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중 지브롤터의 군사 역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브롤터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격변을 겪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민간인 대피가 시작되어 대부분의 지브롤터인들이 수년간 집을 떠나야 했으며, 초기에는 모로코, 이후 영국, 자메이카 등으로 분산되었다. 지브롤터는 연합군의 주요 군사 기지로 활용되었으며, 영국 공군은 비행장을 건설하고 해협 방어에 나섰다. 스페인, 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등 추축국의 공격 위협이 있었고, 독일은 펠릭스 작전을 통해 지브롤터 점령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연합군은 지브롤터를 횃불 작전의 기지로 활용했으며, 전쟁 중 폴란드의 망명 정부 수반인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이 지브롤터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지브롤터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었지만, 숙소 부족으로 인해 1951년까지 모든 피난민이 돌아오지 못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지브롤터의 역사 - 지브롤터 대포위
지브롤터 대포위는 미국 독립 전쟁 중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이 영국령 지브롤터를 포위 공격한 사건으로, 장기간의 포위와 해군 구원 작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지브롤터는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으나 외교적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 지브롤터의 역사 - 위트레흐트 조약
위트레흐트 조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713년에서 1715년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으로, 부르봉 왕가의 필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계승 인정, 영국의 지브롤터와 메노르카섬 점령, 그리고 유럽 세력 균형의 변화를 가져왔다. - 지중해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데켐브리아나
데켐브리아나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아테네에서 그리스 인민해방군을 주축으로 한 좌익 세력과 영국군 및 그리스 정부군 간에 벌어진 시가전으로, 저항 세력의 무장 해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발발하여 그리스 내전의 서막을 알렸다. - 지중해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그리스 저항군
그리스 저항군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그리스 점령에 맞서 싸운 다양한 무장 및 비무장 단체들을 통칭하며, 게릴라전, 사보타주, 정보 수집, 시위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고, 주요 단체로는 EAM-ELAS와 EDES 등이 있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연합국
연합국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 및 추축국에 대항한 국가들을 지칭하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합 창설 및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 구성에 중심 역할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 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미국, 영국, 소련을 중심으로 결성된 다국적 동맹으로, 연합국 선언을 통해 규모가 확대되었고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내부의 이념적 차이로 인해 전후 냉전의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브롤터의 군사 역사 | |
---|---|
개요 | |
![]() | |
시기 | 1939년 ~ 1945년 |
장소 | 지브롤터 |
목표 | 지브롤터 방어 및 지중해 통제 |
배경 | |
전략적 중요성 | 지브롤터 해협 통제 지중해, 대서양 연결 영국 해군 기지 |
위협 | 나치 독일의 스페인을 통한 공격 가능성 이탈리아 왕국의 지중해 장악 시도 |
방어 준비 | |
요새화 | 기존 요새 강화 새로운 방어 시설 건설 해안 포대, 대공 포대 설치 |
군사력 증강 | 영국군 병력 증원 지브롤터 연대 창설 및 훈련 |
민간 대비 | 공습 대비 훈련 식량 및 물자 비축 민간인 대피 계획 수립 |
주요 사건 | |
펠릭스 작전 | 나치 독일의 지브롤터 점령 계획 (실행되지 않음) |
이탈리아의 공격 | 공습 및 잠수함 공격 지브롤터에 큰 피해는 없었음 |
민간인 대피 | 영국, 모로코, 자메이카, 마데이라 제도 등으로 대피 |
연합군 작전 기지 | 북아프리카 전역, 시칠리아 침공 등 지원 |
영향 | |
전략적 기여 | 지중해 통제 및 연합군 작전 지원 북아프리카 전역 승리에 기여 |
지브롤터의 중요성 강화 | 영국의 지브롤터 지배 공고화 전후 지브롤터의 정치적 위상 강화 |
민간인 희생 | 공습 등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피 생활의 어려움 |
관련 정보 | |
관련 전투 | 대서양 전투 지중해 해전 |
관련 인물 | 윈스턴 처칠 프란시스코 프랑코 |
추가 정보 | |
참고 자료 | BBC WW2 People's War - Gibraltar's role in WWII BBC WW2 People's War - What life was like on the Rock during the War Years |
2. 서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지브롤터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전략적 가치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지브롤터는 군사적, 민간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2. 1. 민간인 대피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지브롤터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브롤터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민간인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하면서, 많은 지브롤터인들은 한동안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5]1940년 6월 초, 약 13,500명의 지브롤터 민간인들이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대피했다.[5] 그러나 1940년 6월 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친독일적인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면서, 카사블랑카에 있던 지브롤터 대피자들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5]
이때, 덩케르크 전투에서 구조된 프랑스 군인 15,000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던 영국 화물선 15척이 카사블랑카에 도착했다.[5] 프랑스 군인들이 하선한 후, 이 배들은 지브롤터 대피자들을 모두 태워 가기로 합의할 때까지 억류되었다.[5] 영국 해군성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코모도어 크라이튼은 대피자들이 배에 탈 수 있도록 허락했다.[5]
하지만, 메르스엘케비르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선을 공격하여 1,297명의 프랑스 해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5] 이로 인해 지브롤터 대피자들은 프랑스 군인들의 위협 속에서 급하게 짐을 챙겨 배에 올라야 했다.[5]
지브롤터에 도착한 대피자들은 지브롤터 총독의 반대로 상륙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6] 총독은 대피자들이 다시 지브롤터로 돌아오면 재대피가 불가능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6] 그러나 존 매킨토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의 항의와 시의원들의 요청으로, 런던의 지시를 받은 총독은 결국 대피자들의 상륙을 허가했다.[42] 1940년 7월 13일까지 지브롤터로의 재대피가 완료되었다.[42]
한편, 영국 보수당 정치인 올리버 스탠리는 영국 내 대피자 수용 문제를 놓고 지브롤터와 논쟁을 벌였다.[42] 그는 영국의 숙소 부족을 이유로 13,000명만 수용할 수 있으며, 그 중 2,000명은 마데이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42] 결국 런던에 수용된 대피자들은 영국 보건부의 관리를 받으며 켄싱턴 지역에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42]
1940년 9월, 일부 대피자들은 자메이카로 재대피하게 되었다.[7] 10월 9일, 1,093명의 대피자들이 지브롤터에서 자메이카로 직접 떠났고,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1940년 말, 약 2,000명의 대피자가 자메이카에, 그보다 적은 수가 마데이라에, 그리고 약 10,000명이 런던 지역에 수용되었다.
