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서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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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번서조소는 1855년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에도 막부가 설립한 서양 학문 연구 기관이다. 네덜란드학 연구를 시작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와 학문을 교육했으며, 외교 문서 작성, 서양 서적 번역, 화학 및 기계학 연구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안세이 대지진으로 인해 1856년 번서조소로 재건되었으며, 이후 양서조소, 개성소를 거쳐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 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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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서조소 | |
---|---|
개요 | |
명칭 | 번서조소 (蕃書調所) |
다른 명칭 | 양서조소 (洋書調所), 개성소 (開成所) |
영문 명칭 | Institute for Research of Foreign Books |
설립 및 폐지 | |
설립 | 1856년 (안세이 3년) |
폐지 | 1862년 (분큐 2년) |
주요 활동 | |
임무 | 외국 서적 번역 및 연구 |
담당 분야 | 서양 학문 (특히 군사, 과학 기술) |
조직 및 인원 | |
전신 | 번서 번역국 |
후신 | 개성소 |
위치 | 에도 (현재의 도쿄도) |
주요 인물 | 가와모토 고민 미쓰쿠리 슈헤이 스기타 겐타이 니시 아마네 쓰다 마미치 |
역사적 맥락 | |
시대적 배경 | 에도 시대 말기 |
관련 사건 | 존왕양이 운동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일본어) 『幕府海軍史』 (일본어) 『日本洋学史の研究』 |
관련 항목 | |
관련 기관 | 쇼헤이자카 학문소 의학관 천문방 |
기타 관련 항목 | 난학 양학 후쿠자와 유키치 |
2. 설립 배경
1853년 매튜 C. 페리의 일본 내항은 에도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구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막부는 서양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존의 천문방 만서화해어용(蠻書和解御用)을 확충하여 1855년 요가쿠쇼(洋學所, 양학소)를 설립하였다.[7] 하지만 개설 직후 안세이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1856년 '''번서조사소'''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2] 고가 긴이치로(古賀 謹一郎)가 수장으로 취임했고, 오무라 마스지로, 니시 아마네 등 유능한 학자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였다.
번서조소는 에도 막부가 서양 학문 연구와 번역, 외교 문서 작성 등을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매튜 C. 페리의 일본 내항을 계기로 서구 문물 전반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존의 천문방 만서화해어용(蠻書和解御用)을 확대하여 1855년 '''요가쿠쇼'''(洋學所, 양학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곧 안세이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1856년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 번서조소)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62]
3. 역할 및 기능
번서조소는 이름 그대로 번(蕃)에서 사용하는 공문서, 즉 외국과의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곳이었으며, 서양 학문 연구 기관의 역할도 담당했다. 초기에는 난학을 중심으로 교육했으나, 점차 영학(英學), 프랑스학, 독일학 등 서양 학문 전반으로 교육 범위를 확대했다. 막부 신하의 자제들뿐만 아니라 여러 번의 사무라이들도 입학하여 서양 학문을 배웠으며, 수업료는 무료였다.[62]
번서조소에서는 어학 교육, 교재 편찬, 자연 과학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주요 역할 및 기능은 다음과 같다:
1862년에는 '''요쇼시라베쇼'''(洋書調所, 양서조소)로 개칭되었으며, 1863년에는 가이세이쇼(開成所, 개성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종합적인 서양 학문 교육 기관으로 발전했다. 가이세이쇼는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 대학으로 흡수되었다.[62]
4. 교육 및 연구 내용
1853년 페리 내항 이후, 에도 막부는 난학뿐만 아니라 서양학 연구 전반을 강화하기 위해 천문방의 번역 부서였던 만서화해어용을 확충하고 1855년 서양학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서양학소는 개설 직후 안세이 대지진으로 소실되었고, 1856년 '''번서조소'''(蕃書調所)로 개칭, 재건되었다.
