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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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즈데게르드 1세는 399년부터 420년까지 사산 제국을 통치한 왕이다. 그의 이름은 "신이 만든"이라는 뜻이며,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종교 정책, 유대교와의 관계 등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기독교에 관대하여 초기에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멀리했지만, 말년에는 기독교도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정책을 변경하여 박해를 명령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에게 관대하게 대했으며, 유대인 아내를 두기도 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로마 자료에서는 자비로운 통치자로 묘사되지만, 페르시아 자료에서는 귀족과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를 억압한 군주로 묘사된다. 그는 420년 또는 42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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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즈데게르드 1세 | |
---|---|
기본 정보 | |
![]() | |
통치 | |
칭호 | 샤한샤 (이란과 비이란의 왕) |
통치 기간 | 399년–420년 |
이전 통치자 | 바흐람 4세 |
다음 통치자 | 샤푸르 4세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슈샨두크트 |
자녀 | 샤푸르 4세 바흐람 5세 나르세 |
왕가 | 사산 왕조 |
아버지 | 샤푸르 3세 |
사망 | 420년 |
사망 장소 | 구르간 또는 투스 |
종교 |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2. 어원
야즈데게르드(Yazdegerd)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어 ''야자드(yazad / yazata)''(신성한 존재)와 ''-카르타(-karta)''(만들어진)의 합성어로, "신이 만든"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란어의 ''바그카르트(Bagkart)''와 그리스어의 ''테옥티스토스(Theoktistos)''와 유사하다. 다른 언어로는 팔라비어로 야즈데케르트(Yazdekert), 페르시아어로 야즈[에]게르드(Yazd[e]gerd), 시리아어로 야즈데게르드(Yazdegerd), 이즈데게르드(Izdegerd), 야즈데게르(Yazdeger), 아르메니아어로 야즈케르트(Yazkert), 탈무드에서 이즈데게르(Izdeger), 아즈게르(Azger), 아랍어로 야즈데이제르드(Yazdeijerd), 그리스어로 이스디게르데스(Isdigerdes) 등으로 알려져 있다.
야즈데게르드 1세의 치세 동안, 서쪽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동고트족이 발칸 반도를 습격하고, 프랑크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제국 내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동방의 속주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3] 야즈데게르드 1세는 이러한 상황에서 약화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대신, 훈족에 대한 페르시아인의 승리 후에 구출된 기독교도 포로들을 로마 영내로 돌려보냈다.[3]
3. 배경
야즈데게르드 1세는 샤푸르 3세 (재위: 383년 - 388년)의 아들로, 399년에 형제인 바흐람 4세 (재위: 388년 - 399년)가 암살당하자 왕위를 계승했다.[1] 야즈데게르드 1세는 바흐람 4세, 샤푸르 3세, 아르다시르 2세 (재위: 379년 - 383년) 등 세 명의 전임자들이 모두 귀족에게 살해당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친 제국을 물려받았다.[2][3]
당시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파르티아 귀족 가문(우주르간)에 속해 있었다.[2] 이들은 사산 제국 봉건 군대의 중추였지만, 대체로 자치적이었다.[2] 사산 왕조의 왕은 우주르간을 거의 통제하지 못했고, 그들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대개 왕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2] 파르티아 귀족들은 개인적인 이익, 충성심, 그리고 아리아(이란) 혈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산 왕조를 위해 일했다.[2]
야즈데게르드 1세 치세 말기에 강력한 파르티아 수렌 가문은 왕의 강력한 동료가 되어 제국의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 수렌 가문의 권위는 야즈데게르드 1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2세 (재위: 438년 - 457년)의 통치 말기까지 번성했다.[4]
4.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4. 1.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
동로마 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아들 테오도시우스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3] 이 이야기는 6세기 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언급했으며, 동료 로마 역사가 아가티아스는 이 보고서가 "로마 평민과 귀족의 입에 오르내렸다"라고 기록했지만[4] 동시대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다.[2]
