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해전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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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중해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중해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를 통칭하며,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그리고 비시 프랑스 해군 등이 주요 참전 세력이었다. 영국은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여 보급로를 유지하려 했고, 이탈리아는 "마레 노스트룸" 지배를 목표로 해군력을 증강했으나, 레이더 부족과 연료 부족 등의 문제에 직면했다. 프랑스는 해군력을 증강했으나, 독일 점령 이후 비시 프랑스 해군으로 변모하면서 영국에게 위협이 되었다. 독일은 유보트 작전을 통해 영국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려 했다. 주요 해전으로는 타란토 해전, 마타판 곶 해전, 크레타 전투, 알렉산드리아 기습, 몰타 공방전 등이 있었으며, 1943년 이탈리아 항복 이후에는 잠수함과 소형 선박을 상대로 한 작전으로 축소되었다.
영국은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운하의 세 핵심 전략 거점을 기반으로 지중해에서의 해상 우위를 유지하려 했다. 이 거점들은 지중해 함대가 중요한 보급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특히 몰타는 연합군 호송선단의 기착지이자 추축국 보급로 공격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 11월 11일, 타란토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페어리 소드피시 어뢰 공격기로 이탈리아 함대를 공격하여 전함 3척을 대파했다.[16] 이 공격으로 이탈리아 함대는 항모 기반 항공기의 사정거리 밖으로 이동해야 했고, 몰타로 향하는 호송선에 대한 위협이 감소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리비아 선적량은 오히려 증가하여, 타란토 공격이 지중해 전쟁의 맥락을 바꾸는 결정적인 일격은 되지 못했다.[17]
2. 주요 참전 세력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 지배를 통해 신 로마 제국을 건설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해군력 증강에 힘썼다. 그는 지중해를 "(우리 바다)"이라 칭했다.[9] 그러나 이탈리아 해군은 레이더와 함대 항공대가 부족했고, 연료 부족 문제도 심각했다.
1937년 프랑스는 함대 현대화 계획을 통해 세계 4위 규모의 해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프랑스 함대의 주력은 지중해에 배치되어 이탈리아 해군과 대치했다. 1940년 프랑스 항복 이후, 프랑스 해군은 비시 프랑스 해군이 되었고, 영국은 이들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독일 해군(Kriegsmarine)은 유보트를 지중해에 투입하여 영국의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지브롤터 해협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지중해 전역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15]
2. 1. 영국 지중해 함대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운하를 잇는 세 곳의 핵심 전략 거점을 확보하여, 지중해 함대는 중요한 보급로를 유지했다. 몰타는 전체 시스템의 핵심으로, 연합군 호송선단의 필수 기착지이자 추축국 보급로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2. 2. 이탈리아 왕립 해군 (Regia Marina)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중해 통제를 신 로마 제국을 니스, 코르시카, 튀니스, 발칸 반도로 확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보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탈리아 해군 건조가 가속화되었다. 무솔리니는 지중해를 "(우리 바다)"이라고 불렀다.[9]
''레지아 마리나''(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군함들은 설계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탈리아 소형 공격정들은 기대에 부응하여 지중해에서 많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10] 그러나 일부 이탈리아 순양함은 장갑이 부족했고, 모든 이탈리아 군함은 레이더가 없었다. 비록 레이더 부족은 이탈리아 군함들이 주간 전투를 위해 훌륭한 거리 측정기와 사격 통제 시스템을 갖추면서 부분적으로 상쇄되었지만, 1943년 봄, 즉 휴전 5개월 전에 12척의 이탈리아 군함에 이탈리아가 설계한 EC-3 ter 구포 레이더 장치가 장착되었다. 또한, 연합군 해상 지휘관들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반면, 이탈리아 지휘관들의 행동은 이탈리아 해군 본부(''수페르마리나'')에 의해 엄격하고 정확하게 통제되었다.
