 고호리카와 천황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 친왕이 인세를 시작하면서 다시 권세를 얻었다. 1231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헤이케모노가타리가 성립될 당시 생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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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쿄노츠보네 | |
---|---|
기본 정보 | |
관위 | 종5위하 |
생몰년 | 몰년: 겐큐 9년(1198년) 1월 |
아버지 | 후지와라노 미쓰요시 |
어머니 | 다이라노 도키타다의 딸 |
남편 |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
자녀 | 미나모토노 나카쓰나, 딸(기소 요시나카의 유모) |
별칭 | 쓰보네, 이마고젠 |
종류 | 일본의 미나모토 요리마사의 아내 |
2. 출자
처음 종2위 타이라노 토키코를 모셔, '''미나미노온카타(南御方)'''라고 불렸다. 지쇼 3년 (1179년) 모리사다 친왕의 유모가 되면서 사부라이나(候名)를 '''지부쿄(治部卿)'''라고 했다. 나중에는 '''시죠노츠보네(四条局)'''라고 불렸다. 출신은 명확하지 않지만, '온카타(御方)'라는 경칭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대신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부쿄노츠보네가 토키코의 뇨보가 된 시기에 내대신이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인연이 깊었던 후지와라노 타다마사가 아버지로 여겨진다.
닌난 2년 (1167년) 경, 헤이케 전성기에 타이라노 토모모리와 결혼하여 가오 원년 (1169년)에 장남 토모아키라를 낳았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지시로 지쇼 3년 (1179년) 타카쿠라 천황의 2황자 모리사다 친왕의 유모가 되었고, 남편과 함께 친왕을 양육했다.
3. 생애
겐페이 전쟁이 일어나면서 장남 토모아키라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 주에이 2년 (1183년) 모리사다 친왕과 함께 헤이시 일문을 따라 낙향했고, 분지 원년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남편 토모모리가 자결하며 헤이시 일문은 멸망했다. 지부쿄노츠보네는 살아남아 모리사다 친왕, 켄레이몬인 등과 수도로 돌아와 후지와라노 타카후사 부부의 집에 의탁했다. 모리사다 친왕은 죠사이몬인의 양자가 되어, 지부쿄노츠보네는 유모로서 죠사이몬인을 섬겼다. 이후 후지와라노 타카미치에게 비파를 배웠다.
겐큐 7년 (1196년) 차남 토모타다가 모반을 일으켜 효수되었다. 지부쿄노츠보네는 머리 검시에 불려가, 생사도 모르고 성장한 모습도 보지 못한 토모타다의 머리가 남편을 닮았다는 이유로 토모타다의 머리임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
조큐 3년 (1221년) 조큐의 난 이후, 고호리카와 천황이 즉위하고 아버지 모리사다 친왕이 고타카쿠라인으로 인세이를 시작하자, 지부쿄노츠보네는 고타카쿠라인과 키타시라카와인을 모시며 다시 권세를 얻었다. 간기 3년 (1231년) 80세로 사망했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성립 시기(1230년 경)에 지부쿄노츠보네는 생존해 있었고, 헤이시의 피를 이은 천황의 세상에서 헤이케 관련 여성들이 권세를 누렸다. 『지쇼모노가타리(治承物語)』가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로 바뀐 것은 당시 사회 상황의 영향으로 보인다.
3. 1. 헤이케 전성기
닌난 2년 (1167년)경, 헤이케 전성기에 동갑인 타이라노 토모모리의 아내가 되었다. 가오 원년 (1169년) 18세에 장남 토모아키라를 낳았다. 시아버지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지시에 따라 지쇼 3년 (1179년)에 태어난 다카쿠라 천황의 2황자 모리사다 친왕의 유모가 되었고, 남편 토모모리와 함께 자택에서 친왕을 양육했다.
3. 2. 겐페이 전쟁과 헤이케 몰락
겐페이 전쟁(지쇼·주에이의 난)이 발발하고, 전란 속에서 장남 토모아키라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1] 주에이 2년 (1183년) 7월, 모리사다 친왕을 모시고 헤이시 일문과 함께 서쪽으로 낙향했다.[1] 분지 원년 (1185년) 3월, 단노우라 전투에서 남편 토모모리가 자결하면서 헤이시 일문은 멸망했다.[1] 지부쿄노츠보네는 살아남아 모리사다 친왕, 겐레이몬인 등 헤이시 일문의 여성들과 함께 수도 교토로 돌아왔다.[1] 친척인 후지와라노 다카후사 부부의 시조오미야 저택에 몸을 의탁했다.[1] 모리사다 친왕이 조사이몬인 도우시 내친왕의 양자가 되면서, 지부쿄노츠보네는 친왕의 유모로서 조사이몬인을 섬겼다.[1] 모리사다 친왕과 함께 후지와라노 다카미치에게 비파를 배워 명수가 되었다.[1]
3. 3. 차남의 죽음과 슬픔
겐큐 7년 (1196년) 6월, 어린 나이에 헤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차남 토모타다가 모반을 일으켜 효수되었다.[1] 조정에서 수급 검시를 위해 지부쿄노츠보네를 불렀는데, 성장한 모습을 보지 못한 아들의 머리였지만 남편을 닮은 모습에 토모타다의 머리임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
3. 4. 고타카쿠라인 인세이와 권세 회복
조큐 3년(1221년) 조큐의 난 이후, 고호리카와 천황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 친왕은 고타카쿠라인으로서 인세이를 시작했다. 지부쿄노츠보네는 고타카쿠라인과 새 천황의 어머니 기타시라카와인을 모시며 다시 권세를 얻게 되었다. 간키 3년(1231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3. 5. 헤이케모노가타리와의 관계
1230년경,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가 성립될 당시 지부쿄노츠보네는 생존해 있었다.[1] 헤이시의 피를 이은 천황의 시대였고, 헤이케와 관련된 여성들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1] 지쇼모노가타리(治承物語)가 헤이케모노가타리로 제목을 바꾼 것은 당시의 사회 상황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인다.[1]
4. 관련 작품
5.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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