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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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틸리코는 반달족 출신으로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 치하에서 두각을 나타내 외교 사절로 활약했으며, 황제의 조카딸 세레나와 결혼하여 황실과 인연을 맺었다. 서로마 제국 방위를 책임지는 고위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알라리크 1세의 침략을 막아냈으나, 호노리우스 황제의 측근 올림피우스의 모함으로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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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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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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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일자 | 408년 8월 22일 (추정 나이 ) |
사망 장소 | 라벤나 |
안장 장소 | 알려지지 않음, 아마도 스틸리코의 석관 |
직업 | 로마 제국의 군인 집정관 |
자녀 | 3명 |
군사 정보 | |
소속 | 서로마 제국 |
복무 기간 | 382년–408년 |
최종 계급 | Comes et magister utriusque militiae |
주요 참전 전투 | 프리기두스 전투 (394년) 고트 전쟁 (395년~398년) 길도닉 전쟁 (398년) 픽트 전쟁 (398년) 아스티 공방전 (402년) 폴렌티아 전투 (402년) 베로나 전투 (402년) 라다가이수스 전쟁 (405년~406년) |
정치 경력 | |
관직 | 집정관 (400년, 405년) |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스틸리코[8]는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와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50][9] 아버지의 구체적인 신분이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50] 이러한 출신 배경은 스틸리코에게 평생 동안 '반(半)야만인'이라는 정체성의 굴레를 씌웠고, 그의 정치적 입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로마 사회는 아버지가 로마인이면 자녀도 로마인으로 인정했지만, 아버지가 야만족 출신일 경우 자녀 역시 야만족으로 간주하며 차별하는 경향이 강했다.종교적으로는 그가 게르만족들처럼 아리우스파를 신봉했다는 기록이 있지만,[50] 제국 내 그의 높은 지위와 그의 후원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니케아 신조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했던 점을 고려할 때, 스틸리코 역시 니케아 신조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젊은 나이에 로마군에 입대한 스틸리코는 제국 동방을 통치하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휘하에서 복무하며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기 전 마지막으로 제국 전체를 통치한 황제였다. 383년 또는 384년,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을 받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파견되었다.[10] 그의 임무는 페르시아 왕 샤푸르 3세와 아르메니아 왕국의 분할 문제를 논의하는 평화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10] 아킬리세네 평화 조약으로 알려진 이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페르시아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복귀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딸이자 양녀인 세레나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궁정 시인이었던 클라우디아누스는 이 결혼이 스틸리코의 뛰어난 공적에 대한 포상이라고 기록했지만,[7] 실제 스틸리코는 사절단 내에서 고위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11] 따라서 황실 내부에서 세레나를 만나 교제했거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망한 젊은 장군을 황실과 연결시키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 결혼은 스틸리코의 출세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두 딸 마리아, 테르만티아가 태어났다.[11]
결혼 이후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호위대장으로 발탁되어 서고트족의 침입으로부터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후 ''코메스 사크리 스타불리''와 385년 ''코메스 도메스티코룸'' 등 주요 직책을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다. 392년 또는 393년에는 ''코메스 에트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케 밀리테''로 승진하여 트라키아 지역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12]
392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암살되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재통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스틸리코는 티마시우스와 함께 군대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되어[13] 프리기두스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는 훗날 스틸리코의 주요 경쟁자가 되는 서고트족의 지도자 알라리크도 로마의 동맹군으로 참전했다. 스틸리코는 이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며,[14]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방위를 책임질 만한 인물로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14] 클라우디아누스의 시는 이 전투에서 스틸리코의 역할을 강조하며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4]
프리기두스 전투 이후 스틸리코는 마기스테르 밀리툼(고위 군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기 직전에는 서로마 제국 전군을 통솔하는 최고 사령관(''코메스 에트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케 밀리테 프레젠탈리스'')이자 어린 아들 호노리우스 황제의 후견인으로 지명되었다.[15] 이는 사실상 스틸리코가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6]