야즈데게르드 1세는 테오도시우스의 보호자가 되기로 동의했으며, 그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자에게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2][3]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야즈데게르드]는 아르카디우스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며 로마인들과의 심오한 평화 정책을 중단 없이 이어갔고, 그리하여 테오도시우스를 위해 제국을 보존했다."라고 한다.[3] 야즈데게르드 1세는 테오도시우스의 교육을 위해 "가장 뛰어난 학식과 교육을 받은 조언자이자 스승"인 안티오쿠스를 보냈다.[3]
5. 종교 정책
야즈데게르드 1세는 치세 초기에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멀리했으며,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2] 그 덕분에 그의 치세 초기에는 기독교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널리 퍼질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주교 마루타와 크테시폰의 주교 아브다스(Abdaas)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2] 410년에는 이들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도 한다.[3]
그러나 크테시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 불의 신전이 기독교 주교 아브다스에 의해 전소되어 재건 불가능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로아스터교 신관인 마기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야즈데게르드 1세는 마기들에게 제국 내 교회를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후 5년 동안 제국 내 기독교인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으며, 거리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Al Khasha(가혹한 자)[2]', 'Al Athim(사악한 자)', 또는 'Yazdegerd the Sinner(죄인 야즈데게르드)[4]'라고 불렀다.
야즈데게르드 1세의 통치 말년, 기독교인에 대한 그의 관용은 그들의 무모함으로 인해 시험대에 올랐다.[2] 수사의 주교인 압다스는 후제스탄의 아흐바즈에서 기독교 성직자들과 평신도 무리와 함께 419년에서 420년경에 조로아스터교 불의 신전을 허물었다.[2] 궁정은 그들을 불러 행동에 대해 해명하도록 했고, 야즈데게르드 1세는 압다스에게 "당신은 이 사람들의 지도자인데, 어째서 그들이 우리 왕국을 멸시하고, 우리 명령을 어기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하는가? 당신은 우리 아버지들의 아버지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우리 예배당과 불의 신전의 기초를 허물고 파괴하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2] 압다스는 대답을 망설였지만, 그의 수행원 중 한 성직자가 "저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불은 하나님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기초를 허물고 불을 껐습니다."라고 대답했다.[2] 불의 신전을 파괴하는 것은 "기독교의 승리"를 알리는 방법이었다고 한다.[2]
압다스는 불의 신전 재건을 거부했고, 그와 그의 수행원들은 처형되었다.[2] 다른 장소에서 한 성직자는 성스러운 불을 끄고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했다.[2] 야즈데게르드 1세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독교인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고 박해를 명령했다. 아마도 정책 변화로 인해 야즈데게르드는 수렌 가문의 미르 나르세를 자신의 재상(''와주르그 프라마다르'')으로 임명했다.[2]
5. 1. 기독교와의 관계
야즈데게르드 1세는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치세 초기에는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2] 그의 선임자 샤푸르 2세가 340년부터 379년까지 이른바 "대박해"를 통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2] 이후 바흐람 5세, 야즈데게르드 2세, 페로즈 1세, 호스로 1세, 호스로 2세 등도 동방 교회를 박해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2] 성인전 기록에 따르면, 이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변함없는 적대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다.[2]그러나 샤푸르 2세의 기독교 박해는 궁정의 요구에 불응한 일부 종교 지도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2] 샤푸르 2세는 반항적인 성직자들을 처벌했지만, 기독교인 전체를 박해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박해"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2] 현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자우어는 사산 왕조의 왕들이 정치적 이익이 있을 때만 다른 종교를 박해했다고 주장한다.[2] 샤푸르 2세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주된 이유는 성직자들이 제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 야즈데게르드 1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직자들이 궁정과 협력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다.[2]