번서조소는 난학을 중심으로 영학을 더한 서양학 교육과 번역, 구미 제국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했다. 1862년에는 '''양서조소'''(洋書調所)로 개칭되었으며, 1863년에는 가이세이쇼(開成所)로 이름이 바뀌었다.
번서조소에서는 1857년부터 네덜란드어 교육이 시작되었고, 1860년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1862년에는 독일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1862년에는 영어-일본어 사전인 《영화대역수진사서》(英和對譯袖珍辭書)가 출간되었다.
1860년에는 화학과 박물학에 중점을 둔 '''세이렌카타'''(精鍊方, 정련방)가 설치되어, 가와모토 고민의 《화학신서》(化學新書, 1861년) 저술 등 일본 화학 연구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865년 세이렌카타는 '''가가쿠쇼'''(化學所)로 개칭되었다.
1856년부터 이치카와 가네노리(市川 兼恭)가 기차 모형 및 전신기 작동 임무를 맡으면서 기계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 외교관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그라프 추 오일렌부르크가 가져온 전신기 및 사진기 등을 가토 히로유키가 다루기도 했다. 1857년에는 스탠호프 수동인쇄기를 작동시켰고, 1858년에는 영어 서적 《FAMILIAR METHOD》를 인쇄했다.
물리학은 이토 게이스케와 다나카 요시오가, 수학은 간다 고헤이가, 회화는 가와카미 만노조가 가르쳤다. 1861년 이토 게이스케는 물산학 강의를 도입하여 동식물 및 광물 연구를 진행하였다.
4. 1. 어학
매튜 C. 페리의 일본 내항을 계기로 서양 학문 전반을 배워야겠다는 자각을 한 에도 막부는 1855년에 '''요가쿠쇼'''(洋學所, 양학소)를 개설했다. 1856년에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 번서조소)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난학을 중심으로 하되 영국학을 더하여 서양학 교육의 체계를 세우는 한편 번역과 외교 교섭을 주로 담당하였다. 어학 교육과 교재 편찬도 진행하였다.[62]반쇼시라베쇼는 1857년 1월 18일에 개교와 동시에 네덜란드어 교육을 시작했다. 미쓰쿠리 겐포(箕作 阮甫), 스기타 세이케이(杉田 成卿)는 반쇼시라베쇼에서 네덜란드어 교사로 근무하면서 네덜란드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담당했다.[55]
1860년에는 영어 교육, 프랑스어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호리 다쓰노스케(堀 達之助), 지무라 고로(千村 五郎), 다케하라 유시로(竹原 勇四郎), 미쓰쿠리 린쇼(箕作 麟祥), 니시 아마네(西 周) 등은 영어 교사로, 무라카미 히데토시(村上 英俊), 하야시 세이주로(林正 十郎), 고바야시 데이스케(小林 鼎輔) 등은 프랑스어 교사로 근무했다. 1862년에는 독일어 수업이 시작되었으며 이치카와 가네노리(市川 兼恭), 가토 히로유키(加藤 弘之) 등이 독일어 교사로 근무했다. 1862년에는 영어-일본어 사전인 《영화대역수진사서》(英和對譯袖珍辭書)를 출간하였다.
교수진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어 | 영어 | 프랑스어, 독일어 |
---|---|---|
막부 말기 일본에서는 중국인이 서양 정보를 이용하여 편집한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한 책이 널리 유포되었다.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해국도지』[48], 『영환지략』[49] 등이 있다.