3. 군사 작전 및 위협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지브롤터는 연합군과 추축국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브롤터 해협을 통제함으로써 연합군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반대로 추축국은 이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940년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나치 독일 편으로 참전하겠다고 제안하며 지브롤터를 되찾으려는 야욕을 드러냈으나,[10] 지브롤터의 방어력과 경제적 제재의 위험을 깨닫고 참전 제안을 철회했다.[10]
1940년 영국군이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공격을 감행하자, 비시 프랑스 정부는 보복으로 지브롤터 폭격을 승인했다.[12] 이 공격으로 최초의 사상자가 발생했고,[12] 1940년 9월 24일과 9월 25일에는 더 큰 규모의 폭격이 이어져 해군 기지와 항만 시설에 피해를 입혔다.[15]
나치 독일은 펠릭스 작전을 통해 지브롤터 점령을 계획했다.[20]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서명한 이 작전은 독일군이 스페인을 통해 지브롤터를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20] 1940년 엔다예 회담에서 외교적 실패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21]
이탈리아는 1942년부터 피아지오 P.108 폭격기를 이용하여 지브롤터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22] 카시빌레 휴전 (1943년 9월 8일) 이후에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지브롤터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22]
이탈리아의 코만도 수중 폭파반 부대인 ''제10 기동대(Decima Flottiglia MAS)''는 지브롤터 항구에 대한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다.[23] 이들은 알헤시라스에 억류된 이탈리아 유조선 SS ''올테라''를 기지로 삼아[4] 유인 어뢰와 폭발물을 이용하여 연합군 선박을 공격했다.
독일 정보부(아프베어)는 스페인과 지브롤터 요원들을 동원하여 지브롤터 내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수행했다.[30] 이들은 폭탄 테러, 항공기 파괴, 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영국 정보부에 의해 저지되거나 체포되었다.
크리그스마리네(독일 해군)는 U보트를 지중해에 파견하여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를 고립시키고 영국의 무역로를 방해하고자 했다.[1] 그러나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많은 U보트가 공격을 받아 침몰하거나 피해를 입었다.[1]
3. 1. 영국 공군 (RAF)의 역할 (1939-1941)
1939년 말, 견고한 표면을 가진 활주로 건설이 시작되었고, 1940년에는 기존 활주로를 1,550야드(1,417m) 길이로 확장하는 것이 제안되었다.[9] 1941년 말, "노스 프론트"에 RAF 캠프 건설과 함께 매립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RAF 지브롤터이다.[9] 영국 공군은 이 시기에 여러 비행대대를 지브롤터로 파견했다. 1939년 9월 독일과의 전쟁이 선포되자 독일 잠수함(U-보트)이 지브롤터 해협에 집결하고 스페인 항만 시설을 사용할 가능성이 영국 해군성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9] 1939년 9월 9일 09:00 (UTC)에 제202비행대 RAF는 장비를 가득 채워 지브롤터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1939년 9월 25일, 제200 (해안) 그룹 RAF가 제202비행대 통제를 위해 지중해 RAF 본부의 하위 부대로 창설되었다.[8] 이 그룹의 임무는 지브롤터에서 작전하는 영국 공군 부대를 통제하는 것이었다.[8] 1940년 말, 이 그룹은 해안 사령부로 이전되었다.[8] 이후 1942년 초에 작전을 시작한 통합 본부가 설치되었다.[9]

3. 2.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
1940년 6월 19일, 스페인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을 독일 편으로 참전하겠다고 제안했다.[10] 1940년 7월 18일, 프랑코는 지브롤터를 되찾고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200만 명의 병력이 준비되어 있다고 선언했다.[10] 그러나 스페인은 지브롤터가 얼마나 잘 방어되어 있는지, 그리고 특히 석유 수입에 대한 스페인 항구 봉쇄의 경제적 영향을 깨닫고, 추축국과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제안을 철회하면서 이러한 위협은 현실화되지 않았다.[10]3. 3. 비시 프랑스의 공격 (1940)
1940년 7월 18일, 영국군이 메르스엘케비르 해전 공격을 감행하자,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브롤터 폭격을 승인했다. 이 공격은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최초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폭격은 소극적이었고, 대부분의 폭탄은 의도적으로 목표 지점을 벗어나 투하되었다.[12] 이 폭격으로 군인 1명과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13]9월 24일 화요일, 이탈리아 스테파니 통신사는 다카르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령 모로코 주둔 프랑스 항공기 120대가 지브롤터를 공격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은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항공기의 지브롤터 공격 보도를 공식 부인했지만, "프랑스의 보복이 임박했다"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고 보도했다.[14]
같은 날, 비시 프랑스 정부는 지브롤터 해군 기지와 도시에 대한 폭격을 명령했다. 비시 프랑스 공군 (''Armée de l'Air de Vichy'') 소속 폭격기 6개 비행대와 비시 프랑스 해군 (''Marine nationale de Vichy'') 소속 4개 비행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64대의 폭격기는 오랑, 타파루이 (프랑스령 알제리), 메크네스, 메디우나, 포르 레오테이 (모로코)의 기지에서 출격했다. 이 작전은 독일 휴전 위원회와 이탈리아 휴전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15]
프랑스는 지브롤터 공습 동안 150발의 폭탄을 투하했다.[16] 폭격은 요새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영국 항공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사우스 몰과 항구에 정박해 있던 대형 선박이 심하게 파손되었고, 지브롤터 북부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15] 그러나, 대부분의 폭탄은 바다에 떨어졌다.
