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경공 (희진)
1. 개요
진 경공은 춘추 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아버지 진 성공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즉위 초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노력했으나, 정나라 구원 과정에서 초나라에 패하여 패권을 상실했다. 이후 적적 정벌과 안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동방에서의 패권을 회복하고 군대를 확장했다. 내부적으로는 권신들을 견제하고 조씨 가문을 몰락시키는 등 권력 투쟁을 벌였으며, 오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견제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말년에는 수도를 옮기고, 병입고황(病入膏肓)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기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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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중국의 군주 -
초 영왕
초 영왕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왕으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쇠퇴한 초나라의 패권을 재건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자결했다. -
기원전 6세기 중국의 군주 -
주 경왕 (개)
주 경왕은 주 영왕의 손자이자 주 경왕의 아들로, 형인 도왕 사후 기원전 520년에 즉위하여 왕자조의 난 등을 겪고 성주로 천도했으며 기원전 476년에 사망했다. -
기원전 7세기 중국 사람 -
제 희공
제 희공은 제나라의 제후로서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나라와 위나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며 북융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으나, 말년에 후계 구도에 혼란을 야기하다가 재위 33년 만에 사망했다. -
기원전 7세기 중국 사람 -
제 환공
제 환공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제후이자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관중을 등용하여 제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초나라의 남진을 저지하는 등 춘추 시대 초반 질서 확립에 기여했으나, 관중 사후 정치적 혼란과 후계자 다툼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및 치세
진 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초와 강화한 진(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진경공 3년(BC 597) 초장왕(楚莊王)이 진나라를 섬긴다는 이유로 정나라(鄭)를 정벌하러와 수도 정성(鄭城, 형양)을 포위하자 정양공(鄭襄公)은 진경공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진경공은 순림보(荀林父)를 중군원수(진나라의 필두 재상), 사회(士會)를 상군원수, 조삭(趙朔)을 하군원수로 삼고 선곡(先縠), 극극(郤克), 난서(欒書)를 각각 중·상·하군의 보좌로, 그리고 한궐(韓厥)을 사마에 임명해 병거 600승을 정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같은해 6월 진군(晋軍)이 황하에 도착했을 때 정백(정양공)이 초장왕에게 항복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순림보는 회군할 생각이었으나 중군보좌 선곡이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하는 것은 나라의 망신이라며 반대했다. 퇴각을 생각하던 순림보는 주전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갈등했는데 이때 선곡이 조동, 조괄 형제, 위기(魏錡), 조전(趙旃)과 함께 멋대로 황하를 건너 초군 앞에 진지를 세웠다. 순림보는 할 수 없이 전군에 대해 황하를 건너 진영을 세우게 했다. 선곡은 전투를 하기 위해 화평을 요청하러 순림보를 찾아온 초장왕의 사신 채구(蔡鳩)를 망신줘서 내쫓았다. 결국 양군은 전투에 돌입한다. 이 전투에서 진군은 초군에 대패했다. 순림부의 중군과 조삭의 하군은 초군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간신히 황하를 건너 퇴각했다. 이 싸움의 패전으로 진나라는 패권을 초장왕에게 내주게 된다.
하지만 진경공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순림보 일행에 대해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고 오직 군령을 처음으로 위반한 선곡만 벌하는 것으로 패전의 벌을 마무리했다. 이는 진문공 이후 가장 큰 패전을 했음에도 진나라가 중원의 패권국 지위를 지킬 수 있고 아울러 훗날 초나라에 복수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다.
진경공 4년(BC 596), 선곡이 필 전투 패배로 주살될 것을 두려워해 오랑캐 책(翟)나라로 도주했다. 그후 선곡은 책군을 동원해 진나라를 칠 구상을 했다. 이에 진나라에선 선진의 후손인 선씨 일가를 모두 주살한다.
진경공 5년(BC 595), 순림보는 초나라에서 명재상인 영윤 손숙오(孫叔敖)가 죽자 앞서 필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로 정나라를 노략질한다. 정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초장왕은 진나라를 섬기는 송(宋)을 공격해 진나라에 복수키로 했다.