''레지아 마리나''는 적절한 함대 항공대를 갖추지 못했다. 아퀼라는 완공되지 못했고, 지중해 해전 동안 대부분의 항공 지원은 육상 기반의 ''레지아 아에로노티카''(왕립 공군)가 제공했다.[9]
이탈리아에게 또 다른 주요 약점은 연료 부족이었다. 1941년 3월 초부터 연료유 부족이 심각했다. 석탄, 가솔린, 윤활유도 현지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이탈리아의 전쟁 노력 동안 사용 가능한 모든 연료유의 75%가 호송 임무를 수행하는 구축함과 어뢰정에 사용되었다.[11]
2. 3. 프랑스 해군
1937년 1월, 프랑스는 함대 현대화 및 확장 계획을 시작했다. 이는 곧 프랑스 함대를 세계 4위 규모로 만들었다.
영국 해군성과의 합의에 따라, 프랑스 함정의 가장 강력한 전력은 지중해에 배치되었다. 이탈리아 함대는 프랑스 본토에서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매우 중요한 프랑스 해상 수송로와 지브롤터 해협과 수에즈 운하 사이의 영국 해상 수송로에 위협을 가했다.[13]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된 후, 지중해의 ''해군(Marine Nationale)''은 비시 프랑스 정부의 해군이 되었다. 비시 프랑스 해군으로서 이 해군은 영국 해군에게 잠재적으로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영국은 이 위협을 무력화하는 것이 절실했다.
카타펄트 작전의 시작 단계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한 프랑스 함대는 협상을 통해 처리되었다. 이는 주로 르네-에밀 고프루아 제독과 앤드루 커닝햄 제독, 두 지휘관이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에,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을 독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시키라는 영국의 최후 통첩은 거부되었다. 함대는 알제리의 메르스엘케비르에 위치해 있었고, 1940년 7월 3일, 지브롤터에서 온 영국 "H 부대" (제독 제임스 소머빌)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 공격으로 인해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고, 비시 프랑스 공군 (''휴전군 공군(Armée de l'Air de l'armistice)'')은 심지어 지브롤터의 영국 시설을 공격하기도 했다.
최소 두 척의 연합군 수송선이 튀니지에서 프랑스군에게 나포되어 나중에 이탈리아 해군에 넘겨졌다.[14]
1941년 6월과 7월, 소규모의 비시 프랑스 해군 부대가 엑스포터 작전에 참여했다. 이는 레바논과 시리아에 주둔한 비시 프랑스군을 상대로 한 연합군의 작전이었다. 프랑스 해군 함정들은 리타니 강을 건너기 전에 격퇴되어야 했다.
1942년, "안톤 작전" 동안 비시 프랑스 점령의 일환으로, 독일군은 툴롱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점령하려 했다. 이는 프랑스 지휘관들의 단호한 행동으로 좌절되었고, 함대의 대부분은 닻을 내린 채 자침되었다.
2. 4. 비시 프랑스 해군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된 후, 지중해의 해군(Marine Nationale)은 비시 프랑스 정부의 해군이 되었다. 비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에게 잠재적으로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국은 이 위협을 무력화하는 것이 절실했다.[13]
카타펄트 작전의 시작 단계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한 프랑스 함대는 르네-에밀 고프루아 제독과 앤드루 커닝햄 제독, 두 지휘관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에 협상을 통해 처리되었다. 반면에, 프랑스 함대의 대부분을 독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시키라는 영국의 최후 통첩은 거부되었다. 함대는 알제리의 메르스엘케비르에 위치해 있었고, 1940년 7월 3일, 지브롤터에서 온 영국 "H 부대" (제독 제임스 소머빌)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13]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 공격으로 인해 영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고, 비시 프랑스 공군 (휴전군 공군(Armée de l'Air de l'armistice))은 심지어 지브롤터의 영국 시설을 공격하기도 했다.[13]
최소 두 척의 연합군 수송선이 튀니지에서 프랑스군에게 나포되어 나중에 이탈리아 해군에 넘겨졌다.[14]
1941년 6월과 7월, 소규모의 비시 프랑스 해군 부대가 엑스포터 작전에 참여했다. 이는 레바논과 시리아에 주둔한 비시 프랑스군을 상대로 한 연합군의 작전이었다. 프랑스 해군 함정들은 리타니 강을 건너기 전에 격퇴되어야 했다.