9월 25일, 프랑스는 83대의 더 큰 규모의 폭격 부대를 투입하여 해군 기지와 항만 시설에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다. 영국 공군 항공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프랑스 승무원들은 격렬한 대공포화를 만났다고 보고했다. LeO 451 폭격기 1대가 손실되었고, 이틀간의 폭격 공격 동안 다른 13대의 항공기가 경미하게 손상되었다.[15] 영국 무장 트롤선 가 폭탄에 의해 침몰되었고, 여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17][18] 비시 당국은 영국이 다카르 공격을 계속하면 지브롤터 폭격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9월 25일의 공습은 비시 군에 의한 지브롤터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3. 4. 펠릭스 작전 (1940-194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지브롤터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독일의 점령 계획 대상이었다.[20] "펠릭스"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서명하고 최고 사령부에서 구상되었다.[20] 독일은 스페인을 통해 지브롤터를 공격하고 영국을 서부 지중해에서 몰아낼 계획이었다.[20] 지브롤터가 함락되면 지브롤터 해협이 봉쇄되어, 동맹국 선박은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를 우회해야 했다.[20]
독일은 프랑스를 출발해 스페인 공군 기지에 착륙하는 비행기의 급강하 폭격으로 지브롤터를 집중 공격할 예정이었다.[20] 스페인이 기지를 점령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독일 계획자들은 지브롤터 점령을 독일군만으로 수행하기로 결정했다.[20]
히틀러의 ''펠릭스 작전, 지침 제18호, 제4장: 공군''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지브롤터 항구에 대한 공습을 위해 충분한 성공을 보장할 병력을 지정해야 한다. 해군 목표에 대한 후속 작전과 록 공격 지원을 위해 주로 급강하 폭격기 부대가 스페인으로 이동해야 한다. 지상 목표물에 대한 사용을 포함하여 충분한 대공포를 육군 부대에 할당해야 한다.[19]
그러나 1940년 여름과 가을에 Wehrmacht에 의해 상세하게 작성된 이 작전은 1941년 초 최고위 정부의 외교 실패(엔다예 회담)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21]
루트비히 퀴블러 장군의 제49군단이 록에 대한 실제 공격을 수행할 예정이었다.[21] 공격 부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부대 |
---|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 연대 |
제1 산악 사단의 제98 연대 |
26개의 중형 및 중포 포병 대대 |
3개의 관측 대대 |
3개의 공병 대대 |
2개의 연막 대대 |
150명의 브란덴부르크 부대 |
최대 150대의 소형 원격 조종 폭파 차량(골리앗)[21] |
독일 공군(''Luftwaffe'')은 연합군 작전의 일환으로 다음 부대를 투입할 예정이었다.[20][21]
독일 해군(''Kriegsmarine'')은 U보트를 사용하여 영국 해군의 이동을 방해하고, 해안 포대를 설치하여 영국 해군을 더욱 위축시킴으로써 협력할 예정이었다.[20][21]
1941년 3월 10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임박한 가운데, 펠릭스 작전은 독일군이 소련에서 철수하여 지브롤터를 점령하는 ''펠릭스-하인리히 작전''으로 수정되었다.[20] 그러나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완강함으로 인해 작전은 연기, 수정되었고, 결국 포기되었다.[20][21]
3. 5. 이탈리아의 폭격
사르데냐에서 출격한 이탈리아 피아지오 P.108 폭격기는 1942년에 지브롤터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지브롤터에 대한 마지막 공습은 횃불 작전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같은 폭격기가 오란도 공격했다.[22]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이탈리아 왕립 공군)에서 피아지오 P.108을 운용한 유일한 부대는 "제274 장거리 폭격 비행대대"였다. 이 부대는 1941년 5월에 처음 생산된 기체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나, 승무원 훈련이 길어져 1942년 6월에야 작전을 시작했다. 1942년 10월에는 사르데냐에서 지브롤터를 향해 여러 차례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22]
카시빌레 휴전 (1943년 9월 8일) 이후,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지브롤터에 최소 두 차례 공습을 감행했다. 1944년 6월 4일 밤에서 5일 밤 사이에는 SM.79bis 항공기 10대로, 6월 6일에는 항공기 9대로 공습했다. 두 차례 모두 아에로실루란티 "부스칼리아-파지오니" 그룹이 수행했다.[22]
날짜 | 부대 | 폭격기 | 수량 |
---|---|---|---|
1940년 7월 17/18일 | 실험부대 | SM.82 | 3 |
1940년 7월 25/26일 | 실험부대 | SM.82 | 3 |
1940년 8월 20/21일 | 실험부대 | SM.82 | 2 |
1941년 6월 6일 | 실험부대 | SM.82 | 1 |
1941년 7월 11일 | SM.82 | 1 | |
1941년 7월 13일 | SM.82 | 1 | |
1941년 7월 14일 | SM.82 | 1 | |