서명 | 저자, 선자 | 번역자 | 발행소 | 발행년도 | 비고 |
---|---|---|---|---|---|
해국도지 | 웨이위안 엮음 | 1875년 (광서 원년) (중간) | 100권 | ||
해국도지 | 웨이위안 엮음 | 린 상슈 역, 시오야 코조・미쓰쿠리 겐포 교정 | 스하라야 이하치 | 1854년 (가에이 7년) | |
해국도지–묵리가주부 | 웨이위안 편 | 나카야마 덴에몬 교정 | 이즈미야 키치베 외 | 1854년 (가에이 7년) | 8권 |
미리가국총기화해 | 괼창 마사키 아쓰시 | 1854년 (가에이 7년) | 3편 | ||
속 아메리카총기[52] | 히로세 죽안 | 1854년 (가에이 7년) | 2권 | ||
해국도지–영길리국부 [49] | 웨이위안(청) | 시오야 토우인(훈점), 미쓰쿠리 겐포(훈점) | 1856년 (안세이 3) 5월 | ||
해국도지 | 〔웨이위안〕편 | 사본 | 권39 | ||
영환지략[53] | 쉬 지쉐 엮음 | 옌운루 | 1873년 (통치 12년) | 10권 | |
영환지략 | 쉬 지쉐 | 이노우에 슌요 등(훈점) | 요네즈 키요헤이 | 1861년 (분큐 원년) | 10권 |
영환지략 | 쉬 지쉐 | 이노우에 슌요 등(훈점) | 1861년 (분큐 원년) | 권1, 3 | |
영환지략 | 쉬 지쉐 | 사본 | 10권 | ||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artillerie, voor de kadetten van alle wapenennl[54]。3 druk. | Overstraten, J. P. C. van | Ter boekdrukkerij van de Gebroeders NYS, voor rekening van de Koninklijke Militaire Akademie | 1850년 | ||
포과신론 | 오토리 게이스케 | 조무관(장판) | 1861년 (분큐 원년) | 권1-4[56] | |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versterkings-kunst, ... 2. druknl[57] | Pel, C. M. H | Gebr. Muller | 1852 | 요시모 하햐쿠지 외 『축성전형』(육군소, 1864년)의 원서[58]。 | |
축성전형 | 요시모 하햐쿠지 | 오토리 게이스케 | 1860년 (만연 원년) | 5권 | |
Beschrijving hoedanig de Koninklijke Nederlandsche troepen en alle in militaire betrekkung staande personen gekleed, ...nl[59] | Gebr. van Cleef | 1823 | |||
화란관군지복색 및 군장략도[60] | 세우프켄 저술 | 야마와키 마사미 | 강무숙 장판 | 1858년 (안세이 5년) | 무라카미 분세이 그림 |
지구설략 | 위 리철 저술 | 미쓰쿠리 겐포 훈점 | 1860년 (만연 원년) | [61] | |
지구설략소증 | 〔미쓰쿠리 겐포〕 | 자필본 | |||
종두략관 | 폰페(Thm. J.L.C. 폼페 판 메이델포르트nl) | 미쓰쿠리 겐포 | 자필본 | 1857년 (안세이 4년) (서) | |
옥석지림 | 미쓰쿠리 겐포 | 미쓰쿠리 간행 | 4권 | ||
하이관진 | 〔미쓰쿠리 겐포〕 | 자필본 | 1853년 12월, 1855년 9월, 1855년 10월 | ||
화란보함 | 사본 | 〔에도 후기〕 | |||
육합총담〔삭제본〕 | 〔양서조소〕편 | 로삽관 | |||
중외신보 | 로삽관 | 1859년 10월 1일 (제6호) | |||
바타히야 신문 | 〔번서조소〕 | 로삽관 | 1861년 (10월 5일) | 권11 | |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영어. | Henry Wheaton영어 | London : Sampson Low, son, & co. | 1857 | 제6판 | |
만국공법 | 혜돈(호턴) 엮음 | 딩 웨이량(William Alexander Parsons Martin영어) | 1864년 (동치 3년) | 4권 | |
만국공법 | 혜돈 엮음 | 딩 웨이량 | 만옥병사로 | 〔에도 시대 말기〕 | 권4 |
만국공법 | 〔혜돈〕엮음 | 〔딩 웨이량〕 | 사본 | 서・제1권 | |
화해만국공법 | 사본 | ||||
성법만국공법국법제산학정표구결 | Visseringnl | 니시 슈 | 사본 | ||
