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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토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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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이토리아니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제국 시대까지 황제와 고위 장군을 호위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예 군인 집단이다. 프라이토리아니는 원래 장군의 호위병으로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정규 부대로 편제되었으며, 황제의 신변 보호뿐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도 개입하여 황제 폐위와 옹립에 영향을 미쳤다. 조직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뛰어난 장비와 훈련을 갖춘 정예 병사들이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으나,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해산되었다.

2. 역사적 배경

로마 공화정 시대 장군들의 개인 호위병( cohors praetoria|코호르스 프라이토리아la )에서 기원한[3] 프라이토리아니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인 황제 친위대로 창설하면서 로마 제국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주요 임무는 황제 경호였으나, 군사 작전 참여 및 로마 시내 질서 유지 역할도 수행했다.

이들은 황제와의 근접성 덕분에 여러 특권을 누렸다. 로마의 신성한 경계인 포메리움|포메리움la(pomerium) 안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군인이었고, 복무 기간도 일반 군단병보다 짧았다(기원전 13년 기준 12년, 이후 16년). 봉급 역시 군단병보다 훨씬 높았으며([2] sesquiplex stipendumla, 1.5배 봉급), 특히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거나 황실 경사 시 지급되는 막대한 특별 하사금 도나티붐( donativumla )은 이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초기 로마 황제들의 개인 근접 경호를 맡았던 황실 게르만 친위대와는 구별되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과 특권은 점차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하기 어려운 정치 세력으로 만들었다. 세야누스의 권력 장악 시도 이후, 이들은 노골적으로 황제 계승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41년 칼리굴라 암살과 클라우디우스 옹립, 69년 네 황제의 해 당시 갈바 살해와 오토 지지, 193년 페르티낙스 암살 후 제위 경매 사건 등은 프라이토리아니의 정치적 영향력과 그 위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의 정치 개입과 폭력성은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게 공포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역대 황제들은 이들을 통제하려 시도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기존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하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군단병으로 재편성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궁을 로마 밖으로 옮기고 새로운 친위 부대를 창설하여 그 지위를 약화시켰다.

결국 프라이토리아니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지지하며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맞섰으나 패배했다.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완전히 해산시키고 그들의 주둔지였던 Castra Praetoria|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la를 철거했다. 이로써 약 3세기 동안 로마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프라이토리아니는 해체되었다.

2. 1. 로마 공화정 시대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시대에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장군의 개인 호위병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275년경 스키피오 가문의 호위병으로서 등장한다.[3] 군 지휘권인 임페리움|임페리움la(imperium)을 가진 장군은 행정관이나 프로콘술로서 공직을 수행했으며, 이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리크토르가 공식적으로 배정되었다. 로마 집정관과 프로콘술에게는 각각 12명의 리크토르가, 프라에토르와 프로프라에토르에게는 각각 6명의 리크토르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영구적인 개인 호위대가 아니었기에, 실제 전투 현장의 고위 지휘관들은 특별히 선발한 병사들로 임시 호위 부대를 꾸려 스스로를 보호했다. 예를 들어,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에서 벌어진 누만티아 포위전(기원전 134년~133년) 당시 장군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는 적의 포위 공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500명으로 구성된 별도 부대를 운용했다.

고대 로마에서 '프라에토르'(praetor)는 본래 시민 또는 군사 지도자를 의미하는 용어였으며, 프라이토리아니는 초기에 이들 프라에토르를 위한 정예 경호대 역할을 했다.[3]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라는 명칭 자체도 프라이토르의 막사나 지휘 본부를 뜻하는 프라에토리움|프라이토리움la(praetorium)에서 유래했다. 로마 군단의 사령관들은 각 계급의 병사 중에서 정예 인원을 선발하여 자신의 호위병으로 삼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는 적어도 기원전 275년경 스키피오 가문 시절부터 나타난다.

이러한 호위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점차 그 규모가 커져 대대(코호르스) 단위로 편성되면서 cohors praetoria|코호르스 프라이토리아la('프라이토르 부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야영지에서 이들은 지휘관의 텐트인 프라에토리움|프라이토리움la 근처에 배치되어 경호를 담당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군의 장기간에 걸친 군사 작전 속에서, 이러한 개인 호위 부대는 야전 지휘관에게 일반적인 존재가 되었다. 단순한 경호 부대를 넘어 군단 규모의 정예 부대를 보유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제10군단 에퀘스트리스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최정예 부대로 삼아 갈리아 전쟁과 로마 내전에서 핵심 전력으로 활용했다.

기원전 40년 말, 제2차 삼두정치의 주역인 옥타비아누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각자 프라이토리아니를 운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친위대를 로마의 종교적, 법적 경계인 포메리움|포메리움la(pomerium) 안쪽에 배치했는데, 이는 군대가 로마 시내에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된 최초의 사례였다. 동방에 있던 안토니우스는 3개 코호트를 지휘했으며, 기원전 32년에는 자신의 프라이토리아니를 기리는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역사가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5개 코호트를 지휘했다. 내전 종결 후,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 통합의 상징으로 자신의 군대와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합쳤고, 이후 초대 로마 황제(기원전 27년~서기 14년)가 된 후에도 프라이토리아니를 황제의 핵심 호위 병력으로 유지했다. 이 시기 프라이토리아니는 점차 로마 권력 정치의 중요한 행위자로 변모하게 된다.