진경공 6년(BC 594), 초장왕은 공자영제와 공자측을 동원해 송성(宋城) 수양성을 포위했고 송은 진에 구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진나라 모신 백종(伯宗)은 필 전투의 패배를 볼 때 하늘이 초를 돕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므로 실제로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구원병을 보낼 것처럼 꾸며 초의 포위를 풀자는 계략을 아뢴다. 이에 진경공은 해양(解揚)을 송에 사자로 보낸다. 해양은 가는 길에 초군에 사로 잡히게 된다. 초장왕은 해양에게 진의 구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니 어서 항복하라고 말하면 살려주고 초에서 중히 쓸 것이라고 말했으나 해양은 죽음을 각오하고 송성에 진군이 곧 당도할 것이라고 외쳤다. 초장왕은 진노했지만 그가 진나라 신하로서 목숨을 걸고 사명을 마쳤다는 점을 치하하고 그를 풀어준다.
진경공 7년(BC 593), 진경공은 송이 1년 넘게 초에 항전하자 일부 신하들의 여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원병을 편성키로 했다. 하지만 구원군은 송을 구원하지 않고 이웃 적적(赤狄)의 노(潞)나라를 친다. 순림보와 함께 노나라를 친 후 노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을 하고 있던 위과와 동생 위기는 노나라를 구원하려는 진(秦)군의 공격을 받는다. 위과 형제는 고전 끝에 진의 맹장 두회를 사로잡아 그를 참수하고 진군을 대파한다. 진경공은 사회(士會, 范文子)에게 명해 적적의 잔적들을 정벌하도록했다. 이렇게 진이 구원을 해주지 않자 송의 송문공(宋文公)은 결국 초에 항복한다.
진나라에 도적이 날뛰었지만 이를 막지 못해 홧병이 난 순림보가 사망. 사회가 중군원수를 계승했다. 진경공은 사회의 존재를 국내외에 각인시키기 위해 사회에게 적적을 토벌하고 얻은 전리품과 포로를 모두 주(周)왕실에 바치도록 했다. 이에 동주 정왕(周定王)은 사회를 진나라 상경으로 삼았다.
진경공 8년(BC 592), 진경공은 초를 견제하기 위해 상군원수 극극(郤克)을 사신으로 보내 제와 친교하려했다. 이 때 제나라에는 극극 외 노(魯) 상경 계손행보, 위(衛) 상경 손량부, 조(曹) 대부 공자 수가 친교를 맺기 위해 사신으로 왔다. 그런데 제경공(齊頃公)은 자신의 모후 소태부인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꾸인 극극의 수레는 애꾸가, 대머리 계손행보의 수레는 대머리가, 절름발이 손량부의 수레는 절름발이가 곱사등이 공자 수의 수레는 곱사등이가 몰게 했다. 이를 본 소태부인과 그녀를 모시는 궁녀들이 큰 소리로 웃자 극극 등은 이상하게 생각해 탐문을 벌였고 결국 이유를 알게 됐다. 격노한 네 나라 대신들은 힘을 합쳐 제에 복수하기로 맹세한 후 제경공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각자 귀국했다. 극극은 황하를 건너며 "내가 제나라에 보복하지 않는지를 하백께서 보실 것이다"고 맹세했다. 귀국한 후 극극은 진경공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제나라를 토벌할 것을 주청했지만 진경공은 "그대의 원한 때문에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하겠는가?"라 하고는 들어주지 않았다. 중군원수 사회도 제 토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극극이 계속 제를 토벌할 것을 요구하자 지겨워진 중군원수 사회는 늙었음을 이유로 사퇴했다. 이에 극극이 중군원수가 돼 본격적인 제 침공을 계획하게 된다.
진경공 9년(BC 591), 초장왕이 죽자 극극은 제를 토벌하기 위해 노,위,조 세나라와 합쳐 군대를 일으킨다. 하지만 제경공이 세자 강(彊)을 인질로 진에 보내자 진은 군대를 물렸다.