Volkenregtnl 만국공법(란문) | 사본 | 1863년 (분큐 3년경) | |||
만국공법 | 피셜링(Visseringnl) | 니시 슈스케 | 전옥총사로 외 | 1868년 (게이오 4년) | 4권 |
만국공법 4권 | Simon Visseringnl | 니시 슈스케 | 죽포루 외 | 1866년 (게이오 2년) (서간) | |
태서국법론 | Visseringnl | 쓰다 마도 | 자필본 | 1866년 (게이오 2년) 5월 15일부터 6월 25일고 | 권지일 |
태서국법론 | Visseringnl | 쓰다 신이치로 | 18758년 (메이지) 5월 | ||
서명 | 저자, 선자 | 번역자 | 발행소 | 발행년도 | 비고 |
주 |
4. 2. 화학 (정련학)
1860년에 화학과 박물학에 중점을 둔 '''세이렌카타'''(精鍊方, 정련방)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세이렌카타는 에도의 난학자 가와모토 고민, 가쓰라가와 호사쿠, 우쓰노미야 고노신 등이 모여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화학 연구를 진행한 장소가 되었다. 가와모토 고민은 《화학신서》(化學新書, 1861년)를 저술하여 일본에 화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63] 1865년에 세이렌카타는 '''가가쿠쇼'''(化學所, 화학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63]4. 3. 기계학
1856년 이치카와 가네노리(市川 兼恭)가 기차 모형 및 전신기 작동 임무를 맡으면서 기계학 연구가 시작되었다.[63] 같은 해, 페리에게서 받은 증기 기관차 모형과 전신기를 작동시키는 첫 번째 업무를 이치카와 겐쿄가 맡았다. 실시된 테스트에서는 전신기를 사용하여 응접실과 약 1마일 떨어진 가옥 사이에서 통신이 이루어졌다.[39] 프로이센 왕국의 외교관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그라프 추 오일렌부르크(Friedrich Albrecht Graf zu Eulenburg)가 가져온 전신기 및 사진기 등을 가토 히로유키가 다루었다.[63]1857년에는 스탠호프 수동인쇄기를 작동시켰고,[63] 1858년에는 영어 서적 《FAMILIAR METHOD》를 인쇄하였다. 분큐 연간(1861년~1864년)에는 새롭게 국문 활자도 주조하여 20여 부의 서적을 발행했다.
4. 4. 기타 학문
이토 게이스케, 다나카 요시오는 물리학을, 간다 고헤이는 수학을, 가와카미 만노조는 회화를 가르쳤다.[64] 1861년 이토 게이스케는 물산학 강의를 도입하여 동식물 및 광물 연구를 진행하였다.5. 명칭 변경 및 발전
1862년 요쇼시라베쇼(洋書調所, 양서조소)로 개칭되었다.[62] 1863년에는 가이세이쇼(開成所, 개성소)로 개칭되면서 종합적 양학 교육 기관으로 발전하였다.[62] 가이세이쇼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도쿄 대학으로 흡수되었다.[62]
6.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가이세이쇼는 신정부의 관리 하에 가이세이 학교(開成学校)로 개칭되었다.[5] 가이세이 학교는 도쿄 대학을 구성하는 전신 기관 중 하나가 되었다.[5]
7. 한국과의 관계
번서조소는 개화파에게 서양 학문 수용에 있어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30]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 유학을 통해 번서조소와 그 후신인 개성소의 학문적 성과를 접하고, 이를 조선에 도입하려 노력하였다.[29]
개화파는 번서조소에서 번역된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구의 과학 기술, 정치 제도, 사회 사상 등을 학습하고, 이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 하였다. 특히 『해국도지』[48], 『영환지략』[49] 등은 서양의 지리, 역사, 정치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개화파 인사들의 서구 세계 이해를 넓혔다.