야즈데게르드 1세는 초기에는 기독교에 우호적이었으나, 말년에 기독교인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정책을 변경하여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페르시아인들에게 훌륭한 왕으로 인식되어 'Ramashtras(가장 평온한 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5]
5. 1. 1. 이란 교회의 설립
야즈데게르드 1세의 치세는 이란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로마 제국의 주교 마루타의 조언에 따라, 야즈데게르드 1세는 410년에 동방 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2] 이는 이란 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424년에는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1][2] 야즈데게르드 1세의 칙령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비견되기도 한다.[2][3]이후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의 궁정 근처에 교회, 순교자 성지, 수도원 등이 세워졌다.[4] 이는 야즈데게르드 1세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는 동시리아 또는 로마 외교관들을 통해 교회를 지원했다.[4] 그는 기독교인들이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땅을 더럽히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례적인 관용이었다.[5]
이러한 변화로 관료 체제 내 기독교 엘리트의 수가 증가했으며, 이는 651년 사산 왕조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4] 시몬 바르 사바에와 같은 사제 지도자들은 샤푸르 2세의 관료 체제 참여 요청에 반대했지만, 5세기 주교들은 이란의 대리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4] 야즈데게르드 1세는 사제 지도자들을 활용하여 크테시폰의 카톨리코스 총대주교를 자신과 그의 형제(이란 남부 파르스의 총독) 사이의 중재자로 보내기도 했다.[2] 또 다른 총대주교는 야즈데게르드의 테오도시우스 특사였다.[2]
야즈데게르드 1세는 기독교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샤푸르 2세처럼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6] 기독교인들은 그의 관대한 대우에 대해 그를 "고귀한 영혼"이자 이란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 대왕에 비견하기도 했다.
5. 1. 2. 기독교 박해
야즈데게르드 1세는 치세 초기에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멀리했으며,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하려 했다고 전해진다.[2] 그 덕분에 그의 치세 초기에는 기독교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주교 마루타와 크테시폰의 주교 아브다스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으며,[2] 410년에는 이들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도 했다.[3]그러나 크테시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 불의 신전이 기독교 주교 아브다스에 의해 파괴되어 재건이 불가능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로아스터교 신관인 마기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들은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야즈데게르드 1세는 마기들에게 제국 내 교회를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5년 동안 제국 내 기독교인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거리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Al Khasha(가혹한 자)[2]', 'Al Athim(사악한 자)', 또는 'Yazdegerd the Sinner[4]'라고 불렀다.
야즈데게르드 1세의 통치 말년, 기독교인에 대한 그의 관용은 그들의 무모함으로 인해 시험대에 올랐다. 수사의 주교인 압다스는 후제스탄의 아흐바즈에서 기독교 성직자들과 평신도 무리와 함께 419년에서 420년경에 조로아스터교 불의 신전을 파괴했다. 궁정은 그들을 불러 행동에 대해 해명하도록 했고, 야즈데게르드 1세는 압다스에게 "당신은 이 사람들의 지도자인데, 어째서 그들이 우리 왕국을 멸시하고, 우리 명령을 어기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하는가? 당신은 우리 아버지들의 아버지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우리 예배당과 불의 신전의 기초를 허물고 파괴하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압다스는 대답을 망설였지만, 그의 수행원 중 한 성직자가 "저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불은 하나님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기초를 허물고 불을 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불의 신전을 파괴하는 것은 "기독교의 승리"를 알리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아브다스는 불의 신전 재건을 거부했고, 그와 그의 수행원들은 처형되었다. 다른 장소에서 한 성직자는 성스러운 불을 끄고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독교인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고 박해를 명령했다. 아마도 정책 변화로 인해 야즈데게르드는 수렌 가문의 미르 나르세를 자신의 재상(''와주르그 프라마다르'')으로 임명했다.