2. 2. 로마 제정 시대

프라이토리아니( Praetorianila )는 로마 제국 시대에 황제의 경호원 역할을 수행했던 정예 군단병들이었다. 그 기원은 로마 공화정 시기 법무관( praetorla )이나 군 사령관이 자신의 막사( praetoriumla ) 주변을 경호하기 위해 정예 병사들로 구성했던 친위대( cohors praetoriala )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적어도 기원전 275년경 스키피오 가문에서부터 시작된 관행으로 보인다. 공화정 말기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10군단 에퀴스트리스를 자신의 정예 부대로 활용했던 것처럼, 강력한 지휘관들이 정예 부대를 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을 수립하면서 이러한 정예 부대가 평시에도 황제의 안전과 로마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프라이토리아니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그는 공화정의 외양을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부대를 육성했다. 초기에는 500명으로 구성된 9개 보조대를 편성했으며, 점차 인원을 1,000명까지 늘렸다. 이 중 3개 보조대는 로마 시에, 나머지는 이탈리아 내 다른 지역에 주둔시켰다. 서기 2년에는 기사 계급 중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최고 책임자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2명을 임명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와의 근접성 덕분에 여러 특권을 누렸다. 로마의 신성한 경계인 포메리움 내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군인이었으며, 복무 기간도 일반 군단병보다 짧았다. 기원전 13년에는 프라이토리아니의 복무 기간이 12년(군단병 16년)이었고, 기원전 5년에는 16년(군단병 20년)으로 조정되었다. 봉급 역시 군단병보다 훨씬 높았는데,[2] 네로 시대에는 군단병의 3.5배에 달했으며,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지급되는 막대한 특별 하사금인 도나티붐( donativumla )도 받았다. 이 하사금은 때로는 몇 년 치 봉급에 해당했으며, 황실의 경사나 중요한 정치적 사건 이후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지급되곤 했다.

프라이토리아니의 주요 임무는 황제와 황실 가족을 경호하는 것이었지만, 때로는 황제를 따라 직접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로마 시내의 질서 유지 및 행정 집행 보조, 폭동 진압 등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황제와의 근접성과 강력한 군사력은 점차 정치 개입으로 이어졌다. 티베리우스 치세의 세야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칼리굴라 암살, 클라우디우스 옹립, 네 황제의 해의 혼란, 페르티낙스 암살과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옹립 등 황제의 폐위와 옹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로마 정치의 불안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는 로마 시민들과 로마 원로원에게 두려움과 불신을 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기존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하고 자신의 충성스러운 군단병들로 재편성하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 속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여전히 황제 선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거처를 로마 밖으로 옮기고 새로운 친위 부대인 요비아니와 헤르쿨리아니를 창설하면서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프라이토리아니의 마지막은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였다. 막센티우스를 지지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완전히 해산시키고 그들의 주둔지였던 Castra Praetoria|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la를 철거함으로써 프라이토리아니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2. 2. 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을 시작하며 평시에도 활동하는 정예 부대의 필요성을 느껴 프라이토리아니를 창설했다. 그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이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신중하게 부대를 증강했다. 처음에는 500명으로 구성된 9개 보조대를 편성했고, 점차 인원을 1,000명까지 늘렸다. 이 중 3개 보조대는 로마 시에, 그중 1개 보조대는 황궁에 배치되었다. 로마에서의 주요 임무는 아우구스투스가 거주하는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 경비였다. 황궁 외부 경비는 프라이토리아니가 맡았고, 내부 경비는 황실 게르만 근위대와 Statores 아우구스티[5]가 담당했는데, 이들은 로마군의 참모 본부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군사 경찰이었다. 매일 오후, 보조대장은 황제로부터 직접 암호를 받았다. 이 보조대의 지휘권은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가 아닌 황제에게 있었다. 기원전 23년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가 건설된 후, 또 다른 보조대장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와 황실 가족을 호위하고, 필요시 폭동 진압 역할도 수행했다. 일부 여제들은 자신들만의 프라이토리아니를 거느리기도 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기원전 23년에는 이탈리아의 평화를 위해 9개 보조대(총 4,500명)가 있었으며, 3개는 로마에, 나머지는 근교에 주둔했다. 그러나 1994년에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는 잠시 12개 보조대로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8] 이 비문은 한 인물이 아우구스투스 말기에 제11 보조대를, 티베리우스 초기에 제4 보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타키투스가 언급한 서기 23년의 9개 보조대는, 아우구스투스 말기에 3개의 도시 보조대가 프라이토리아니에서 분리되거나 이름이 변경되면서 조정된 결과일 수 있다. 서기 2년에는 기사 계급 중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최고 책임자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2명을 임명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공화정 말기 전쟁 이후 처음으로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발생한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 사망 후,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라인강과 판노니아 주둔 군단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들은 프라이토리아니보다 열악한 복무 조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판노니아 군단의 반란은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2개 프라이토리아니 보조대, 프라이토리아니 기병대, 황실 게르만 근위대를 이끌고 진압했다. 게르마니아 군단의 반란은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게르마니쿠스가 진압했으며, 그는 이후 2년간 게르마니아에서 군단과 프라이토리아니 파견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여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잃었던 군단 독수리 3개 중 2개를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다.[11]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선포함'', 로렌스 알마-타데마의 작품, 캔버스에 유채, 1867년. 클라우디우스의 즉위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에 따르면,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원들은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직후 커튼 뒤에 숨어 있던 그를 발견하고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티베리우스 치하에서는 세야누스가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 총독이었으나 서기 15년에 단독 총독이 되었고, 통치 부담을 원로원과 나누기 어려워했던 티베리우스에게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세야누스는 로마 시 외곽에 흩어져 있던 프라이토리아니 보조대들을 로마 시내의 새로운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집결시켜 자신의 통제 하에 두었고, 이를 통해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12]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를 독살하고(서기 23년),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스스로 후계자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음모는 서기 31년에 발각되었고,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대신하여 비밀리에 임명한 새로운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비길레스(소방대)의 도움을 받아 세야누스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마크로는 치밀한 계획으로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하여 세야누스 제거에 성공했으며,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세야누스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는 나타나지 않았다.[13]