1942년 4월 1일 | 제47 비행대 | SM.82 | 3 |
1942년 6월 28/29일 | 제274 독립 장거리 폭격 비행대 | P.108B | 5 |
1942년 7월 3일 | 제274 독립 장거리 폭격 비행대 | P.108B | 1 |
1942년 9월 24일 | 제274 독립 장거리 폭격 비행대 | P.108B | 2 |
1942년 10월 20일 | 제274 독립 장거리 폭격 비행대 | P.108B | 4 |
1942년 10월 21일 | 제274 독립 장거리 폭격 비행대 | P.108B | 3 |
1943년 7월 19일 | 제132 독립 어뢰 폭격 비행대 | SM.79 | 10 |
3. 6. 이탈리아 잠수함 공격 (1940-1943)
파시즘 정권 시대에 창설된 이탈리아 코만도 수중 폭파반 부대인 ''제10 기동대(Decima Flottiglia MAS)''는 지브롤터 항구에 대한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다. 이 부대는 "떠다니는 트로이의 목마"로 알려져 있었다.[23]지브롤터는 영국 군함과 연합군 상선을 위한 은신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에게 매우 매력적인 목표였다.[23] 이탈리아 수중 폭파반은 처음에는 지브롤터에서 약 3.22km 떨어진 스페인 빌라(''Villa Carmela'')를 기지로 사용했다. 이 빌라는 스페인 여성 콘치타 라모니뇨와 결혼한 이탈리아 장교의 소유였다.[23] 이후 그들의 기지는 알헤시라스에 억류된 이탈리아 유조선 SS ''올테라''로 옮겨졌다.[4]
''제10 기동대(Decima Flottiglia MAS)''의 지브롤터 작전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날짜 | 작전 내용 |
---|---|
1940년 8월 21일 | 이탈리아 잠수함 이리데가 8월 22일 지브롤터 공격을 위해 라스페치아를 출발. |
1940년 9월 24일 | 주니오 발레리오 보르게세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잠수함 시레가 3대의 유인 어뢰와 6명의 승무원을 싣고 라스페치아를 출발. 9월 29일, 영국 함대가 시레가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지브롤터를 떠나면서 공격은 취소되고 잠수함은 라 마달레나로 복귀. |
1940년 10월 21일 | 시레가 3대의 유인 어뢰와 6명의 승무원을 싣고 라스페치아를 출발하여 지브롤터로 항해. 유인 어뢰 고장으로 한 대만 항구에 진입, 선박 피해는 없음.[24] 승무원 2명 체포, 테세오 테세이와 알시데 페데레티를 포함한 4명은 스페인으로 탈출 후 이탈리아로 복귀.[24] 이들의 유인 어뢰는 에스피곤 만에 밀려와 스페인 당국에 억류. |
1941년 5월 25일 | 시레가 3대의 유인 어뢰를 싣고 라스페치아를 출발. 카디스에서 유조선 풀고르에 6명의 승무원을 비밀리에 태움.[24] 지브롤터에서 군함을 찾지 못함. 아크 로열 및 셰필드가 5월 27일 침몰한 비스마르크 수색을 위해 대서양으로 이동했기 때문. 로도스테드에서 상선 공격 실패, 승무원들은 스페인으로 탈출하여 비행기로 이탈리아로 복귀.[24] |
1941년 9월 10일 | 시레가 3대의 유인 어뢰를 싣고 라스페치아를 출발. 카디스에서 6명의 승무원을 비밀리에 태우고 덴비데일과 피오나 셸이라는 2척의 유조선과 더럼이라는 화물선 등 3척의 선박을 침몰시킴. 어뢰 승무원들은 장비를 버린 후 스페인 영토로 헤엄쳐 갔고, 나중에 이탈리아로 복귀. |
1942년 7월 | 이탈리아 수중 폭파반은 지브롤터 근처 알헤시라스에 억류된 이탈리아 화물선 올테라에 기지를 설치. 자재를 비밀리에 스페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이 제한됨. |
1942년 7월 13일 | 12명의 이탈리아 수중 폭파반이 알헤시라스 만에 있는 빌라 카르멜라에서 지브롤터 항구로 헤엄쳐 들어가 폭발물을 설치, 4척의 화물선(메타, 엠파이어 스나이프, 바론 더글러스, 슈마)을 침몰시킴. |
1942년 9월 15일 | 이탈리아 수중 폭파반이 증기선 레이븐스 포인트를 침몰시킴. |
1942년 12월 8일[25] | 3대의 어뢰에 탑승한 6명의 이탈리아인이 올테라를 출발하여 영국 군함 넬슨, 포미더블, 퓨리어스를 공격. 영국 순찰선이 폭뢰로 어뢰 승무원 1명(비신티니 중위와 마그로 수병)을 사살. 시신은 수습되었고, 오리발은 지브롤터의 영국 경비 잠수부 시드니 놀스와 라이오넬 크랩 사령관이 사용. 영국 순찰선이 다른 어뢰를 감지, 추격 및 사격하여 2명의 승무원을 체포. 남은 어뢰는 후방 라이더를 잃고 올테라로 복귀. |
1943년 5월 8일 | 3대의 이탈리아 유인 어뢰가 악천후 속에서 올테라를 출발하여 지브롤터를 공격, 미국 리버티선 패트 해리슨과 영국 화물선 마슈드와 카메라타를 침몰시킴. |
1943년 8월 3일 | 3대의 이탈리아 유인 어뢰가 올테라를 출발하여 지브롤터를 공격, 노르웨이 선박 토르쇼브디, 미국 리버티선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영국 선박 스탠리지 등 3척의 상선을 다시 침몰시킴. |
3. 7. 독일 정보부 (Abwehr)의 파괴 공작
독일 정보부(아프베어)는 스페인과 지브롤터 요원들을 동원하여 지브롤터 내 시설에 대한 파괴 공작을 수행했다. ''아프베어''는 캄포 데 지브롤타르의 스페인 참모 장교인 엘레우테리오 산체스 루비오 중령과 접촉했다. 그는 팔랑헤의 일원이었고 캄포의 정보 작전을 조정했는데,[30] 지브롤터에 접근할 수 있는 파괴 공작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산체스 루비오는 팔랑헤의 또 다른 일원인 에밀리오 플라자스 테제라를 조직의 작전 책임자로 임명했다.[30]파괴 공작에 투입된 요원들은 대부분 캄포 출신의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재정적 보상, 이념적 헌신, 그리고 약간의 위협과 협박을 조합하여 상당수의 요원을 모았다. 영국 정보부에 따르면 지브롤터에 대한 간첩 및 파괴 공작에 최소 183명의 스페인인과 지브롤터인이 연루되었다고 한다.
