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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누스 트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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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군 복무를 시작하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사후 친위대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과도한 세금 부과와 귀족 계급과의 갈등으로 인해 원로원의 반발을 샀다. 결국, 아프리카 속주의 반란과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등장으로 인해 아퀼레이아 포위전 중 친위대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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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누스 트락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흉상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관에 있는 흉상
로마자 표기Gaius Julius Verus Maximinus
전체 이름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칭호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 아우구스투스
출생기원후 173년경
출생지트라키아
사망기원후 238년 6월경 (약 65세)
사망 장소이탈리아 아퀼레이아
통치 정보
직위로마 황제
재위 기간기원후 235년 3월 - 238년 6월경
이전 통치자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후임 통치자푸피에누스발비누스
경쟁자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
가족 관계
배우자카에킬리아 파울리나
자녀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아버지미상 (미카일 가능성 있음)
어머니미상 (아바바일 가능성 있음)

2. 생애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목동 생활을 하다 군대에 입대하여 황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재위 기간에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남다른 체격과 힘 덕분에 황제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마인츠에서 친위대에게 살해당하자, 친위대는 막시미누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도 이를 승인했다. 236년, 막시미누스는 자신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238년 3월,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가 막시미누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원로원 또한 고르디아누스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며 막시미누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12일,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막시미누스를 지지하는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의 군대에 패배하여 목숨을 잃었다.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사망 이후, 원로원은 데키무스 카일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와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를 공동 황제로 옹립하였다. 푸피에누스는 막시미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나 북상했고, 막시미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로마로 진군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에 동조하는 도시들의 비협조로 인해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군 내부에서도 불만이 쌓여 통솔력을 잃어갔다. 결국 238년 5월 10일, 아퀼레이아를 포위하던 중 휘하 친위대의 반란으로 인해 막시미누스는 일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보내져 테베레 강에 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3]

2. 1. 배경

막시미누스는 최초의 사병 출신 황제였다.[8] 트라키아 출신으로 양치기를 하다 군대에 입대했다고 전해지는데, 힘이 장사여서 당시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8] 그의 가문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이우스 율리우스"라는 이름이 이를 시사한다.[8] 해방 노예와 새롭게 통합된 로마인들은 이전 주인의 이름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8]

헤로디안은 막시미누스가 트라코-로마인 출신이라고 기록했다.[11] 신뢰성이 높지 않은 ''아우구스타사''에 따르면, 그는 트라키아 또는 모에시아에서 고트족 아버지와 알란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12] 하지만 고트족이 훨씬 후대에 트라키아로 이주했고, 다뉴브 강 지역에 거주했다는 증거도 막시미누스 사후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아우구스타사''의 기록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역사가 로널드 사이엄은 "'고티아'라는 단어만으로도 아우구스타사에서 이 구절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리기에 충분하다"라고 언급하며, 헤로디안, 싱켈루스 등의 증거는 막시미누스가 모에시아에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고트족" 조상에 대한 언급은 트라키아 게타이족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후대 작가들은 게타이족과 고트족을 혼동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13] ''아우구스타사''에는 "그는 마치 자기들 중 하나인 것처럼 게타이에게 유별나게 사랑받았고" "거의 순수한 트라키아어를 말했다"는 구절이 나온다.[13]

하지만, 버나드 바흐라흐는 ''아우구스타사''가 막시미누스 시대에 사용되지 않던 "고티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록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14] ''아우구스타사''의 저자가 3세기의 자료를 참고하면서, 당시 용어를 자신의 시대에 맞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14] 따라서 막시미누스의 혈통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그의 출신 배경은 미천한 지방민이었고, 로마 원로원은 그를 야만인으로 여겼다. ''아우구스타사''에 따르면, 그는 목동이자 강도질의 지도자였으며, 이후 로마 제국 군대에 입대했는데, 이 때문에 역사학자 브렌트 쇼는 "다른 상황에서는 대부가 되었을" 사람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막시미누스는 군 경력을 통해 평범한 병사에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3~5세기의 다른 트라코-로마 황제들(리키니우스, 갈레리우스, 아우레올루스, 레오 1세 등)과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통치 기간 동안 군대에 입대했다.