1942년, "안톤 작전" 동안 비시 프랑스 점령의 일환으로, 독일군은 툴롱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점령하려 했다. 이는 프랑스 지휘관들의 단호한 행동으로 좌절되었고, 함대의 대부분은 닻을 내린 채 자침되었다.
2. 5. 독일 해군 (Kriegsmarine)
지중해 유보트 작전은 대략 1941년 9월 21일부터 1944년 5월까지 지속되었다. 독일 해군(Kriegsmarine)은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운하를 고립시켜 영국이 극동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차단하려 했다. 60척 이상의 유보트가 이 해역의 해상 수송을 방해하기 위해 투입되었지만, 많은 수가 영국이 통제하던 지브롤터 해협에서 공격을 받았다(통과를 시도하다가 9척이 침몰했고 10척이 손상되었다).[15] 공군(Luftwaffe) 또한 특히 1941년 여름 동안 지중해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독일의 전쟁 전략은 지중해를 부차적인 작전 전역으로 간주했다.[15]
3. 주요 해전 및 사건
1941년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마타판 곶 해전에서 영국 해군과 왕립 호주 해군은 이탈리아 해군을 요격하여 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을 격침시키고, 전함 1척에 피해를 입혔다. 이 승리는 항공모함의 효과, ''울트라'' 통신 감청, 이탈리아 함선의 레이더 부족 덕분이었다.
1941년 5월 크레타 전투에서 영국 해군은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6척을 포함한 8척의 군함이 침몰하고, 다른 7척의 함선이 손상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독일 공군에게 제공권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지만, 전략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1941년 12월 19일, 알렉산드리아 기습에서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전함 2척을 대파하며 성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1942년에는 제2차 시르테 해전, 작전명 작살, 작전명 비거러스, 작전명 페데스탈 등 몰타를 둘러싼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1943년 휴전 이후, 이탈리아 해군은 둘로 나뉘었다. 이후 지중해 해상 작전은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에서 잠수함과 소형 선박을 상대로 한 작전으로 제한되었다.
다음은 주요 해전 및 사건을 연도별로 정리한 표이다.날짜 해전/사건 결과 1940년 6월 28일 에스페로 호송대 해전 이탈리아 구축함 격침 1940년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 뚜렷한 결과 없음 1940년 7월 19일 스파다 곶 해전 이탈리아 순양함 격침 1940년 10월 12일 파세로 곶 해전 이탈리아 구축함 1척, 어뢰정 2척 격침, 영국 순양함 손상 1940년 11월 11일 타란토 해전 이탈리아 전함 3척 대파 1940년 11월 17일 화이트 작전 몰타로의 항공기 수송 방해 1940년 11월 27일 스파르티벤토 곶 해전 뚜렷한 결과 없음 1941년 1월 6~11일 엑세스 작전(Operation Excess) 영국 호송대 몰타 도착, 이탈리아 어뢰정 격침, 영국 구축함 기뢰 피해 1941년 2월 25~28일 앱스텐션 작전(Operation Abstention) 카스텔로리조 섬 상륙 실패 1941년 3월 26일 수다 만 작전 영국 순양함 격침 1941년 3월 27~29일 마타판 곶 해전 이탈리아 순양함 3척, 구축함 2척 격침, 전함 피해 1941년 4월 16일 타리고 호송대 전투 이탈리아 호송대 파괴, 이탈리아 구축함 2척, 영국 구축함 손실 1941년 5월 20일 ~ 