진경공 11년(BC 589), 그해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융(隆)땅을 빼앗았다. 노나라가 위(衛)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위나라와 조나라는 노를 구원하려 했으나 모두 제경공에게 대패한다. 이들은 극극을 통해 진나라에 급함을 알렸다. 극극은 계손행보 등과 진경공에 나아가 이제 반드시 제를 토벌해야 하며 그래야 중원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청했다. 이에 진경공은 극극을 중군원수, 사섭(士燮)을 상군원수, 난서(欒書)를 하군원수, 한궐을 사마로 삼고 병거 800승을 줘 노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치게 했다. 제경공은 병거 400승을 동원, 연합군과 맞섰는데 전투 초기 제군은 연합군을 대파하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해 여름 안(鞍) 땅에서 양 군은 크게 붙었는데 이때도 용맹한 제군은 전투 초기 우세를 잡았고 연합군의 총 사령관인 극극의 팔에 화살을 맞추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제군의 화살을 맞은 극극이 분전하자 난서, 한궐 등 진장(晋將)은 물론 노,조,위 연합군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진 연합군은 제군을 대파하고 제경공을 포위했다. 한궐이 제경공 일행을 추격해 결국 사로 잡았는데 제경공은 그 시위병과 자리를 바꾸고 내려서는 물을 마시는 척하다가 탈출했다. 진 연합군이 계속 제경공을 뒤쫓자 제경공은 보물을 바치며 강화를 구했다. 하지만 극극은 제경공의 어머니 소태부인을 인질로 주지 않으면 강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제나라의 사신은 임금의 어머니를 어찌 인질로 요구할 수 있나고 분개하며 보물을 그대로 놓고 돌아갔다. 이에 극극은 계손행보 등과 상의한 후 진경공에게 고해 제와의 강화를 받아들였다.
이해 초나라 신공(申公) 굴무(屈巫)가 초장왕과 영윤 공자 측이 노리던 하희(夏姬)를 훔쳐 정나라를 거쳐 도망쳐 왔다. 진경공은 굴무를 형(邢)의 대부(大夫)로 삼았다. 굴무는 무신巫臣)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에 초공왕(楚共王)과 영윤 공자 영제, 공자 측(側)이 굴무(무신)의 집안을 모두 주살했다. 무신은 노해 "반드시 네 놈을 도망 다니다 죽은 신세로 만들겠다"라는 편지를 공자영제와 공자반에게 보냈다.
진경공 12년(BC 588), 극극이 돌아와 승전을 보고 하자 진경공은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많은 상을 하사했다. 그리고 진경공은 기존 상중하군 외 3군을 더 만들어 처음으로 6군(六軍)을 창설했다. 중군 밑에 신중군(新中軍)을 둬 원수에 한궐(韓厥), 조괄(趙括)을 부원수로 세우고, 신상군원수로는 공삭(鞏朔) 그리고 한천(韓穿)을 부원수로 삼았다. 신하군은 순추(荀騅)와 조전(趙旃)을 원수와 부원수로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경(卿)으로 올랐다. 순수의 아들 순앵(荀罃)이 초나라에서 돌아왔다. 이때부터 진경공은 진영공처럼 주색에 빠지게 됐으며 역시 진영공처럼 도안가(屠岸賈)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진경공 13년(BC 587), 초에 항복한 정나라를 정벌해 범(氾) 땅을 취했다. 이해 중군원수 극극이 제와 싸움에서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돼 왼 팔을 잘랐다. 그리고 중군원수를 사임했는데 얼마후 죽었다. 난서가 뒤를 이었다.
진경공 14년(BC 586), 중군원수 난서가 초에 항복한 정을 친다. 하지만 이해 새로 즉위한 정도공(鄭悼公)은 허(許)나라와 국경 분쟁이 붙었는데 초가 허 편을 들자 정도공이 분개해 진을 섬기기로 바꿨다. 이에 난서는 돌아왔다.