5. 2. 유대교와의 관계
페르시아 유대인들은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매우 관대하고 존경받는 대우를 받았으며, 그들의 유대인 수장(Exilarch)은 그를 바빌론 유수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새로운 키루스 대왕이라고 불렀다. 야즈데게르드는 랍비들에게 쾌적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에게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선전에 의해 편향된 유대교 역사 기록의 산물일 수 있다. 그는 유대인 아내인 슈샨두크트를 두었는데, 그녀는 유대인 수장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의 정체는 불분명하며, 마르 카하나 1세, 마르 예마르 또는 마르 주트라였을 수 있다. 중세 페르시아 지리 텍스트인 ''Šahrestānīhā ī Ērānšahr(이란의 지방 수도)''는 야즈데게르드가 슈샨두크트의 요청에 따라 유대인들을 이스파한에 정착시켰으며, 그녀가 그의 아들인 바흐람 5세의 어머니였다고 전한다. 이란학자 에른스트 헤르츠펠트에 따르면, 하마단에 있는 에스테르와 모르데카이 무덤은 에스테르와 모르데카이의 묘소가 아니라 슈샨두크트의 묘소였다.6. 인물됨과 귀족, 성직자와의 관계
야즈데게르드 1세는 통치 기간 동안 귀족 및 성직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이전 세 명의 왕들(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바흐람 4세)이 귀족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야즈데게르드 1세는 귀족들을 경계했다.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강력한 파르티아 귀족 가문(''wuzurgan'') 출신이었다. 이들은 사산 왕조의 군사력의 핵심이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산 왕조의 왕들은 이들 ''wuzurgan''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들을 억압하려는 시도는 왕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파르티아 귀족들은 개인적인 이익, 충성심, 그리고 아리아 혈통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산 왕조를 섬겼다. 야즈데게르드 1세의 통치 후반, 강력한 파르티아 가문인 수렌 가문이 왕의 동맹 세력이 되어 제국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렌 가문의 권력은 야즈데게르드 1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2세 통치 말기까지 이어졌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초기에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멀리했다.[2] 그는 기독교로 개종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의 통치 초기에 기독교는 널리 퍼졌다.[2] 메소포타미아의 주교 Marutha와 크테시폰의 주교 Abdaas의 지지를 받았으며,[2] 410년에는 이들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도 했다.[3]
그러나 크테시폰에 있는 조로아스터교 신전이 기독교 주교 Abdaas에 의해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로아스터교 사제들(마기)은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조치를 요구했다. 결국 야즈데게르드 1세는 마기들에게 제국 내의 교회를 파괴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후 5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많은 교회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해 그는 'Al Khasha(가혹한 자)[2]', 'Al Athim(사악한 자)', 'Yazdegerd the Sinner[4]'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인들에게는 'Ramashtras(the most quiet)'라는 긍정적인 별명으로도 알려졌다.[5]
로마 기록에서는 야즈데게르드 1세를 현명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로 묘사한다. 그는 박식하고 "인품의 고귀함"과 "가난하고 비참한 자"를 돕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아랍 기록에서는 그를 "죄인"(bazehkar 또는 bezehgar)이자 "부랑자"(dabhr)로 묘사하며, 귀족과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를 억압하고 권력을 남용한 군주로 평가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로마에 대한 평화 정책과 비(非)조로아스터교도(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 때문이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가 성직자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유는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에 반대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 왕들의 운명을 알고 귀족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귀족들이 왕권을 약화시키고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로 인해 야즈데게르드 1세는 귀족 및 성직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그는 이전 왕들보다 유능했으며, 그의 통치는 사산 왕조 역사에서 새로운 시기로 평가받는다.
