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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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는 하라 카즈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이었던 오쿠자키 겐조가 전쟁의 참상과 쇼와 천황의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뉴기니 전투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식인 행위와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고, 오쿠자키의 과격한 행동과 주장을 통해 일본 사회에 전쟁 책임을 묻는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오쿠자키의 삶과 신념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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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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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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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ゆきゆきて、神軍 (유키유키테, 신군) |
영어 제목 | The Emperor's Naked Army Marches On |
장르 | 다큐멘터리 영화 |
감독 | 하라 카즈오 |
제작자 | 고바야시 사치코 |
출연 | 오쿠자키 겐조 |
촬영 | 하라 카즈오 |
편집 | 나베시마 준 |
배급사 | 이마무라 프로덕션 싯소 프로덕션 잔조샤 |
개봉일 | 1987년 8월 1일 |
상영 시간 | 122분 |
제작 국가 | 일본 |
언어 | 일본어 |
제작비 | 222,000 달러 |
2.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오쿠자키는 결국 쇼와 천황에게 전쟁의 모든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나는 무책임한 사람들을 혐오한다... 일본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천황이다"). 그는 항의 과정에서 경찰을 "로봇"이라고 부른다. 그는 전직 군인과 장교들을 끈질기게 찾아내어 그들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도록 설득하는데, 이 과정에서 종종 언어적으로 학대하고 때로는 신체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피를 흘리게 만들기도 한다 (오쿠자키는 "폭력은 나의 특기"라고 말한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40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전쟁이 이미 끝난 후 탈영으로 처형되었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뉴기니 원주민들을 식인 풍습으로 살해했다고 말한다.
전쟁 말기에 뉴기니의 일본 수비대는 좁은 지역에 갇히게 되었고, 식량 공급이 거의 완전히 끊기면서 굶주림과 결국 식인 풍습으로 이어졌다. 자백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완곡 어법으로 "검은 돼지"라고 불렸고, 연합군 병사들은 "흰 돼지"라고 불렸는데, 인터뷰 대상 중 한 명은 "흰 돼지"를 먹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말한다. 처형된 사람들 중 한 명의 누이는 두 사람 (계급이 낮은 이등병)이 장교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살해되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오쿠자키의 조사 과정에서 고시미즈라는 이름의 대위가 두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지며, 인터뷰 대상 중 일부는 그가 사격이 그들을 즉사시키지 못하자 자신의 권총으로 직접 마무리했다고 말했지만, 대위는 이를 부인한다.
오쿠자키는 또한 그의 부대에서 또 다른 의심스러운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연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직 하사를 찾아낸다. 오랜 설득과 신체적 충돌 끝에, 하사는 그가 음식을 훔치던 동료 병사를 직접 살해했고 시신을 먹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원주민들은 너무 민첩해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식인 풍습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일본 군인들이 죽음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식인 풍습의 대상이 되었다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먼저). 하사는 자신이 다른 병사들을 위해 신선한 물을 찾는 것과 같은 정글 안내인으로 유용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타이틀 카드는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오쿠자키가 뉴기니로 갔지만 그 영상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밝힌다.
에필로그는 오쿠자키가 두 군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고시미즈를 살해하려 했다는 신문 헤드라인 사진을 보여준다. 그는 집에 없는 고시미즈 대신 고시미즈의 아들을 쏘아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그런 다음 오쿠자키는 살인 미수 혐의로 12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다고 언급된다.
2. 1. 영화 개요
오쿠자키 겐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독립공병대 제36연대의 병사로 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다. 같은 부대 1,300명 중 불과 100명만이 정글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오쿠자키는 전후 자신이 소속했던 제36연대의 웨와크 잔류대에서 대대장에 의한 부하 사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살해된 두 병사의 친족과 함께 진상을 추적한다. 살아남은 전 병사들은 처음에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오쿠자키는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면서 증언을 얻어내고, 어떤 전 상관이 처형 명령을 내렸다고 결론짓는다. 이 과정에서 전 병사의 친족은 동행을 그만두고, 이후에는 관계자가 대리를 맡았다.영화의 결말에는 오쿠자키가 전 상관의 집에 개조 권총을 들고 찾아가, 그의 아들에게 발포하여 살인 미수죄 등으로 체포된 사실이 자막으로 소개된다. 오쿠자키는 징역 1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만기 출소 후에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주장하며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2005년에 사망했다.
이 영화는 하라 카즈오가 감독하고, 이마무라 쇼헤이가 기획했다.
