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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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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는 서기 23년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 친위대 사령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가 친위대 부대 통합을 위해 건설한 병영이다. 로마 시 외곽에 위치했으며, 440 x 380m 크기의 석재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이곳은 클라우디우스의 황제 즉위, 페르티낙스 사후 황제 옹립 경쟁, 엘라가발루스 황제 암살 등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무대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탈리아 정복 후 친위대를 해산하면서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를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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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
개요
프라이토리아 정문의 흔적
프라이토리아 정문의 흔적
위치로마
상세 정보
종류군사 캠프
용도프라이토리아 근위대의 병영
건설 시작기원후 23년
건설 명령세야누스
확장아우렐리아누스 황제 (270년-275년)
역사
건설 시기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기간
건설 이유이전에는 프라이토리아 근위대가 로마 시 전체에 분산 수용되었음
위치비미날레 언덕 밖에 위치
아우렐리아누스 시대로 확장벽이 사각형 모양으로 통합됨
규모16 헥타르 (40 에이커)
페허 시기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해 파괴됨
구조
벽은 높이 4.75미터, 총 둘레는 1.3km
특징동쪽과 북쪽 벽은 여전히 아우렐리아누스 벽의 일부로 존재
주요 문포르타 프라이토리아
포르타 디보르툼
포르타 데쿠마나

2. 역사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가 친위대 소속 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서기 23년에 건설하였다.[4] 이 병영은 로마시 바로 외곽에 세워졌고 단단한 석제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성벽의 네 면 중 세 개는 나중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합쳐졌고, 그 일부는 현재까지도 손쉽게 볼 수 있다. 인접한 도시 구역인 '카스트로 프레토리오'는 이 병영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는 로마 역사에서 몇몇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였다. 칼리굴라가 살해된 후 클라우디우스가 친위대에 의해 로마 역사상 최초로 황제로 선포되었고,[4][1] 페르티낙스 살해 후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곳도 이곳이었다.[5][2] 193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인 곳[5][2],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서기 222년에 친위대에게 살해당한 장소이기도 하다.[4][1] 그 뒤 서기 238년에, 이 병영은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봉기를 일으킨 로마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다.[4][1]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가 서로마 황제로 있던 이탈리아를 정복한 뒤 친위대를 해산하고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를 철거했다.[6][3] 친위대의 마지막 전투는 서기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였으며, 콘스탄티누스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공식적으로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부대원들을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 보냈다.[6][3]

2. 1. 건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가 친위대 소속 부대를 통합시키기 위해 서기 23년에 건설하였다.[4]

이 병영은 로마시 바로 외곽에 세워졌고 단단한 석제 성벽이 둘러싸였다. 성벽의 네 면 중 세 개는 나중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합쳐졌고, 그 일부는 현재까지도 손쉽게 볼 수 있다. 인접한 도시 구역인 '카스트로 프레토리오'는 이 병영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2. 2. 주요 사건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는 로마 역사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였다.

  • 칼리굴라가 살해된 후 클라우디우스가 친위대에 의해 최초로 황제로 추대된 곳이다.[4][1]
  • 페르티낙스 황제 살해 후, 친위대가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곳이기도 하다.[5][2]
  • 193년 3월 28일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는 병영 내에서 병력들을 달래려 하였고, 황제 자리에 자신을 지지할 경우 기부금을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역시 병영에 도착하여 출입이 저지당하자, 친위대에게 기부금을 주겠다고 외쳤다. 흥정 끝에 술피키아누스는 인당 20,000 세스테리티우스를 주겠다고 하였으며, 술피키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차지할까 염려한 율리아누스는 인당 25,000 세스테리티우스를 제시했다. 친위대원들은 율리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병영문을 개방한 뒤 그를 황제로 선포하였다.[5][2]
  • 서기 222년 엘라가발루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친위대에게 살해당한 장소이기도 하다.[4][1]
  • 238년, 이 병영은 막시미누스 트락스에 대해 봉기를 일으킨 로마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다.[4][1]
  •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가 서로마 황제로서 군림하던 이탈리아를 정복한 뒤 친위대를 해산하고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를 철거했다.[6][3] 친위대의 마지막 전투는 서기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였으며, 콘스탄티누스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공식적으로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부대원들을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으로 뿔뿔이 찢어 보냈다.[6][3]

2. 3. 콘스탄티누스 1세의 파괴

콘스탄티누스 1세막센티우스가 서로마 황제로 군림하던 이탈리아를 정복한 뒤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를 철거하고 친위대를 해산했다.[6] 친위대의 마지막 역사의 무대는 서기 312년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였으며, 콘스탄티누스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공식적으로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부대원들을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 보냈다.

참조

[1] 서적 Annals
[2] 서적
[3] 서적 Encyclopedia of the R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4] 서적 편년사
[5] 서적
[6] 서적 Encyclopedia of the R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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