6월 1일 크레타 전투 영국 군함 9척 침몰, 독일 공군의 제공권 과시 1941년 5월 24일 이탈리아 수송선 격침 영국 해군 잠수함의 공격, 1297명 사망 1941년 7월 서브스턴스 작전(Operation Substance) 영국 호송대 몰타 도착, 영국 구축함 손실 1941년 9월 할버드 작전(Operation Halberd) 영국 호송대 몰타 도착, 수송선 임페리얼 스타 격침 1941년 11월 8일 뒤스부르크 호송대 전투 추축국 호송대 파괴, 이탈리아 구축함 손실 1941년 11월 13일 격침 의 어뢰 공격, 영국 해군 항공 전력 약화[20] 1941년 11월 25일 격침 의 어뢰 공격, 862명 사망[21] 1941년 12월 13일 본 곶 해전 이탈리아 경순양함 2척 격침 1941년 12월 17일 제1차 시르테 해전 뚜렷한 결과 없음 1941년 12월 19일 알렉산드리아 기습 영국 전함 2척 대파 1942년 3월 22일 제2차 시르테 해전 영국 호송대와 호위대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공격, 구축함 2척 손상, 호송대 화물선 4척 침몰 1942년 6월 15일 작전명 작살 영국 호송대 이탈리아 순양함 및 추축국 항공기에 공격, 상선 3척, 유조선 1척, 구축함 침몰, 폴란드 구축함 기뢰 접촉 침몰, 추축국 항공기 29대 격추, 호송대 화물선 2척 몰타 도착 1942년 6월 15일 작전명 비거러스 영국 호송대 심한 공습,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격퇴 1942년 8월 15일 작전명 페데스탈 영국 호송대 공격, 순양함과 상선 9척 침몰, 필수 물품 몰타 전달 1942년 11월 작전명 스톤 에이지 영국 호송대 몰타 무사 도착 1942년 12월 2일 스케르키 뱅크 해전 이탈리아 호송대 파괴 1942년 12월 11일 알제 공격 이탈리아 유인 어뢰 공격, 증기선 2척 침몰 1943년 4월 16일 치뇨 호송 작전 해전 영국 구축함 공격 실패, 이탈리아 호위함 격침, 영국 구축함 자침 1943년 5월 3~4일 캄포바소 호송 작전 해전 영국 구축함, 이탈리아 수송선 캄포바소와 어뢰정 격침 1943년 6월 2일 메시나 호송 작전 해전 영국 구축함, 이탈리아 호송대 공격, 이탈리아 어뢰정 격침 1943년 7월 17일 스킬라 작전 , 영국 엘코 어뢰정과 교전, 영국 어뢰정 1척 격침 1944년 3월 18일 리구리아 해 해전 영국 구축함, 독일 구축함 1척, 어뢰정 2척 요격, 독일 어뢰정 2척 격침[24]
3. 1. 1940년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다음 날, 이탈리아 폭격기들이 몰타를 공격하면서 공습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은 이탈리아 북서부 해안의 여러 목표물, 특히 제노바 항구를 포격했다. 프랑스가 6월 24일 항복하자, 추축국 지도자들은 새로운 비시 프랑스 정부가 해군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에서 양측 함대 간의 첫 번째 충돌이 발생했지만,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여름 동안 에스페로 호송대 해전과 스파다 곶 해전 등 소규모 해상전이 이어졌다.
몰타로 향하는 호송선에 대한 이탈리아 해군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앤드루 커닝햄 제독은 타란토 해전 (암호명: 유도 작전)을 조직했다. 1940년 11월 11일, 페어리 소드피시 어뢰 공격기들이 이탈리아 함대를 공격하여 전함 2척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다른 전함 1척은 침몰을 막기 위해 좌초되었다. 이 공격으로 ''레지아 마리나''의 주력 함정 절반이 몇 달 동안 작전 불능 상태가 되었다.
11월 27일, 스파르티벤토 곶 해전에서 이탈리아 함대는 다시 지중해 함대와 교전했지만, 뚜렷한 결과는 없었다. 타란토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전함 3척 중 2척은 1941년 중반까지 수리되었고, 지중해의 주도권은 1943년 이탈리아 휴전 때까지 계속해서 바뀌었다.
1940년의 주요 해전은 다음과 같다.