7. 화폐와 제국 이데올로기
야즈데게르드 1세의 동전은 아르다시르 2세가 사용한 돔 형태의 왕관에 두 개의 메를론(성벽의 돌출부)과 초승달을 상단에 배치한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통치는 사산 제국의 정치적 관점이 (원래 서방을 지향하던) 동방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나타내는데, 이는 동부 이란의 적대적인 부족들에 의해 촉발되었을 수 있다. 페르시아 훈족과의 전쟁은 신화 속 이란 카얀 왕조 통치자와 투란 적 사이의 신화적 경쟁 관계를 다시 불러일으켰을 수 있는데, 이는 젊은 아베스타 텍스트에 의해 설명된다. 야즈데게르드의 동전에는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왕중왕"이라는 전통적인 칭호에 "Ramshahr|람샤르영어" (그의 지배권 내 평화 유지자)라는 칭호가 추가되었다.[1][2] Ram|람영어이라는 단어는 "평화", "안식", "즐거움", "기쁨" 또는 "만족"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야즈데게르드 1세의 경우, 아마도 "평화"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3] 이 칭호는 중세 페르시아 영웅 서사시인 ""에 등장하는 카얀 왕조의 군주에게 사용되었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습속을 기록한 10세기에 저술된 덴카르드에도 등장한다. 카야니안 이데올로기와 역사에 대한 사산 왕조의 관심은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야즈데게르드 1세의 통치 하에 야즈드시에 조폐국이 설치되어(조폐국 약칭은 "YZ"), 이 도시의 중요성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구라에도 조폐국이 설치되었으며, 가룸에도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8. 건설 활동
야즈데게르드 1세는 쿠미스, 하마단, 수사, 슈슈타르, 이스파한 등의 도시 재개발을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야즈데게르드 1세의 군 사령관들이 Aqda|아크다영어와 메이보드 마을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1]。
9. 죽음과 계승
야즈데게르드 1세는 420년(혹은 421년)에 죽었는데, 그 상황은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히르카니아에 머물던 중 강에서 나타난 멋진 말에 치여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6] 이는 부하들에 의한 암살 암시로 볼 수 있다. 그는 음모에 희생된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5세기 아르메니아의 역사가 모브세스 호레나치는 그의 사인을 질병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페르도우시의 《샤나메》에 따르면, 그는 아바르샤르 동부 투스 인근의 샘에서 갑자기 나타난 흰 말에게 차여 죽었고, 그 말은 곧 사라졌다고 한다. 테오도르 묄데케는 페르도우시가 이 전설을 투스의 전통에 무책임하게 접목했다고 추측하며, 살인은 구르간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 전설은 파르티아 귀족들이 야즈데게르드 1세를 살해했을 때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야즈데게르드 1세를 경멸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그의 아들들에게서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샤푸르, 바흐람, 나르세 세 아들이 있었는데, 사산 아르메니아의 총독-왕 샤푸르는 크테시폰으로 가서 샤푸르 4세로 즉위했지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귀족들은 호스로를 왕위에 앉혔으나, 알-히라의 라흐미드 궁정에서 자란 바흐람이 아랍 군대를 이끌고 와 바흐람 5세로 즉위했다. 그의 형제 나르세는 아바르샤르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0. 계보
야즈데게르드 1세는 샤푸르 3세 (383-388)의 아들이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의 형제인 바흐람 4세 (388-399)가 399년에 암살되자 그가 뒤를 이었다.[1] 야즈데게르드 1세 치세 말기에 강력한 파르티아 수렌 가문은 샤의 강력한 동료가 되어 제국의 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 수렌 가문의 권위는 야즈데게르드의 손자 야즈데게르드 2세 (438-457)의 통치 말기까지 번성했다.[2]
호르미즈드 2세 (303-3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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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두르나세 (309) | 샤푸르 2세 (309-379) | 아르다시르 2세 (379-383) | |
샤푸르 3세 (383-388) | |||
바흐람 4세 (388-399) | 야즈데게르드 1세 (399-4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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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즈데게르드 2세 (438-457) |
참조
[1]
서적
Nöldeke
[2]
서적
Rawlinson
1882
[3]
서적
Asmussen
1983
[4]
서적
Tabari I, Arabic al-atòim
[5]
서적
Rawlinson
1882
[6]
서적
Nölde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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