스틸리코의 생애, 특히 404년 이전의 활동에 대한 주요 정보는 그를 후원했던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의 찬사에서 비롯된다.[7] 이 기록들은 스틸리코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404년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는 후대의 역사가 조시무스의 기록이 중요한데, 그는 스틸리코에게 적대적이었던 에우나피우스와 그를 지지했던 올림피오도로스의 상반된 기록을 함께 참고하여 다소 모순적인 서술을 남겼다. 또한 스틸리코는 유명한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던 심마쿠스와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2. 2. 로마군 총사령관
젊은 나이에 로마군에 입대하여 당시 제국 동부를 통치하던 테오도시우스 1세 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84년, 테오도시우스의 명령으로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아르메니아 왕국 분할에 관한 평화 교섭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10] 이 교섭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의 신임을 얻어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스틸리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조카딸인 세레나를 양녀로 삼아 그와 결혼시켰다. 이 결혼 이후 스틸리코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으며, 385년에는 황실 근위대 지휘관 격인 코메스 도메스티코룸(_comes domesticorum_)으로 승진했다.[11]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두 딸 마리아, 테르만티아가 태어났다.[11]392년 서방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혹은 암살)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찬탈자 에우게니우스를 상대로 한 군사 작전을 준비하며 스틸리코를 티마시우스와 함께 군대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했다.[13] 스틸리코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서고트족의 족장 알라리크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에우게니우스의 서방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방위를 맡길 만한 인물로 인정받아, 고위 군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 _magister militum_)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2]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에서 스틸리코의 공헌을 강조하며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4]
394년, 주군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서 로마를 잠시 통일한 후, 스틸리코는 제국 전체 보병과 기병을 총괄하는 최고 군사 직위인 로마군 총사령관(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케 밀리테, _magister utriusque militiae_)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 서쪽은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맡겨졌다. 테오도시우스는 임종 직전 스틸리코를 최고 사령관(코메스 에트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케 밀리테 프레젠탈리스, _Comes et Magister Utriusque Militiae Praesentalis_) 지위와 함께 어린 호노리우스 황제의 후견인으로 임명했다.[15][17]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모두 나이가 어리고 정무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스틸리코는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최고 실력자로서 제국 방위에 힘썼다. 그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후견인 역할도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 동로마에서는 루피누스가 실권을 장악하여 스틸리코의 경쟁자가 되었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398년 딸 마리아를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켰고, 마리아가 사망한 후에는 다른 딸 테르만티아를 다시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켰다.[18]
총사령관이자 후견인으로서 스틸리코의 첫 조치 중 하나는 라인강 국경 지대의 방어선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는 혹한기에 알프스를 넘어 바젤에서 바타비아까지 라인강을 따라 내려오며 수비대의 상황을 확인하고 게르만족의 움직임을 억제하여 국경 지역에 안정을 가져왔다. 이후 빠른 속도로 밀라노(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의 궁정으로 복귀했다.
395년, 프리기두스 전투에 참여했던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왕으로 즉위한 후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약탈을 시작했다. 스틸리코는 동서 로마군을 통합 지휘하여 메디올라눔(밀라노)을 위협하던 서고트족 군대를 격퇴했다. 이후 테살리아에서 알라리크를 공격하려 했으나, 동로마의 실권자 루피누스의 견제를 받았다. 루피누스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동로마 부대의 철수를 명령하게 했고, 이로 인해 스틸리코는 결정적인 전투 없이 물러나야 했다. 루피누스는 곧 암살되었지만, 동서 로마 간의 불신과 갈등은 계속되었다.
397년, 스틸리코는 다시 마케도니아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했지만, 알라리크는 산악 지대로 도주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같은 해, 그는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길도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라에티아에서 반달족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스틸리코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동로마의 새로운 실권자 에우트로피우스는 398년 알라리크를 동로마와 서로마의 경계 지역인 일리리쿰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알라리크를 이용하여 스틸리코를 견제하고, 그의 군사력을 서로마 제국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였다.