날짜 | 해전 | 결과 |
---|---|---|
6월 28일 | 에스페로 호송대 해전 | 이탈리아 구축함 격침 |
7월 9일 | 칼라브리아 해전 | 뚜렷한 결과 없음 |
7월 19일 | 스파다 곶 해전 | 이탈리아 순양함 격침 |
10월 12일 | 파세로 곶 해전 | 이탈리아 구축함 1척, 어뢰정 2척 격침, 영국 순양함 심각한 손상 |
11월 11일 | 타란토 해전 | 이탈리아 전함 3척 대파 |
11월 17일 | 화이트 작전 | 이탈리아 함대에 의해 몰타로의 항공기 수송 방해 |
11월 27일 | 스파르티벤토 곶 해전 | 뚜렷한 결과 없음 |
3. 2. 1941년
마타판 곶 해전은 1941년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과 왕립 호주 해군이 안젤로 야키노 제독 휘하의 이탈리아 해군(레지아 마리나) 함대를 요격했다. 연합군은 중순양함 , , 와 구축함 ''비토리오 알피에리'', ''조수에 카르두치''를 격침시켰으며, 전함 에 피해를 입혔다. 영국군은 어뢰정 1대를 잃었고, 일부 순양함이 ''비토리오 베네토''의 포격으로 경미한 파편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의 승리 요인은 항공모함의 효과, ''울트라'' 통신 감청, 그리고 이탈리아 함선의 레이더 부족이었다.[10]1941년 5월 크레타 전투에서 독일 공수부대에 패배한 후, 독일군이 해상으로 크레타섬에 도달하는 것을 막고 연합군 육상 부대의 부분적인 철수를 돕기 위한 노력으로 연합국 해군은 많은 함선을 잃었다. 주로 융커스 Ju 87와 Ju 88을 포함한 독일 항공기의 공격으로 영국 군함 8척이 침몰했다: 경순양함 2척( 및 )과 구축함 6척(, , , , 및 ). 전함 와 및 경순양함 를 포함한 다른 7척의 함선이 손상되었다. 약 2,000명의 영국 해군이 사망했다.
독일 공군(Luftwaffe)은 제공권을 장악한 해역에서 영국 해군이 심각한 손실 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독일 공군에게 상당한 승리였다. 그러나 몇 주 후 독일 육군(국방군)(German Army (Wehrmacht))의 관심이 러시아로 향했고(바르바로사 작전), 지중해는 이후 몇 년 동안 독일의 전쟁 계획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으로 추축국의 영향력이 동부 지중해로 확장되었고, 연합군 호송대에 대한 위협이 연장되었다.
카이케를 사용하여 독일군을 해상으로 수송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있었지만, 두 시도 모두 영국 해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해군의 작은 호위함들은 대부분의 선박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연합군의 철수가 이미 진행 중이던 5월 28일, 이탈리아군은 시티아 근처에 자체 부대를 상륙시켰다.