서기 37년, 칼리굴라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마크로의 지원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칼리굴라 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의 규모는 다시 12개 보조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41년, 칼리굴라에게 개인적인 모욕(앵앵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놀림받음)을 당했던 프라이토리아니 보조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를 비롯한 장교들이 칼리굴라와 그의 아내를 암살했다.[14] 암살에 동조했던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공화정 복원을 시도했지만, 대부분의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은 황제로부터 받는 보상과 원로원의 무능함을 이유로 제정 유지를 원했다. 혼란 속에서 궁전을 약탈하던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은 커튼 뒤에 숨어있던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하고 그를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데려가 황제로 추대했다. 이는 프라이토리아니가 직접 황제를 옹립한 첫 사례였다.[15]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에게 5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여 충성을 확보했고, 암살 주동자인 카이레아 등은 불충죄로 처형했다.[16][17] 클라우디우스는 43년 브리타니아 정복 전쟁에 프라이토리아니를 파견했으며,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에게는 불온 분자 색출의 공을 치하하며 기사이면서도 법무관 표창과 15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보상을 원로원을 통해 보냈다.[18] 또한 황후 메살리나와 그녀의 연인 가이우스 실리우스를 모반 혐의로 처형할 때에도 프라이토리아니를 동원했지만, 당시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였던 루키우스 루시우스 게타를 불신하여 신임하던 해방 노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에게 지휘권을 맡겨 사태를 수습했다.[19]

클라우디우스가 독살된 후, 프라이토리아니는 당시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였던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르스의 영향으로 네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부르스는 네로 치세 초반 8년 동안 황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서기 62년에 사망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일부는 65년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 당시 공동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였던 티겔리누스는 음모 진압을 주도했고,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은 충성심에 대한 보상으로 각각 500 데나리우스를 받았다.

2. 2. 2. 네 황제의 해

서기 68년 네로 황제가 사망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면서 '네 황제의 해'로 알려진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프라이토리아니의 공동 대장이었던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동료 티겔리누스 몰래 프라이토리아니를 설득하여 네로를 버리고 갈바를 새로운 황제로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1인당 7,500 데나리우스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약속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갈바는 "나는 병사를 모집하는 습관이 있지, 사는 습관은 없다"고 말하며 약속된 보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는 프라이토리아니의 큰 불만을 샀고, 갈바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오토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오토는 불만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 스페쿨라토르 23명을 매수하여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했다. 결국 69년 1월 15일, 궁정 코호트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라이토리아니는 갈바와 그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젊은 피소를 살해했다.

오토를 지지했던 프라이토리아니는 이후 라인강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비텔리우스는 기존의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시키고 충성심 높은 군단병과 보조병 중에서 새롭게 16개 코호트, 약 16,000명 규모의 프라이토리아니를 창설했으며, 기존 프라이토리아니 백인대장들을 처형했다. 해산되었던 옛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네 번째 황제 후보인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로마의 프라이토리아니 주둔지를 공격하는 등 내전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한 후, 프라이토리아니를 다시 9개 코호트로 축소하고 자신의 아들 티투스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하여 직접 통제했다. 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비밀경찰처럼 활용하여 반대 세력을 감시하고 숙청하는 등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했다.[20]

2. 2. 3. 플라비우스 왕조

68년 6월 28일, 제5대 황제 네로가 사망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면서 로마 내전이 일어났다. 프라이토리아니는 처음에는 갈바를 지지했으나, 곧 그의 경쟁자인 오토에게 매수되어 갈바를 살해했다.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아들 티투스를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통제력을 강화하고, 비밀경찰처럼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데 이용했다[20]. 베스파시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를 9개 코호트로 재편하고, 각 부대의 병력을 500명으로 되돌렸다. 또한 황궁 입구에서의 경비 임무는 없앴지만, 궁궐 내부 경비는 유지하도록 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투스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올랐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보다 프라이토리아니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코호트 수를 10개로 늘렸으며, 프라이토리아니는 게르마니아와 다뉴브 강 유역에서 다키아인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다키아 전쟁에서는 사령관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가 이끄는 프라이토리아니를 파견했고, 기사 계급인 푸스쿠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푸스쿠스는 86년 다키아 영토로 진격하던 중 타파에 협곡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고, 프라이토리아니를 포함한 그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로마군의 상징인 군기까지 빼앗기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시종 파르테니우스 등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이었던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도 암살에 연루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를 따르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페트로니우스와 파르테니우스를 처형했다.

2. 2. 4. 안토니누스 왕조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암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된 자신들의 사령관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의 처형을 요구했다.

98년 초 네르바가 사망하자, 근위대는 라인강 군단의 사령관인 트라야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지지했다. 트라야누스는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트라야누스는 라인강에서 로마로 돌아왔는데, 이때 새로운 부대인 아우구스티 기병( equites singulares Augusti|에퀴테스 싱굴라레스 아우구스티la )을 대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101년–102년, 105년–106년)과 113년–117년의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다.

소위 오현제 시대의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같은 히스파니아 출신인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했다. 아티아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종군했으며, 원정지에서 트라야누스가 사망했을 때 황후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모의하여 자신이 후견인을 맡고 있던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가 되도록 조치했다는 설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에게 권력 이양이 발표되자마자 로마로 귀환하여 집정관 경험자였던 유력한 원로원 의원 네 명을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은 하드리아누스의 지시였다는 설과 아티아누스가 독단적으로 잠재적 위협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2세기 동안 프라이토리아니는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161년-166년 로마-파르티아 전쟁에 참여했고, 169년–175년과 178년–180년 사이의 북부 원정에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수행했다. 이 원정 중 두 명의 사령관이 사망했다.