401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결국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수도 밀라노를 포위했다. 스틸리코는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 주둔하던 병력까지 동원하여 이에 맞섰고, 402년 폴렌티아 전투와 베로나 전투에서 알라리크에게 승리를 거두어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 이 승리로 스틸리코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지만, 서고트족의 위협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스틸리코의 통치와 업적에 대한 주요 정보는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의 찬사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스틸리코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7] 404년 이후의 기록은 주로 역사가 조시무스에 의존하는데, 그는 스틸리코에게 적대적이었던 에우나피우스와 그를 지지했던 올림피오도로스의 상반된 기록을 참조하여 다소 모순된 서술을 남겼다. 스틸리코는 또한 이교도 원로원 의원이었던 심마쿠스와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2. 3. 루피누스 살해와 동로마와의 갈등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서고트족은 새로운 왕 알라리크의 지휘 아래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제국 영토를 침범하여 트라키아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훈족의 침입으로 다른 지역에 묶여 있었고, 동방의 프라에토리아누스 재상 루피누스는 알라리크와 직접 협상을 시도했으나 콘스탄티노플의 관리들은 그가 고트족과 결탁했다고 의심했다.[19]이에 스틸리코는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승리한 군대를 이끌고 발칸반도로 진격하여 테살리아에서 서고트족 군대를 포위했다.[19]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에 따르면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격파할 수 있었으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측근이자 경쟁자였던 루피누스의 방해로 동로마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내고 일리리쿰 프라에토리우스 관구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아야 했다.[20] 스틸리코는 테살로니카에서 이 명령을 받고 "비겁한 그 바보(루피누스)의 짓이야!"라며 분노했다고 전해진다.[21]
루피누스는 스틸리코 휘하의 동로마 군단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근교 헤브도몬 궁정에서 황제와 함께 군대를 사열하던 중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51] 이 암살에 스틸리코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는 동방 병력을 이끈 인물이 스틸리코 휘하의 고트족 출신 장군 가이나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피누스가 죽은 뒤 그가 불법적으로 모은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었고, 가이나스마저 스틸리코를 배신하고 동로마 측에 가담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스틸리코가 루피누스 암살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의심한다.[22]
이 사건 이후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은 스틸리코를 '공화국의 적'으로 선포하고 동로마 영토 내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스틸리코는 개인적인 복수 외에는 얻은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르카디우스 측근들이 보낸 자객들에게 여러 차례 암살 위협을 받게 되었다.
397년, 스틸리코는 다시 알라리크를 격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향했다. 이오니아 해를 건너 코린토스 인근에 상륙한 스틸리코의 군대는 아르카디아 지방의 험준한 지형에서 알라리크의 군대와 충돌했다. 질병과 탈영으로 고트족의 손실이 컸고, 알라리크는 폴로에 산으로 후퇴했다. 스틸리코는 이들을 포위하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등 섬멸을 시도했다.[24]
그러나 알라리크는 포위망을 뚫고 에피루스 속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알라리크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신들을 상대로 공작을 벌인 결과, 동로마 정부는 스틸리코에게 동로마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결국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제압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고, 알라리크는 동로마 황제의 동맹이자 신하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조시무스를 인용하며 스틸리코가 승리에 자만하여 알라리크를 놓쳤다고 비판했지만[24], 현대 학자들은 동로마의 철수 명령, 스틸리코 군대의 신뢰성 문제,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길도의 반란 등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25]
2. 4. 아프리카 전쟁
397년, 북아프리카의 총독(코메스) 길도가 서로마를 배신하고 동로마 편에 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로마의 주요 곡물 공급처인 아프리카 속주들을 동로마의 통제하에 두려는 의도였다. 이에 스틸리코는 콘스탄티노플에 항의하는 한편, 원로원에 길도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고 토벌군 파병을 요청했다. 그는 "우리 식량이 일개 무어인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게다가 그 인물은 공급자가 아니라 협박자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연설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또한 밀라노에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까지 로마로 불러 원로원 회의장에서 길도 토벌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했고, 마침내 원로원의 만장일치 결의를 얻어낸 후에야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길도의 곡물 수출 금지 조치로 로마가 식량난에 시달릴 것을 우려한 스틸리코는 미리 대비책을 마련했다. 갈리아 내륙 속주에서 거둔 대량의 곡물을 론 강의 빠른 물길을 이용해 테베레 강까지 수송하여, 아프리카 전쟁 기간 내내 로마의 곡물 창고를 가득 채워두었다.
스틸리코는 원정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길도의 친동생이자 형에게 두 아들을 잃고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던 마스케젤에게 7개 부대, 약 5,000명의 병력을 맡겨 파견했다. 마스케젤의 군대는 투스카니의 피사 항구를 출발하여 카프라리아 섬에서 병력을 보충한 뒤, 코르시카의 암초를 피해 사르디니아 동쪽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아프리카 해안에서 약 225.31km 떨어진 칼리아리의 안전한 항구에 도착했다.
