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센티우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막센티우스는 로마 황제(306년 ~ 312년)로, 황제 막시미아누스와 에우트로피아의 아들이다. 그는 306년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했으나, 갈레리우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막센티우스는 기독교 신앙을 용인하고, 건축 사업을 추진했지만, 콘스탄티누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폭군으로 묘사하며 그의 업적을 가렸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막센티우스의 친 기독교 정책이 재조명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12년 사망 -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위기 이후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 행정, 경제 개혁을 단행하고 사두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등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나, 최고가격령 실패와 기독교 박해라는 어두운 면도 남겼으며,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전환점이자 후대 제국에 영향을 미쳤다. - 312년 사망 - 안티오케이아의 루키아노스
안티오케이아의 루키아노스는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순교자로, 안티오크에서 장로로 활동하며 신학교를 설립하고 성경 개정 작업에 참여했지만, 신학적 논쟁으로 추방과 복권을 겪은 후 박해 시대에 순교하여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 살해된 4세기 군주 - 마그누스 막시무스
4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군에 의해 추대되어 갈리아를 정복하고 서로마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이탈리아 지배를 시도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으며, 이단 박해와 브리튼 및 브르타뉴 지역 역사, 웨일스 전설과 관련된 영웅적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 살해된 4세기 군주 - 그라티아누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로 공동 황제에 임명되어 제국을 공동 통치하며 라인 강 방어, 고트족 침입 대응,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동방 황제 임명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으로 암살당한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막센티우스 | |
---|---|
기본 정보 | |
![]() | |
군주 칭호 | 로마 황제 (이탈리아) |
재위 기간 | 306년 10월 28일 – 312년 10월 28일 |
선임자 | 세베루스 2세 |
후임자 | 콘스탄티누스 1세 |
섭정 | 세베루스 2세 (306–307) 갈레리우스 (동방, 306–311) 막시미아누스 (306–308) 콘스탄티누스 1세 (306–312) 리키니우스 (308–312) 막시미누스 2세 (동방, 310–12) |
출생일 | 기원후 278년경 |
사망일 | 312년 10월 28일 (약 29세) |
사망 장소 | 로마 |
배우자 | 발레리아 막시밀라 |
자녀 | 발레리우스 로물루스, 아들 1명 |
전체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막센티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 |
제왕 이름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 아우구스투스 |
아버지 | 막시미아누스 |
어머니 | 에우트로피아 |
2. 초기 생애와 가족
막센티우스는 황제 막시미아누스와 시리아 출신 아내 에우트로피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78년경으로 추정된다.[3] 아버지 막시미아누스가 285년 황제가 되면서, 막센티우스는 황태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군사적 또는 행정적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갈레리우스의 딸 발레리아 막시밀라와 결혼하여, 발레리우스 로물루스(ca. 295 – 309)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을 두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새로운 사두정치에서 제외되었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자가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미워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막센티우스를 계승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약 1.61km 떨어진 저택으로 은퇴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가 황제로 즉위한 후, 갈레리우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사두정치에 받아들여졌다. 이는 막센티우스가 즉위하는 선례가 되었다.
3. 즉위 과정
로마에서는 황제가 로마 시민들에게도 인두세를 부과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에 반발한 로마 주둔군 장교들은 막센티우스에게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황제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막센티우스는 이 요청을 수락하고 수도 주둔군에 기부를 약속한 후, 306년 10월 28일 황제로 즉위했다.[1]
루카니아에서 은퇴 생활 중이던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에게도 공모 요청이 갔으나, 그는 복위를 거절했다.[1]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 중부 이남, 코르시카 섬, 사르데냐, 시칠리아, 아프리카 속주에서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탈리아 북부는 밀라노에 있는 서방 정제 세베루스가 통제하고 있었다.[1]
초기에 막센티우스는 정제 갈레리우스에게 정식으로 지위를 승인받기를 기대하며 "프린켑스 인빅투스"(무패의 제1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이를 공인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를 따라 황제를 칭하는 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군단과 영토를 확고하게 지배했지만, 막센티우스는 소수의 군단만 지휘할 수 있었기에 사두정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다섯 번째 황제가 될 상황이었다. 갈레리우스는 307년 초 세베루스를 로마로 보내 막센티우스를 진압하려 했다.[1]
세베루스의 군대는 대부분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 휘하에서 수년간 전쟁을 경험한 병사들이었고, 막시미아누스는 과거에 거액을 병사들에게 분배했었다. 세베루스 군이 로마에 도착하자 군대의 대부분이 막센티우스 편으로 돌아섰다. 막시미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와 아들을 지원하며 다시 제위에 오르겠다고 선언하자, 세베루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라벤나로 철수했다. 그는 생명의 안전을 약속받고 막시미아누스에게 항복했다.[1]
세베루스를 물리친 후, 막센티우스는 알프스 산맥과 이스트라 반도까지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세베루스 사후 공석이 된 정제의 지위를 칭하게 되었다.[1]