수도 주변 양산(梁山)이 무너졌다. 진경공이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해 도안가(屠岸賈)에게 묻자 도안가는 상벌이 분명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진경공은 자신은 벌을 중하게 준 일이 없다고 말하자 도안가는 과거 조선자(趙宣子) 조돈(趙盾)이 진영공을 시해한 일에 대해 명백한 처벌이 없었다고 고한다.
진경공 15년(BC 585), 수도를 강(絳)에서 신전(新田)으로 옮긴다. 진경공은 천도 후 신전의 이름을 '신강'(新絳)으로 바꿨다.
진경공 16년(BC 584), 초나라에 복수할 것을 결심한 무신은 오(吳)나라를 육성해 초를 괴롭히는 전략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그 아들은 오나라의 행인(行人)이 되어 오나라에게 전차와 용병을 가르치게 했다. 오나라와 진나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열어 초나라를 정벌하기로 약속했다.
진경공 17년(BC 583), 진경공이 조삭을 비롯해 조동(趙同)과 조괄 등 조씨 일족을 진영공 시해 책임을 물어 모두 주살하고 집안을 멸했다. 한궐이 "조쇠와 조돈의 공을 어찌 잊을 수 있는가? 제사를 어찌 끊을 수 있는가?"라고 하자 다시 조씨의 적자 조무(趙武)를 조씨의 후계로 삼고 봉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때부터 난씨와 극씨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진경공 18년(BC 582), 정성공(鄭成公)이 진나라를 방문했다. 진경공은 정이 진과 초를 번갈아 섬기는 것을 꾸짖고 그를 감금한다. 이어 정나라를 토벌하는데 정이 초에 구원을 요청하자 초는 진의 위성국인 진(陳)을 공격해 진(晋)으로 하여금 정에 대한 포위를 풀게 했다.
진경공 19년, 여름 진경공은 병이 깊어져 세자 수만(壽曼)을 세우니 이가 진여공(晋厲公)이다. 한 달 남짓 뒤 경공이 죽었다.
2.1. 즉위 초, 권력 기반 강화
진 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초와 강화한 진(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진경공은 즉위 초, 아버지 진 성공이 권신 조돈에게 휘둘렸던 것과 달리, 권문세가들을 견제하며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국내외에서 큰 문제가 잇따라 일어났다. 기원전 597년,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순림보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비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조삭의 숙부 조동, 조괄 형제가 전쟁 지속을 주장했던 패전의 책임으로 조씨 가문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를 틈탄 사구 도안가/屠岸賈중국어에 의해, 과거 일족의 조천/趙穿중국어이 영공을 살해한 죄를 덮어씌워 조삭이 살해되었다. 순림보 역시 패전의 책임을 느껴 죽음을 청했으나, 사회의 구명으로 용서받았다. 패전 후 배반한 정나라에 순림보를 보내 토벌했다. 순림보는 싸우지 않고 열병식만으로 굴복시켰다.
진 경공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순림보 일행에 대해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고 오직 군령을 처음으로 위반한 선곡만 벌하는 것으로 패전의 벌을 마무리했다. 이는 진문공 이후 가장 큰 패전을 했음에도 진나라가 중원의 패권국 지위를 지킬 수 있고 아울러 훗날 초나라에 복수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다. 진 경공 4년(BC 596), 선곡이 필 전투 패배로 주살될 것을 두려워해 오랑캐 책(翟)나라로 도주했다. 그후 선곡은 책군을 동원해 진나라를 칠 구상을 했다. 이에 진나라에선 선진의 후손인 선씨 일가를 모두 주살한다.