2. 2. 영화 제작 과정
촬영은 1982년 초부터 1983년 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감독인 하라(原)가 카메라를 겸했다.[8] 촬영이 진행된 어느 날, 오쿠자키(奥崎)가 촬영한 필름과 하라가 편집한 필름을 비교해 보고 싶다고 제안했고, 하라(原)는 이에 불쾌해하며 거절했다. 오쿠자키는 "감독은 하라 씨로 괜찮습니다"라며 물러섰다.[8] 또, 오쿠자키는 자신의 행동 전부를 촬영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하라는 16mm 필름의 비용 문제를 들어 "무엇을 찍을지는 내가 결정해"라고 거절했다.최대의 위기는 오쿠자키가 래시 필름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발생했다. 하라는 무난한 장면을 1시간 정도 보여주었고, 오쿠자키는 감동하며 "하라 씨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네요"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후, 오쿠자키는 하라에게 후루미즈를 살해하는 장면을 촬영해 달라고 은밀하게 제안하며, "이것은 저로부터 하라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라는 즉답을 피했지만, 오쿠자키는 몸을 떨며 압박했다. 하라는 카메라가 없어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무섭습니다. 찍을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오쿠자키는 실망하며 "이제 영화는 그만두겠습니다. 지금까지 촬영한 필름은 태워 주세요"라고 말했다.[8]
하라는 촬영을 계속할지 고민하며 프로듀서와 상담했지만, 프로듀서는 "당신이 그 장면을 찍는다면, 저는 이 영화에서 빠지겠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우라야마 키리오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하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영화는 중단되지 않았다.[8] 타하라 소이치로는 "'유키유키, 신군'은 금기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선 것이 아니냐"라고 평가했지만, 하라는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8]
촬영은 효고현고베시, 히로시마현에타지마, 오타케시 등에서 이루어졌다.[6] 1983년 3월, 서뉴기니에서 2주간 촬영이 진행되었으나, 귀국 당일 인도네시아 정보성에 필름을 압수당해, 이 "뉴기니 편"은 공개되지 못했다.[6] 그 후, 오쿠자키가 체포, 수감되면서 하라 감독은 제작을 포기했으나,[6] 1986년에 편집 작업을 재개하여 작품을 완성했다.[6]
오쿠자키는 촬영 중 하라에게 연출과 각본에 대한 요구를 빈번하게 했고, 이는 하라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오쿠자키는 카메라 앞에서 과도한 연기를 하기도 했다.
2. 2. 1. 기획 및 초기 단계
이 섹션에서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영화 제작의 초기 기획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으나,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제작진의 직책과 이름만 나열되어 있을 뿐, 기획 및 초기 단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요약(summary)에서 언급된 "영화 제작 아이디어의 시작, 하라 카즈오 감독과 오쿠자키 겐조의 만남, 초기 기획 내용"은 현재 제공된 소스만으로는 작성할 수 없다.2. 2. 2. 촬영 및 편집
촬영은 1982년 초부터 1983년 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감독인 하라(原)가 카메라를 겸했다.[8] 촬영이 진행된 어느 날, 오쿠자키(奥崎)가 촬영한 필름과 하라가 편집한 필름을 비교해 보고 싶다고 제안했고, 하라(原)는 이에 불쾌해하며 거절했다. 오쿠자키는 "감독은 하라 씨로 괜찮습니다"라며 물러섰다.[8] 또, 오쿠자키는 자신의 행동 전부를 촬영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하라는 16mm 필름의 비용 문제를 들어 "무엇을 찍을지는 내가 결정해"라고 거절했다.최대의 위기는 오쿠자키가 래시 필름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발생했다. 하라는 무난한 장면을 1시간 정도 보여주었고, 오쿠자키는 감동하며 "하라 씨는 정말 안 되는 사람이네요"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후, 오쿠자키는 하라에게 후루미즈를 살해하는 장면을 촬영해 달라고 은밀하게 제안하며, "이것은 저로부터 하라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라는 즉답을 피했지만, 오쿠자키는 몸을 떨며 압박했다. 하라는 카메라가 없어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무섭습니다. 찍을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오쿠자키는 실망하며 "이제 영화는 그만두겠습니다. 지금까지 촬영한 필름은 태워 주세요"라고 말했다.[8]
하라는 촬영을 계속할지 고민하며 프로듀서와 상담했지만, 프로듀서는 "당신이 그 장면을 찍는다면, 저는 이 영화에서 빠지겠습니다"라고 반대했다. 우라야마 키리오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하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영화는 중단되지 않았다.[8] 타하라 소이치로는 "'유키유키, 신군'은 금기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선 것이 아니냐"라고 평가했지만, 하라는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8]
촬영은 효고현고베시, 히로시마현에타지마, 오타케시 등에서 이루어졌다.[6] 1983년 3월, 서뉴기니에서 2주간 촬영이 진행되었으나, 귀국 당일 인도네시아 정보성에 필름을 압수당해, 이 "뉴기니 편"은 공개되지 못했다.[6] 그 후, 오쿠자키가 체포, 수감되면서 하라 감독은 제작을 포기했으나,[6] 1986년에 편집 작업을 재개하여 작품을 완성했다.[6]
오쿠자키는 촬영 중 하라에게 연출과 각본에 대한 요구를 빈번하게 했고, 이는 하라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또한, 오쿠자키는 카메라 앞에서 과도한 연기를 하기도 했다.