파괴 공작은 1940년 늦가을에 베를린에서 명령되었지만 실제 작업은 1941년 초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첫 번째 작전은 실패했는데, 지브롤터에 폭탄을 밀반입하려는 시도는 타이밍 장치가 고장나면서 중단되었다. 1941년 2월에는 노스 터널에서 큰 폭발이 있었고, 4월에는 비행장 근처에서 폭탄이 터졌다.[26] 1941년 6월, 영국 정보부는 독일 요원이 연합군 화물선 옆에 지뢰를 부착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플라자스가 탄약 저장고 안에 폭탄을 설치했지만 폭발물을 작동시킬 수 없어서 또 다른 시도가 실패했다.
1942년이 되어서야 작전이 성공하기 시작했다. 1월에는 두 명의 스페인 요원이 노스 프론트 착륙 활주로에서 항공기 두 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자금 지원, 훈련 및 장비를 지원받은 스페인 파괴 공작원들은 무장된 트롤 어선을 침몰시켰고, 1월 18일에는 HMS ''Argus''의 장교 1명과 영국 해군 징집병 6명의 사망을 초래한 보조 기뢰 제거선을 파괴했다.[27][28][29] 플라자스는 푸엔테 마요르가의 스페인 해군 사령관인 마누엘 로메로 휴메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그가 그곳에 사공선을 정박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영국 정보부는 파괴 공작에 대응할 수 있었다. 1942년 3월, 독일을 위해 일하는 가장 저명한 요원 중 한 명인 호세 키는 ''아프베어''를 위해 군사 이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연말에 원즈워스 교도소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42년 9월까지 플라자스는 당시 영국에 의해 그의 활동이 면밀히 감시받고 있었고, 사임하여 작전 책임을 부사령관인 카를로스 칼보에게 넘겼다.[30]
1942년 말, 베를린의 독일 본부는 파괴 공작의 확대를 명령했다. 1943년 초, 스페인에서 경험이 풍부한 ''아프베어'' 작전 책임자가 도착하면서 작전의 영향력이 향상되었다. 3월, 탄약고가 칼보의 요원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영국은 일부 파괴 공작원에 대한 의심이 커지면서 그들의 지브롤터 입국을 금지했다. 이로 인해 ''아프베어''는 칼보에게 새로운 인력을 요청해야 했다.
록에서 일하는 스페인인 호세 마르틴 무뇨스는 1943년 6월 30일 석탄 섬의 대형 연료 탱크에서 발생한 폭발과 화재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 임무는 무뇨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가 될 뻔했는데, 그가 래그드 스태프 동굴 내부의 무기 저장고에 폭탄을 밀반입하려다 8월에 영국 당국에 의해 포위되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파괴 공작원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1944년 1월 11일 지브롤터에서 영국 사형 집행인 앨버트 피에르포인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관련 없는 ''아프베어'' 파괴 공작 네트워크의 일원인 루이스 로페스 코르돈-쿠엔카(1943년에도 체포됨)도 같은 날 피에르포인트에 의해 처형되었다.
칼보 본인은 스페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무력화되었다. 그는 12월에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스페인의 파괴 공작 부서 책임자인 볼프강 블라움, 일명 바우만 대령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마드리드에서 다시 ''아프베어''에 합류했다.[30] 친연합군 호세 엔리케 바렐라 장군에 대한 팔랑헤의 암살 시도가 산체스 루비오 네트워크의 요원인 후안 호세 도밍게스에 의해 자행되었고, 안소니 이든과 런던 주재 스페인 대사인 하코보 피츠-제임스 스튜어트 간의 회담 이후, 지브롤터 주변의 ''아프베어'' 활동은 종식되었다.[31]
3. 8. 지중해 U-보트 작전 (1941-1944)
크리그스마리네(독일 해군)는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를 고립시키고 영국의 무역로를 방해하고자 했다. 60척 이상의 U보트가 지중해에서 연합군의 선박을 차단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U보트 중 다수는 영국이 통제하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공격을 받았다.[1] 9척의 U보트가 통과를 시도하다 침몰했고, 10척이 추가로 피해를 입었다.[1]4. 연합군의 반격 및 주요 작전
1942년 횃불 작전과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진행된 트레이서 작전이 지브롤터에서 계획되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군은 1942년 중반까지 반격 계획을 세웠다.[35]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제안대로 지중해를 통해 "유럽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이었다.[35]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이 고안한 이 계획은 횃불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3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중장은 횃불 작전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2년 11월 5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횃불 작전과 지브롤터의 군사 지휘권을 인수했다.[35]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이 지브롤터를 점령할 경우에 대비한 영국의 극비 잔류 첩보 작전인 트레이서 작전도 있었다.[32] 이 작전은 6명의 요원이 동굴에 봉인되어 7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물품을 가지고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었다.[33] 이들은 지브롤터 만을 감시하는 약 30.48cm x 약 15.24cm 크기의 슬릿이 있는 관측소와 지중해를 바라보는 은폐된 야외 테라스에서 활동할 예정이었다.[33]
4. 1. 횃불 작전 (1942)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군은 1942년 중반까지 반격 계획을 세웠다.[35] 1943년 유럽 침공은 불가능했지만,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말처럼 지중해를 통해 "유럽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할 수 있었다.[35]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이 고안하고 횃불 작전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이 계획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프랑스 식민지에서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몰아낼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35]1942년 7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중장이 횃불 작전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5] 처칠은 지브롤터를 아이젠하워 장군 지휘 아래 두고, 이 작전(전쟁에서 최초의 대규모 영미 작전)의 임시 본부로 삼았다.[35] 아이젠하워는 1942년 11월 5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횃불 작전과 지브롤터의 군사 지휘권을 인수했다.[35]
아이젠하워 장군은 공식 지브롤터 총독 관저인 ''수도원''에 머물렀지만, 작전 본부는 바위 중심부 터널의 작은 방에 있었다.[35]
수많은 수송선에 실린 10만 명의 병사들이 지브롤터로 모여들었다.[35] 모든 유형의 항공기 400대 이상이 지브롤터 활주로 주변 분산 지역에 배치되었다.[44] 전투기는 상자에 담겨 운송되어 비행장에서 조립되었다.[5] 탄약, 연료, 기타 필수 물품이 모든 가용 저장 공간을 채웠다. 168명의 미국 조종사가 ''노스 프론트''의 RAF 식당에 수용되었다.[35]
1942년 11월 8일, 지브롤터에서 발진한 항공기 466대가 점령된 북아프리카 비행장에 착륙했다.