진 경공 5년(BC 595), 순림보는 초나라에서 명재상인 영윤 손숙오가 죽자 앞서 필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로 정나라를 노략질한다. 정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초장왕은 진나라를 섬기는 송(宋)을 공격해 진나라에 복수키로 했다. 진 경공 6년(BC 594), 초장왕은 송성(宋城) 수양성을 포위했고 송은 진에 구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진나라 모신 백종(伯宗)은 필 전투의 패배를 볼 때 하늘이 초를 돕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므로 실제로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구원병을 보낼 것처럼 꾸며 초의 포위를 풀자는 계략을 아뢰었다. 진 경공은 해양(解揚)을 송에 사자로 보냈으나, 초군에 사로잡혔다. 초장왕은 진의 구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니 항복하라고 회유했지만, 해양은 죽음을 각오하고 송성에 진군이 곧 당도할 것이라고 외쳤다. 초장왕은 진노했지만 그가 진나라 신하로서 목숨을 걸고 사명을 마쳤다는 점을 치하하고 그를 풀어준다.
진 경공 7년(BC 593), 진 경공은 송이 1년 넘게 초에 항전하자 일부 신하들의 여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원병을 편성키로 했다. 하지만 구원군은 송을 구원하지 않고 이웃 적적(赤狄)의 노(潞)나라를 친다. 순림보와 함께 노나라를 친 후 노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을 하고 있던 위과와 동생 위기는 노나라를 구원하려는 진(秦)군의 공격을 받는다. 위과 형제는 고전 끝에 진의 맹장 두회를 사로잡아 그를 참수하고 진군을 대파한다. 진경공은 사회(士會, 范文子)에게 명해 적적의 잔적들을 정벌하도록했다. 이렇게 진이 구원을 해주지 않자 송의 송문공(宋文公)은 결국 초에 항복한다.
진나라에 도적이 날뛰었지만 이를 막지 못해 홧병이 난 순림보가 사망하고 사회가 중군원수를 계승했다. 진 경공은 사회의 존재를 국내외에 각인시키기 위해 사회에게 적적을 토벌하고 얻은 전리품과 포로를 모두 주(周)왕실에 바치도록 했다. 이에 동주 정왕(周定王)은 사회를 진나라 상경으로 삼았다.
2.2. 필 전투와 패권 상실
기원전 597년, 초 장왕이 진나라의 동맹국인 정나라를 공격하자, 진 경공은 순림보, 사회, 조삭 등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했다. 하지만 진나라 군대는 필 전투에서 초나라와 정나라 연합군에게 대패했고, 이로 인해 진나라는 초나라에게 패권을 내주게 되었다. 이 패배의 책임으로 조씨 가문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고, 이는 훗날 조씨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필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진 경공은 순림보 등을 처벌하지 않고 선곡만을 벌하여, 이후 진나라가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고 초나라에 복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진 경공 4년(BC 596), 선곡이 필 전투 패배로 주살될 것을 두려워해 오랑캐 책(翟)나라로 도주했다. 그후 선곡은 책군을 동원해 진나라를 칠 구상을 했다. 이에 진나라에선 선진의 후손인 선씨 일가를 모두 주살한다.
진 경공 5년(BC 595), 순림보는 초나라에서 명재상인 영윤 손숙오가 죽자 앞서 필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로 정나라를 노략질한다. 정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초장왕은 진나라를 섬기는 송을 공격해 진나라에 복수키로 했다.
진 경공 6년(BC 594), 초장왕은 공자영제와 공자측을 동원해 송성(宋城) 수양성을 포위했고 송은 진에 구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진나라 모신 백종(伯宗)은 필 전투의 패배를 볼 때 하늘이 초를 돕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므로 실제로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구원병을 보낼 것처럼 꾸며 초의 포위를 풀자는 계략을 아뢴다. 이에 진경공은 해양(解揚)을 송에 사자로 보낸다. 해양은 가는 길에 초군에 사로 잡히게 된다. 초장왕은 해양에게 진의 구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니 어서 항복하라고 말하면 살려주고 초에서 중히 쓸 것이라고 말했으나 해양은 죽음을 각오하고 송성에 진군이 곧 당도할 것이라고 외쳤다. 초장왕은 진노했지만 그가 진나라 신하로서 목숨을 걸고 사명을 마쳤다는 점을 치하하고 그를 풀어준다.