철수 과정에서 커닝햄은 "해군은 육군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육군 장성들이 너무 많은 함선을 잃을까 두려워하자, 커닝햄은 "배를 건조하는 데 3년이 걸리지만, 전통을 세우는 데는 3세기가 걸린다"고 말했다. ''울트라'' 요격으로 사전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전투는 연합군의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침공은 주요 무기 없이 투하되어 용기에 별도로 배달된 독일 공수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1941년 여름 크레타 전투 이후, 영국 해군은 성공적인 호송선 공격(두이스부르크 호송선 및 본곶 해전)을 통해 지중해 중부에서 우위를 되찾았지만, 12월 알렉산드리아 기습으로 추축국에게로 전력의 균형이 기울었다.[18]
레지아 마리나의 영국 함대에 대한 가장 성공적인 공격은 1941년 12월 19일 알렉산드리아 기습 당시 잠수부들이 영국 전함 선체에 소형 부착 지뢰를 부착했을 때였다. 전함 와 는 정박해 있던 상태에서 침몰했지만, 1943년 중반까지 인양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1941년에 발생한 주요 해전 및 사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날짜 | 사건 | 결과 |
---|---|---|
6월 28일 | 에스페로 호송대 해전 | 이탈리아 구축함 격침, 영국 호송대 지연 |
7월 9일 | 칼라브리아 해전 | 뚜렷한 결과 없음 |
7월 19일 | 스파다 곶 해전 | 이탈리아 순양함 격침 |
10월 12일 | 파세로 곶 해전 | 이탈리아 구축함 1척, 어뢰정 2척 격침, 영국 순양함 손상 |
11월 11일 | 타란토 해전 | 이탈리아 전함 3척 대파, 영국 해군의 항공모함 운용 능력 과시 |
11월 17일 | 화이트 작전 | 몰타로의 항공기 수송 방해 |
11월 27일 | 스파르티벤토 곶 해전 | 뚜렷한 결과 없음 |
1월 6~11일 | 엑세스 작전(Operation Excess) | 영국 호송대 몰타 도착, 이탈리아 어뢰정 격침, 영국 구축함 기뢰 피해 |
2월 25~28일 | 앱스텐션 작전(Operation Abstention) | 카스텔로리조 섬 상륙 실패 |
3월 26일 | 수다 만 작전 | 영국 순양함 격침 |
3월 27~29일 | 마타판 곶 해전 | 이탈리아 순양함 3척, 구축함 2척 격침, 전함 피해 |
4월 16일 | 타리고 호송대 전투 | 이탈리아 호송대 파괴, 이탈리아 구축함 2척, 영국 구축함 손실 |
5월 20일 ~ 6월 1일 | 크레타 전투 | 영국 군함 9척 침몰, 독일 공군의 제공권 과시 |
5월 24일 | 이탈리아 수송선 격침 | 영국 해군 잠수함 의 공격, 1297명 사망 |
7월 | 서브스턴스 작전(Operation Substance) | 영국 호송대 몰타 도착, 영국 구축함 손실 |
9월 | 할버드 작전(Operation Halberd) | 영국 호송대 몰타 도착, 수송선 임페리얼 스타 격침 |
11월 8일 | 뒤스부르크 호송대 전투 | 추축국 호송대 파괴, 이탈리아 구축함 손실 |
11월 13일 | 격침 | 의 어뢰 공격, 영국 해군 항공 전력 약화[20] |
11월 25일 | 격침 | 의 어뢰 공격, 862명 사망[21] |
12월 13일 | 본 곶 해전 | 이탈리아 경순양함 와 격침 |
12월 17일 | 제1차 시르테 해전 | 뚜렷한 결과 없음 |
12월 19일 | 알렉산드리아 기습 | 영국 전함 2척 대파 |
2월 25일~28일 | 앱스테인션 작전 | 영국군의 카스텔로리조 공격과 점령 시도는 이탈리아 해군과 공군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
5월 20일 | 크레타 전투 | 추축군이 섬을 침공했다. |
3. 3. 1942년
1941년 12월 알렉산드리아 기습으로 전력 균형이 추축국으로 기울었지만,[18] 1942년에는 다시 연합군과 추축군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이루었다.- 3월 22일, 제2차 시르테 해전. 영국 호송대와 호위대는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공격받았지만, 심하게 손상된 구축함 2척과 함께 간신히 벗어났다. 그러나 이탈리아 해군은 호송대의 도착을 지연시켰고, 그 결과 다음날 아침 추축국 공습으로 호송대의 화물선 4척이 모두 침몰했다.
- 6월 15일, 작전명 작살. 몰타를 재보급하는 영국 호송대가 이탈리아 순양함에 의해 요격당했고, 추축국 항공기에 의해 공격받았다. 상선 3척, 대형 유조선 1척, 구축함 베두인이 항공 공격과 해군 함포 사격으로 침몰했다. 폴란드 구축함 쿠야비악은 발레타에 접근하던 중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했다. 전투 중 추축국 항공기 29대가 격추되었다. 6척의 호송대 중 2척의 화물선만이 몰타에 도착했고, 그 중 한 척은 손상되었다.