2. 2. 3. 영화 배급 및 상영
토에이에 배급을 의뢰했다. 토에이도 "이건 재미있으니, 우리 회사에서 상영하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양화 계열에서의 공개를 고려했다고 전해지지만, 토에이는 당시 우익(우익) 성향의 영화가 많았고, 상영하면 우익 단체로부터 방해가 예상되어, 토에이 팬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고 판단하여, 자사에서의 배급을 단념했다. 단관에서의 상영을 권했다.2. 3. 영화 내용 분석
2. 3. 1. 뉴기니 전투의 참상
뉴기니 전투는 그 참혹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특히, 일본군의 식인 행위는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2. 3. 2. 오쿠자키 겐조의 진실 추적
오쿠자키는 종종 하라에게 연출과 각본에 대한 요구를 들이밀어 하라와의 사이에 갈등이 잦았다. 또한,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과도한 연기를 하기도 했다.2. 3. 3. 일본 천황의 전쟁 책임
오쿠자키 겐조는 일본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를 추궁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오쿠자키는 쇼와 천황을 "전범 중 한 명"으로 규정하고, 천황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오쿠자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일본 제국 헌법에서 천황이 군 통수권자였던 점을 강조하며, 천황이 전쟁 수행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오쿠자키는 천황이 전쟁 범죄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여러 인사들을 옹호하고 비호했다고 비판했다.
오쿠자키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천황에게 직접 항의 서한을 보내거나, 천황이 참석하는 행사에 나타나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오쿠자키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오쿠자키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과격한 행동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 4. 영화의 평가 및 수상
''천황의 나체의 군대는 진군한다''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칼리가리 영화상(하라 카즈오), 블루 리본상 감독상(하라 카즈오), 키네마 준보 어워드 독자상(하라 카즈오),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하라 카즈오) 및 녹음상(쿠리바야시 토요히코),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 KNF상(하라 카즈오), 요코하마 영화제 감독상(하라 카즈오) 및 작품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2]에롤 모리스는 로튼 토마토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5편 중 하나로 이 영화를 꼽았고,[3] 마크 커즌스는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 제작을 부활시켰다고 평가했다.[4] 미국의 마이클 무어 감독은 "평생 본 영화 중 최고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했다.[6]
1987년, 쇼와 시대가 끝나갈 무렵 공개되었다.[6] 같은 해 8월부터 도쿄 시부야의 유로 스페이스에서 상영되었으며,[6] 이와나미 홀 등에서도 상영을 검토했지만 결국 단념했고, 유로 스페이스 단관에서 3개월 동안 매일 만석을 기록하며 5400만 엔 정도의 흥행 수입을 올리는 대히트를 기록했다.[9] 버블 시대가 다가오던 일본의 젊은 관객들은 극단적인 언행을 하며 달려드는 유령 같은 오쿠자키를 보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6] 하라는 "기이함을 인정하는 '쇼와'가 아직 남아 있었다. 간신히 오쿠자키 씨는 슈퍼스타가 되었다"고 평했다.[6]
영화 공개 중이던 같은 해 9월 18일은 오쿠자키의 아내 시즈미의 1주기였는데, 유로 스페이스의 관객 및 관계자들에게 구류 중인 오쿠자키가 보낸 토라야 특제 "신군 만두" (신과 군의 낙인이 찍힌 2개입)가 배포되었다.[10][9]
3. 오쿠자키 겐조의 생애
오쿠자키 겐조는 쇼와 천황에게 전쟁의 모든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나는 무책임한 사람들을 혐오한다... 일본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천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항의 과정에서 경찰을 "로봇"이라고 불렀다. 그는 전직 군인과 장교들을 끈질기게 찾아내어 그들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도록 설득했는데, 이 과정에서 종종 언어적 학대와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오쿠자키는 "폭력은 나의 특기"라고 말했다.