길도는 북아프리카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70,000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맞섰으나, 첫 전투에서 예상외의 참패를 당했다. 마스케젤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 길도는 동로마로 도망치려 했지만 타브라카 항구에서 주민들에게 붙잡혀 지하 감옥에 갇혔고, 결국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쟁 후 스틸리코는 길도 측 포로의 처리를 서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맡기며 '공화국의 법률'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승전 후 밀라노 궁정으로 귀환한 마스케젤은 스틸리코와 함께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강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2] 이 죽음은 석연치 않은 정황 때문에 스틸리코가 질투심에 그를 제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26]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틸리코는 자신의 딸 마리아를 황제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켰다. 또한 400년에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어 로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27]
2. 5.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침공과 비밀 협상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부 일리리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된 알라리크는 점차 서로마 제국 영토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400년부터 403년까지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공격했다. 당시 스틸리코는 반달족을 막기 위해 라에티아 국경 지대에 파견되어 있었고, 새로운 군대를 모으는 데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스틸리코는 밀라노의 궁정이 잠시 버텨준다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뒤, 라리오 호수를 건너 산악 지대를 통과하며 알레만니족을 굴복시키고 주변의 적으로부터 구출된 보병대를 규합했다. 또한 벽지에 주둔하던 군대와 브리타니아 방벽의 주둔군, 알라니족의 대규모 기병대까지 소집하여 황제와 이탈리아 본토 방어에 나서도록 명령했다.
궁정이 있던 메디올라눔(현 밀라노)을 떠나 아를로 피신하려던 호노리우스 황제는 알프스로 향하던 중 포 강을 건너기 전에 고트족 기병대에게 따라잡혔다. 황제는 급히 인근 리구리아의 아스타 요새로 피신했으나, 곧 알라리크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스틸리코는 선봉 부대를 이끌고 아두아 강을 헤엄쳐 건너 아스타 성벽 아래에서 고트족 진영을 돌파했다. 이미 알라리크의 호송 부대를 차단한 로마군은 고트족 포위군을 역으로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402년 부활절 일요일, 스틸리코는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야영지와 아내를 사로잡았다. 공격 실행은 알라니족 족장이자 테오도시우스 휘하의 평판 높은 고참 장군이었던 사울이 맡았으나, 그가 전사하자 알라니족 기병대는 혼란에 빠져 도주했다. 스틸리코가 직접 로마인과 야만족으로 구성된 보병대를 이끌고 공격에 나서 저녁 무렵 고트족을 퇴각시켰다. 알라리크 자신은 병력의 대부분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사람들은 스틸리코의 승리를 과거 같은 장소에서 북방 야만족을 물리쳤던 마리우스의 승리에 비견하기도 했다.
폴렌티아 전투 이후,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에게 금전을 받고 물러날 것을 제안했다.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미 상당수 족장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호노리우스 황제나 스틸리코와 비밀리에 접촉하며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알라리크 진영의 계획은 실시간으로 스틸리코에게 보고되었고, 로마군은 그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했다.