2. 2. 군 경력

막시미누스는 최초로 사병 출신 황제가 되었다. 트라키아 출신으로 양치기 노릇을 하다가 입대했다고 하는데, 기운이 장사여서 당시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눈에 띄었다.[1] 트라키아에서 고트족 아버지와 알란족(사르마티아인의 일파로 유목 민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군대에 입대했다.[2]

235년, 마인츠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살해되자, 친위대(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로 선언하였고 원로원은 이를 추인했다.[3]

2. 3. 황제 즉위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재위기에 백인대장으로 있다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때는 라인강 주둔 군단의 신병 훈련 책임자로서 대대장이 되었다.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자 라인강 주둔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16]

235년 마인츠에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살해되자, 친위대(프라이토리아니)의 황제 선언을 받아 원로원이 이를 추인했다. 236년에는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17]

3. 통치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재위기에 백인대장을 지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 이후 라인강 주둔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18] 그는 도나우강라인강 근처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과 전쟁을 벌였으며, 이 지역에 가도 건설 사업을 추진하여 수많은 이정표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막시미누스는 군대의 급여를 두 배로 인상했지만, 이는 증세를 초래했고, 징세인들이 폭력과 부정한 수단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 로마 지배층과 시민들의 불화를 야기했다.[30][31] 또한 기독교를 국가에 비협조적이라고 여겨 탄압하여, 폰티아누스와 안테루스 등 두 명의 로마 교황이 그의 치세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30][31]

238년, 제국의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봉기하여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했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토벌군에 의해 사망하자, 트락스는 원로원을 응징하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어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지만, 도시의 완강한 저항과 부하들의 불만으로 인해 살해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군인 출신으로 북방 야만족 토벌에 공을 세워 로마의 안정에 기여했으나, 거친 성격과 원로원에 대한 증오로 인해 파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치세는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후 로마는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3. 1. 게르만족과의 전쟁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도나우강·라인강 근처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과 싸웠다. 이 지방에서 가도 건설 사업을 많이 벌여 이곳의 수많은 이정표에는 아직도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18] 막시미누스는 아그리 데쿠마테스의 늪지대에서 알레마니족을 상대로 첫 번째 원정을 벌여, 로마군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승리 후 ''Germanicus Maximus''라는 칭호를 얻었다.[19][20] 막시미누스는 베저 강 너머 게르만 부족을 격파한 하르츠호른 전투에서 게르마니아 깊숙이 두 번째 원정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한동안 게르만 국경을 확보한 후 막시미누스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 겨울 야영지를 설치했고, 그 보급 기지에서 235~236년 겨울 동안 다키아인과 사르마티아인과 싸웠다.

3. 2. 사회, 경제적 정책

막시미누스는 군대의 급여를 두 배로 인상했는데,[30] 이는 끊임없는 전쟁과 함께 더 높은 세금을 필요로 했다. 세금 징수원들은 폭력적인 방법과 불법 몰수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통치 계급을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더욱 소외시켰다.[31]

초기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는 막시미누스의 전임자인 알렉산더의 황실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에우세비우스는 전임자의 가정을 미워한 막시미누스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다.[30][31]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235년의 박해는 로마의 히폴리투스와 교황 폰티아누스를 유배로 보냈지만, 다른 증거는 235년의 박해가 황제의 지시하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발생한 지방에서 지역적으로 일어났음을 시사한다.[32]

막시미누스는 로마의 귀족 계급을 증오하여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없었다. 실제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지지자들로부터 두 건의 음모가 꾸며졌으며, 막시미누스는 이것들을 진압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한 것에 반해, 막시미누스는 기독교인을 국가에 비협조적이라고 여겨 탄압했다. 두 명의 로마 교황, 폰티아누스와 안테루스가 그의 치세 하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3. 3. 원로원과의 갈등