진 경공 7년(BC 593), 진 경공은 송이 1년 넘게 초에 항전하자 일부 신하들의 여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원병을 편성키로 했다. 하지만 구원군은 송을 구원하지 않고 이웃 적적(赤狄)의 노(潞)나라를 친다. 순림보와 함께 노나라를 친 후 노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을 하고 있던 위과와 동생 위기는 노나라를 구원하려는 진군의 공격을 받는다. 위과 형제는 고전 끝에 진의 맹장 두회를 사로잡아 그를 참수하고 진군을 대파한다. 진경공은 사회(士會, 范文子)에게 명해 적적의 잔적들을 정벌하도록했다. 이렇게 진이 구원을 해주지 않자 송의 송문공(宋文公)은 결국 초에 항복한다.
진나라에 도적이 날뛰었지만 이를 막지 못해 홧병이 난 순림보가 사망. 사회가 중군원수를 계승했다. 진경공은 사회의 존재를 국내외에 각인시키기 위해 사회에게 적적을 토벌하고 얻은 전리품과 포로를 모두 주왕실에 바치도록 했다. 이에 주정왕은 사회를 진나라 상경으로 삼았다.
2.3. 적적 정벌과 북방 안정
진 경공 4년(BC 596), 필 전투 패배로 주살될 것을 두려워한 선곡(先縠)이 적적(赤狄)으로 도망쳤다. 그후 선곡은 적군을 동원해 진나라를 공격했고, 진나라는 선곡과 그 일족 전체를 죽였다.
진 경공 7년(BC 593), 진 경공은 누이 백희(伯姬)가 적적 노씨(潞氏)의 대신 봉서(逢叔)에게 살해당하자, 순림보를 보내 노씨를 정복하고 통치자 영아(嬰兒)를 사로잡았다. 봉서는 위(衛)나라로 도망쳤지만 진나라로 돌려보내져 죽임을 당했다. 이듬해 진나라는 몇몇 더 많은 적적 국가 또는 부족을 정복했다.
사회(士會)가 정경직을 계승한 이후, 진 경공은 사회에게 적적을 토벌하고 얻은 전리품과 포로를 모두 주(周)왕실에 바치도록 하여, 동주 정왕(周定王)은 사회를 진나라 상경으로 삼았다.
기원전 588년, 진나라는 적적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장구여(샤우코우조, kängäräs)를 멸망시켜 뒷걱정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2.4. 안 전투와 동방 패권 회복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 진 성공이 초나라와 강화한 진(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진경공 3년(기원전 597년), 초장왕(楚莊王)이 진나라를 섬긴다는 이유로 정나라(鄭)를 정벌하러 와 수도 정성(鄭城, 형양)을 포위하자 정양공(鄭襄公)은 진 경공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진 경공은 순림보(荀林父)를 중군원수(진나라의 필두 재상), 사회(士會)를 상군원수, 조삭(趙朔)을 하군원수로 삼고 선곡(先縠), 극극(郤克), 난서(欒書)를 각각 중·상·하군의 보좌로, 한궐(韓厥)을 사마에 임명해 병거 600승을 정나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진군(晋軍)이 황하에 도착했을 때 정백(정양공)이 초장왕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림보는 회군하려 했으나, 중군보좌 선곡이 반대했다. 선곡은 멋대로 황하를 건너 초군 앞에 진지를 세웠고, 순림보는 할 수 없이 전군에 황하를 건너 진영을 세우게 했다. 결국 양군은 전투에 돌입했고, 진군은 대패하여 패권을 초장왕에게 내주게 된다. 진 경공은 패전의 책임을 크게 묻지 않고 군령을 위반한 선곡만 벌했다. 이는 진나라가 중원의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고 훗날 초나라에 복수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다.