결국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와 조약을 맺고, 이탈리아로 이끌고 온 군대의 생존자들과 함께 포 강을 건너 퇴각했다. 돌아가는 길에 알라리크는 라에티아 알프스의 주요 통로에 있는 베로나를 점령하려 했으나, 베로나 전투에서 스틸리코에게 다시 패배하고 말 한 필에 의지해 간신히 도망쳐야 했다.[30] 휴전이 성립된 후 알라리크는 일리리쿰으로 가서 부하들과 함께 노리쿰과 판노니아 변경 지역에 정착했다.[31]
한편, 메디오라눔 궁정에서 황제의 안전이 위협받았던 경험을 교훈 삼아 스틸리코는 이탈리아 내에 야만족의 침입에도 안전할 수 있는 요새화된 피난처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 내부에서는 스틸리코가 여러 차례 알라리크를 격파하고 섬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아주었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반(半)야만족' 출신이라는 점과 아리우스파 이교도라는 의혹[8][9]이 늘 따라다녔으며, 황제의 부하 사령관이라는 위치 때문에 원로원과 황제 측근들로부터 정치적 견제를 받았다. 호노리우스가 어릴 때는 후견인으로서 군사와 정치를 장악했지만, 황제가 성인이 되면서 점차 소원해졌다. 특히 황제의 측근으로 부상한 올림피우스는 반(反)스틸리코 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심지어 알라리크를 의도적으로 놓아준 것이 그와 내통했기 때문이라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퍼지면서, 스틸리코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2. 6. 라다가이수스를 격퇴하다
서기 405년, 동고트족의 왕 라다가이수스는 수에비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 다양한 게르만 부족을 이끌고 게르마니아 북쪽에서 출발하여 로마 근처까지 진군했다. 이들의 목표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이었으며, 동원된 병력은 전투 가능한 남성만 20만 명, 여성과 아이, 노예까지 포함하면 총 4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였다.이듬해인 406년부터 이들은 이탈리아를 본격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국력이 크게 쇠약해져 도나우강 방어선을 복구하거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스틸리코는 이탈리아 본토 방어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군대 소집과 신병 모집에 나섰으나, 많은 이들이 두려움 때문에 병역을 기피했다.
이에 스틸리코는 탈영병을 체포하거나 회유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병적에 이름을 올린 노예에게는 금화 두 닢과 함께 자유민 신분을 부여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통해 간신히 3만에서 4만 명 정도의 병력을 확보했다. 여기에 대규모의 야만족 보조군을 동원하여 30개 군단을 추가로 보강했다.[53] 라다가이수스의 군대가 알프스, 포강,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남하하는 동안, 스틸리코는 티키눔(현재의 파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병력들이 집결할 때까지 신중하게 기다렸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가 라다가이수스 군대에게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고, 마침내 피렌체가 포위되었다. 스틸리코는 과거 알라리크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것처럼, 강력한 포위선을 구축하여 적을 역으로 포위하는 전술을 다시 한번 구사했다. 굶주림에 지친 라다가이수스의 군대는 절망적인 상태로 스틸리코의 방어선을 향해 돌격했지만 번번이 격퇴당했다.
때마침 스틸리코의 군대와 군량이 피렌체로 공급되면서, 라다가이수스의 대군은 피렌체 시와 스틸리코의 군대 양쪽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라다가이수스는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그의 병사들은 포로가 되어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라다가이수스의 동맹 세력으로 알프스 산맥과 다뉴브강 사이에 진을 치고 있던 다른 게르만 부족 병력도 10만 명에 달했지만, 스틸리코는 라인강으로 이동하여 당시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크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54]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잔존 세력이 로마와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퇴각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오직 로마와 이탈리아의 안전만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다른 속주들의 안위는 소홀히 했던 정책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로시우스나 히에로니무스 같은 당대의 인물들은 스틸리코가 결과적으로 야만족의 침략을 다른 지역으로 부추긴 셈이라고 비판했다.