막시미누스는 알렉산데르의 측근들을 제거하면서 통치를 시작했다.[16] 그의 의심은 정당했을 수도 있는데, 막시미누스에 대한 두 차례의 음모가 좌절되었다.[16] 첫 번째 음모는 라인강을 건너는 원정 중에 발생했는데,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들의 지원을 받은 장교 그룹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파괴하여 막시미누스를 적대적인 영토에 고립시키려 했다.[16] 그들은 이후 원로원 의원 마그누스를 황제로 선출할 계획이었지만, 음모가 발각되어 공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두 번째 음모는 알렉산더에게 충성했던 메소포타미아 궁수들이 연루되었다. 그들은 콰르티누스를 옹립할 계획이었지만, 그들의 지도자 마케도가 입장을 바꿔 콰르티누스를 살해했고, 이로 인해 마케도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17]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순수한 군인이었으며, 북방 야만족(고트족 등) 토벌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려 북방 방어선의 유지를 통해 로마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다. 한편, 그의 거칠고 무지한 서간 등이 상류 계급을 자부하는 원로원의 멸시와 증오를 사 파멸했다고 전해진다.

막시미누스는 로마의 귀족 계급을 증오하여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없었다. 실제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지지자들로부터 2개의 음모가 꾸며졌으며, 막시미누스는 이것들을 진압했다.

238년 제국의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반 막시미누스 봉기를 일으켜 세리를 죽이고 나이 많은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로마 원로원은 그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하였다. 한편 황제를 자칭했던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토벌군의 기습으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그 충격으로 자결한 상태였다. 트락스는 이러한 원로원을 응징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와 동북 이탈리아에 있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3. 4. 종교 정책

초기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는 막시미누스의 전임자인 알렉산더의 황실에 기독교인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에우세비우스는 전임자를 미워한 막시미누스가 교회 지도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한다.[30][31]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235년의 이 박해로 로마의 히폴리투스와 교황 폰티아누스가 유배되었지만, 다른 증거는 이 박해가 황제의 지시가 아니라 발생 지역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났음을 시사한다.[32]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기독교에 비교적 관대했지만, 막시미누스는 기독교인을 국가에 비협조적이라고 여겨 탄압했다. 폰티아누스와 안테루스 등 두 명의 로마 교황이 그의 치세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4. 몰락

238년 제국의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반(反) 막시미누스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세리를 죽이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선포하였다.[22]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하였다.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을 응징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와 동북 이탈리아에 있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지만, 도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몇 달 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사이,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27] 이후 푸피에누스발비누스를 거쳐, 고르디아누스의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막시미누스는 군인 출신으로, 북방 야만족(고트족 등) 토벌에서 큰 공을 세워 로마의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거친 성격과 원로원에 대한 증오는 결국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 특히, 북방 야만족에 대한 방어선 구축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훗날 3세기의 위기를 맞게 된다.

막시미누스는 자신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되는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지지자들의 두 차례 음모를 진압했으며, 기독교를 국가에 비협조적이라고 여겨 탄압하여 폰티아누스와 안테루스 두 교황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군대 급여를 두 배로 인상했지만, 이는 증세로 이어져 징세인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만들었다. 이는 로마 지배층과 시민들의 불화를 초래했다.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이자 3세기의 위기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치세부터 시작되었으며, 로마는 이후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4. 1.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반란

238년 제국의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막시미누스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세리를 죽이고 나이 많은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선포하였다.[22]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하였다. 한편 황제를 자칭했던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토벌군의 기습으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그 충격으로 자결하였다.[24]

4. 2.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옹립

238년 초, 아프리카 속주에서 토지 소유주들이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세리를 죽이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추대했다.[22] 로마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지지하며 막시미누스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했다.[23]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의 공격으로 패배했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 고르디아누스 1세는 자결했다.[24]

이에 원로원은 푸피에누스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옹립했다.[25]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이 결정에 반발하여 항의했고, 고르디아누스 3세를 옹호하는 파벌과 시가전까지 벌어졌다. 결국 공동 황제들은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로 임명하여 타협했다.[26]

4. 3. 죽음

238년 제국의 세금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프리카 속주의 지주들이 반(反) 막시미누스 봉기를 일으켜 세리를 죽이고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선포하였다.[27]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폐위하고 공적(公敵)으로 선포하였다. 한편 황제를 자칭했던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토벌군의 기습으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하고 고르디아누스 1세는 그 충격으로 자결하였다. 트락스는 이러한 원로원을 응징하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와 동북 이탈리아에 있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27]

그러나 아퀼레이아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몇 달 동안 교착상태에 빠졌고, 그 사이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27] 이후 푸피에누스발비누스가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고르디아누스의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다음 후계자가 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로마로 진격했지만,[27] 아퀼레이아는 그에게 문을 닫았다. 그의 군대는 예상치 못한 도시 포위전 동안 불만을 품게 되었고, 기아에 시달렸다.[28] 238년 5월 또는 6월경, 그의 진영에 있던 II ''파르티카'' 군인들이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주요 대신들을 암살했다.