180년 코모두스가 즉위하면서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로 돌아왔다. 티기디우스 페레니스(182년–185년)와 해방 노예 출신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186년–190년)는 황제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을 남용했다. 페레니스는 그의 지방 문제 간섭에 불만을 품고 로마 브리타니아에서 온 세 개 군단의 란키아리 대표 1,500명에 의해 살해되었다. 클레안데르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사령관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188년, 클레안데르는 두 명의 다른 사령관과 함께 근위대의 공동 지휘권을 얻었다. 그는 아우구스티 기병에게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고, 이는 도시 코호트와의 계획된 전투로 이어지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2. 2. 5. 세베루스 왕조

코모두스는 192년, 그의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 퀸투스 아에밀리우스 라에투스가 가담한 음모로 살해되었다. 음모에 참여했던 새로운 황제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3,000 데나리우스의 특별 수당을 지급했지만, 추가 지급을 거부하자 193년 3월 28일, 즉위 3개월 만에 근위병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제위를 경매에 부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사들였다. 그러나 다뉴브강 군대는 판노니아 수페리오르의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세베루스는 로마로 진군하여 기존 프라이토리아니를 속여 무장 해제시킨 뒤 해산했다. 해산된 프라이토리아니는 세베루스 자신의 군대에서 차출된 병사들로 새롭게 대체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새로 편성한 프라이토리아니는 197년 리옹 전투에서 그의 경쟁자였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상대로 활약했다. 또한 197년부터 202년까지 황제를 따라 오리엔트 원정에 참여했으며, 208년부터는 브리타니아 원정에 동행하여 211년 세베루스가 요크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를 호위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 카라칼라는 즉위 직후 자신의 동생이자 공동 황제였던 게타를 살해하여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217년, 오리엔트 원정 중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 마크리누스의 사주로 암살당했다.

마크리누스가 제거된 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새로운 황제 엘라가발루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엘라가발루스는 동방의 엘라가발 숭배 사제 출신이었는데, 프라이토리아니는 222년에 그를 몰아내고 그의 13세 사촌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 시기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의 지위는 점차 일반 행정직과 유사해지는 경향을 보였고, 법률가들이 임명되기도 했다. 유명한 법률가 파피니아누스는 203년부터 카라칼라 즉위 후 제거될 때까지 이 자리를 맡았으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치하에서는 또 다른 법률가 울피아누스가 사령관을 역임했으나 황제가 보는 앞에서 근위병들에게 살해당했다.

플라비우스 왕조와 오현제 시대를 지나 다시 내란의 시대가 도래하자, 프라이토리아니는 다시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여 황제를 좌지우지했다. 페르티낙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공개 경매에 부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선택한 것은 프라이토리아니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프라이토리아니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제국을 직접 통치할 기반은 부족했기에 항상 특정 인물을 황제로 내세워야만 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기존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하고 자신의 판노니아 군단 병사들로 새롭게 구성하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한 정치력을 갖춘 인물이 등장하지 못했다. 결국 군인 황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의 옹립과 폐위를 결정하는 강력한 집단으로 다시 부상했으며, 이는 단명 정권이 이어지는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 출신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오르게 된다.

2. 2. 6. 군인 황제 시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된 후, 기존의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하고 자신의 판노니아 군단을 새로운 프라이토리아니로 편성했다. 그러나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만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 부족했고, 군인 황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하고 제거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다시 부상했다. 물론, 그들이 지지하는 인물은 당시의 정세에 따라 계속 바뀌었고, 이는 단명하는 정권이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238년 봄,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 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의 주력 부대는 다른 전선에서 복무 중이었다. 소수의 병력만 남아있던 로마의 프라이토리아니 야영지는 로마 원로원과, 막시미누스에 반기를 든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결국 자신의 군대(프라이토리아니 포함)에 의해 살해되었다. 원로원이 추대한 푸피에누스발비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를 로마로 불러들였으나, 도리어 그들의 공격을 받아 238년 7월 29일에 살해당했다.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가 황제가 되었다.

238년 이후의 기록은 부족하여 프라이토리아니에 대한 정보가 드물어진다. 249년에는 황제 아라비아의 필리푸스의 아들인 필리푸스 2세를 암살했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세에는 팔미라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위를 크게 축소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시아 마이너의 니코메디아(비잔티움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거리)에 거주했기 때문에, 프라이토리아니는 더 이상 황제의 궁정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요비아니와 헤르쿨리아니(각각 유피테르와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군단으로, 사두정치의 선임 황제와 부 황제를 상징)라는 두 개의 새로운 군단이 창설되어 프라이토리아니를 대신해 황제의 개인 경호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고, 297년에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와 함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 5월 1일에 퇴위할 무렵, 로마의 Castra Praetoria|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la에는 소규모 수비대만이 주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프라이토리아니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때로는 황제를 시해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황족이나 원로원, 관료 집단과는 달리 제국을 직접 통치할 능력이나 기반은 부족했기에 항상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페르티나크스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를 경매에 부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팔아넘긴 사건은 프라이토리아니의 권력 남용과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 2. 7.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해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 출신이었으나, 황제가 된 후 그들의 권한을 대폭 줄였다. 그럼에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유지되었고, 제국은 4분할 통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4세기 초,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갈레리우스의 명령을 받아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반발한 프라이토리아니는 은퇴한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를 찾아가 306년 10월 28일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프라이토리아니의 마지막 활동은 312년 막센티우스 황제를 지지하며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맞서 싸운 밀비우스 다리 전투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고 서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콘스탄티누스 군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그들이 지지하던 황제 막센티우스는 전투 중 사망했다.

막센티우스가 죽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라이토리아니의 남은 세력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제국 각지의 로마군 부대로 흩어져 배치되었고, 프라이토리아니의 주둔지였던 Castra Praetoria|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la는 로마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프라이토리아니의 시대를 마감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철거되었다.