- 6월 15일, 작전명 비거러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영국 호송대는 심한 공습을 받았다. 결국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 8월 15일, 작전명 페데스탈. 몰타를 재보급하는 영국 호송대가 공격받았다. 맨체스터와 상선 9척이 추축국 E-boat(어뢰정), 항공기 및 잠수함에 의해 침몰했지만, 유류를 포함한 필수 물품이 전달되었다.
- 11월, 작전명 스톤 에이지. 영국 호송대가 아무런 방해 없이 몰타에 도착했다.
- 12월 2일, 스케르키 뱅크 해전. 이탈리아 호송대가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 12월 11일, 알제 공격. 이탈리아 유인 어뢰가 연합군 선박을 공격하여 증기선 2척이 침몰했다.
1942년의 주요 작전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작전명 | 결과 |
---|---|---|
3월 22일 | 제2차 시르테 해전 | 영국 호송대와 호위대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공격, 구축함 2척 손상, 호송대 화물선 4척 침몰 |
6월 15일 | 작전명 작살 | 영국 호송대 이탈리아 순양함 및 추축국 항공기에 공격, 상선 3척, 유조선 1척, 구축함 베두인 침몰, 폴란드 구축함 쿠야비악 기뢰 접촉 침몰, 추축국 항공기 29대 격추, 호송대 화물선 2척 몰타 도착 |
6월 15일 | 작전명 비거러스 | 영국 호송대 심한 공습,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격퇴 |
8월 15일 | 작전명 페데스탈 | 영국 호송대 공격, 맨체스터와 상선 9척 침몰, 필수 물품 몰타 전달 |
11월 | 작전명 스톤 에이지 | 영국 호송대 몰타 무사 도착 |
12월 2일 | 스케르키 뱅크 해전 | 이탈리아 호송대 파괴 |
12월 11일 | 알제 공격 | 이탈리아 유인 어뢰 공격, 증기선 2척 침몰 |
3. 4. 1943년
1943년 7월 25일, 파시즘 대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했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원수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새로운 이탈리아 정부는 즉시 연합국과 전투 종식을 위한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9월 3일, 시칠리아의 페어필드 캠프에서 연합국과 비밀 휴전이 조인되었다. 휴전은 9월 8일에 발표되었다.휴전 이후, 이탈리아 해군은 둘로 나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남부 공동 교전 해군(Marina Cobelligerante del Sud)"이 국왕과 바돌리오를 위해 싸웠다. 북부에서는 훨씬 작은 규모의 ''레지아 마리나''가 무솔리니의 새로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Repubblica Sociale Italiana, RSI)의 공화국 국가 해군(Marina Nazionale Repubblicana)에 합류하여 독일군을 위해 계속 싸웠다.
1943년에 발생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내용 |
---|---|---|
4월 16일 | 치뇨 호송 작전 해전 | 영국 구축함 2척이 야간에 이탈리아 호송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탈리아 호위함 중 한 척인 가 격침되었다. 영국 구축함 은 전투 중 손상되어 자침했다. 5,000톤급 수송선 벨루노와 은 항공 유류를 싣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
5월 3~4일 | 캄포바소 호송 작전 해전 | 영국 구축함 3척이 튀니지의 추축군에게 물자를 수송하는 이탈리아 수송선 캄포바소를 (800톤급) 어뢰정 의 호위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페르세오와 캄포바소는 모두 격침되었으며 영국군은 피해가 없었다. |
6월 2일 | 메시나 호송 작전 해전 | 영국 구축함 와 는 의 호위를 받는 소규모 선박 2척의 호송대를 공격했다. 카스토레는 손상되어 새벽 전에 격침되었지만, 그녀의 반격으로 수송선들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
7월 17일 | 스킬라 작전 | EC-3 구포 레이더를 장착한 는 메시나 해협을 통과하던 중 야간에 영국 엘코 어뢰정 4척과 교전했다. 어뢰정 1척이 전원 사망한 채 격침되었고 다른 3척은 손상되었다. |
7월 9일 | 허스키 작전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시작. |
9월 3일 | 아발란체 작전 | 이탈리아에 대한 연합군 침공 시작. |
9월 8일 | 도데카니소스 전역 | 도데카니소스 제도를 장악하려던 연합군의 실패한 시도. |
9월 9일 | 이탈리아 살레르노 상륙 | 연합군의 상륙 시작. |
4. 주요 상륙 작전
- 1941년 5월 크레타 전투에서 연합군 해군은 독일 공수부대에 패배한 후, 독일군의 해상 진입을 막고 연합군 육상 부대의 철수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융커스 Ju 87과 Ju 88 등 독일 항공기의 공격으로 영국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6척이 침몰했고, 다른 7척의 함선이 손상되었다. 이 전투에서 약 2,000명의 영국 해군이 사망했다.
