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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비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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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비아누스는 363년부터 364년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331년 오늘날 세르비아의 벨그라드에서 태어난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근위대 사령관의 아들로,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율리아누스 사후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페르시아와의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영토를 할양했다. 기독교 정책을 펼쳤지만, 안티오키아 도서관 방화 사건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364년 비티니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발렌스가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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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비아누스
기본 정보
이름요비아누스
로마자 표기Jovianus
그리스어 표기Ιοβιανός (Iobianós)
전체 이름플라비우스 요비아누스 (Flavius Jovianus)
재위 기간363년 6월 27일 – 364년 2월 17일
이전 통치자율리아누스
다음 통치자발렌티니아누스 1세 (서로마 제국)
다음 통치자 (동로마 제국)발렌스
출생일331년
출생지싱기두눔,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로마 제국
사망일364년 2월 17일 (향년 33세)
사망지다다스타나, 고전 아나톨리아, 로마 제국
매장지성 사도 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배우자카리토
자녀바로니아누스, 또 다른 아들
아버지바로니아누스
종교니케아 기독교
이미지 정보
금화에 왼쪽을 향한 관을 쓴 남자
요비아누스를 묘사한 솔리두스
요비아누스의 경화
요비아누스의 경화

2. 생애

요비아누스는 331년 싱기두눔(오늘날 세르비아의 벨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황실 근위대 사령관(comes domesticorum) 바로니아누스의 아들이었다.[1] 요비아누스는 근위대에 들어가 361년 콘스탄티우스의 유해를 성사도교회로 호송했다.[2] 그는 카리토와 결혼하여 바로니아누스를 포함한 두 아들을 두었는데, 다른 한 아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3]

요비아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사산조 샤푸르 2세에 대항하는 원정에 참여했다. 363년 사마라 전투에서 율리아누스가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자, 군대는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로마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진에 고립되어 있었다. 요비아누스는 페르시아 왕 샤푸르 2세와 굴욕적인 화의를 맺고 철수했는데, 그 조건은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 동쪽 지역을 할양하는 것이었다.

36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중, 요비아누스는 비티니아 속주 다다스타나(Dadastana) 부근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화로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암살설도 제기된다. 기독교도였던 요비아누스는 이교 시대의 장서를 보유한 안티오키아 도서관을 불태웠지만, 이 행위는 기독교도들에게도 비난받았다. 결국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채 8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요비아누스는 331년 싱기두눔(오늘날 세르비아의 벨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황실 근위대 사령관(comes domesticorum)인 바로니아누스였다.[1] 요비아누스는 카리토와 결혼하여 바로니아누스를 포함한 두 아들을 두었는데, 다른 한 아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

요비아누스 가계도
관계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비고
아버지바로니아누스300년363년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황실 근위대 사령관
아내카리토??루키아누스의 딸
아들바로니아누스363년380년 이후
아들(이름 미상)360년?


2. 2. 군 경력과 황제 즉위

요비아누스는 331년 싱기두눔(오늘날 세르비아 벨그라드)에서 황실 근위대 사령관 바로니아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비아누스도 군에 입대하여 361년 콘스탄티우스의 유해를 성사도교회로 호송했다.[1] 그는 카리토와 결혼하여 바로니아누스를 포함한 두 아들을 두었으나, 다른 아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요비아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사산조 샤푸르 2세에 대항하는 원정에 참여했다. 363년 사마라 전투에서 율리아누스가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자,[1] 군대는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암미아누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는데, 이는 적절한 후계자를 간과하거나 권력욕에 눈이 먼 귀족들이 원하는 후계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음 날, 고령의 사투르니누스 세쿤두스 살루티우스(동방의 프라이토리안 총독)가 황제직을 거절하자, 군대는 스콜라에의 고위 장교이자 기독교도였던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선출했다. 당시 로마군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진에 고립되어 있었다.

3. 통치

요비아누스는 즉위 직후 율리아누스가 시작한 후퇴를 재개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지만, 군대는 티그리스 강변의 두라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1] 강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페르시아와의 평화 조약" 하위 섹션 참조)

티그리스 강을 건넌 후, 요비아누스는 서쪽으로 사절을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2] 조약 체결 후, 니시비스로 진군하여 주민들에게 3일간의 이주 시간을 주었다.[1]

363년 9월, 에데사에서 두 개의 칙령을 발표했다.[3] 첫 번째는 군인이 짚을 구하기 위해 보낼 수 있는 거리를 제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율리아누스가 이교도 사원에 편입한 '레스 프라이바타'(res privata)의 토지를 제국의 재정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독교 정책" 하위 섹션 참조)

363년 10월,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격분한 시민들의 항의에 직면하여 안티오키아 도서관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363년 11월, 안티오키아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363년 12월, 앙키라에 도착하여 어린 아들 바로니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포했다. (자세한 내용은 "내정" 하위 섹션 참조)

요비아누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음" 하위 섹션을 참조하라.