3. 정치적 역할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친위대장 세야누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려 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시내에 분산되어 있던 친위대를 카스트라 프라에토리아라는 새로운 병영에 집결시켜 자신의 지휘 하에 두었다.[12]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어 제국 통치에 깊숙이 관여했으나,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를 독살하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스스로 황제의 후계자가 되려 했다. 그의 음모는 서기 31년에 발각되었고, 티베리우스는 새로 임명한 친위대장 나에비우스 스트리우스 마크로와 비길레스(소방대)를 동원하여 세야누스를 체포하고 처형했다.[13]

서기 37년, 세야누스의 후임자였던 마크로는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친위대 장교 카시우스 카에레아 등에게 암살당했다.[14] 원로원이 공화정 복원을 논의하는 사이, 친위대원들은 궁전에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하고 그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15] 이는 친위대가 스스로 황제를 옹립한 첫 사례였으며,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친위대원들에게 막대한 도나티붐(특별 하사금)을 지급하고[16] 암살 관련자들을 처형했다.[17] 클라우디우스는 또한 아내 메살리나의 불륜과 모반 혐의를 처리할 때 친위대를 동원했지만, 당시 친위대장 루키우스 루시우스 게타를 불신하여 해방 노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에게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19]

클라우디우스 사후, 친위대는 당시 친위대장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르스의 영향 아래 네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부르스는 네로 치세 초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62년 사망 후 친위대의 일부 장교들은 65년 피소의 음모에 가담하기도 했다.

68년, 네 황제의 해로 알려진 내전 기간 동안 친위대의 정치적 영향력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당시 친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거액의 하사금을 약속하며 친위대가 네로를 버리고 갈바를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갈바가 약속된 금액 지불을 거부하자("나는 병사를 모집하는 습관이 있지, 사는 습관은 없다"), 친위대는 오토에게 매수되어 69년 1월 15일 갈바를 살해하고 오토를 황제로 추대했다. 오토는 친위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에게 지휘관을 직접 임명할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후 오토가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하자, 비텔리우스는 기존 친위대를 해산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단병들로 16개 대대의 새로운 친위대를 조직했다. 하지만 해산되었던 구 친위대 병력은 네 번째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여 비텔리우스 타도에 기여했다.[6]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친위대를 9개 대대로 축소하고, 아들 티투스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하여 친위대의 정치적 충성심을 확보하고 통제를 강화했다.[20]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친위대를 중용했으나, 96년 암살당했다. 이 암살에는 친위대장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도 연루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를 따르던 친위대원들은 그의 처형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다음 황제 네르바가 사망하자, 친위대는 트라야누스를 지지했고, 트라야누스는 즉위 후 이전 암살에 연루되었던 남은 친위대 지휘관들을 처형하여 황제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코모두스 황제 치하에서는 친위대장 티기디우스 페레니스와 해방 노예 출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가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을 남용했다. 페레니스는 브리타니아 주둔 군단의 항의로 살해되었고, 클레안데르는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다가 도시 보조대와의 충돌을 빚기도 했다. 192년, 코모두스는 친위대장 퀸투스 아에밀리우스 라에투스가 가담한 음모로 암살되었다.

코모두스 사후, 친위대는 새 황제 페르티낙스를 지지했지만, 그가 추가적인 하사금 지급을 거부하자 193년 3월 28일 그를 암살했다. 더욱이 친위대는 황제의 자리를 경매에 부쳤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막대한 금액을 제시하여 황제로 선포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친위대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제 추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지만, 스스로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나 기반은 없었기에 항상 누군가를 옹립해야만 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한 것은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는 로마로 진군하여 기존의 친위대를 해산시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판노니아 군단 병력으로 새로운 친위대를 창설했다. 이는 친위대의 구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황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는 조치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후에도 친위대는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그의 아들 카라칼라는 친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로 217년 암살당했다. 마크리누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곧 제거되었고, 친위대는 엘라가발루스 황제에게 반발하여 222년 그의 사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옹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친위대장의 지위는 점차 법률가들이 맡는 행정직과 유사해졌으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치하에서는 법률가 출신 친위대장 울피아누스가 황제 앞에서 친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군인 황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친위대는 다시 황제의 옹립과 폐위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황제의 야전 호위대인 사케르 코미타투스(sacer comitatus)를 강화했다.

친위대의 마지막 정치적 활동은 312년, 막센티우스 황제를 지지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맞선 밀비우스 다리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승리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완전히 해산시키고 그 병사들을 제국 각지의 군단으로 분산시킴으로써, 로마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친위대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4. 조직과 구성

프라이토리아니la(Praetoriani)라는 이름은 로마 공화정 시기 군 사령관이나 속주 총독의 본부 또는 막사를 의미하는 프라이토리움la(praetorium)에서 유래했다. 로마 군단의 사령관들은 자신의 호위를 위해 각 계급의 병사 중에서 정예병을 선발하는 관행이 있었으며, 이는 기원전 275년경 스키피오 가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호위 부대는 보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점차 코호르스(대대) 규모로 커지면서 '프라이토르 부대'(cohors praetoriala)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단순한 경호 부대를 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10군단 에퀘스트리스를 자신의 직속 정예 부대로 활용했듯이, 강력한 부대로 운용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정예 부대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고 신변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프라이토리아니를 상설 부대로 창설했다. 그는 공화정 체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황제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중하게 군사력을 증강했다. 처음에는 1개 코호르스 당 500명으로 구성된 9개의 코호르스를 창설했으며, 점차 인원을 1,000명까지 늘렸다. 이 중 3개 코호르스는 로마 시에 주둔시켰고, 그중 1개 코호르스는 황궁을 직접 방어했다. 또한 서기 2년에는 기사 계급 중에서 프라이토리아니의 최고 지휘관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2명을 임명했다.

프라이토리아니 부대는 기본적으로 보병 코호르스와 기병으로 지정된 에퀴타테la(기병) 투르마(부대)로 구성되었다.[7] 또한 황제의 비밀 작전, 체포, 처형 등을 수행하는 특별 기병 부대인 스페쿨라토레스 아우구스티la(Speculatores Augusti)도 존재했다. 총 300명 규모(각 코호르트 당 30명)로, 선임 백인대장인 트레케나리우스la(Trecenarius)의 지휘를 받았다.