진 경공 8년(기원전 592년), 진 경공은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상군원수 극극(郤克)을 사신으로 보내 제나라와 친교하려 했다. 이 때 제나라에는 극극 외 노(魯) 상경 계손행보, 위(衛) 상경 손량부, 조(曹) 대부 공자 수가 친교를 맺기 위해 사신으로 왔다. 그런데 제경공(齊頃公)은 자신의 모후 소태부인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꾸인 극극의 수레는 애꾸가, 대머리 계손행보의 수레는 대머리가, 절름발이 손량부의 수레는 절름발이가, 곱사등이 공자 수의 수레는 곱사등이가 몰게 했다. 격노한 네 나라 대신들은 힘을 합쳐 제나라에 복수하기로 맹세하고 귀국했다. 극극은 진 경공에게 제나라 토벌을 주청했지만, 진 경공과 중군원수 사회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극극이 계속 요구하자 사회는 사퇴했고, 극극이 중군원수가 돼 제나라 침공을 계획하게 된다.
진 경공 9년(기원전 591년), 초장왕이 죽자 극극은 제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노나라, 위나라, 조나라와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제 경공이 세자 강(彊)을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자 진나라는 군대를 물렸다.
진 경공 11년(기원전 589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융(隆)땅을 빼앗았다. 노나라, 위나라, 조나라는 극극을 통해 진나라에 급함을 알렸다. 진 경공은 극극을 중군원수, 사섭(士燮)을 상군원수, 난서(欒書)를 하군원수, 한궐을 사마로 삼고 병거 800승을 줘 노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치게 했다. 제 경공은 병거 400승을 동원, 연합군과 맞섰는데, 안(鞍) 땅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진나라 연합군은 제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제 경공을 포위했다. 한궐이 제 경공을 사로잡았으나, 제 경공은 시위병과 자리를 바꿔 탈출했다. 진 연합군은 계속 제 경공을 뒤쫓았고, 제 경공은 보물을 바치며 강화를 구했다. 극극은 제 경공의 어머니 소태부인을 인질로 요구했으나, 제나라 사신은 분개하며 돌아갔다. 결국 극극은 계손행보 등과 상의한 후 진 경공에게 고해 제나라와의 강화를 받아들였다. 이 승리로 진나라는 비 전투에서 잃었던 명성을 되찾고 군대를 3개 군단에서 6개 군단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진 경공 12년(기원전 588년), 극극이 돌아와 승전을 보고하자 진 경공은 그 공로를 치하하며 많은 상을 하사했다. 그리고 기존 상중하군 외 3군을 더 만들어 처음으로 6군(六軍)을 창설했다.
2.5. 내부 권력 투쟁과 조씨 가문의 몰락
진경공 15년(기원전 585년), 수도를 강(絳)에서 신전(新田)으로 옮기고 신강(新絳)이라 칭했다. 수도 주변 양산(梁山)이 무너진 일에 대해, 도안가는 과거 조돈(趙盾)이 진영공을 시해한 일에 대해 명백한 처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경공에게 고했다.
진경공 17년(기원전 583년), 도안가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삭을 비롯한 조씨 일족에게 진영공 시해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조씨 가문을 멸족시켰다.(하궁의 난) 하지만 한궐이 조쇠와 조돈의 공을 들어 간언하자, 조씨의 유일한 후손인 조무(趙武)를 찾아내 조씨 가문을 부활시키고 봉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때부터 난씨와 극씨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2.6. 오나라와의 연합과 초나라 견제
기원전 584년,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무신(굴무)은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오나라를 육성해 초나라를 괴롭히는 전략을 진 경공에게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아들을 오나라의 행인(行人)으로 보내 전차와 용병을 가르치게 했다. 이로써 오나라와 진나라는 처음으로 관계를 맺고 초나라를 정벌하기로 약속했다.
2.7. 천도와 말년
기원전 585년, 진 경공은 수도를 강(絳)에서 신전(新田)으로 옮기고, 신전의 이름을 '신강'(新絳)으로 바꾸었다.