이들은 번역 사업을 통해 서구의 지식과 정보를 조선 사회에 확산시키고, 근대화를 위한 지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7. 1. 개화파의 서양 학문 수용
개화파는 번서조소와 그 후신인 개성소에서 이루어진 서양 학문 연구와 번역 성과를 중요한 지적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 유학을 통해 번서조소와 개성소의 학문적 성과를 접하고, 이를 조선에 도입하려 노력하였다.[29]이들은 번서조소에서 번역된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구의 과학 기술, 정치 제도, 사회 사상 등을 학습하고, 이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 하였다. 번서조소에서 번역된 주요 서적으로는 중국어 서적을 번역한 『해국도지』[48], 『영환지략』[49] 등이 있었다. 이 책들은 서양의 지리, 역사, 정치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으며, 개화파 인사들에게 서구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다음은 번서조소에서 번역되거나 연구된 주요 서적 목록이다.
서명 | 저자, 편자 | 번역자 | 발행소 | 발행년도 | 비고 |
---|---|---|---|---|---|
해국도지 | 웨이위안 | 시오야 코조・미쓰쿠리 겐포 교정 | 스하라야 이하치 | 1854년 | |
해국도지–묵리가주부 | 웨이위안 | 나카야마 덴에몬 교정 | 이즈미야 키치베 외 | 1854년 | |
미리가국총기화해 | 괼창 마사키 아쓰시 | 1854년 | |||
속 아메리카총기[52] | 히로세 죽안 | 1854년 | |||
해국도지–영길리국부 [49] | 웨이위안 | 시오야 토우인(훈점), 미쓰쿠리 호코쿠 (훈점) | 1856년 | ||
영환지략[53] | 쉬 지쉐 | 옌운루 | 1873년 | ||
영환지략 | 쉬 지쉐 | 이노우에 슌요 등(훈점) | 요네즈 키요헤이 | 1861년 | |
포과신론 | 오토리 게이스케 | 조무관(장판) | 1861년 | ||
축성전형 | 요시모 하햐쿠지 | 오토리 게이스케 | 1860년 | ||
화란관군지복색 및 군장략도[60] | 세우프켄 | 야마와키 마사미 | 강무숙 장판 | 1858년 | |
지구설략 | 위 리철 | 미쓰쿠리 겐포 훈점 | 1860년 | ||
종두략관 | 폼페 | 미쓰쿠리 겐포 | 자필본 | 1857년 | |
옥석지림 | 미쓰쿠리 겐포 | 미쓰쿠리 간행 | |||
바타히야 신문 | 번서조소 | 로삽관 | 1861년 | ||
만국공법 | 혜돈(호턴) | 딩 웨이량 | 1864년 | ||
만국공법 | 피셜링(Vissering) | 니시 슈스케 | 전옥총사로 외 | 1868년 | |
만국공법 4권 | 니시 슈스케 | 죽포루 외 | 1866년 | ||
태서국법론 | Vissering | 쓰다 마도 | 자필본 | 1866년 |
7. 2. 근대 교육 제도 도입
서양학소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번서조소는 새롭게 구단 언덕 아래에 강사를 신축하여 개강했다. 1860년(만엔 원년)에는 서양학 경시 정책의 영향으로 오가와마치의 협소한 강사로 이전되었지만, 1862년(분큐 2년)에는 히토츠바시 문 밖 "고지인"(현재의 칸다 니시키초)의 광대한 교지로 이전, 이것이 후신 기관인 개성소·개성학교·도쿄 외국어학교·도쿄 대학 법·이·문 3학부에 계승되었다. 처음에 번서조소가 설치된 구단미나미에는 "번서조소" 터의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29]1857년(안세이 4년) 1월 18일에 개교식이 거행되어, 네덜란드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미쓰쿠리 겐포나 스기타 세이케이[55] 등의 교수진은 번역이 대부분이었으며, 지도는 아카마쓰 노리요시 등 구두점 담당 교수에 의한 개인 지도가 주를 이루었다. 1860년 10월 7일(만엔 원년 8월 23일) "영어 구두"로 호리 다쓰노스케, 센무라 고로, 다케하라 유시로, 미쓰쿠리 린쇼[30], 니시 슈 등을 교관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31] 교수진이 정리한 영단어집은 1866년에 출판되었다.[32][33]
프랑스어 강의는 1861년 7월 17일(분큐 원년 6월 10일)에 무라카미 히데토시, 하야시 킨지, 고바야시 데이스케 등을 교관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어는 1862년(분큐 2년)에 이치카와 겐쿄, 가토 히로유키 등을 교관으로 맞이하여 정식 학과가 되었다.