로마 시민의 전통을 보존하고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시 중심부에서는 갑옷을 입지 않고 시민 복장인 토가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로마 시민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도시에 강력한 군사력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여 이러한 복장 규정을 시행하고 부대 배치를 분산시키기도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인 서기 26년,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야누스는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9개의 프라이토리아니 코호르스와 도시 코호르스를 로마 세르비우스 성벽 너머 에스퀼리노 언덕에 새로 건설된 거대한 병영인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la(Castra Praetoria)로 통합시켰다. 이를 통해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정치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프라이토리아니의 규모와 모집 대상, 지휘 체계, 복무 조건 등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4. 1. 지휘 체계

기원전 2년부터 프라이토리아니 군단장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전에는 각 코호트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기사 계급의 트리뷴의 명령을 받았다. 로마에 주둔한 모든 군대의 수장인 이 역할은 로마 정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후 프라이토리아니 군단장 직은 항상 기사 계급(equesla) 출신이 맡았다. 기사 계급은 전통적으로 로마 군대에서 기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시민 계급이었다.

기원전 2년부터 코호트는 두 명의 군단장 통제를 받았으나, 각 코호트는 여전히 트리뷴의 지휘 아래 독립적으로 편성되었다. 트리뷴 바로 아래에는 일반적인 백인대장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동등한 계급이었지만 예외적으로 trecenariusla는 프라이토리아니 코호트의 모든 백인대장 중 첫 번째이자 최고위였다. 그는 300명의 speculatoresla(정찰병 또는 첩보병)를 지휘했으며, 그의 부관인 ''군단 야영지의 수석 지휘관''을 제외한 모든 백인대장을 지휘했다.[7]

2세기부터 프라이토리아니 군단장은 프라이토리아니 코호트뿐만 아니라 로마 주둔군 전체를 감독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Cohortes urbanaela("도시 코호트")와 equites singulares Augustila(황제 직속 기병대)가 포함되었지만, 소방대 역할을 하던 ''Vigiles'' 코호트는 제외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판노니아 주둔군의 반란 진압을 위해 친위대장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야누스와 2개 친위대대를 아들 소(小) 드루수스의 지휘하에 파견하여 진압하게 했다. 또한 게르마니아에서는 아르미니우스와 전투 중이던 조카 게르마니쿠스에게 2개 친위대대를 배속시켜 전투에 참여하게 했다[11].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로마 시내에 분산되어 있던 친위대를 집결시키고 그 거점인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를 건설했으며, 이는 친위대의 지위를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2]. 친위대의 힘을 등에 업은 세야누스는 강력한 권세를 누렸으나, 그의 힘을 경계한 티베리우스는 나에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를 새로운 친위대장으로 비밀리에 임명하고 세야누스 제거를 명령했다. 마크로는 친위대 병력을 장악하고 소방대 비길레스와 협력하여 치밀한 준비 끝에 세야누스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세야누스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친위대장은 등장하지 않았다[13].

41년 1월 24일, 제3대 황제 칼리굴라가 원한을 품은 친위대 장교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14]. 암살에 동조한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공화정 복원을 시도했으나, 다수의 친위대원들은 황제로부터 받는 보상과 원로원의 무능함을 이유로 제정 유지를 원했고,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제4대 황제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친위대원들에게 금품을 지급하여 충성을 확보하고, 암살 주동자인 카이레아 등을 처형했다[16][17].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정복 사업에 친위대를 파견하여 전투에 참여하게 하는 한편, 친위대장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의 반란 음모 적발 공로를 치하하며 원로원을 통해 법무관 표창과 15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하사했고[18], 황후 메살리나와 그녀의 연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의 모반 혐의 처형에도 친위대를 동원했으나, 당시 친위대장 루키우스 루시우스 게타를 불신하여 신임하던 해방 노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에게 임시로 지휘권을 맡겨 사태를 수습했다[19].

68년, 제5대 황제 네로가 사망하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로마 내전이 발발했다. 친위대는 처음 갈바를 지지했으나, 곧 그의 경쟁자인 오토에게 매수되어 갈바를 살해했다. 내전의 최종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아들 티투스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하여 친위대를 직접 통제하고, 비밀경찰처럼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20].