이후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서로를 불신했고, 결국 둘 다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제가 되었다. 막시미누스는 로마에 도달하지 못하여 통치 기간 동안 수도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29]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에 동조한 도시들의 비협조로 인한 보급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군대 통솔에 어려움을 겪었고, 군단 내부에서도 불만이 생겨났다. 5월 10일, 아퀼레이아를 포위하던 막시미누스는 친위대의 반란으로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막시미누스의 유해는 로마로 보내져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5. 외모



신뢰할 수 없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부터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고대 자료들은 막시미누스를 동시대인보다 훨씬 더 큰 체격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36][37] 게다가 고대 이미지에서도 그는 두드러진 눈썹, 코, 턱을 가진 남자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말단비대증의 증상이다.[38]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매우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으며, 코르두스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의 키가 8피트 1인치(약 2.4미터)라고 말했다."라고 한다.[39] 그러나 이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나오는 많은 과장된 묘사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막시미누스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그는 어쨌든 매우 무시무시한 외모와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훈련을 잘 받은 그리스 운동선수나 야만족 전사 엘리트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라고 언급했다.[40]

일부 역사가들은 막시미누스의 비정상적인 키에 대한 이야기(과도한 발한과 초인적인 힘과 같은 그의 외모에 대한 다른 정보와 마찬가지로)를 그를 의도적으로 야만족 강도의 양식화된 화신으로 만들거나,[41] 군인의 이미지에 대한 민간인들의 감탄과 혐오를 강조하는 대중적인 전형적인 속성으로 해석한다.[42]

6. 평가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고트족 등 북방 야만족을 토벌하여 로마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거칠고 무지한 모습은 원로원의 멸시와 증오를 샀고, 이는 결국 그의 파멸로 이어졌다. 로마가 북방 야만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로마 스스로가 사령관의 발목을 잡은 것은 훗날 3세기의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막시미누스는 로마 귀족 계급을 증오하여 자신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되는 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실제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지지자들이 두 차례 음모를 꾸몄고, 막시미누스는 이를 진압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한 것과 달리, 막시미누스는 기독교인들을 국가에 비협조적이라고 여겨 탄압했다. 그의 치세에 두 명의 로마 교황인 폰티아누스와 안테루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막시미누스는 군대에 대한 급여를 두 배로 인상했지만, 이는 증세를 초래했고, 징세인들이 폭력과 부정한 수단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하여 로마 지배층과 시민들의 불화를 야기했다.

군인 황제 시대와 3세기의 위기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치세부터 시작되었으며, 로마는 이후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238년의 내전은 고르디아누스 3세가 황제로 선언되면서 종식되었지만, 6년 후인 244년에 고르디아누스 3세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284년에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카리누스를 타도할 때까지 황제가 난립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로마 제국사』에 따르면,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동시대인보다 상당히 컸으며[43][44], 이마, 코, 턱이 매우 두드러져 말단 비대증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아내의 팔찌를 반지로 착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45]. 로마 황제 열전에는 막시미누스의 신장이 약 2.6m였다는 기록도 있지만[46],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47].

헤로디아누스는 막시미누스에 대해 "끔찍한 풍모의 거대한 남자였기 때문에, 잘 훈련된 그리스인 운동선수나 야만족의 엘리트 전사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48].

일부 역사가는 막시미누스의 비정상적인 신장에 관한 전설(초인적인 힘 등)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이며, 그를 야만적인 무법자로 간주하고[49], 병사의 이미지가 일반 시민에게 불러일으킨 칭찬과 혐오를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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