- 1941년 여름 크레타 전투 이후, 영국 해군은 두이스부르크 호송선 및 본곶 해전과 같은 성공적인 호송선 공격을 통해 지중해 중부에서 우위를 되찾았다.
- 1941년 12월 알렉산드리아 기습으로 전력의 균형이 추축국에게로 기울었다.[18]
- 1942년 8월, 영국은 작전 페데스탈이라는 암호명으로 매우 강력하게 방어된 호송대를 보냈고, 연합군 호송대가 전멸하면서 몰타는 보급을 받아 다시 공격 기지가 될 수 있었다.
-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붕괴와 이탈리아 함대의 항복으로 지중해 해상 작전은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에서 잠수함과 소형 선박을 상대로 한 작전으로 제한되었다.
- 1943년 2월 25일~28일, 앱스테인션 작전에서 영국군의 카스텔로리조 공격과 점령 시도는 이탈리아 해군과 공군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 1943년 5월 20일, 크레타 전투가 시작되어 추축군이 섬을 침공했다.
- 1943년 9월 14일, 어그리먼트 작전에서 연합군의 토브루크 공격은 추축군의 육상, 항공 및 해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 1942년 11월 8일, 횃불 작전 개시, 비시 프랑스 통치하의 모로코와 알제리에 대한 연합군의 침공.
- 1942년 11월 10일, 튀니스 진격
- 1943년 7월 9일, 허스키 작전의 시작,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1943년 9월 3일, 아발란체 작전의 시작, 이탈리아에 대한 연합군 침공 시작.
- 1943년 9월 8일, 도데카니소스 전역의 시작, 도데카니소스 제도를 장악하려던 연합군의 실패한 시도.
- 1943년 9월 9일, 이탈리아 살레르노 상륙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 시작.
- 1944년 1월 22일, 이탈리아 안치오에 연합군 상륙 작전인 셔글 작전 개시.
- 1944년 8월 5일, 남부 프랑스에 연합군 상륙 작전인 드래군 작전 개시.
참조
[1]
문서
18 July 1940 & 24–25 September (Mers-el-Kébir & Military history of Gibraltar during World War II#Vichy French attacks: 1940Gibraltar), 8 June-14 July 1941 (Syria–Lebanon Campaign), and 8–11 November 1942 (Operation Torch and 'Case Anton'). Vichy officially pursued a policy of armed neutrality and conducted military actions against armed incursions from both Axis and Allied belligerents. The cease fire and pledging of allegiance of the Vichy troops in French North Africa to the Allies during 'Torch' convinced the Axis that Vichy could not be trusted to continue this policy, so they invaded and occupied the French rump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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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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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서
Only counting those sunk or grounded from the battles at Casablanca (1 battleship, 1 cruiser, 2 flotilla leaders, 5 destroyers, 6 submarines), Mers-el-Kébir (1 battleship, 1 destroyer), and Syria-Lebanon (1 sub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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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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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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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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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Barham Explodes & Sinks: World War II (1941) - archive footage captured by British Pathé News cameraman, John Tu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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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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