티투스 사후 황제가 된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이상으로 친위대를 중용했다. 다키아 전쟁에는 친위대장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가 이끄는 친위대를 파견하고, 기사 계급인 푸스쿠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푸스쿠스는 타파에 전투에서 전사했고, 친위대를 포함한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군기까지 빼앗겼다.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했을 때 친위대장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도 연루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에게 충성하던 친위대원들에 의해 암살 관련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오현제 시대의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같은 히스파니아 출신인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했다. 아티아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동행했으며, 트라야누스가 원정지에서 사망하자 황후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공모하여 자신이 후견인을 맡고 있던 하드리아누스의 황제 계승을 도왔다는 설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즉위가 발표되자마자 아티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집정관 경력이 있는 유력 원로원 의원 4명을 처형했다. 이 사건은 하드리아누스의 지시였는지, 아티아누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코호트를 격파하고 해산시킨 후, 프라이토리아니 군단장의 역할은 순전히 행정적인 것으로 바뀌어 로마 교구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관할구)를 황제를 대신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4. 2. 규모와 구성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la)라는 명칭은 로마 공화정 시기 군 사령관이나 속주 총독의 본부 또는 막사를 의미하는 프라이토리움(praetorium)에서 유래했다. 로마 군단의 지휘관들은 자신의 호위를 위해 각 계급의 병사 중에서 정예병을 선발하는 관행이 있었으며, 이는 기원전 275년경 스키피오 가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호위 부대는 보병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점차 코호르스(대대) 규모로 커지면서 '프라이토르 부대'(cohors praetoriala)라고 불리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단순한 경호 부대를 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10군단 에퀘스트리스를 자신의 직속 정예 부대로 활용했듯이, 군단 규모의 강력한 부대로 운용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정예 부대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고 신변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프라이토리아니를 상설 부대로 창설했다. 그는 공화정 체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황제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중하게 군사력을 증강했다. 처음에는 1개 코호르스 당 500명으로 구성된 9개의 코호르스를 창설했으며, 점차 인원을 1,000명까지 늘렸다. 이 중 3개 코호르스는 로마 시에 주둔시켰고, 그중 1개 코호르스는 황궁을 직접 방어했다. 또한 서기 2년에는 기사 계급 중에서 프라이토리아니의 최고 지휘관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2명을 임명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프라이토리아니는 기병으로 지정된 에퀴타테la(기병) 투르마(부대)와 보병 코호르스로 구성되었다.[7] 로마 시민들 사이의 불안감을 줄이고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시 중심부에서는 갑옷 대신 토가를 착용했다. 이는 시민 복장과 구별되면서도 존경받는 로마 시민의 상징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도시에 강력한 군사력이 집중되는 위험을 경계하여 이러한 복장 규정을 시행하고 부대 배치를 분산시키기도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 이르러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이자 티베리우스의 총애를 받던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야누스는 서기 26년,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9개의 프라이토리아니 코호르스와 도시 코호르스를 로마 세르비우스 성벽 너머 에스퀼리노 언덕에 새로 건설된 거대한 병영인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통합시켰다. 이를 통해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정치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점차 커져갔다. 티베리우스는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의 군사 작전에도 프라이토리아니 코호르스를 파견하여 그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주었다.[11][12] 세력 확장을 경계한 티베리우스는 결국 나에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를 통해 세야누스를 숙청했지만, 프라이토리아니의 영향력은 이후 황제 계승에도 영향을 미쳤다. 41년 칼리굴라 암살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시도를 무산시키고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4][15]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막대한 보상을 지급하고, 브리타니아 원정[18]이나 메살리나 숙청[19] 등 주요 국정 운영에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프라이토리아니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시대별 프라이토리아니 규모 변화[8]
시대총 병력 (추정)코호르스 당 병력 (추정)
아우구스투스4,500 ~ 6,000명500명 (초기)
비텔리우스12,800명-
베스파시아누스7,200명800명
도미티아누스 ~ 코모두스/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초기8,000명-
코모두스/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후기15,000명1,500명 (20개 백인대 추정)



2세기 초까지 프라이토리아니의 약 89%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는 징병 대상이 확대되어, 로마 군단의 군단병뿐만 아니라 전투 경험이 풍부한 '다뉴브 군대'의 병사들도 포함하게 되었다. 세베루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로마에 주둔시킴으로써 프라이토리아니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프라이토리아니 코호르스는 보병 외에도 자체적인 기병 부대(Equitesla)를 보유했다. 이는 트라야누스 황제 때 창설된 별도의 친위 기병대인 Equites Singulares Augustila와는 구별된다.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는 보병으로 약 5년간 복무한 후 기병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된 백인대(켄투리아)에 이름을 올린 채, 각 30명으로 구성된 투르마la(분대) 단위로 활동했으며, 각 투르마는 옵티오 에퀴툼la(Optio equitum, 기병 옵티오)가 지휘했다. 대략 보병 2개 백인대 당 1개의 기병 투르마가 배속된 것으로 추정된다.[8] 이에 따라 코호르스 당 투르마의 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3개, 서기 100년에서 200년 사이에는 5개, 서기 200년 이후에는 10개로 증가했으며, 각 투르마는 벡실룸la(vexillum, 군기)을 상징으로 사용했다.

또한 스페쿨라토레스 아우구스티la(Speculatores Augusti)라는 특별한 기병 부대도 있었다. 이들은 로마 군단이나 보조 부대의 스페쿨라토레스la(정찰병, 첩보원)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했다. 총 300명(각 코호르트 당 30명) 규모로, 선임 백인대장인 트레케나리우스la(Trecenarius)의 지휘를 받았다. 뛰어난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황제의 비밀 작전, 체포, 투옥, 처형과 같은 민감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황제의 해외 원정 시 동행하는 역할도 맡았으나, 이 역할은 나중에 Equites Singulares Augustila에게 넘어갔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만찬 시 이들을 곁에 둘 정도로 신뢰했다. 갈바, 오토,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는 황제의 측근 경호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이들은 갈바에 의해 해산된 황실 게르만 근위대를 대체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후, 후임 네르바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여 당시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이었던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으며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후, 도미티아누스에게 충성했던 스페쿨라토레스la를 대신하여 자신의 총독 시절 호위대를 모델로 한 Equites Singulares Augustila를 창설하여 측근 경호대로 삼았다. 기존의 스페쿨라토레스la 약 300명은 일반 프라이토리아니 코호르스로 재배치되었다.[7] 스페쿨라토레스la는 스페쿨라토리아 칼리가la(speculatoria caliga)라고 불리는 특별한 군화를 신어 구별되었으며, 제대 시에는 청동으로 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그들은 자체적인 기마 훈련 교관(exercitatoresla)도 두었다.[8]

4. 3. 복무 조건



프라이토리아니는 원래 이탈리아 중부(에트루리아, 움브리아, 타키투스에 따르면 라티움)에서 주로 모집되었다.[9] 신병의 나이는 15세에서 32세 사이로, 18세에서 23세 사이였던 군단 신병보다 범위가 넓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서기 2세기 초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혁 이전까지 프라이토리아니는 이탈리아, 스페인, 마케도니아, 노리쿰(현재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 황제 치하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 경비대, 도시 코호트, 그리고 여러 군단에서 병력을 충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193년, 페르티낙스 황제를 암살한 기존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시키고 자신의 다뉴브 군단 병사들로 교체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조치 이후, 군단에서 병력을 선발하는 방식이 3세기에는 일반화되었다. 이때부터 프라이토리아니는 군단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들(주로 일리리아 출신)로 구성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이탈리아인처럼 사회적으로 특권적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실력 위주의 엘리트 병사 집단으로 성격이 변모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새로 창설되어 이탈리아에 주둔한 Legio II Parthicala의 주요 모집 대상이 되었다.