3. 1. 페르시아와의 평화 조약

요비아누스는 즉위 직후 샤푸르 2세가 이끄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1] 이 조약은 로마 제국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로마는 30년 간의 휴전에 동의하고, 아르자메나, 막소에오나, 아즈브디케나, 레히메나, 코르두에나 등 5개의 로마 속주를 페르시아에 넘겨주어야 했다. 또한, 니시비스, 카스트라 마우로룸, 싱가라와 같은 주요 요새들도 페르시아의 차지가 되었다.

로마는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한 권리마저 포기해야 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 왕 아르사케스 2세는 로마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조약은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3. 2. 기독교 정책

요비아누스는 율리아누스 황제가 폐지했던 기독교 정책을 복원하고, 기독교를 다시 국교로 삼았다.[1] 그는 아타나시우스를 포함한 니케아 공의회(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는 주교들을 복권시켰다.[1] 363년 9월까지 요비아누스는 군대의 표준으로 라바룸("키-로")을 복원했고, 기독교도에 대한 율리아누스의 칙령을 폐지했다.

요비아누스는 에데사에서 아타나시우스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의 영접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망명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반아리우스파(Semi-Arian) 주교들은 좋지 않은 환대를 받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고수하고 아리우스파를 배척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요비아누스에게 전달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주교직에 복귀되었고, 요비아누스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안티오크에 도착하자 요비아누스는 안티오크 공의회로부터 멜레티우스(Meletius of Antioch)를 주교직에 복귀시켜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비록 이교 신전을 폐쇄하지는 않았으나, 신민들이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의 관용 칙령을 발표했지만, 마법과 점술은 금지했다. 니케아 신조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하지 않았다. 아리우스파 교회 사학자인 필로스토르기우스(Philostorgius)는 "요비아누스 황제는 교회들을 원래 용도로 복구하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가한 모든 괴로운 박해에서 해방시켰다"라고 말했다.

3. 3. 내정

363년 10월, 요비아누스가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 격분한 시민들이 그를 맞이했다. 도시 전체에 공격적인 낙서와 모욕적인 익명의 문서(famosi)가 나돌자, 그는 안티오키아 도서관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에우나피우스는 요비아누스가 그의 아내의 부추김을 받아 안티오키아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주장한다. 반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조나라스, 필로스토르기우스는 요비아누스의 체류 중 도서관 화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요비아누스는 363년 11월 안티오키아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363년 12월에는 앙키라에 도착하여 그의 어린 아들인 바로니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포했다.

3. 4. 죽음

요비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던 중, 364년 2월 17일 비티니아 속주 다다스타나(Dadastana)에서 텐트 안에서 사망했다.[2] 그의 죽음은 조사되지 않았지만,[3] 새로 칠한 침실 벽에서 새어 나오는 유독성 연기나, 화로(火鉢)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의 죽음이 교살 때문이라고도 제안하여 암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요비아누스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사도 교회에 자주색 석관에 묻혔다. 그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발렌스 형제에게 계승되었고, 그들은 이후 제국을 나누었다.

요비아누스의 사후, 그의 아들 바로니아누스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눈이 멀게 되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 따르면, 요비아누스의 아내 카리토(Charito)는 남은 생애 동안 두려움 속에 살았다고 한다.

4. 가족 관계

요비아누스는 カリト일본어(Kalito)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아들로는 바로니아누스(363년 - 380년 이후)가 있었다. 그 외에 360년에 태어난 자녀가 한 명 더 있었으나, 성별을 포함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요비아누스의 손녀 마리아(약 385년 출생)는 아르킬(Archil, 370년-435년)과 결혼하여 아르닥(Ardak, 407년 출생)을 낳았다. 아르닥의 아들 바흐탕(Wachtang, 440년-502년)은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의 황녀 헬레나(Helena, 약 455년 출생)와 결혼했다. 이 부부의 증손자 데메트리오스(Demetrios, 약 645년-665년 이후)는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왕조 제2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의 차남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632년 출생)의 딸(약 655년 출생, 콘스탄스 2세의 조카, 콘스탄티누스 4세의 사촌)과 결혼하여 후손을 남겼다. 데메트리오스의 외조부의 형제 스테판(Stephan)의 후손들도 계속 존속했다.

5. 유산과 평가

요비아누스는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을 전환하고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등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기독교도의 인기를 얻기 위해 안티오키아 도서관을 불태웠으나, 이 행위는 기독교도들에게도 비난받았다. 샤푸르 2세와 맺은 평화 조약은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 동쪽 지역을 할양하는 굴욕적인 내용으로, 이 역시 비판받았다. 결국 요비아누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채 8개월 만에 재위를 마감하였다.

6.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Rerum gestarum libri XXXI Loeb Classical Library 1939-1950
[2] 웹사이트 III. https://www.newadven[...]
[3] 웹사이트 Consularia Constantinopolitana s.a. 363 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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