4. 황제 재위
307년 여름, 막센티우스는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나, 갈레리우스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막센티우스는 갈레리우스와 협상하는 동시에, 세베루스에게 했던 것처럼 돈과 막시미아누스의 권위를 이용하여 갈레리우스 군대의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를 약탈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세베루스는 막센티우스에게 살해당했는데, 정확한 정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갈레리우스의 침략 실패 이후,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확고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307년부터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그해 여름,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로 가서 콘스탄티누스와 자신의 딸 파우스타를 결혼시키고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막센티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308년 4월경, 막시미아누스는 로마에서 아들을 폐위시키려 했으나, 군대가 막센티우스를 지지하여 실패하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도망쳐야 했다. 같은 해 가을 카르눈툼 회의에서 막센티우스는 다시 한번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고, 리키니우스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임무를 맡은 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되었다. 308년 말,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가 카르타고에서 황제로 추대되면서 아프리카 속주가 막센티우스의 통치에서 이탈했다. 아프리카는 로마의 식량 공급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는 막센티우스에게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thumb
309년, 막센티우스의 장남 발레리우스 로물루스가 1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아피아 가도의 막센티우스의 빌라에 있는 영묘에 안치되었다. 근처에 막센티우스는 막센티우스 서커스를 건설했다. 310년 또는 311년에 막시미아누스가 사망한 후, 콘스탄티누스와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막센티우스는 막시미누스와 동맹을 맺어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동맹에 대항했다. 그는 라에티아 속주를 확보하여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분할하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가 먼저 행동하여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310년, 막센티우스는 이스트리아를 리키니우스에게 잃었지만, 리키니우스는 작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311년 중반까지 갈레리우스는 병으로 황실 정치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4][5] 갈레리우스의 죽음은 사두정치의 안정을 흔들었다.[6] 이 소식을 들은 막시미누스는 리키니우스에 대항하여 동원했고, 평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만나기 전에 소아시아를 점령했다.[7] 한편, 막센티우스는 북부 이탈리아를 요새화하고, 프라이토리아 총독 루피우스 볼루시아누스의 지휘 하에 소규모 군대를 아프리카로 보내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를 격파하고 처형했다. 막센티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지지자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많은 양의 곡물을 로마로 가져왔다. 또한 교황 에우세비우스를 선출하여 이탈리아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지지를 강화했다.[8]
막센티우스에 대한 초기 지지는 점차 약화되어, 312년에는 간신히 용인되는 인물이었다.[9][10] 제국의 수입이 줄어들자, 막센티우스는 군대와 로마의 건축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다시 과세를 부과해야 했다.[11]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인해 이탈리아 교회는 배교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보다 자신들에게 더 동정적이라고 생각했다.[12]
311년 여름,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아버지의 "살인"을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13]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가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는 것을 막기 위해,[14] 311년에서 312년 사이의 겨울에 자신의 여동생 콘스탄티아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다. 막시미누스 다자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동맹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로마에 대사를 보내 막센티우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정치적 인정을 제안했다.[15] 이로써 막시미누스와 막센티우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두 동맹이 대립하게 되었고, 황제들은 전쟁을 준비했다.[16]
막센티우스의 통치 방식은 자료 부족과 콘스탄티누스의 선전으로 인해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막센티우스의 군사력은 초기에는 프라이토리아니 잔여 병력, 황제 기병 수비대, 로마 도병 등 소규모 병력이었으나,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와의 전투에서 이반 병사를 흡수하고, 아프리카 재정복 시 국경 주둔 병력 일부를 이탈리아로 이동시켜 증강했다. 그러나 병력 규모는 크지 않았고, 알프스 산맥 뒤라는 지리적 이점과 로마의 요새로서의 수비력에 의존해야 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 막센티우스 경기장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통해 수도로서의 특권을 부여하고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의 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로마에도 세금을 부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 반란으로 로마로의 곡물 공급이 중단되었을 때, 수도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폭동으로 약 6,000명이 사망했다.
원로원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았지만, 막센티우스가 의원들에게 기부를 강요하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험악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막센티우스 사후, 고위 의원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도 출세했다.