근위대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좋은 신체 조건과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야 했으며, 존경받는 가문 출신이어야 했다. 또한 사회 유력자들의 추천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선발 과정을 통과하면 Probatusla로 인정받아 코호트(대대) 내의 세기에 Milesla(병사)로 배치되었다.

입대 후 승진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계급설명승진 조건 (예시)
Milesla병사기본 복무
Immunisla면제병 (병장급)입대 2년 후, 상급자의 인정을 받으면 승진. 일상 잡무 면제, 총사령부나 기술직 근무 가능.
Principalisla하사관급Immunisla에서 2년 후 승진 가능. Tesserariusla(전령), Optiola(부백인대장), Signiferla(기수) 등의 직책 수행. 이중 급여 수령. 문해력은 부족하나 계산 능력이 뛰어나면 행정직으로 배치 가능.
Evocati Augustila황제 직속 예비역복무 중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황제가 직접 임명. 기술 행정직, 교관, 군단 세기로 전출 등 경력 연장 가능.
근위대 백인대장장교Principalisla 중 소수가 도달 가능. 근위대 복무의 정점. 추가 승진을 원하면 군단으로 전출 필요.



근위대 코호트를 지휘하는 군사 호민관(Tribuni Militum)은 기사 계급 출신이었다. 이들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임명되었다. 첫째는 근위대에서 병사로 시작해 백인대장까지 승진한 후, 군단에서 상위 백인대장과 Primus pilusla(군단 최고 선임 백인대장)를 거쳐 로마로 돌아와 비질레스 호민관, 도시 코호트 호민관을 역임한 뒤 근위대 호민관이 되는 경로였다. 둘째는 군단에서 복무하며 Primus pilusla 지위에 오른 뒤 로마로 와서 근위대 호민관이 되는 경우였다.[8][10] 어느 경우든 근위대 호민관은 풍부한 군사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었다. 이들은 로마에서 1년간 복무한 뒤 퇴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부는 두 번째 Primus pilusla 임기를 거쳐 기사 계급의 고위직으로 진출하거나 근위대장이 되기도 했다.[8][10]

근위대의 최고 지휘관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는 대부분 태생부터 기사 계급인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2년에 기사 계급 중에서 2명의 근위대장을 임명했다. 초기에는 이집트 총독 바로 다음가는 서열이었으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그의 아들 티투스가 근위대장이었다) 시대부터는 로마 제국 내 기사 계급 관직 중 최고 서열로 격상되었다.

4. 4. 장비

2세기경 표준 로마 무기를 든 프라이토리아니 병사


로마부조, 프라이토리아니, 서기 50년경


프라이토리아니는 모든 군단병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장비를 갖추고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경호, 호위 또는 예비 군사력으로서 각 기능에 적합한 장비를 갖추었다.

무거운 보병 전투 대형(삼중 대형 시스템)을 위해, 그들은 헬멧, 갑옷(로리카 세그멘타타, 로리카 하마타, 로리카 스쿼마타 - 특히 2, 3세기에), 튼튼하고 화려한 방패(스쿠툼), 무거운 투창(필룸)을 장착했으며, 나중에는 긴 창과 가벼운 투창(하스타, 란체아)까지 갖추었다.

프라이토리아니의 헬멧에는 금속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높은 갈레아가 포함되었다. 방패는 군단이 때때로 사용하던 일반적인 직사각형 모양에 비해 타원형이었고 더 튼튼했다. 각 군단은 자체 문장을 스쿠툼 (방패)에 표시했으며 프라이토리아니는 방패에 추가적인 휘장을 포함한 유일한 부대였을 것이다. 각 코호트에는 자체 버전의 프라이토리아니 휘장이 있었다. 프라이토리아니 부대는 사자 가죽 망토를 착용할 수 있었고 그들의 군기(색상)는 훈장으로 장식되어 병사들이 장거리 행진에서 휴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프라이토리아니의 군기에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포함되었다.

프라이토리아니 방패에는 날개와 번개가 포함되어 유피테르를 언급했으며, 또한 독특하게 전갈, 별 및 초승달을 포함했다.

호위를 위해 타원형 방패와 랜스가 스쿠툼과 필룸을 대체했다. 원칙적으로 도시 중심부인 로마에서의 임무는 군인에게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토가를 착용했다.

한편, Speculatores Augusti|스페쿨라토레스 아우구스티la는 speculatoria caliga|스페쿨라토리아 칼리가la라고 하는 특별한(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부츠 스타일로 구별되었으며, 제대 시 청동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마 훈련교관(exercitatores|엑세르키타토레스la)을 두었다.[8]

참조

[1] 웹사이트 8 Things You May Not Know About the Praetorian Guard https://www.history.[...] 2014-07-08
[2] 웹사이트 Roman Economy – Prices in Ancient Rome http://www.ancientco[...] Ancientcoins.bis 2007-06-13
[3] 웹사이트 8 Things You May Not Know About the Praetorian Guard https://www.history.[...] 2018-08-29
[4] 간행물 1997
[5] 문서
[6] 간행물 1997
[7] 서적 L'Armée Romaine 1989
[8] 서적 The Praetorian Guard Osprey Publishing 1994
[9] 문서
[10] 서적 Histoire générale de l'Empire romain Éditions du Seuil 1974
[11] 서적 タキトゥス『年代記』1.24,2.16
[12] 서적 タキトゥス『年代記』4.2
[13] 서적 カッシウス・ディオ『ローマの歴史』58.9-14
[14] 서적 スエトニウス『ローマ皇帝伝』カリグラ.56-59
[15] 서적 ヨセフス『ユダヤ古代誌』6.19.2-3
[16] 서적 ヨセフス『ユダヤ古代誌』6.19.4
[17] 서적 スエトニウス『ローマ皇帝伝』クラウディウス.10
[18] 서적 タキトゥス『年代記』11.1-4
[19] 서적 タキトゥス『年代記』11.33-38
[20] 서적 スエトニウス『ローマ皇帝伝』ティトゥ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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