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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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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우스 3세는 서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황제로, 411년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412년에는 헤라클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서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갈리아와 이베리아를 안정시켰으며, 417년에는 바가우다이 봉기를 진압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기스터 밀리툼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호노리우스 황제로부터 세 번의 집정관 임명과 갈라 플라키디아와의 결혼을 통해 지위를 강화했다. 421년 호노리우스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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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3세
기본 정보
콘스탄티우스 3세의 집정관 쌍판화
콘스탄티우스 3세의 집정관 쌍판화
이름콘스탄티우스 3세
로마자 표기Constantius III
즉위명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아우구스투스
출생 이름콘스탄티우스
출생지나이수스, 모에시아
사망일421년 9월 2일
사망지라벤나, 이탈리아
배우자갈라 플라키디아
자녀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발렌티니아누스 3세
왕조테오도시우스 가문
통치
재위421년 2월 8일 – 421년 9월 2일 (with 호노리우스)
직책서로마 황제
기타
칭호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아우구스투스

2. 생애

콘스탄티우스는 모이시아 나이수스(오늘날 니슈)에서 태어났으며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명랑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411년, 마기스터 밀리툼(군사령관)에 임명되어 갈리아로 파견, 대립 황제 막시무스와 그의 장군 게론티우스를 격파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3세의 거점 아를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라벤나로 압송했다.

415년,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푸스를 보급 차단으로 갈리아에서 철수시켰고, 416년에는 황제 프리수스 아탈루스를 사로잡았다. 서고트족과의 평화 협상을 통해 410년 로마 약탈 때 납치된 호노리우스 황제의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를 돌려받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호노리우스에게서 집정관 직위(414년, 417년, 420년)와 갈라 플라키디아와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둘 사이에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태어났다.

421년 2월 8일, 호노리우스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준비했으나, 421년 9월 2일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콘스탄티우스는 모이시아 나이수스(오늘날 니슈, 세르비아)에서 일리리아계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1][2][3] 호노리우스 휘하에서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411년 ''마기스터 밀리툼''(군사령관)의 계급에 올랐다.[1]

콘스탄티우스 3세의 솔리두스

2. 2. 콘스탄티누스 3세 진압 (411년)

411년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의 명령을 받아 407년 브리타니아에서 황제를 자칭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누스 3세의 수도이자 거주지였던 아를로 향했다. 도착하자 그는 콘스탄티누스 3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장군 게론티우스의 군대를 격파한 후 도시를 포위했다.[5]

콘스탄티누스 3세는 항복을 거부하고, 북부 갈리아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던 그의 장군 에도비쿠스의 귀환을 기다렸다. 에도비쿠스가 아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콘스탄티우스에게 신속하게 패배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 3세는 라인강을 지키고 있던 그의 군대가 찬탈자 요비누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나머지 병력 대부분을 잃었고,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3세가 안전하게 성직자 직책으로 은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투옥시킨 후 411년 8월 또는 9월에 라벤나로 돌아오는 길에 참수했다.[5]

2. 3. 헤라클리아누스의 난 진압 (412-413년)

콘스탄티우스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412년에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공을 세운 콘스탄티우스와 마찬가지로 공을 세운 라이벌 장군 헤라클리아누스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헤라클리아누스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이탈리아로의 곡물 공급을 중단했다. 413년 3월 초, 이 반란 주동자는 호노리우스와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 근처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의 로마 군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5] 패배 후 헤라클리아누스는 도망쳤고, 체포되어 살해당했다.[5]

2. 4. 서고트족과의 전쟁 및 강화 (415-418년)

콘스탄티우스는 416년 이베리아 북부의 서고트족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여, 고트족을 봉쇄하고 기아 상태에 빠뜨려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곧 서고트족 왕 발리아는 로마에 항복하고, 갈라 플라키디아를 돌려주었으며, 로마가 반달족 등 다른 야만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대가로 식량 공급을 받기로 합의했다.[5] 갈라 플라키디아는 412년경 알라리크 1세에게 포로로 잡혀 아타울프와 강제 결혼했으나, 아타울프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호노리우스의 누이동생이다.

이러한 발전으로 콘스탄티우스는 417년 갈리아 북서부의 바가우다이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여러 부족 집단에 대한 원정을 계속하여 420년까지 이베리아와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5]

2. 5. 바가우다이 봉기 진압 (417년)

415년, 콘스탄티우스는 보급 차단으로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푸스를 갈리아에서 철수시켰고, 이듬해 416년에는 황제 프리수스 아탈루스를 사로잡았다. 서고트족과의 평화 협상에서는 410년 로마 약탈 때 납치되어 아타울푸스의 아내가 된 호노리우스 황제의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를 돌려받았다.[5]

2. 6. 공동 황제 즉위와 죽음 (421년)

이 시기에 장군들은 로마 황제, 특히 서로마 황제의 통치 지속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 콘스탄티우스는 ''마기스터 밀리툼''(군사령관)의 지위와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스틸리코에 필적할 만한 서로마 제국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이유로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고,[5] 414년 콘스탄스(Constans)와 함께, 417년 호노리우스와 함께, 그리고 420년 테오도시우스 2세와 함께 세 차례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콘스탄티우스의 충성심을 더욱 확보하기 위해 호노리우스는 417년 자신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와 콘스탄티우스의 약혼을 주선했다. 이후 421년 2월 8일,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를 자신의 공동 서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의 사촌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는 이에 분노하여 테오도시우스에 대한 원정을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콘스탄티우스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황제로서 7개월도 채 되지 않은 421년 9월 2일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반네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는 독살당했다. 그는 그 근거로 테오파네스를 인용하는데, 테오파네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노리우스 황제의 측근이었던 카스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 사후 육군 최고 사령관의 지위를 얻었는데, 그의 소행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사후 그의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 호노리우스는 423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통치했고, 콘스탄티우스의 어린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갈라 플라키디아를 섭정으로 삼아 그의 뒤를 이었다.

3. 성격

콘스탄티우스 3세는 명랑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연회에서 배우 흉내를 내어 분위기를 띄웠다고 한다.[4]

참조

[1] 서적 The Evolution of Man and Society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1971
[2] 서적 2021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21
[3] 서적 Count Marcellinus and His Chronicl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4] 서적 コンスタンティウス3世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10
[5] 서적 The Coins of the Two Eudoxias,Eudocia,Placidia, and Honoria and of Theodosius II,Marcian, and Leo I, Struck in Italy https://books.google[...]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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