진 경공 19년(기원전 581년) 여름, 병이 깊어져 세자 수만(壽曼)을 세우니 이가 진 여공이다. 한 달 남짓 뒤 경공이 죽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은 중국 고전 텍스트인 좌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좌전에 따르면, 경공은 악령을 꿈에 보았고, 무당은 그가 새로운 수확의 밀을 먹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병세가 악화되자 진나라의 의사가 초빙되었는데, 그는 경공의 병이 고황(膏肓)에 이르러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6월 병오일(8~9월), 경공은 새로운 밀을 먹으려다 화장실에 빠져 죽었다. 이 이야기는 병입고황(病入膏肓)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다.
2.8. "병입고황(病入膏肓)" 고사
진 경공(晉景公)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은 《춘추좌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병입고황(病入膏肓)'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다.
기원전 581년 여름, 경공은 대려(병의 신령)가 된 조동, 조괄의 죽은 혼령 때문에 병에 걸렸다. 악령을 꿈에 본 경공은 무당에게 자문을 구했고, 무당은 그가 새로운 수확의 밀을 먹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병세가 악화된 경공은 진(秦)나라에 의사를 요청했다. 진나라 의사 완(緩)이 도착하기 전, 경공은 병을 의인화한 두 아이의 꿈을 꾸었다. 그들은 완이 훌륭한 의사이므로 자신들을 해칠까 두렵다며, 심장 위와 목 아래(膏肓)에 자리를 잡으면 치료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나라에서 온 의사 완은 진찰 후 경공에게 병이 고황(膏肓)에 이르러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경공은 의사의 솜씨를 칭찬하고 후하게 보상한 후 돌려보냈다.
6월 병오일(8~9월), 경공은 새로운 수확의 밀을 진상받았다. 무당의 예언이 틀렸다고 생각한 그는 무당을 불러 새로운 밀을 보여주고 처형했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팽만감을 느껴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에 빠져 죽었다. 정오에 노예가 경공의 시신을 변기에서 꺼냈는데, 그날 아침 노예는 자신이 주군을 하늘로 데려가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경공과 함께 순장되었다.
이 이야기는 불치의 병이나 해결 불가능한 상황을 묘사하는 고사성어인 병입고황(病入膏肓)의 유래가 되었다.
3. 평가
진 영공 시해 이후 약화되었던 군권을 강화하고 소패업을 이룩한 군주로 평가된다. 집권 초 초나라에 대패해 패권을 상실했지만, 다른 전투에서는 연승하여 중원의 패권국 지위는 유지했다.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권신들을 교묘히 제어했다. 조돈의 도움으로 군위에 오른 아버지 진 성공이 조돈에게 철저히 끌려 다닌 것과 달리, 진 경공은 권문세가들을 압도하며 통치했다. 특히 조돈 이후 최고 권세를 누리던 조씨 가문을 처벌했다. 진 영공은 폭군이라 불릴 만한 군주였지만, 조돈과 조씨 일가는 진 영공을 시해했는데도 죄를 받지 않았다. 또 조돈은 자신과 권세를 다투던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고 그 일족을 주멸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조씨 일가는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요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다.
열국지에서 진 경공은 조씨를 몰락시키는 과정에서 폭군으로 나타나며, 그의 죽음도 조씨의 원혼에 따른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는 조씨가 최후의 승자인 점 때문으로 보인다. 군주를 시해하고 멋대로 군주를 세운 뒤 자신과 권력을 다투던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 멸족시킨 조씨의 죄는 훗날 진 경공의 아들 진 여공이 몰락시킨 극씨에 비해 더 컸고, 진 평공 때 멸족된 난씨에 비해서도 그 죄는 같거나 더 크다. 다만 진 경공은 유일한 조씨의 후손인 조무는 살려줘 기강도 잡고 공신의 공도 잊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진(秦)으로 망명했던 사회를 다시 데려와 중군원수까지 올려놓은 것이나 사회-극극-난서를 차례로 중군원수로 집정시킨 것을 볼 때, 진 경공은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4. 가족 관계
* 조부 : 진문공
* 아버지 : 진성공
* 아들 : 진 여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