4. 1. 종교 정책
막센티우스는 고대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교를 신봉했고, 부친 막시미아누스 황제와 관련된 마르스 신을 특히 숭배했다. 한편, 영토 내에서의 기독교 신앙은 용인했다. 이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여파가 남아 있었고, 교회 내에서 교황마르켈루스 1세와 교황 에우세비우스가 대립하고 있었다.
5. 콘스탄티누스와의 전쟁
막센티우스는 리키니우스가 동쪽에서 공격할 것을 예상하여 베로나에 군대를 배치했다.[17]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보다 병력이 적었다. 막센티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철수한 병력, 친위대, 황실 기병대, 세베루스에게서 빼앗은 병력을 합쳐 약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2만 5천에서 4만 명 정도만 동원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병력 대부분은 라인 전선에서 철수할 수 없었다.[18] 그럼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자문관, 장군, 대중의 예상과 달리 막센티우스를 먼저 공격했다.[14]
312년 늦봄, 콘스탄티누스는 군대의 4분의 1(약 4만 명 미만)을 이끌고 코티안 알프스의 몽세니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요새화된 도시 세구시움(수사, 이탈리아)을 점령하고 약탈을 금지한 뒤 북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토리노 서쪽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중무장한 막센티우스 기병대(''클리바나리'' 또는 ''카타프락토이'')와 마주쳤다. 토리노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기병대로 막센티우스 기병대의 측면을 공격하여 쇠곤봉으로 쳐부수었다. 많은 막센티우스 기병이 낙마하고 무력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보병에게 막센티우스 보병을 공격하게 하여 승리했다. 토리노는 막센티우스 군대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문을 열었다. 다른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도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사절단을 보냈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환영을 받고 312년 여름 중반까지 머물렀다.
이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5. 1. 밀비우스 다리 전투

막센티우스는 이전의 세베루스와 갈레리우스에게 했던 것처럼, 방어가 잘 된 로마 시에 머물면서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포위 전략을 쓸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불확실한 이유로 이 계획을 포기하고,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근처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전투를 제안했다. 고대 자료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미신이나 (콘스탄티누스 지지적이라면) 신의 섭리 탓으로 돌린다. 막센티우스는 전투 전에 점쟁이와 상의했는데, 이는 관례였으며, 특히 전투일이 그의 즉위일인 ''dies imperii'', 즉 왕위에 오른 날(306년 10월 28일)이었기에 유리한 징조를 보고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를 동기부여했을 다른 요인들은 추측의 영역이다.[30]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티베르 강 건너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로마 시 북쪽, 성벽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만났다. 특히 락탄티우스와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를 비롯한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계시된 라바룸 아래에서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가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격파했고, 그들은 티베르 강으로 후퇴했으며, 도망치는 군대가 강을 건너려는 혼란 속에서 막센티우스는 물에 빠져 익사했다. 그의 시신은 다음 날 발견되어 도시를 행진했고, 나중에 그가 확실히 죽었다는 증거로 아프리카로 보내졌다. 막센티우스의 두 고아 자녀를 포함한 그의 가족 전체도 처형되었다.[30]
6. 사후
2021년과 2022년 사이에 수행된 연구를 통해 막센티우스의 서신 필사본 전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서신들은 친(親) 콘스탄티누스적 성인전적 서사(성 카타리나의 수난기)에 맞춰 텍스트를 수정하기 위한 수많은 삽입과 위조 시도를 겪었다.[25] 로마법, 법률 파피루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원로원 의결과 박해 칙령과 같은 주요 자료를 비교하여 원본 텍스트를 통합적으로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유세비우스, 밀레비의 옵타투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친 기독교 정책에 대해 보고한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25] 베네치아의 마르차나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 새로운 문서에 따르면, 막센티우스는 밀라노 칙령보다 최소 5년 앞서 자신의 영토에서 대 박해를 종식시켰다.[25]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303년부터 311년까지 제국의 모든 영토에서 시행되었으며, 이 시점에서는 막센티우스의 관할 지역을 제외했는데, 막센티우스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공식적인 박해를 겪었다.[25]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311년에 권력을 잡았으며, 막센티우스는 그곳에서 익사했다.[25]
막센티우스는 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나, 그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다마나티오 메모리아에''로 인해 그의 업적은 가려졌다. 로마 포룸의 거대한 바실리카와 같이 로마에 있는 많은 건물들이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와 관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막센티우스가 건설했다.[26]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한 후, 막센티우스는 잔혹하고 무능한 폭군이었다는 중상을 계획적으로 퍼뜨렸다.[26] 락탄티우스의 자료와 같은 초기 역사 자료에서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에 막센티우스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선전의 영향으로 후대에는 막센티우스를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는 전통이 생겨났다.[26] 이러한 이미지가 역사 자료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에는 화폐나 비문 등 문학 자료 이외의 자료 조사를 통한 중립적인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26]
7. 유산
2021년과 2022년 사이에 수행된 연구를 통해 막센티우스의 서신 필사본 전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서신들은 친(親) 콘스탄티누스적 성인전적 서사(성 카타리나의 수난기)에 맞춰 텍스트를 수정하기 위한 수많은 삽입과 위조 시도를 겪었다.[25] 로마법, 법률 파피루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원로원 의결과 박해 칙령과 같은 주요 자료를 비교하여 원본 텍스트를 통합적으로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유세비우스, 밀레비의 옵타투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친 기독교 정책에 대해 보고한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베네치아의 마르차나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 새로운 문서에 따르면, 막센티우스는 밀라노 칙령보다 최소 5년 앞서 자신의 영토에서 대 박해를 종식시켰다.