아이젠하워 장군과 앤드루 브라운 커닝햄 경 제독은 지브롤터 본부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군이 참여한 최초의 주요 합동 전투 작전인 횃불 작전을 지휘했다.[35]
4. 2. 트레이서 작전 (1941-1942)
작전 트레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이 지브롤터를 점령할 경우에 대비한 영국의 극비 잔류 첩보 작전이었다.[32] 이 작전은 6명의 요원이 동굴에 봉인되어 7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물품을 가지고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자원자들은 의사 2명, 통신병 3명, 지휘관 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지브롤터 만을 감시하는 약 30.48cm x 약 15.24cm 크기의 슬릿이 있는 관측소와 지중해를 바라보는 은폐된 야외 테라스에서 활동할 예정이었다.[33] 이들은 모든 선박의 이동 정보를 영국 해군성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33]

만약 동굴 안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벽돌 바닥에 시멘트로 매장될 예정이었다.[33]
1941년 말, 독일의 침공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비밀 관측소 설치 계획이 ''작전 트레이서''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다.[33] 초기에는 지브롤터에 설치하고, 이후 몰타와 아덴 등 다른 지역에도 설치할 계획이었다.[33]
지브롤터에서는 제프리 빌리 사령관과 포드햄 대령의 지휘 아래 작업이 즉시 시작되었다. 로드 에어리 배터리 남쪽 끝에 위치한 부지는 이미 로드 에어리 쉘터를 위한 터널 계획이 존재했다.[33] 1942년 1월에는 MI6 무선 전문가 리처드 갬비어-패리 대령의 감독하에 장비 실험이 진행되었다.[33] 로버트 팰컨 스콧의 테라 노바 원정대 대원이었던 조지 머레이 레비크가 생존 기술 자문을 위해 외과 사령관으로 합류했다.[33] 식단, 운동, 위생, 의류뿐만 아니라 "요원의 심리학"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도 고려되었다.[33] 1942년 여름, 팀 구성과 동굴 설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작전의 모든 측면에 대한 포괄적인 매뉴얼이 준비되었고, 미래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 세계에 유사한 비밀 감시 초소를 설치할 계획이었다.[33]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동부 전선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작전 트레이서는 실행되지 않았다.[33]
이 작전은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가, 영국 큐의 공공 기록 보관소에서 관련 문서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33] 1960년대에 정보부 관계자가 기자에게 이 작전에 대한 정보를 흘렸고, "작전 몽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왔지만, 내용은 부족했다.[33]
1997년, 지브롤터 동굴 탐험 그룹이 "잔류 동굴" (별명)을 발견했다.[33] 터널에서 강한 돌풍을 감지한 후, 50년 이상 봉인되어 있던 방으로 통하는 벽을 뚫고 들어가면서 발견되었다.[33]
2006년 11월, 짐 크론과 로열 지브롤터 연대의 피트 잭슨 상사는 작전 트레이서의 유일한 생존자로 추정되는 W. A. 브루스 쿠퍼 박사를 영국에서 만났다.[33] 당시 92세였던 쿠퍼 박사는 영국 해군 자원 예비대 (RNVR)의 외과 소위로 작전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전에 대한 증언을 했다.[33] 그는 동료, 훈련, 그리고 임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회상했다.[34]
5. 종전과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은 지브롤터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5] 바위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대피를 시행하면서, 대부분의 지브롤터 사람들은 최대 10년 동안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었다.[5] 필수적인 직업을 가진 민간인들만 남을 수 있었지만, 이는 전체 공동체에 전쟁에 동참함으로써 '영국인'이라는 소속감을 주었다.[5]
1940년 6월 초, 약 13,500명의 대피자들이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 군대에 항복한 후, 친독일적인 비시 프랑스 정부는 카사블랑카에 지브롤터 대피자들이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5] 이들은 영국 화물선 15척이 덩케르크에서 구조된 프랑스 군인 15,000명을 송환하면서 지브롤터로 돌아올 기회를 얻었다.[5] 구조된 군인들이 하선하자, 배들은 모든 대피자들을 데려가는 데 동의할 때까지 억류되었다.[5] 영국 해군성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코모도어 크라이튼은 대피자들을 위해 탑승을 허가했다.[5] 메르스엘케비르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 군함을 파괴하여 1,297명의 프랑스 해군이 사망한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가족들은 총검의 위협을 받으며 소지품을 남겨둔 채 떠나야 했다.[5] 지브롤터 총독은 대피자들의 상륙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존 매킨토시 광장에 군중이 모여 항의하자 런던의 지시를 받아 상륙을 허용했다.[6][42] 1940년 7월 13일까지 지브롤터로의 재대피가 완료되었다.[42]
영국 보수당 정치인 올리버 스탠리는 영국에서 대피자들을 수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지브롤터와 인원수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42] 그는 총독이 대피자 수를 다르게 보고했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숙소 부족을 이유로 13,000명만 수용할 수 있으며, 그 중 2,000명은 마데이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42] 런던에서 대피자들은 보건부에 의해 켄싱턴 지역에 수용되었다.[42] 런던 공습이 격화되면서 지브롤터에서 그들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7]
1940년 9월에는 자메이카로의 재대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10월 9일에 1,093명의 대피자들이 자메이카로 떠났다. 1940년 말, 약 2,000명의 대피자가 자메이카에, 그보다 적은 수가 마데이라에, 약 10,000명이 런던에 수용되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피난민의 귀환에 대한 반대가 사라졌다.[42] 1943년 11월에 재정착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44년 2월 8일 회의에서 귀환 우선순위가 합의되었다.[42] 1944년 4월 6일, 1,367명의 첫 번째 귀환자 그룹이 영국에서 직접 도착했고, 1944년 5월 28일에는 첫 번째 귀환 그룹이 마데이라를 떠났다. 1944년 말까지 우선순위가 없는 피난민은 520명만 섬에 남아 있었다.[43]