2. 7. 죽음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국경 지대의 아이모나 인근에 진을 치고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고트족의 영구 정착지를 요구하자, 스틸리코는 원로원 의원들을 모아 제국의 상황을 설명하며 알라리크의 요구를 전달하고 전쟁과 평화 중 선택을 맡겼다. 그는 알라리크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속주에 대한 로마 공화국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해왔으며, 약속된 봉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알라리크의 퇴각은 황제의 친서에 복종한 결과이며, 이는 황족 형제들의 불화를 염려한 황후 세레나의 중재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원로원은 처음에는 로마의 위엄을 내세우며 야만족 왕에게 돈으로 굴욕적인 화친을 맺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격론 끝에 스틸리코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알라리크에게 보조금 명목으로 약 1814.37kg의 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원로원 의원 람파디우스만이 끝까지 반대하며 "''Non est ista pax, sed pactio servitutis''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종속의 조약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교회의 성소로 피신했다.[41] 원로원 의원들은 그의 대담성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한편, 스틸리코가 이탈리아를 알라리크(401–402)와 라다가이수스(405–406)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라인강 전선의 병력을 빼내면서 방어선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406년 12월 31일,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연합군이 방어가 허술해진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했다.[37][38] 이들은 갈리아 지방을 황폐화시켰고, 이는 브리타니아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들로 스틸리코의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다.[39]
스틸리코는 부하 사루스를 보내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사루스는 초기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철수했고, 스틸리코는 알프스를 봉쇄하여 콘스탄티누스가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것을 막는 데 집중해야 했다.[40] 콘스탄티누스의 반란으로 스틸리코와 알라리크의 일리리아 공동 공격 계획이 중단되자, 알라리크는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다시 이탈리아 침공을 위협했다. 원로원은 전쟁을 주장했지만, 스틸리코는 다시 한번 그들을 설득하여 알라리크의 요구를 수용하게 했다. 이는 원로원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41]
로마 군단과 시민들은 스틸리코가 야만족인 고트족 편을 들고 잘못된 정책으로 국가 재난을 불렀다며 비난했다. 결정적으로 황제 호노리우스가 궁정의 서기장관이었던 올림피우스의 모함에 넘어가 스틸리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올림피우스는 스틸리코가 자신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황제로 앉히려 한다고 호노리우스를 부추겼다.[48] 이에 호노리우스는 라벤나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죽은 형 아르카디우스의 뒤를 이은 조카 테오도시우스 2세의 속주를 통치할 의사를 밝혔다. 스틸리코는 만류했지만, 호노리우스가 파비아(티키눔)의 군 진영을 시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408년 8월 13일, 호노리우스가 파비아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중, 올림피우스에게 매수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스틸리코의 지지자들을 대거 살해했다(조시무스 5.32). 희생자 중에는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민정 총독, 기병대 및 보병대 총사령관, 총무장관, 재무관, 회계관, 근위대 총독(코메스) 등 제국의 고위 관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가 존 매튜스는 이 사건이 스틸리코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조직한 철저히 조율된 쿠데타의 양상을 보인다고 평가했다.[42]
볼로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는 휘하 지휘관들을 소집했으나, 황제의 안위가 불확실하고 지휘관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며 복수를 망설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는 그의 모습에 실망한 지휘관들은 철수해버렸고, 고트족 출신 지휘관 사루스는 스틸리코의 막사를 기습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간신히 피신한 스틸리코는 이탈리아 도시들에 야만족에 대비하라는 마지막 경고를 보낸 뒤 라벤나의 교회로 피신했다.
총독(코메스) 헤라클리아누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교회를 포위하고 황제의 명령이라며 스틸리코를 체포했다. 스틸리코는 저항하지 않고 자신에게 씌워진 반역 혐의를 받아들였으며, 자신을 구하려는 추종자들을 진정시키고 408년 8월 22일 처형당했다.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도 곧 살해되었고, 딸 테르만티아는 호노리우스에게 이혼당했다. 파비아에서 살아남은 스틸리코의 지지자들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스틸리코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에 큰 손실이었다. 그의 사후 로마군에 복무하던 야만족 용병 다수가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알라리크에게 합류했다. 유능한 군사 지도자를 잃은 서로마 제국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이는 결국 410년 알라리크에 의한 로마 약탈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틀어박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2. 8. 스틸리코 사후
스틸리코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그의 사후 로마군에 복무하던 야만족 용병들은 로마군에게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약 3만 명으로 추정)은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에게 합류했다.[37] 이들은 즉시 알라리크에게 로마로 진격할 것을 촉구했다. 알라리크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율리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408년 9월에는 로마 성벽 앞에 도달했다.스틸리코와 같은 유능한 군사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황제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머물며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알라리크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하며 시간을 벌어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지만, 이는 사실상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알라리크는 로마 영토 내에 영구적인 정착지를 확보하고 평화 조약을 맺기를 원하며 로마를 세 차례나 포위했지만, 도시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네 번째 협상마저 결렬되자, 알라리크는 마침내 로마를 공격했다. 몇 달간의 포위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고, 일부는 식인 행위까지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결국 410년 8월, 서고트족 군대는 성문을 부수고 도시로 난입하여 로마를 약탈했다. 이는 기원전 387년 갈리아족의 침입 이후 거의 8세기 만에 처음으로 야만족에게 로마 수도가 함락된 사건이었으며, 많은 역사가들은 스틸리코의 제거가 이 비극적인 사건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평가한다.
