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고려)
1. 개요
최선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11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1180년 왕의 동생인 승려 충희의 추문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나, 이후 복직하여 국자시 시험관, 서적 교정 등의 활동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지공거를 역임하며 인재를 등용했고, 1200년에는 수태부, 문하시랑평장사 등으로 임명되었다. 1206년 치사한 후 1209년 사망했으며, 문(文懿)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청렴하고 학식이 깊었으며, 많은 명사를 배출하여 평가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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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년 사망 -
팜빈지
팜빈지는 리 고종 시대에 봉어관을 지냈으며, 반란을 진압했으나 모함으로 투옥되었고, 부하의 구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팜주 형제에게 살해당했다. -
1209년 사망 -
니자미
니자미 간자비는 '단어를 조절한다'는 의미의 아호를 가진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서사시인으로, 5부작 서사시집 《함사》를 통해 페르시아 문학을 넘어 이슬람 문화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철원 최씨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철원 최씨 -
최영
최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국방을 굳건히 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민왕을 보필했으나, 우왕의 요동정벌에 참여했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한 후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무신이다. -
1138년 출생 -
살라딘
쿠르드족 출신 살라딘은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이자 술탄으로, 이집트 장악과 시리아 정복,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승리, 그리고 관용과 용맹함으로 이슬람 세계와 서구 세계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
1138년 출생 -
도키와 고젠
도키와 고젠은 헤이안 시대 말기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측실로서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등을 낳았고, 겐페이 전쟁 이후 체포되었으며, 문학 작품에서 강인한 어머니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2. 생애
최선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1180년 (명종 10) 충희 사건으로 파면되었다가 복직된 후,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196년(명종 26)에는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했고, 1199년(신종 2)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다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200년(신종 3) 왕은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守太傅)·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상주국(上柱國)을 더했다.
1202년(신종 5) 승선(承宣)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禮賓省)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으며, 1206년(희종 2) 수태사(守太師)·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판이부사·상주국으로서 치사(致仕)한 후, 형 최당이 만든 기로회에 들어갔다. 이때 최선의 나이는 69세였다.
1209년(희종 5) 최선이 졸하자 임금은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희종(熙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인 김영부(金永夫)의 묘지명을 지었다.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1180년(명종 10) 왕의 어머니인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2. 관직 생활과 충희 사건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인 김영부(金永夫)의 묘지명을 지었다.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1180년(명종 10)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후에 복직되어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判將作監)으로서 대사성(大司成) 황보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梁公俊) 등 37명을 선발했고,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 增續資治通鑑』과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교정했다.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 1196년(명종 26) 역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2.3. 복직과 국자시, 서적 교정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으로서 대사성 황보탁, 좌산기상시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 등 37명을 선발했다.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로서 이부상서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과 『태평어람』을 교정했다.
2.4. 지공거 활동과 고위 관직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인 김영부(金永夫)의 묘지명을 지었다.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1180년(명종 10) 왕의 어머니인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후에 복직되어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判將作監)으로서 대사성(大司成) 황보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梁公俊) 등 37명을 선발했고,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 增續資治通鑑』과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교정했다.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 1196년(명종 26)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했으며, 1199년(신종 2)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200년(신종 3) 왕이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守太傅)·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으며, 이듬해 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
1202년(신종 5) 승선(承宣)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禮賓省)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다.
2.5. 말년과 죽음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로 승진했으며, 1199년(신종 2) 참지정사로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200년(신종 3) 왕이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이부사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으며, 이듬해 상주국이 더해졌다.
1202년(신종 5) 승선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으며, 1206년(희종 2) 수태사·중서시랑평장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이부사·상주국으로서 치사한 후, 형 최당이 만든 기로회에 들어갔는데, 이 당시 나이가 69세였다.
1209년(희종 5) 졸하자 임금이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평가
文學중국어으로 세상에 소문난 최선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자기의 문벌을 자부하지 않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선비를 우대했으며, 두 차례 지공거를 맡으면서 명사를 많이 얻었다.
4. 가족 관계
| | 이름 || 비고 | ||
|---|---|---|
| 증조부 | 최원립(崔爰立) | 형부원외랑, 증 태자태부 |
| 조부 | 최석 | 검교태부·수태보·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감수국사·판이예부사·상주국·창원현개국자·식읍 500호, 예숙공 |
| 아버지 | 최유청(1095년 ~ 1174년) | 검교태위·수사공·중서시랑평장사·집현전태학사·판예부사, 문숙공 |
| 어머니 | 정항(1080년 ~ 1136년)의 장녀 | 지추밀원사·예부상서·한림학사승지, 문안공 |
| 부인 | 미상 | |
| 장남 | 최종원(崔宗源) | 검교태자첨사 |
| 차남 | 최종준(? ~ 1246년) | 문하시중, 선숙공 |
| 3남 | 최종재(崔宗梓) | 우복야·한림학사승지 |
| 4남 | 최종번(崔宗蕃) | 승선, 최평의 아버지 |
| 첫째 사위 | 조충(1171년 ~ 1220년) |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수문전태학사·수국사·판병부사, 증 문하시중, 문정공 |
| 둘째 사위 | 최홍윤(1153년 ~ 1229년) | 수태보·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병부사, 경문공 |
| 셋째 사위 | 정숙첨(鄭叔瞻) | 평장사 |
| 넷째 사위 | 문후식(文侯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