런던에서는 귀환자들이 피난민의 전시 숙소를 요구했고, 500명의 지브롤터인들이 스코틀랜드로, 3,000명이 북아일랜드의 캠프로 재피난되었다.[44] 노엘 메이슨-맥팔레인 경(Lt. General Sir Noel Mason-MacFarlane) 총독은 피난민을 위해 노력했지만, 숙소 부족을 지연의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44] 1947년에도 2,000명이 북아일랜드 캠프에 있었다.[44] 마지막 피난민들은 1951년이 되어서야 다시 지브롤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44]
5. 1.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죽음 (1943)

1943년 7월 4일, RAF 수송 사령부 소속 리버레이터 폭격기가 지브롤터에서 영국으로 이륙했다.[37] 이 비행기에는 폴란드 런던에 본부를 둔 망명 정부의 수상이자 군대 총사령관인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중동의 폴란드 군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37]
항공기는 활주로에서 정상적으로 상승하여 속도를 내기 위해 수평을 유지했지만 갑자기 고도를 잃고 항구에 추락했다.[37] 62세의 시코르스키 장군은 다른 15명과 함께 사망했다.[37] 유일한 생존자는 체코 출신 조종사 에두아르트 프르찰이었으며, 그는 RAF 보트에 의해 구조되었다.[37] 시코르스키의 딸을 포함한 5명의 승객과 승무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37]
시코르스키 장군과 그의 참모총장 킬리메츠키 장군의 관은 폴란드 국기로 덮여 성모 대관 성당에 안치되었다.[38] 진혼 미사 후, 시신은 정식 군사적 예우를 갖춰 H.M. 조선소로 행렬되었고, 시코르스키 장군의 유해가 언젠가 해방된 폴란드로 반환될 것을 예상하며 런던으로 수송되었다.[38] 조선소로 가는 길에는 영국 군인들이 늘어섰고 관은 폴란드 군인들이 운반하고 호위했다.[38]
1943년 영국 조사 위원회는 시코르스키의 리버레이터 II ''AL523''의 추락 사고를 조사했지만, 사고의 유력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단지 사고였다는 점[39]과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항공기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는 점만 밝혀냈다. 대중적인 이론은 기술적인 유지 보수 부족으로 항공기 조종 장치가 잼(jam)되었다는 것이었다.[40] 위원회의 결론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정치적 맥락과 다양한 기이한 상황이 맞물려 시코르스키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소련, 영국, 심지어 폴란드 음모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 있다는 추측이 즉시 제기되었다.[41]
5. 2. 지브롤터 주민들의 귀환
제2차 세계 대전은 지브롤터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5] 바위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대피를 강행하기로 하면서, 대부분의 지브롤터 사람들은 최대 10년 동안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었다.[5] 필수적인 직업을 가진 민간인들만 남을 수 있었지만, 이는 전체 공동체에 전쟁에 동참함으로써 '영국인'이라는 소속감을 주었다.[5]1940년 6월 초, 약 13,500명의 대피자들이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 군대에 항복한 후, 친독일적인 비시 프랑스 정부는 카사블랑카에 지브롤터 대피자들이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5] 이들은 영국 화물선 15척이 덩케르크에서 구조된 프랑스 군인 15,000명을 송환하면서 지브롤터로 돌아올 기회를 얻었다.[5] 구조된 군인들이 하선하자, 배들은 모든 대피자들을 데려가는 데 동의할 때까지 억류되었다.[5] 영국 해군성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코모도어 크라이튼은 대피자들을 위해 탑승을 허가했다.[5] 메르스엘케비르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 군함을 파괴하여 1,297명의 프랑스 해군이 사망한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가족들은 총검의 위협을 받으며 소지품을 남겨둔 채 떠나야 했다.[5] 지브롤터 총독은 대피자들의 상륙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존 매킨토시 광장에 군중이 모여 항의하자 런던의 지시를 받아 상륙을 허용했다.[6][42] 1940년 7월 13일까지 지브롤터로의 재대피가 완료되었다.[42]
영국 보수당 정치인 올리버 스탠리는 영국에서 대피자들을 수용하는 데 동의했지만, 지브롤터와 인원수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42] 그는 총독이 대피자 수를 다르게 보고했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숙소 부족을 이유로 13,000명만 수용할 수 있으며, 그 중 2,000명은 마데이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42] 런던에서 대피자들은 보건부에 의해 켄싱턴 지역에 수용되었다.[42] 런던 공습이 격화되면서 지브롤터에서 그들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7]
1940년 9월에는 자메이카로의 재대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10월 9일에 1,093명의 대피자들이 자메이카로 떠났다. 1940년 말, 약 2,000명의 대피자가 자메이카에, 그보다 적은 수가 마데이라에, 약 10,000명이 런던에 수용되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피난민의 귀환에 대한 반대가 사라졌다.[42] 1943년 11월에 재정착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44년 2월 8일 회의에서 귀환 우선순위가 합의되었다.[42] 1944년 4월 6일, 1,367명의 첫 번째 귀환자 그룹이 영국에서 직접 도착했고, 1944년 5월 28일에는 첫 번째 귀환 그룹이 마데이라를 떠났다. 1944년 말까지 우선순위가 없는 피난민은 520명만 섬에 남아 있었다.[43]
런던에서는 귀환자들이 피난민의 전시 숙소를 요구했고, 500명의 지브롤터인들이 스코틀랜드로, 3,000명이 북아일랜드의 캠프로 재피난되었다.[44] 노엘 메이슨-맥팔레인 경(Lt. General Sir Noel Mason-MacFarlane) 총독은 피난민을 위해 노력했지만, 숙소 부족을 지연의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44] 1947년에도 2,000명이 북아일랜드 캠프에 있었다.[44] 마지막 피난민들은 1951년이 되어서야 다시 지브롤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44]
참조
[1]
서적
The Rock
Companion Book Club
1958
[2]
서적
The Rock of the Gibraltarians. A History of Gibraltar
Gibraltar Books
1998
[3]
웹사이트
Gibraltar's role in WWII
http://www.bbc.co.uk[...]