스틸리코의 몰락은 단순히 궁정 내의 권력 투쟁 결과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알라리크(401–402년)와 라다가이수스(405–406년)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던 로마군 병력을 상당수 차출한 것이 장기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당시 라인 전선이 "게르만족의 신뢰와 로마 이름에 대한 고대의 공포에 의해서만" 방어되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결국 406년 12월 31일,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연합군이 방어가 허술해진 라인 전선을 돌파했다.[38] 로마의 동맹이었던 프랑크족이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알란족의 도움을 받은 반달족에게 패배했다.[37] 라인강을 건넌 이들 게르만 부족은 갈리아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이는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현지에서의 군사 반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틸리코의 명성은 이 사건들로 인해 크게 실추되었다.[39]
갈리아의 혼란과 라벤나 궁정의 미흡한 대응은 브리타니아 주둔군이 콘스탄티누스 3세를 황제로 추대하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스틸리코는 부하 장군 사루스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사루스는 초기에 콘스탄티누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최고 군사 지휘관 두 명을 죽이는 등 승리를 거두었으나, 증원군에게 패배하여 후퇴해야 했다. 스틸리코는 콘스탄티누스 3세가 이탈리아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봉쇄하는 수밖에 없었다.[40]
한편,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으로 인해 스틸리코와 알라리크가 계획했던 일리리아 공동 공격은 무산되었다. 알라리크는 약속된 보수를 지급하라며 막대한 양의 금을 요구했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탈리아를 다시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로마 원로원은 알라리크와의 전쟁을 주장했지만, 스틸리코는 다시 한번 원로원을 설득하여 알라리크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했다. 이에 원로원 의원들은 스틸리코에게 크게 분노했으며, 특히 람파디우스는 "Non est ista pax, sed pactio servitutisla"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예속의 조약이다)라고 외치며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했다.[41]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알라리크에게 굴욕적인 보조금을 지급한 일, 그리고 과거 동로마 제국의 실권자 루피누스를 암살했다는 의혹과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사망(408년 5월 1일)한 후 자신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스틸리코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다. 결국 스틸리코의 정적이었던 올림피우스 등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408년 8월 13일, 티키눔(현재의 파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폭동을 일으켜 스틸리코파로 분류되던 최소 7명의 제국 고위 관료들을 살해했다 (조시무스 5.32).[42] 존 매튜스는 이어진 사건들이 "스틸리코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조직된 철저히 조율된 쿠데타의 모든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언급했다.[42]
볼로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스틸리코는 휘하 지휘관들을 소집했으나, 복수를 주장하는 지휘관들과 달리 황제의 안위를 알 수 없고 지휘관들의 충성심마저 의심스러워 즉각적인 행동을 망설였다. 그의 우유부단함에 실망한 지휘관들은 흩어졌고, 과거 그의 부하였던 고트족 출신 사루스는 한밤중에 스틸리코의 막사를 기습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스틸리코는 이탈리아 도시들에 '야만족에 맞서 성문을 닫으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라벤나의 한 교회로 피신했다.