7. 3. 번역 사업의 중요성 인식
번서조소의 번역 사업은 개화파 인사들에게 서양 학문 수용에 있어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30] 이들은 번서조소의 사례를 참고하여 조선에서도 서양 서적 번역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서구의 지식과 정보를 조선 사회에 확산시키고, 근대화를 위한 지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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蕃書調所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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疫毒預防説
萬屋兵四郎出版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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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前後西洋語対訳単語集の基礎的研究
名古屋大学
2000
[24]
서적
1986
[25]
간행물
蕃書調所起源考略
文部省
[26]
논문
1911
[27]
논문
2004
[28]
논문
1911
[29]
웹사이트
蕃書調所跡
https://visit-chiyod[...]
[30]
웹사이트
https://ndlsearch.nd[...]
[31]
서적
Gemeenzame leerwijs : voor degenen, die de Engelsche taal beginnen te leeren, het Engelsch naar den beroemden Walker en het Hollandsch naar de heeren Weiland en Siegenbeek
Blusse en Van Braam
1822
[32]
서적
英吉利單語篇
開成所
1866
[33]
서적
英吉利單語篇
開成所
1866
[34]
논문
[35]
논문
[36]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서적
印刷博物館とわたし
千倉書房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서적
市川兼恭
https://ci.nii.ac.jp[...]
温知會
1941
[45]
서적
(受)東京学士会院、学士会員市川兼恭博物場備雛形触手観覧ノ件
https://ndlsearch.nd[...]
特定歴史公文書等原本資料所蔵者 : 東京大学文書館
1881-09-12
[46]
서적
近代日本美術教育の研究:明治時代
東京芸術大学
[47]
논문
[48]
서적
籌海篇
https://www.iiif.ku-[...]
2024-01-20
[49]
서적
海国図志
https://www.digital.[...]
国立公文書館
2024-01-20
[50]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企画展示「知識を世界に求めて―明治維新前後の翻訳事情―」を開催中
https://current.ndl.[...]
国立国会図書館
2022-11-17
[51]
논문
[52]
서적
續亞米利加總記
須原屋源助
[53]
문서
瀛寰志略
[54]
서적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artillerie, voor de kadetten van alle wapenen
Ter boekdrukkerij van de Gebroeders NYS, voor rekening van de Koninklijke Militaire Akademie [王立陸軍士官学校を代表してNYSブラザーズ書籍印刷所に依頼]
[55]
서적
砲術訓蒙
[56]
서적
砲科新論
[57]
서적
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versterkings-kunst, ten dienste van onder-officieren, die zich tot het examen voor officier der infanterie willen voorbereiden. 2. druk,
Gebr. Muller
1852
[58]
서적
国立国会図書館
[59]
서적
Beschrijving hoedanig de Koninklijke Nederlandsche troepen en alle in militaire betrekkung staande personen gekleed, geëquipeerd en gewapend zijn ... [仮題:オランダ王国の軍隊と軍の陣地にあるすべての人々がどのように服を着、装備し、武装しているかの説明...]
Gebr. van Cleef
[60]
서적
和蘭官軍之服色及軍装略図
講武塾蔵版
1858
[61]
서적
地球説略
[62]
서적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63]
서적
일본 화학의 개척자들
전파과학사
[64]
논문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의 번역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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