- 기독교를 팍스 데오룸(Pax Deorum)에서 "새로운 신"을 환영하는 합법적인 종교로 만들었다(서신 1).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칙령을 법으로 폐지했다(서신 1).
- 기독교 박해를 지속하는 자에게 심각한 처벌을 위협했다(서신 1).
- 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에 대해 분노하며 로마 교회와의 전략적 동맹을 재확인했다(서신 2).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303년부터 311년까지 제국의 모든 영토에서 시행되었으며, 이 시점에서는 막센티우스의 관할 지역을 제외했는데, 막센티우스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마지막, 가장 크고, 가장 피비린내 나는 공식적인 박해를 겪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후 311년에 권력을 잡았으며, 막센티우스는 그곳에서 익사했다.[25]
막센티우스는 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다마나티오 메모리아에''로 인해 그의 업적은 가려졌다. 로마 포룸의 거대한 바실리카와 같이 로마에 있는 많은 건물들이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와 관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막센티우스가 건설했다.[26]
2006년 12월,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은 팔라티노 언덕 근처의 신전 아래에서 발굴을 진행하여 나무 상자 안에 여러 유물을 발견했으며, 이를 막센티우스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는 황제의 레갈리아로 확인했다.[27] 린넨과 비단으로 싸인 이 상자 안의 유물에는 완전한 창 3개, 투창 4개, 기의 받침대로 보이는 것 1개, 유리와 옥수 구슬 3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정교한 솜씨로 보아 황제 자신이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푸른 녹색 구체를 든 꽃 모양의 홀이었다.[28]
이것들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황실 휘장으로, 지금까지는 동전과 부조 조각에 묘사된 것만 알려져 있었다. 이 발견을 한 고고학자 클레멘티나 파넬라는 "이 유물들은 특히 매우 정교한 홀을 볼 때 분명히 황제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만한 물건이 아니죠."라고 말했다. 파넬라는 이 휘장들이 막센티우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패한 후 황제의 지지자들이 황제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29] 유물들은 복원되었으며, 현재 로마 국립 박물관 팔라초 마시모 알레 테르메에서 임시 전시 중이다.
참조
[1]
웹사이트
LSA-896 (J. Lenaghan)
http://laststatues.c[...]
[2]
서적
New Empire
[3]
서적
Tête juvénile de Maxence (?)
https://www.villachi[...]
Musée d’Archéologie de Toulouse
2019
[4]
서적
Historia Ecclesiastica
[5]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6]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7]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8]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9]
서적
Reign of Constantine
[10]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1]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2]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3]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4]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5]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6]
서적
[17]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21]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22]
간행물
Panegyrici Latini
[23]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24]
서적
Constantine and Eusebius
[25]
간행물
https://revistas.um.[...]
2022
[26]
서적
Conservator Urbis Suae
Stockholm
1994
[27]
웹사이트
I segni del potere : realtà e immaginario della sovranità nella Roma imperiale
http://www.worldcat.[...]
2022-08-23
[28]
웹사이트
Scepter from Roman Emperor Exhibited
http://www.chnpress.[...]
2009-03-16
[29]
뉴스
The Times, online edition
https://www.timesonl[...]
The Times
[30]
웹사이트
Battle of Milvian Bridge|Roman history 〔312〕
https://www.britanni[...]
Britannica
2024-10-28
[31]
문서
이 바실리카는 나중에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