그러나 곧 총독(Comes) 헤라클리아누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교회를 포위했다. 헤라클리아누스는 주교에게 황제의 명령으로 스틸리코를 체포하러 왔다고 전했고, 스틸리코는 순순히 교회 밖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반역 혐의를 담담히 받아들였으며, 자신을 구출하려는 추종자들을 만류하고 408년 8월 22일 처형당했다.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었다. 에우케리우스가 처형되기 전, 그의 누이이자 호노리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테르만티아는 일방적으로 이혼당했다. 티키눔 폭동에서 살아남았던 스틸리코의 지지자들은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반역 혐의를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스틸리코가 실제로 알라리크와 내통했는지 여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3. 평가 및 논란
스틸리코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기울어가는 로마 제국을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충성스러운 재상이자 장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단순히 로마 사령관으로서의 책무나 죽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아직 동서 로마가 완전히 분열되지 않은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만들려는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몇 가지가 제시된다. 첫째, 스틸리코가 자신의 딸 마리아를 열네 살의 어린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시집보낸 것을 그 포석으로 본다. 둘째, 알라리크를 마케도니아에서 패배시킨 후, 그가 점령하고 있던 다르마티아 속주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는 의혹이다.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고트족에게 빼앗긴 다르마티아는 매우 비옥한 땅이었기에,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스틸리코에게 매력적인 목표였을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야심설이 사실이라면, 동로마의 실권자였던 루피누스와의 대립 관계도 설명될 수 있다. 루피누스는 이미 호노리우스의 장인이 되어 권력 기반을 다진 스틸리코가 더 이상 황제의 지위에 가까워지는 것을 막고, 비옥한 다르마티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그의 군사적 성공을 방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동·서 로마의 황제들은 야만족 출신인 알라리크가 로마와 동맹을 맺자, '반(半)야만족'이었던 스틸리코를 대체할 인물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황제의 장인으로서 지위가 높고 강력한 군사력까지 갖춘 스틸리코는 동·서 로마 양측 모두에게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스틸리코의 출신 배경 역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로마인이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야만족 출신이면 그 자녀 역시 야만족으로 취급받고 멸시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스틸리코 자신도 '로마인'이 아니라는 정체성 문제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출신 성분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 '반 야만족', '반 로마인'이라는 굴레는 정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고, 세상의 불신과 참소를 불러일으켜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4. 가족 관계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조카이자 양녀인 세레나(Serena, 370년경-409년)와 결혼했다.[11]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가 스틸리코의 뛰어난 업적을 기려 세레나와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스틸리코의 지위나 업적을 고려할 때 이는 다소 과장된 찬양으로 보인다.[11] 스틸리코가 황실 내부에서 활동하며 세레나를 만나 직접 관계를 발전시켰거나, 테오도시우스가 유망한 장군을 황실과 연결시키려는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결혼을 통해 스틸리코는 황실과의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고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스틸리코와 세레나 사이에는 아들 에우케리우스(Eucherius, 388년/389년/390년경-408년)와 두 딸 마리아(Maria, 385년경-407년), 테르만티아(Thermantia, 386년경-415년)가 태어났다.[11]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내 | 세레나 | 370년경 ~ 409년 |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이자 양녀 |
아들 | 에우케리우스 | 388년/389년/390년경 ~ 408년 | 스틸리코 사후 처형됨 |
딸 | 마리아 | 385년경 ~ 407년 | 호노리우스와 결혼, 자녀 없음 |
딸 | 테르만티아 | 386년경 ~ 415년 | 호노리우스와 결혼 (마리아 사후), 자녀 없음, 스틸리코 사후 수도원에서 사망 |
스틸리코는 서방 황제 호노리우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두 딸을 차례로 황제에게 시집보냈다. 398년 장녀 마리아가 호노리우스와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407년에 사망했고, 이후 차녀 테르만티아가 호노리우스와 결혼했지만 역시 자녀를 낳지 못했다.[18]
스틸리코의 사후 그의 가족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아들 에우케리우스는 로마로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아내 세레나 역시 처형당했다. 둘째 딸 테르만티아는 남편 호노리우스에 의해 이혼당한 뒤 친정으로 보내졌다가 스틸리코 사후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직계 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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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리코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이유는 그가 로마의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했고, 죽은 뒤 그에 관련된 문헌, 법률, 건축물, 조각품 등의 모든 기록을 말소하는 이른바 기록말살형(라틴어: Damnatio Memoriae)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51]
문서
루피누스의 오른손은 잘려져 콘스탄티노플의 거리 구석구석까지 돌려지면서 조롱거리가 되었고 목은 긴 창끝에 꽂혀 전시되었다. 다만 그의 아내와 딸은 교회의 보호를 받아 남은 여생을 예루살렘의 조용한 은거지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며 보냈다고 한다.
[52]
문서
조시무스에 따르면 이것은 우발적인 사고를 가장한 스틸리코의 소행이었다.
[53]
문서
알라니족은 개인적으로 스틸리코를 위해 복무에 나섰고, 훈족과 고트족은 라다가이수스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기꺼이 동참했다고 한다.
[54]
문서
프랑크족의 왕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마르코미르는 조약의 신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스틸리코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고 투스카니 속주로의 가벼운 추방령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신민들은 왕의 위신이 떨어진 것에 분개하기는커녕 형제를 위해 복수하려던 순노를 죽이고 스틸리코가 선택한 왕들에게 충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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