WW2 People's War
2007-07-31
[4]
웹사이트
What life was like on the Rock during the War Years
http://www.bbc.co.uk[...]
WW2 People's War
2007-07-31
[5]
문서
Bond, pp. 97
[6]
문서
Bond, pp. 98
[7]
문서
GGA, Evacuation 1940: General Mechanics of
[8]
웹사이트
Air of Authority—A History of RAF Organisation
http://www.rafweb.or[...]
Royal Air Force Organisation
2007-07-04
[9]
웹사이트
The History of RAF Gibraltar
http://www.raf.mod.u[...]
Royal Air Force—Gibraltar
2007-07-05
[10]
서적
The Politics of Revenge: Fascism and the Military in 20th-century Spain
Routledge
1990
[11]
웹사이트
The Evacuation of Gibraltar 1940
https://friendsofgib[...]
friendsofgibraltar
2016-01
[12]
서적
Vichy Air Force at War: The French Air Force that Fought the Allies in World War II
Pen & Sword Aviation
2011
[13]
서적
Defending the Rock: How Gibraltar Defeated Hitler
https://books.google[...]
Faber & Faber
2023-11-05
[14]
서적
Sea War: 1939–1945
[15]
서적
Sea War: 1939–1945
[16]
문서
Sutherland and Canwell, p. 29
[17]
웹사이트
Naval-History.net
http://www.naval-his[...]
[18]
문서
Sutherland and Canwell, p. 30
[19]
서적
A short History of Loreto in Gibraltar
DOMA
[20]
문서
Bond pp. 100–102
[21]
웹사이트
Operation Felix: Assault on Gibraltar
http://stonebooks.co[...]
Bill Stone
2007-08-16
[22]
서적
In the Skies of Europe
The Crowood Press
2000
[23]
웹사이트
Naval Assault Units
http://www.comandosu[...]
Commando Supremo
2007-09-04
[24]
간행물
Gibraltar
[25]
간행물
Gibraltar
[26]
서적
British Intelligence in the Second World War: Security and Counter-Intellig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27]
웹사이트
Royal Navy casualties, January 1942
http://www.naval-his[...]
[28]
웹사이트
Naval Events, January 1942, Part 2
http://www.naval-his[...]
[29]
웹사이트
HMS Erin ASW Trawler
http://www.uboat.net[...]
Uboat.net
[30]
문서
Ros Agudo (2005), pp. 232–234
[31]
문서
Ros Agudo (2005), p. 236
[32]
간행물
Operation Tracer
1997-10
[33]
웹사이트
Operation Tracer - Stay Behind Cave
http://www.aboutourr[...]
www.aboutourrock.com
2012-09-10
[34]
뉴스
Secret plan to bury soldiers alive inside Rock of Gibraltar
http://www.belfastte[...]
The Belfast Telegraph
2007-02-05
[35]
웹사이트
Address by the Hon P.R. Caruana QC on the occasion of a plaque unveiling ceremony to commemorate 'Operation Torch'
http://www.gibraltar[...]
Government of Gibraltar
2007-07-01
[36]
웹사이트
The Great Siege Tunnels
http://www.gibraltar[...]
Government of Gibraltar
2007-06-29
[37]
뉴스
Real History and the Death of General Sikorski
2003-07-04
[38]
간행물
General Sikorski
[39]
웹사이트
Tajemnica gen. Sikorskiego
http://www.dziennik.[...]
2002-12-07
[40]
간행물
Biuletyn „Kombatant” nr specjalny (148) czerwiec 2003
http://www.udskior.g[...]
2003-06
[41]
뉴스
'Polish soldier's 'fishy' sabotage tale'
http://news.bbc.co.u[...]
BBC
2006-09-04
[42]
문서
Garcia, pp. 20
[43]
문서
Garcia, pp. 20
[44]
문서
Bond, pp. 100
[45]
서적
The Rock
Companion Book Club
1958
[46]
서적
The Rock of the Gibraltarians. A History of Gibraltar
Gibraltar Books
1987
[47]
웹인용
Gibraltar's role in WWII
http://www.bbc.co.uk[...]
WW2 People's War
2007-07-31
[48]
웹인용
What life was like on the Rock during the War Years
http://www.bbc.co.uk[...]
WW2 People's War
2007-07-3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