전쟁 말기 뉴기니의 일본 수비대는 좁은 지역에 갇혀 식량 공급이 끊기면서 굶주림과 식인 풍습으로 이어졌다. 원주민들은 완곡 어법으로 "검은 돼지"라고 불렸고, 연합군 병사들은 "흰 돼지"라고 불렸다. 인터뷰 대상 중 한 명은 "흰 돼지"를 먹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말한다. 처형된 사람들 중 한 명의 누이는 두 사람 (계급이 낮은 이등병)이 장교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살해되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오쿠자키의 조사 과정에서 고시미즈라는 이름의 대위가 두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지며, 인터뷰 대상 중 일부는 그가 사격이 그들을 즉사시키지 못하자 자신의 권총으로 직접 마무리했다고 말했지만, 대위는 이를 부인한다.
오쿠자키는 또한 그의 부대에서 또 다른 의심스러운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연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직 하사를 찾아낸다. 오랜 설득과 신체적 충돌 끝에, 하사는 그가 음식을 훔치던 동료 병사를 직접 살해했고 시신을 먹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원주민들은 너무 민첩해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식인 풍습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일본 군인들이 죽음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식인 풍습의 대상이 되었다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먼저).
타이틀 카드는 다큐멘터리 제작진과 오쿠자키가 뉴기니로 갔지만 그 영상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밝힌다.
에필로그는 오쿠자키가 두 군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고시미즈를 살해하려 했다는 신문 헤드라인 사진을 보여준다. 그는 집에 없는 고시미즈 대신 고시미즈의 아들을 쏘아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그런 다음 오쿠자키는 살인 미수 혐의로 12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다고 언급된다.
3. 1. 초기 생애 및 전쟁 경험
3. 2. 전후 활동
3. 2. 1.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으므로, 섹션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3. 2. 2. 살인 미수 사건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에 제공된 정보가 없습니다. 제공된 정보가 없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3. 3. 오쿠자키 겐조의 유산
1987년 9월 4일,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오쿠자키의 두 번째 공판에서, 본 작품의 비디오 테이프가 변호인 측의 증거로 채택되어 법정에서 상영되었다. 이때 처음 작품을 감상한 오쿠자키는 하라 감독에게 "전혀 재미없습니다"라는 감상을 편지로 전했다고 한다[12].고베에 있던 오쿠자키의 집은 현재 없어지고 코인 주차장이 되었다고 한다[6].
4. 오쿠자키 겐조와 한국
4. 1.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한국
4. 2. 시민 사회의 역할
참조
[1]
웹사이트
Yuki Yukite shingun (1987)
http://www.jmdb.ne.j[...]
Japanese Movie Database
2008-01-16
[2]
웹사이트
Awards for Yuki Yukite shingun (1987)
https://www.imdb.com[...]
IMDb
2008-01-14
[3]
웹사이트
Five Favorite Films with Errol Morris // Current
http://current.com/i[...]
2009-08-31
[4]
웹사이트
In LA, directors have clubbed together to save a landmark cinema. Why don’t Brits do the same?
https://www.theguard[...]
2024-02-22
[5]
웹사이트
『ゆきゆきて、神軍』公式ホームページ
http://docudocu.jp/s[...]
2020-10-10
[6]
뉴스
映画の旅人 広島県江田島市 『平等兵』破天荒な闘い『ゆきゆきて、神軍』(1987年) 地獄語ることが戦友の慰霊 『戦えなかった戦争』の責任を追及する『ゆきゆきて、神軍』
http://www.asahi.com[...]
朝日新聞社
2013-08-31
[7]
웹사이트
極限状態のジャングルを生き抜き天皇をパチンコで撃った元日本兵…寡黙な男を駆り立てたもの 「国に借りは作りたくない」奥崎謙三という囚人 #1
https://bunshun.jp/a[...]
文藝春秋
2024-11-28
[8]
간행물
撮影報告 「ゆきゆきて神軍」
日本映画撮影監督協会
1987-07-30
[9]
문서
전국에서는 최종적으로 흥행 수입 1억 엔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서적
『非国民 奥崎謙三は訴える!!!』
신천사
1988
[11]
웹사이트
1987年度 日本映画ペンクラブ選定 ベスト5 {{!}} 日本映画ペンクラブ
https://j-fpc.com/po[...]
2020-10-07
[12]
서적
観ずに死ねるか! 傑作ドキュメンタリー88
철인사
201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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